지금은, 일본 소도시 여행
두경아 지음 / 길벗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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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함께하는 일본 알펜루트 여행기

여행 3일차, 2026.05.24.(일요일)
비 내린 산과 협곡, 쿠로베 토롯코열차를 타다


1. 새벽 5시 기상, 오늘은 쿠로베 협곡으로

아침 5시에 눈을 떴다.

오늘은 쿠로베 협곡으로 가는 날이다.

덴테츠도야마역에서 오전 6시 10분에 출발하는 우나즈키온센행 열차를 타야 했기 때문에 평소보다 약간 일찍 하루를 시작했다.

전날 다카오카와 아마하라시까지 돌아다닌 피로가 아직 남아 있었지만 여행지에서 기차를 타러 가는 아침은 힘들지가 않다.

특히 일본 여행에서 나는 기차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이 참 좋다.

신칸센처럼 빠르고 편한 열차도 좋지만, 작은 역에 하나씩 서면서 시골과 산속으로 들어가는 지방열차에는 또 다른 맛이 있다.

역과 역 사이로 펼쳐지는 논과 밭, 오래된 집들, 작은 마을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부터 이미 여행이 시작된 기분이다.

역시 일본 여행은 기차를 타야 낭만이 있다.

호텔을 나서 덴테츠도야마역으로 향했다.

아침 6시 전이었지만 밖은 이미 완전히 밝았다.

비는 오지 않았다.

구름은 제법 끼어 있었지만 이른 아침 공기가 상쾌했다.

전날 저녁 덴테츠도야마역 위치와 승강장까지 미리 확인해두었으니 아침부터 헤맬 일도 없었다.


2. 덴테츠도야마역, 나란히 서 있던 두 대의 열차

덴테츠도야마역 승강장으로 들어서자 두 대의 열차가 나란히 서 있었다.

크림색 차체 아래쪽으로 붉은색 선이 둘러진 오래된 전동차였다.

요즘의 매끈하고 세련된 열차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둥근 전조등과 각진 차체, 오래된 승강장과 지붕까지 어우러지니 그 자체가 참 예뻤다.

“이야, 기차 이쁘다.”

그냥 타고 가기에는 아까웠다.

나는 열차 앞으로 가서 사진을 찍고 마님과도 열차를 배경으로 사진을 남겼다.

우리가 탈 열차의 행선판에는 ‘普通 宇奈月温泉’, 우나즈키온센행 보통열차라고 적혀 있었다.

차량 안으로 들어가니 붉은색 천으로 된 좌석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아침 일찍 출발하는 열차라 승객도 많지 않았다.

한산한 객차에 마님과 자리를 잡으니 그것 또한 좋았다.

붐비는 열차보다 이렇게 조용한 시골열차를 타고 창밖을 바라보며 움직이는 것이 훨씬 내 취향이다.

오전 6시 10분.

열차가 덴테츠도야마역을 출발했다.

오늘의 쿠로베 협곡 여행이 시작됐다.


3. 시골열차를 타고 설산을 바라보며

도야마 시내를 벗어나자 건물은 줄어들고 논과 밭, 작은 마을들이 이어졌다.

물이 가득 찬 논과 일본식 주택들이 차창 밖으로 천천히 흘러갔다.

오른쪽 창밖으로는 높은 산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도야마 평야 동쪽에 길게 이어진 다테야마 연봉이었다.

구름이 산을 부분적으로 가리고 있었지만 높은 봉우리에는 아직 눈이 많이 남아 있었다.

논과 작은 마을 뒤로 설산이 병풍처럼 펼쳐지는 모습이 기가 막혔다.

나는 카메라를 들고 계속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님은 그런 내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주었다.

“와, 기가 막히는구만.”

높은 설산과 논, 작은 일본식 주택이 한 장면 안에 같이 들어왔다.

대도시에서 목적지까지 빠르게 가는 열차와 달리 이 열차에서는 창밖을 구경하는 시간 자체가 여행이었다.

열차 안도 한산해서 더욱 좋았다.

마님과 조용히 앉아 창밖 풍경을 마음껏 바라보았다.


4. 데라다역, 오늘과 내일의 길이 갈라지는 곳

열차는 작은 역들을 하나씩 지나갔다.

엣추산고, 엣추후나하시 같은 역들이 차례로 나타났다.

그리고 데라다역(寺田駅)에 들어섰다.

이곳은 이번 여행에서 나에게 꽤 의미 있는 역이었다.

오늘 우리가 가는 우나즈키온센 방향과 내일 알펜루트를 향해 가게 될 다테야마 방향이 바로 이곳에서 갈라진다.

오늘은 우나즈키온센으로 가지만 내일은 다시 이곳을 지나 다테야마 쪽으로 향한다.

하루 차이로 같은 역에서 서로 다른 산으로 들어가는 셈이었다.

승강장에는 오래된 지붕과 기둥이 남아 있었고 다른 선로에도 지방철도 특유의 열차가 서 있었다.

이런 모습들이 참 좋다.

열차는 다시 출발했고 다테야마 방면 선로와 헤어진 뒤 우나즈키온센을 향해 계속 달렸다.


5. 열차 안에서 시작된 비

정확히 어느 지점부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열차를 타고 가는 도중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 차창에 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논과 마을도 비에 젖기 시작했다.

나는 오히려 좋았다.

햇볕이 쨍하게 내리쬐는 날의 산도 좋지만 비가 한 차례 지나가고 산허리에 구름이 걸린 풍경을 더 좋아한다.

비에 젖은 나무와 논의 초록빛 벼가 더욱 짙어지고 공기도 깨끗해 보였다.

창밖의 설산도 구름에 가렸다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를 반복했다.

이런 날의 산은 맑은 날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있다.


6. 신쿠로베역과 산으로 향하는 사람들

우나즈키온센에 가까워질수록 열차 안에는 등산복과 등산가방 차림의 사람들이 제법 눈에 띄기 시작했다.

산으로 향하는 지역이라는 것이 실감났다.

신쿠로베역에 도착하자 그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열차에서 내렸다.

이곳은 바로 옆의 호쿠리쿠신칸센 구로베우나즈키온센역과 연결되는 곳이다.

우리와 함께 우나즈키 방향으로 오던 등산객들 가운데서도 여기서 내리는 사람들이 제법 보였다.

열차는 다시 출발했다.

도야마 시내에서 출발했을 때와 달리 이제 창밖의 산은 훨씬 가까워져 있었다.


7. 비와 구름 속으로 들어가는 열차

우치야마역과 오토자와역 등을 지나면서 열차는 완전히 산속으로 들어갔다.

짙은 초록색 산 사이로 하얀 구름이 걸려 있었다.

구름은 산꼭대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산허리와 골짜기 사이까지 내려와 있었다.

비에 젖은 숲과 산 사이로 구름이 흘러가는 모습이 정말 좋았다.

“자기야, 저 산들과 구름 좀 봐.”

내가 좋아하는 풍경이었다.

햇볕이 쨍한 날보다 이런 날의 산이 더 좋을 때가 있다.

비가 지나간 뒤의 산과 숲, 구름과 안개, 깨끗한 공기.

열차가 잠시 작은 역에 멈출 때마다 젖은 승강장과 산골마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도야마 시내에서 불과 두 시간도 달리지 않았는데 완전히 다른 곳으로 들어온 느낌이었다.


8. 오전 8시경, 우나즈키온센에 도착

오전 8시경 우나즈키온센역에 도착했다.

열차에서 내리자 가장 먼저 산이 눈에 들어왔다.

역 바로 뒤까지 산이 다가와 있었고 비에 젖은 숲은 짙은 초록색이었다.

산허리에는 하얀 구름이 걸려 있었다.

우리가 타고 온 열차를 배경으로 사진도 남겼다.

온천마을은 아직 아침이라 비교적 조용했다.

길 건너편에는 오늘 우리가 진짜 타러 온 쿠로베협곡철도의 선로와 차량들이 보였다.

주황색 기관차와 함께 ‘黒部峡谷鉄道’라는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오…… 드디어 왔구만.”

도야마에서 여기까지 오는 열차 여행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좋았다.

하지만 오늘의 진짜 목적은 이제부터였다.


9. 우나즈키역에서 토롯코열차 표를 받다

덴테츠 우나즈키온센역에서 쿠로베협곡철도 우나즈키역으로 이동했다.

우리는 토롯코열차를 미리 예약해두었다.

역에서 예약 QR코드를 보여주고 실제 탑승권으로 교환했다.

우리가 예약한 것은 창문이 있는 릴랙스 객차였다.

쿠로베 협곡의 토롯코열차에는 바깥이 그대로 열린 일반객차도 있지만, 우리는 창문이 있는 객차를 골랐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에는 창문이 있는 릴랙스 객차를 선택한 것이 꽤 잘한 일일 것이라....

이른 시간이라 사람도 많지 않았다.

우리가 탄 객차에는 다른 승객이 한 명도 없었다.

마님과 나 둘뿐이었다.

“이거 완전히 전세 냈네.”

이런 행운이 또 있을까 싶었다.

북적거리지 않고 둘이서 조용히 쿠로베 협곡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10. 오전 8시 17분, 쿠로베 협곡 속으로

오전 8시 17분.

토롯코열차가 우나즈키역을 출발했다.

긴 객차를 이끌고 열차가 천천히 산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창밖으로 쿠로베강이 나타났고, 강 양쪽으로는 짙은 초록색 산과 가파른 절벽이 이어졌다.

비가 내린 뒤라 산허리에는 낮은 구름이 걸려 있었다.

구름이 산을 완전히 덮는 것이 아니라 골짜기와 능선 사이를 흘러다니며 산의 모습을 가렸다가 다시 보여주었다.

나는 이런 날씨의 산을 참 좋아한다.

햇볕이 쨍한 날에는 멀리까지 또렷하게 볼 수 있지만, 비가 지나간 뒤의 산은 구름과 안개 때문에 풍경이 계속 달라진다.

방금 전까지 보이던 절벽이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가 조금 뒤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산허리 아래로는 짙은 숲과 계곡이 이어졌다.

철길은 쿠로베강을 따라 산허리를 파고들 듯 이어졌다.

열차는 터널 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밖으로 나오기를 반복했고, 협곡을 가로지르는 교량 위를 지날 때마다 발아래로 강과 깊은 골짜기가 한눈에 들어왔다.

교량을 건널 때는 열차가 공중에 떠서 협곡 한가운데를 지나가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강 건너편으로는 산을 뚫어 만든 웅장한 콘크리트 구조물들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특히 극한의 자연환경 속에 지어진 쿠로베가와 제2발전소(黒部川第二発電所)와 부속 댐 시설물들이 험준한 협곡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사람의 손이 닿기 어려워 보이는 이 깊은 산속에 수로와 터널을 뚫고, 철길을 놓아 발전시설을 완성해 낸 치열한 토목 시공의 흔적을 마주하니 새삼 놀라웠다.

쿠로베 협곡철도가 애초부터 관광열차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 깊은 산속의 전력개발과 공사 자재, 사람을 실어 나르기 위해 놓인 철도라는 것이 풍경을 보고 있으니 더 실감났다.

창문이 있는 릴랙스 객차 안에는 마님과 나 둘뿐이었다.

한쪽 창으로 풍경을 보다가 반대편에 좋은 장면이 나타나면 자리도 마음대로 옮겨 다녔다.

누가 앞을 가릴 일도 없고 사진을 찍으려고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다.

“와…….”

“이야…….”

마님과 둘이 호젓하게 앉아 계곡과 산을 바라보는 시간이 정말 좋았다.

아침 일찍 움직인 덕을 제대로 보고 있었다.


11. 교량과 터널, 발전시설 사이로 이어진 비경

열차가 안으로 들어갈수록 쿠로베 협곡의 규모가 더욱 실감났다.

양쪽 산은 강에서 거의 곧바로 솟아오르는 것처럼 가팔랐고, 아래로는 쿠로베강이 깊게 파인 골짜기를 따라 흐르고 있었다.

이 험준한 산악 지형을 돌파하기 위해 철길은 일반 철도보다 좁은 762mm 특수 협궤(Narrow Gauge)로 설계되었고, 그 좁은 산비탈에 겨우 자리를 낸 듯 이어졌다.

한쪽은 깎아지른 절벽이고 다른 한쪽은 바로 계곡이었다.

열차는 짧고 긴 터널을 수없이 드나들었다.

어두운 터널 안으로 들어갔다가 밖으로 나오면 전혀 다른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어떤 곳에서는 짙은 숲으로 뒤덮인 산이 바로 앞에 나타났고, 또 어떤 곳에서는 협곡을 가로지르는 교량과 깊은 강물이 한꺼번에 보였다.

교량을 건널 때마다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아래로는 회색빛이 감도는 강물이 흐르고 있었고, 양쪽으로는 비에 젖은 절벽과 숲이 이어졌다.

곳곳에는 댐과 수력발전 관련 시설도 보였다.

콘크리트 구조물과 터널 입구, 산속에 붙어 있는 건물들이 자연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런 깊은 산속에 웬 시설물인가 싶었지만, 쿠로베 협곡 자체가 일본의 대표적인 수력발전 개발지역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이 철도와 발전시설이 협곡의 역사 그 자체였다.

자연만 바라보는 여행이었다면 그냥 아름다운 계곡으로만 기억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 토롯코열차를 타고 달려보니 쿠로베 협곡은 거대한 자연과 그 안에 철길과 교량, 터널, 발전시설을 만들어낸 사람들의 흔적이 함께 보이는 곳이었다.

비가 그친 뒤의 풍경은 더욱 좋았다.

젖은 숲은 초록색이 짙었고, 산허리에는 구름이 띠처럼 걸려 있었다.

구름 아래로 절벽과 계곡이 나타났다 사라졌고, 그 사이로 철교와 발전시설이 잠깐씩 모습을 드러냈다.

맑은 날의 쿠로베 협곡도 분명 멋있겠지만 이날만큼은 이런 날씨라서 더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객차 안에는 여전히 마님과 나뿐이었다.

사진을 찍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카메라를 내려놓고 그냥 창밖만 바라보았다.

“이야…… 이런 데가 있었구만.”

쿠로베 협곡은 단순히 산이 깊고 계곡이 아름다운 곳이 아니었다.

열차가 한 굽이 돌 때마다 전혀 다른 장면이 나타났고, 터널 하나를 빠져나올 때마다 또 다른 풍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 5시에 일어나 여기까지 온 보람이 충분했다.


12. 네코마타, 지금은 여기까지

오전 9시 2분 네코마타역에 도착했다.

하지만 네코마타는 원래 쿠로베협곡철도의 종착역이 아니다.

원래 열차는 이곳을 지나 가네쓰리(鐘釣)를 거쳐 더 깊숙한 곳에 있는 게야키다이라(欅平)까지 들어간다.

2024년 노토반도 지진으로 가네쓰리 일대의 교량과 사면 등이 피해를 입으면서 복구공사가 계속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가 찾은 2026년 5월에는 우나즈키에서 네코마타까지만 운행하고 이곳에서 다시 되돌아가야 했다.

네코마타까지 왔다는 기쁨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아쉬웠다.

“원래는 여기서 더 깊이 들어가는 건디…….”

쿠로베 협곡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가네쓰리와 게야키다이라까지 이어지는 더 깊은 협곡이 남아 있었다.

우리가 여행한 뒤에도 복구공사가 계속 진행되었고, 2026년 10월 1일부터는 우나즈키~게야키다이라 전 구간 운행이 다시 재개될 예정이라고 한다.

언젠가 다시 이곳에 온다면 그때는 꼭 게야키다이라까지 들어가보고 싶다.

13. 네코마타에서 잠시 머물다 다시 우나즈키로

네코마타역에 내리니 깊은 산속의 작은 역답게 주변이 조용했다.

한쪽에는 ‘猫又 NEKOMATA’라고 적힌 역명판이 있었고, 역 이름에 맞춰 고양이와 쥐를 형상화한 포토스팟도 마련되어 있었다.

마님과 나는 고양이와 쥐 장식 사이에서 사진을 찍고, 역명판 앞에서도 여러 장을 남겼다.

깊은 산속 역에 이런 귀여운 포토스팟이 있으니 조금 뜻밖이면서도 재미있었다.

역 주변에는 굴착기를 비롯한 공사장비와 자재들이 놓여 있었고, 일부 구역은 펜스와 안전시설로 막혀 있었다.

관광지라기보다 실제 복구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철도 현장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그 뒤로는 비를 머금은 짙은 초록색 산과 계곡이 펼쳐져 있었다.

산허리에는 하얀 구름이 낮게 걸려 있었고, 곳곳에서는 물줄기가 산비탈을 타고 흘러내렸다.

공사장비와 철도시설 바로 뒤에 이런 자연풍경이 이어지는 모습이 묘하게 잘 어울렸다.

평소 전 구간 운행 때에는 관광객이 내려 둘러보는 역이 아니기 때문에, 네코마타에 직접 내려 주변을 구경한 것도 이번 여행에서만 할 수 있었던 특별한 경험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역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고 사진도 충분히 남겼다.

오전 9시 27분.

다시 열차에 올랐다.

돌아가는 길에는 올 때와 반대편으로 보이는 협곡과 산을 다시 바라봤다.

같은 철길을 되돌아가는데도 보는 방향이 달라지니 놓쳤던 풍경들이 새로 눈에 들어왔다.

마님과 단둘이 앉아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며 우나즈키로 돌아왔다.

오전 10시 17분.

열차는 다시 우나즈키역에 도착했다.

쿠로베 협곡에서의 두 시간이 그렇게 끝났다.


14. 우나즈키온센 마을을 혼자 한 바퀴

덴테츠도야마로 바로 돌아가려 했는데 문제가 있었다.

우나즈키온센에서 도야마까지 곧바로 가는 열차는 오전 11시 45분이었다.

한 시간 반 가까이 기다려야 했다.

그냥 역에서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아까웠다.

그래서 오전 10시 55분 열차를 타고 신우오즈까지 간 뒤 그곳에서 도야마행으로 환승하기로 했다.

출발까지 시간이 조금 남았다.

마님은 아침 일찍부터 움직인 데다 쿠로베 협곡까지 다녀오느라 힘들었는지 역에서 쉬고 있겠다고 했다.

나는 혼자 우나즈키온센역 주변을 돌아보기로 했다.

역 앞에는 온천마을답게 온천수가 나오는 분수가 있었다.

손을 넣어보았다.

“오, 따뜻허고 좋구만.”

아침 일찍부터 돌아다닌 몸을 저 물에 푹 담그고 한숨 자고 싶었다.

근처의 시계탑과 온천마을 거리를 둘러보며 사진도 몇 장 찍었다.

비가 내렸다 그친 뒤라 산에는 아직 구름이 남아 있었다.

작은 온천마을과 구름 낀 산이 참 잘 어울렸다.

잠시 둘러본 뒤 다시 역으로 돌아와 마님과 합류했다.


15. 신우오즈에서 열차를 갈아타고 다시 도야마로

오전 10시 55분 우나즈키온센을 출발했다.

덴테츠도야마까지 바로 가지 않고 신우오즈에서 갈아타기로 했다.

아침에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는 셈이었다.

산속을 벗어나자 창밖 풍경도 조금씩 달라졌다.

짙은 산과 계곡이 멀어지고 다시 논과 작은 마을들이 나타났다.

신우오즈역에 도착한 뒤에는 지하통로를 따라 JR 우오즈역 쪽으로 이동했다.

역과 역이 완전히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지하보도로 이어져 있어 갈아타기는 어렵지 않았다.

계단을 내려가 지하통로를 지나 다시 올라가니 우오즈역이 나왔다.

우오즈에서 도야마까지 가는 승차권을 다시 샀다.

잠시 승강장에서 열차를 기다려, 오전 11시 50분쯤 도야마행 열차에 올랐다.

아침에 우나즈키로 갈 때 타던 도야마지방철도와는 또 다른 분위기의 열차였다.

창밖으로 다시 평야와 마을이 이어졌다.

낮 12시 20분쯤 도야마역에 도착했다.

새벽 5시에 하루를 시작해 우나즈키온센과 쿠로베 협곡까지 다녀왔는데 아직 점심시간이었다.

아침 일찍 움직이면 하루가 참 길다.


16. 다테야마 소바 한 그릇과 마음에 남은 선승

도야마역에 돌아오니 배가 고팠다.

역 바깥쪽에 있는 ‘다테야마 소바(立山そば)’로 들어갔다.

마님과 따뜻한 소바 한 그릇씩 먹었다.

아침부터 계속 기차를 타고 산속까지 다녀온 뒤라 뜨거운 국물이 더 반가웠다.

화려한 음식은 아니었지만 이런 날에는 오히려 이런 한 그릇이 좋다.

소바를 먹고 역 밖으로 나오는데 한 선승이 눈에 들어왔다.

삿갓을 쓰고 가사를 걸친 채 조용히 서서 시주를 받고 있었다.

그때는 그냥 지나쳤다.

그런데 나중에 생각하니 그 장면이 자꾸 마음에 남았다.

“아…… 그때 시주라도 좀 할 걸 그랬네.”

이상하게 나는 우리나라 스님들보다 일본 여행 중 길에서 만나는 이런 선승들에게 더 눈길이 간다.

말없이 서 있는 모습 때문인지, 옷차림 때문인지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다.

“내가 일본놈인가…… 에효.”

농담처럼 생각했지만 지나고 나니 시주하지 못한 것이 괜히 아쉬웠다.

여행에서는 이렇게 그냥 지나친 장면이 나중에 더 오래 남기도 한다.

그날 도야마역 앞에서 만난 선승이 그랬다.


17. 내일 알펜루트를 위한 표를 미리 발권하다

덴테츠도야마역으로 가서 내일 사용할 알펜루트 승차권부터 챙겼다.

미리 예약해두었지만 승차권은 이용 하루 전 낮 12시 이후부터 발권할 수 있었다.

내일은 도야마에서 다테야마로 들어가 알펜루트를 넘어 오기사와까지 간다.

오기사와에서 나가노까지 이동하는 표도 준비되어 있고, 나가노에서는 다시 호쿠리쿠신칸센을 타고 도야마로 돌아올 예정이다.

오늘 오후 일정까지 돌아다닌 뒤 내일 새벽에 다시 표를 챙기는 것보다는 미리 받아두는 것이 마음이 편했다.


18. 덴테츠도야마역 앞에서 만난 야스다 젠지로

역 주변을 걷다가 동상 하나를 보았다.

받침대에는 ‘安田善次郎翁之像’이라고 적혀 있었다.

야스다 젠지로(安田善次郎)였다.

처음에는 누군지도 모르고 그냥 동상이라 사진부터 찍었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도야마에서 태어나 에도로 올라가 사업을 시작했고 훗날 야스다은행을 비롯한 금융사업을 크게 일으켜 야스다재벌을 만든 인물이었다.

일본 근대 금융사를 대표하는 사업가 가운데 한 명이었다.

도쿄대 야스다강당의 ‘야스다’도 바로 이 사람의 이름에서 나온 것이다.

도야마역 바로 앞에 그의 동상이 서 있는 이유도 이곳이 그의 고향이기 때문이었다.

여행 중에는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찍은 동상 하나가 나중에 한 도시의 역사를 알려주기도 한다.


19. 스타벅스에서 잠시 쉬었다 도야마성으로

덴테츠도야마역 앞 스타벅스에서 잠시 쉬었다.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벤티 사이즈, 마님과 함께 쿠키도 하나 먹었다.

아침 5시부터 움직인 데다 쿠로베 협곡까지 다녀왔으니 잠시 앉아 쉬는 시간이 필요했다.

커피를 마시고 다시 출발했다.

이번 목적지는 도야마성이다. 오후 1시 20분경 트램을 탔다.

전날 우나즈키온센행 표를 준비하면서 산 것은 성인 3,400엔짜리 ‘철도선·시내전차 1일 프리 승차권’이었다.

덕분에 오늘 도야마 시내를 다니며 트램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다.

우리가 탄 차량은 제법 오래된 트램이었다.

창틀에는 녹이 슨 곳도 보였다.

“야, 일본은 이런 것도 참 오래 쓰네.”

일본이 선진국이지만 물건을 참 오래 쓴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였으면 낡았다며 새것으로 바꾸라는 이야기가 벌써 나왔을 것 같은데 일본에서는 오래된 전차도 여전히 현역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물론 일본도 과거 우리에게 못된 짓을 많이 한 나라다.

그 역사와는 별개로 여행을 다니다 보면 물건을 아껴 쓰고 질서를 지키는 모습 등 배울 만한 국민성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가깝고 여행비용도 유럽이나 미주, 대양주에 비해 훨씬 덜 든다.

게다가 작은 지방도시에도 기차와 트램이 있고, 역사와 생활이 남아 있는 볼거리가 많다.

이래서 내가 일본 여행을 좋아하는가 보다.


20. 도야마성, 거대한 돌이 박힌 이시가키

트램에서 내려 도야마성으로 향했다.

도야마성에 가기 전 “어메이징 도야마”라고 쓰여있는 포토스팟에서 도야마성을 배경으로 마님과 사진도 남겼다.

도야마성은 규모가 큰 성은 아니지만 해자를 두르고 돌로 쌓은 성벽과 천수각이 어우러져 일본 성 특유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천수각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성벽이었다.

돌을 층층이 쌓아 만든 이시가키(石垣) 사이사이에 다른 돌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거대하고 육중한 돌들이 박혀 있었다.

사람 키보다 훨씬 큰 돌들이었다.

그 모습을 보니 예전에 오사카성에서 직접 보았던 거대한 돌들이 떠올랐다.

오사카성 사쿠라몬 안쪽 마스가타에 있는 다코이시(蛸石)는 정말 압도적이었다.

당시 아들을 돌 앞에 세워놓고 사진을 찍었는데 사람이 바로 앞에 서 있어야 그 크기가 실감날 정도였다.

안내판에 따르면 다코이시는 표면적 약 59.43㎡, 추정 무게 약 108톤으로 오사카성 안에서 가장 큰 거석이라고 한다.

커다란 돌 하나가 웬만한 건물 벽만 했다.

일본의 성곽 이시가키에서는 이렇게 눈에 띄게 큰 돌을 중요한 출입구와 성벽에 배치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성벽을 튼튼하게 쌓는 기능적인 목적과 함께 이렇게 거대한 돌을 운반해 성을 쌓을 수 있다는 영주의 힘과 권위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의미도 있었다.

도야마성의 돌들이 오사카성 다코이시만큼 엄청난 크기는 아니었지만, 여러 크기의 돌로 쌓은 성벽 사이에 유난히 크고 육중한 돌이 박혀 있는 모습을 보니 예전에 직접 보았던 오사카성의 이시가키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나는 이런 일본 성의 돌벽을 볼 때마다 신기하다.

기계도 없던 시절에 저 육중한 돌들을 어떻게 옮겨와 맞춰 쌓았을까 싶다.

천수각 안은 도야마시 향토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전시물을 보며 도야마성과 도야마번의 역사를 둘러보고 위층 전망대로 올라갔다.

높은 성은 아니지만 도야마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21. 도야마성 공원을 돌아 다시 트램으로

천수각을 내려와 성 주변 공원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해자와 돌담, 정원과 나무들이 도심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었다.

도야마는 큰 도시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시내를 조금만 돌아다녀도 볼거리가 이어졌다.

성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고 사진도 여러 장 남겼다.

오후 2시 18분경 다시 트램을 타고 환수공원 스타벅스에 가기위해 도야마역으로 돌아갔다.


22. 약장수의 도시를 만든 번주, 마에다 마사토시

도야마성 공원을 둘러보다 눈에 띄는 동상을 만났다.

도야마번 제2대 번주 마에다 마사토시(前田正甫)였다.

안내판을 확인하니 이 양반의 이력이 재미있었다.

보통 ‘번주’라고 하면 갑옷을 입고 칼을 찬 사무라이부터 떠오른다.

그런데 마에다 마사토시는 의학과 약에 관심이 많았던 번주였다.

그는 번의 산업을 키우는 데 힘썼고 특히 도야마 매약업의 기초를 만든 인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에도성에서 한 다이묘가 갑자기 심한 복통을 일으키자 마사토시가 가지고 있던 약을 먹여 효과를 보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 일을 계기로 다른 번에서도 도야마의 약을 찾게 되었고, 약장수들이 각지를 돌며 약을 먼저 맡겨두고 다음에 방문했을 때 사용한 만큼만 돈을 받는 ‘선용후리(先用後利)’ 방식이 자리 잡았다.

훗날 ‘에치추 도야마의 약장수’로 전국에 이름을 알린 도야마 매약업의 출발점이었다.

칼 잘 쓰는 사무라이 영주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약과 의학에 밝고 지역산업까지 키운 번주였다.

도야마가 지금까지도 제약산업으로 유명한 데에는 이런 오랜 역사가 있었다.


23. “자, 환수공원 스타벅스로 진격의 거인.”

도야마역 북쪽으로 나와 환수공원까지 걸었다.

역에서 멀지는 않았다.

도시 건물을 지나자 갑자기 넓은 수변공간이 나타났다.

도야마현 후간운하 환수공원이었다.

커다란 운하를 중심으로 잔디와 산책로가 잘 정비되어 있었고 멀리 두 개의 벽돌색 전망탑과 그 사이를 연결하는 덴몬교가 보였다.

그리고 물가 한쪽에 오늘의 목적지 스타벅스가 있었다.

유리창이 넓게 난 단층 건물이 잔디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가까이 갈수록 사람이 심상치 않았다.

“아이고, 사람이 왜 이렇게 많어.”

정말 많았다.

실내도 가득했고 야외 테라스도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겨우 자리를 하나 확보한 뒤 주문 줄에 섰다.

사진과 영수증을 다시 확인하니 이때 마님이 마신 것은 내가 기억하던 말차라떼가 아니었다.

톨 사이즈 말차 크림 프라푸치노, 나는 늘 그렇듯 벤티 아이스 카페 아메리카노였다.

영수증에는 주문 시간이 오후 2시 45분, 아메리카노 537엔, 말차 크림 프라푸치노 555엔으로 남아 있다.

이런 건 사진이 있으니 기억보다 정확하다.

“자기는 또 말차여?”

마님은 말차,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일본 여행 며칠째 계속되는 익숙한 조합이다.


24. 커피 한 잔 앞에 두고 바라본 운하 풍경

운 좋게 창가 쪽에서 환수공원을 바라볼 수 있었다.

커다란 유리창 너머로 운하가 펼쳐지고 작은 유람선이 물 위를 지나갔다.

맞은편으로는 잔디밭과 나무가 이어졌고 멀리 덴몬교가 보였다.

사람이 워낙 많아 호젓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있었지만 경치는 정말 좋았다.

마님과 음료를 앞에 두고 잠시 쉬었다.

아침 5시에 일어나 우나즈키까지 갔다가 쿠로베 협곡을 왕복하고 다시 도야마성까지 돌아본 뒤였다.

이쯤 되니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시간이 세상 편했다.

밖으로 나와 스타벅스를 배경으로 둘이 사진도 한 장 남겼다.

유리 건물과 잔디, 운하가 어우러지니 왜 이곳 스타벅스가 도야마의 유명한 장소가 됐는지 알 것 같았다.


25. 덴몬교 전망탑에서 내려다본 도야마

커피를 마신 뒤 덴몬교 쪽으로 걸었다.

두 개의 벽돌색 탑을 연결한 다리가 환수공원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전망탑 안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로 올라갔다.

전망대에 서자 환수공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아래로는 운하가 길게 이어지고 스타벅스와 잔디밭, 산책로가 작게 보였다.

반대편으로는 도야마 시내가 펼쳐졌다. 그리고 멀리 산들이 보였다.

구름이 많아 완전히 선명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산줄기가 희미하게 이어졌다.

아침 기차 안에서부터 하루 종일 보고 다녔던 도야마의 산들이었다.

전망탑의 둥근 창으로 내려다보는 풍경도 재미있었다.

마님과 전망대에서도 사진을 여러 장 남겼다.

높은 전망대는 아니지만 환수공원의 전체 모습을 보기에는 딱 좋았다.

공원을 내려다보며 이런 생각도 들었다.

“여기는 밤에 다시 오면 정말 이쁘겠는디.”

덴몬교와 공원에 불이 들어오고 물 위로 야경이 비치면 낮과는 전혀 다른 모습일 것 같았다.

밤에 한번 다시 와보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오지 못했다.

아침 5시부터 시작한 일정이라 저녁이 되니 피곤하고 움직이기 싫어졌다. 이건 조금 아쉽다.


26. 다시 도야마역으로, 내일 먹을 것부터 준비

환수공원을 충분히 둘러본 뒤 다시 걸어서 도야마역으로 향했다.

하루 종일 참 많이도 걸었다.

도야마역 북쪽 출구 쪽 로손에 들러 내일 먹을 것도 미리 샀다.

내일은 알펜루트를 넘어가는 날이다.

아침부터 계속 이동해야 하니 중간에 먹을 것을 챙겨두어야 했다.

빵, 바나나, 스타벅스 커피, 오징어채 등 이것저것 골랐다.

여행 중에는 이런 편의점 장보기도 중요한 일정이다.

내일 아침 배고프다고 난리 치지 않으려면 오늘 준비해놔야 한다.


27. 오후 4시 30분, 오늘 저녁은 버거킹

저녁은 거창하게 먹지 않기로 했다.

도야마역 앞 버거킹으로 갔다.

시간은 오후 4시 30분쯤이었다.

매장 앞에는 고기와 치즈가 어마어마하게 들어간 ‘2대째 BABY BODY BURGER’ 광고가 붙어 있었다.

가격도 2,890엔이나 하는 엄청난 햄버거였다.

“저건 먹다 죽겄다.”

우리는 평범하게 먹기로 했다.

마님이 카운터에서 주문하고 둘이 자리를 잡고 앉아있다가 주문한 햄버거가 나오자 숙소로 향했다.


28. 다시 HOTEL JAL CITY TOYAMA로

호텔로 돌아오니 오후 5시경이었다.

포장해온 햄버거로 객실에서 저녁을 먹었다.

이제야 하루가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님, 오늘 고생했수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우나즈키온센으로 가는 지방열차를 타고, 쿠로베 협곡의 토롯코열차를 타고 네코마타까지 들어갔다 돌아왔다.

다시 도야마로 와서 도야마성을 보고 환수공원까지 걸어 다녔다.

참 많이도 돌아다녔다.


29. 비 내린 산이 더 좋았던 하루

오늘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역시 쿠로베 협곡이었다.

다테야마 연봉의 설산을 바라보며 달리던 시골열차도 좋았고, 비가 내린 뒤 산허리에 구름이 걸린 우나즈키의 풍경도 좋았다.

무엇보다 토롯코열차의 창문 너머로 보이던 비에 젖은 쿠로베 협곡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날씨가 맑지 않아 아쉬웠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래서 더 좋았다.

나는 역시 쨍하게 맑은 산보다 비가 지나간 뒤 구름과 안개가 산허리를 감싸는 풍경을 좋아한다.

그리고 객차 하나에 마님과 단둘이 앉아 그 풍경을 바라봤던 것도 참 좋았다.

게야키다이라까지 들어가지 못한 것은 아쉬웠지만 그것은 다음 여행의 이유로 남겨두면 된다.


30. 오늘의 대장정을 마치다, “마님 고생했수다.”

아침 5시에 시작한 오늘의 대장정이 드디어 끝났다.

기차를 타고 산으로 들어가고, 토롯코열차로 협곡을 달리고, 다시 도야마로 돌아와 트램을 타고 성을 둘러보고, 환수공원까지 걸었다.

하루 동안 산과 계곡, 지방철도와 트램, 성과 공원까지 참 많은 것을 보았다.

여행은 역시 많이 보고 많이 걷게 된다.

마님도 오늘 정말 고생했다.

이제 쉬어야 한다.

내일은 드디어 이번 여행의 가장 중요한 일정 가운데 하나인 다테야마 구로베 알펜루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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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일본 소도시 여행
두경아 지음 / 길벗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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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함께하는 일본 알펜루트 여행기

여행 2일차, 2026.05.23.(토요일)[오후편]
가나자와를 떠나 도야마로, 다카오카와 아마하라시까지


19. 가나자와에서의 마지막 준비와 스타벅스 한 잔

윤봉길 의사님의 순국지와 순국기념비, 암장지, 그리고 박인조 선생님의 묘소까지 찾아뵙고 가나자와역으로 돌아왔다.

아침부터 계속 걸어다닌 데다 날씨도 제법 더워 땀을 많이 흘렸다.

숙소인 하얏트 센트릭 가나자와로 돌아와 먼저 샤워부터 했다.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설 때와는 마음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오전 내내 윤 의사님의 마지막 흔적을 찾아다니며 묵념하고 절을 올린 뒤라 쉽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여운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제 다시 여행자의 시간으로 돌아갈 차례였다.

샤워를 마치고 짐을 정리했다.

캐리어를 다시 챙기고 빠뜨린 물건이 없는지 확인한 뒤 오전 11시쯤 체크아웃했다.

가나자와에서의 숙박은 여기까지였다.

오늘부터는 도야마로 숙소를 옮긴다.

마님과 캐리어를 끌고 다시 가나자와역으로 향했다.

가나자와역에 도착해서는 역시 스타벅스부터 찾았다.

아침에도 커피를 사 들고 윤 의사님의 순국지로 향했는데, 가나자와를 떠나는 길에도 또 스타벅스에 들렀다.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벤티 사이즈, 마님은 말차라떼를 골랐다.

둘이 음료를 들고 플랫폼에 앉아 잠시 쉬었다.

아침부터 워낙 많이 걸었던 터라 이 짧은 휴식이 좋았다.

커피를 들고 마님과 사진도 한 장 남겼다.

이제 정말 가나자와를 떠날 시간이었다.


20. 호쿠리쿠신칸센을 타고 도야마로

우리가 탈 열차는 오전 11시 59분 출발 호쿠리쿠신칸센 하쿠타카 562호였다.

전광판에는 바로 앞 열차인 11시 49분 가가야키 530호와 우리가 탈 11시 59분 하쿠타카 562호가 나란히 표시되어 있었다.

캐리어를 끌고 승강장으로 올라갔다.

열차에 올라 자리에 앉으니 다시 한번 일본 신칸센 좌석의 넉넉함이 느껴졌다.

우리나라 KTX와는 좌석 공간부터 차이가 컸다.

앞뒤 간격이 넓어 작은 캐리어 정도는 무릎 앞에 놓아도 크게 불편하지 않았고, 선반에도 짐을 올릴 수 있었다.

마님 앞에 캐리어와 배낭을 놓았는데도 좌석 공간에 여유가 있었다.

나는 일본에서 신칸센을 탈 때마다 이 점이 참 좋다.

반대로 KTX를 탈 때면 좌석과 앞좌석 사이가 너무 좁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열차는 가나자와를 출발했다.

창밖으로 호쿠리쿠의 도시와 논, 낮은 산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가나자와에서 도야마까지는 정말 가까웠다.

가나자와역에서 도야마역까지 대략 신칸센으로 45km쯤 되는 거리를 약 20분 만에 주파했다.


21. 처음 만난 도야마와 오늘의 숙소 JAL시티

낮 12시 20분쯤 도야마역에 도착했다.

플랫폼에 내리자 ‘富山 Toyama’라고 적힌 역명판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가나자와와는 또 다른 도시가 시작되었다.

역 밖으로 나오니 생각했던 것보다 규모가 제법 큰 도시였다.

역 앞에는 호텔과 상업시설이 모여 있었고 무엇보다 눈길을 끈 것은 트램이었다.

도야마역 주변으로 여러 형태의 노면전차가 계속 오갔다.

새로 만든 듯한 현대적인 차량도 있었고 오래된 형태의 차량도 보였다.

트램을 카메라로 찍는 사람들도 제법 많았다.

나와 마님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도야마에서 처음 만난 도시 풍경과 트램들을 한참 카메라에 담았다.

오늘부터 26일, 귀국할 때까지 3일간 묵을 숙소는 HOTEL JAL CITY TOYAMA였다.

호텔은 도야마역에서 걸어서 5분도 채 걸리지 않을 만큼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런데 역에서 내려 바로 호텔로 간 것이 아니었다.

역 앞을 오가는 트램들이 눈에 들어오는 바람에 한동안 서서 구경하고 사진을 찍었다.

그러다 보니 도야마역에서 호텔까지 가는 데 거의 20분 가까이 걸렸다.

거리는 5분도 안 되는데 트램 구경하느라 네 배 가까이 걸린 셈이다.

건물 전면에 HOTEL JAL CITY TOYAMA라는 간판이 크게 붙어 있었다.

체크인 절차는 미리 할 수 있었지만 아직 객실에 들어가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프런트에 캐리어를 맡겼다.

여행을 며칠 다니다 보면 짐을 숙소에 먼저 맡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몸이 훨씬 가벼워진다.

큰 캐리어들을 맡기고 카메라와 작은 가방만 챙겼다.

이제 본격적인 도야마 오후 여행을 시작할 차례였다.


22. 도야마역에서 먹은 늦은 점심

호텔에 짐을 맡긴 뒤 다시 도야마역 쪽으로 돌아왔다.

점심부터 먹어야 했다.

역 주변 상업시설을 돌아보다 오후 1시경 돈카스 전문점 富金豚(とみきんとん, 토미킨톤, TOMIKINTON)에 들어갔다.

메뉴판을 보니 돈카스와 새우튀김, 규카츠 등 여러 메뉴가 있었다.

마님은 늘 그렇듯 일반 돈카스를 골랐다.

나는 규카츠 정식을 주문했다.

마님 앞에는 노릇하게 튀겨진 돈카스와 양배추가 놓였고, 내 규카츠는 속이 붉은빛을 띤 채 먹기 좋게 잘려 나왔다.

아침부터 계속 움직인 뒤라 그런지 더 맛있었다.

마님은 역시 평소 좋아하는 돈카스를 먹고, 나는 규카츠를 먹었다.

일본 여행을 다니면서 둘이 무엇을 먹는지도 이제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 것 같다.

점심을 든든하게 먹고 다음 목적지인 다카오카로 향했다.


23. 오후 2시 20분 다카오카, 도라에몽의 도시로

도야마역에서 다카오카로 가는 열차를 탔다.

사진에 남아 있는 승차권에는 2026년 5월 23일, 도야마에서 다카오카까지 390엔이라고 찍혀 있다.

우리가 탄 열차는 오후 2시 20분 가나자와행 보통열차였다.

승강장 전광판에도 14:20 金沢行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플랫폼에 서서 열차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차량 내부는 신칸센과는 전혀 달랐다.

지방 도시를 오가는 평범한 통근형 열차였다.

손잡이가 길게 늘어서 있고 좌석도 단순했다.

열차가 도야마를 벗어나자 창밖으로 논과 주택들이 이어졌다.

물이 가득 찬 논과 낮은 집들이 펼쳐지는 풍경을 보며 다카오카로 향했다.

다카오카역에 도착했다.

역 안에서부터 도라에몽이 눈에 띄었다.

커다란 도라에몽 우체통이 있었고 역 주변에도 도라에몽과 관련된 시설들이 보였다.

“여기가 도라에몽의 도시인개벼.”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도라에몽』을 만든 만화가 후지코 F. 후지오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 바로 다카오카다.

다카오카에는 지금도 후지코 F. 후지오의 흔적을 기리는 시설과 도라에몽 관련 조형물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역을 나서니 도시 자체는 크지 않았지만 걷기 좋은 지방도시 분위기가 느껴졌다.

다카오카역 앞에서 사진을 한 장 남기고 첫 번째 목적지인 즈이류지로 향했다.


24. 다카오카의 골목을 걸어 국보 즈이류지로

즈이류지까지는 걸어가기로 했다.

날씨가 제법 더웠다.

역을 벗어나니 관광지보다는 실제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본 지방도시의 모습이 이어졌다.

낮은 주택들과 오래된 집들이 골목을 따라 늘어서 있었다.

관광지까지 가는 길이라고 특별히 화려한 것은 없었다.

나는 이런 길을 걷는 것도 좋아한다.

그 도시 사람들이 실제로 어떤 집에서 살고 어떤 골목을 이용하는지를 직접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마님과 함께 천천히 걸어 즈이류지로 향했다.

조금씩 땀이 났다.

그러다 길 끝으로 절의 모습이 나타났다.

즈이류지 입구에 도착해 먼저 매표소에서 표를 샀다.

입장료를 내고 안으로 들어가자 바깥에서 보던 것보다 규모가 훨씬 크게 느껴졌다.

즈이류지(瑞龍寺)는 가가번 2대 번주 마에다 도시나가를 기리기 위해 3대 번주 마에다 도시쓰네가 세운 조동종 사찰이다.

특히 산문과 불전, 법당은 일본 국보로 지정되어 있고, 여러 건물과 회랑이 중요문화재로 남아 있다.

절 전체가 하나의 건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건물과 긴 회랑이 넓은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구조였다.

입구를 지나 산문 쪽으로 들어가니 정면으로 거대한 목조건물이 나타났다.

첫눈에 들어오는 인상부터 강했다.

“어, 생각보다 훨씬 큰디?”

사진으로 볼 때보다 실제 규모가 훨씬 컸다.


25. 생각보다 훨씬 웅장했던 즈이류지

즈이류지는 생각보다 정말 좋았다.

우리나라 사찰과는 분위기도 구조도 꽤 달랐다.

넓은 잔디와 자갈마당을 중심으로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고, 주요 건물들이 긴 회랑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목조건물의 규모가 상당했다.

커다란 기둥과 두꺼운 목재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고 문과 지붕의 선도 묵직했다.

나는 건물 안팎을 천천히 돌아보며 사진을 많이 찍었다.

긴 회랑을 따라 걷다 보면 같은 건물도 보는 방향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마님을 회랑 가운데 세워놓고 사진을 찍기도 하고, 마님은 반대로 멀리 서 있는 나를 찍어주었다.

이곳에서는 신발을 벗지 않고 그대로 돌아다녔다.

회랑과 건물 사이를 오가며 목조건축의 구조를 가까이에서 살펴볼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오래된 사찰 건축도 아름답지만, 순수하게 건물 규모와 공간의 배치를 놓고 보면 이곳 즈이류지가 더 크고 잘 만들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회랑이 사방으로 길게 이어지고 그 안에 넓은 마당과 중심 건물들이 배치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26. 마에다 도시나가와 신란 성인의 흔적

즈이류지의 중심에는 마에다 도시나가라는 인물이 있었다.

마에다 도시나가는 가가번 초대 번주 마에다 도시이에의 장남으로, 다카오카성을 쌓고 이곳에 성하마을을 조성하며 오늘날 다카오카의 기초를 놓은 인물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동생이자 가가번 3대 번주였던 마에다 도시쓰네가 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즈이류지를 크게 조성했다.

그래서 즈이류지는 단순히 오래된 절이라기보다 다카오카라는 도시의 시작과 마에다 가문의 역사가 함께 담긴 장소였다.

사찰 안에는 여러 불상과 불교 관련 조형물이 있었고, 천장에 매달린 커다란 물고기 모양의 목조물도 눈에 띄었다.

법당과 불전 내부도 상당히 넓었다.

사진을 찍으며 천천히 둘러보니 밖에서 생각했던 것보다 볼거리가 많았다.

즈이류지와 주변을 돌아보면서 신란 성인과 관련된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신란은 일본 정토진종을 연 인물로, 일본 불교사에서 매우 중요한 승려다.

다카오카와 호쿠리쿠 지역에는 정토진종의 영향이 강해 여러 곳에서 신란 성인의 동상과 흔적을 볼 수 있다.

즈이류지 자체는 정토진종 사찰이 아니라 조동종 사찰이지만, 주변 지역을 걷다 보니 이곳 사람들의 불교 신앙과 역사 속에 여러 종파의 흔적이 함께 남아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찰 밖으로 나와 주변을 걷는 길에도 승려의 동상이 보였고, ‘親鸞聖人’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또 갑옷을 입고 앉아 있는 마에다 도시나가공의 동상도 있었다.

한쪽에는 종교의 역사, 한쪽에는 이 도시를 만든 영주의 역사가 나란히 남아 있는 셈이었다.


27. 다시 다카오카역으로, 도라에몽 산책길

즈이류지를 충분히 둘러본 뒤 다시 다카오카역 쪽으로 걸었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걸어서 돌아갔다.

길가에는 붉은 철쭉이 피어 있었고 정돈된 산책길과 오래된 거리 풍경이 이어졌다.

다카오카역에 가까워지자 다시 도라에몽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역 앞 Wing Wing Takaoka 부근에는 ‘도라에몽 산책길’이 조성되어 있었다.

도라에몽뿐 아니라 노진구, 시즈카, 자이언, 스네오 등 작품 속 등장인물들의 동상이 줄지어 서 있었다.

후지코 F. 후지오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이 다카오카이기 때문에 만들어진 공간이었다.

어른인 나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도라에몽과 친구들을 하나씩 사진에 담았다.

아이들도 동상 주변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즈이류지에서 오래된 목조건축과 역사를 보고 나왔는데 몇 분 뒤에는 도라에몽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묘한 도시였다.

오래된 역사와 현대 일본의 대표적인 만화문화가 한 도시에 함께 있었다.


28. 도라에몽을 뒤로하고 아마하라시 해안으로

다카오카에서의 다음 목적지는 아마하라시 해안이었다.

다카오카역 일대에서 도라에몽 산책길을 둘러보고 사진을 찍은 뒤 버스 승강장으로 향했다.

오후 4시 무렵 히미시민병원(氷見市民病院)행 버스를 탔다.

우리가 탄 것은 초록색 가에츠노버스였다.

버스에 올라타니 전형적인 일본 지방 노선버스 모습이었다.

운전석 위쪽에는 요금표가 있었고 좁은 시내도로와 주택가를 지나 서서히 바다 쪽으로 향했다.

다카오카 시내를 벗어나면서 풍경이 조금씩 한적해졌다.

약 35분 정도 지나자 바다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버스에서 내려 조금 걸으니 바다가 나타났다.

아마하라시 해안이었다.

이곳을 찾아온 가장 큰 이유는 바다 건너로 다테야마 연봉을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도야마만을 사이에 두고 해발 3,000m급 산들이 이어지는 다테야마 연봉을 바다와 함께 바라볼 수 있는 곳.

사진으로 여러 번 봤던 풍경이었다.

직접 와보니 해안과 철길, 도로, 작은 마을이 아주 가까이 붙어 있었다.

바다에는 이곳을 대표하는 두 개의 바위가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소나무가 자라고 있는 온나이와(女岩), 여자바위였다.

주변의 작은 암초들이 아이들처럼 보여 여자바위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오토코이와(男岩), 남자바위도 있었다.

여자바위 주변의 큰 바위가 마치 한 쌍의 부부처럼 보인다고 해서 남자바위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여자바위가 워낙 눈에 잘 띄어 아마하라시의 대표적인 풍경처럼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와보니 남자바위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또 ‘雨晴(아마하라시)’라는 이름에도 이야기가 있었다.

미나모토노 요시쓰네가 형 요리토모를 피해 오슈로 가던 길에 이곳에서 갑작스러운 비를 만나 바위 아래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는 전설에서 ‘비가 갠다’는 뜻의 아마하라시라는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작은 바위섬과 바다, 오래된 전설까지.

아마하라시는 단순히 풍경만 아름다운 해안은 아니었다.


29. 바다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설산

그리고 바다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구름과 산의 경계가 잘 구별되지 않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구름 사이로 날카로운 산 능선들이 나타났다.

설산이었다.

“와…… 자기야 저것 좀 봐.”

산 정상과 능선 곳곳에 눈이 남아 있었다.

바다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저렇게 높은 설산이 길게 펼쳐진다는 것이 신기했다.

날씨가 완전히 맑은 날은 아니었다.

구름이 산을 가렸다가 다시 보여주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 구름 사이로 설산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 더 극적이었다.

나는 카메라를 들고 계속 셔터를 눌렀다.

사진을 확대해보면 바다 너머 다테야마 연봉의 눈 덮인 산줄기가 분명하게 보였다.

구름 아래로 산맥이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죽이는구만.”

정말 멋졌다.

도야마에 왔다면 아마하라시는 꼭 한번 와봐야 할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30. 온나이와와 다테야마 연봉

온나이와를 앞에 두고 뒤로 다테야마 연봉이 펼쳐지는 자리를 찾아 사진을 찍었다.

나는 카메라를 들고 산 쪽을 계속 바라봤고 마님은 그런 내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주었다.

마님과 온나이와를 배경으로 함께 사진도 찍었다.

바다는 잔잔했고 구름은 많았지만 멀리 설산은 계속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산과 바다 사이에는 항만시설과 교량, 공장들도 보였다.

자연풍경만 있는 곳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모습이 도야마만의 실제 풍경이었다.

바다와 산업시설, 작은 어촌과 철길, 그 모든 것 뒤에 거대한 설산이 서 있었다.

산만 따로 보고 바다만 따로 보는 풍경과는 전혀 달랐다.

이곳을 왜 많은 사람들이 도야마의 대표적인 조망 장소로 꼽는지 직접 와보니 알 것 같았다.


31. 바다와 철길이 나란히 가는 곳

아마하라시 해안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한쪽에는 바다가 펼쳐지고 그 바로 옆으로 JR 히미선 철길이 지나갔다.

해안과 철길이 거의 붙어 있었고 철길 건너에는 주민들이 사는 작은 집들이 이어졌다.

나는 원래 다카오카와 아마하라시 사이를 오가는 히미선 열차를 꼭 한번 타보고 싶었다.

바다 바로 옆을 따라 달리는 지방철도라는 것부터 마음에 들었다.

여행을 계획할 때부터 아마하라시 해안과 함께 기대했던 것 중 하나였다.

해안을 걷는 동안 히미선 열차가 지나가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바다와 철길, 마을이 거의 붙어 있는 풍경은 내가 좋아하는 일본 지방철도의 모습 그대로였다.

마님과 철길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었다.

나는 이런 장소가 좋다.

관광객을 위해 따로 만들어놓은 풍경이 아니라 사람들이 실제로 살아가는 마을 사이로 철길이 지나가고, 그 몇 걸음 뒤에 바다가 있으며, 날씨가 허락하면 그 바다 너머로 거대한 설산까지 나타난다.

온나이와 주변에서 사진을 찍고 바다 건너 다테야마 연봉을 바라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러다 이제 다카오카로 돌아갈 시간이 됐다.


32. 눈앞에서 놓쳐버린 히미선, 결국 다시 버스로

아마하라시에서 다카오카로 돌아갈 때는 꼭 히미선 열차를 타려고 했다.

해안에서 아마하라시역은 철길 건너편에 있었다.

문제는 건널목이었다.

바로 앞에서 철길을 건널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건널목까지 제법 돌아가야 했다.

해안에서 사진을 찍고 서둘러 역으로 향했지만 생각보다 돌아가는 길이 길었다.

건널목을 건너 역 쪽으로 가는 사이, 내가 타려고 했던 다카오카행 열차가 눈앞에서 지나가버렸다.

“아이고…… 저걸 타야 되는디.”

그야말로 코앞에서 놓쳤다.

이번 여행에서 다카오카~아마하라시 구간의 히미선은 꼭 한번 타보고 싶었는데, 바다 구경하고 사진 찍다가 결국 기회를 놓쳐버린 셈이다.

아쉬웠다.

특히 방금 전까지 해안에서 그 철길을 바라보며 ‘저 기차 타고 가야지’ 하고 있었는데 정작 내가 탈 열차가 눈앞에서 떠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더 허탈했다.

다음 열차를 기다리기에는 이후 일정이 맞지 않았다.

결국 할 수 없이 다시 버스를 타기로 했다.

아마하라시역 부근 버스정류장에서 시간표를 확인하고 기다렸다.

잠시 뒤 초록색 가에츠노버스가 도착했고 마님과 함께 다카오카행 버스에 올랐다.

버스가 출발한 뒤에도 아쉬움이 조금 남았다.

아마하라시의 바다와 온나이와, 다테야마의 설산은 실컷 봤지만 히미선만큼은 숙제로 남았다.

언젠가 다시 오게 된다면 그때는 꼭 다카오카에서 히미선 열차를 타고 이 바닷가를 다시 찾아오고 싶다.


33. 다시 도야마로, 내일을 위한 덴테츠도야마역 사전정찰

다카오카로 돌아온 뒤 도야마행 열차를 탔다.

하루 사이에 도야마와 다카오카를 오가며 신칸센, 보통열차, 버스까지 여러 교통수단을 이용했다.

아침에는 가나자와의 산속에서 윤봉길 의사님의 마지막 길을 찾아 걸었고, 오후에는 도야마로 넘어와 다카오카의 오래된 사찰과 도라에몽, 그리고 아마하라시의 바다와 설산까지 보았다.

하루가 무척 길게 느껴졌다.

저녁 6시 반쯤 다시 도야마에 도착했다.

숙소로 바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내일은 이번 여행의 또 다른 중요한 일정인 쿠로베 협곡으로 가는 날이다.

쿠로베 협곡으로 가려면 우나즈키온센 방면 열차를 타야 한다.

그 다음날 알펜루트의 시작점인 다테야마로 갈 때에도 같은 역에서 기차를 타야된다.

그래서 오늘 미리 덴테츠도야마역을 확인해두기로 했다.

나는 여행을 다닐 때 다음 날 아침 일찍 이용해야 할 역이나 승강장은 가능하면 전날 미리 찾아가 확인해두는 편이다.

가나자와에서도 윤 의사님 순국지로 가는 21번 버스를 타기 위해 전날 저녁 9번 승강장을 미리 확인해두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덴테츠도야마역으로 가서 역 위치와 승강장을 살펴보고, 미리 예약해둔 표도 찾아두었다.

이제 내일 아침에는 헤맬 일이 없었다.

쿠로베 협곡으로 가는 준비까지 끝냈다.


34. HOTEL JAL CITY TOYAMA로 돌아와

모든 일정을 마치고 HOTEL JAL CITY TOYAMA로 돌아왔다.

낮에 맡겨두었던 캐리어를 찾아 객실로 올라갔다.

아침 6시에 가나자와에서 하루를 시작했다.

윤봉길 의사님의 순국지와 순국기념비, 암장지를 찾아가고 박인조 선생님의 묘소까지 참배했다.

숙소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체크아웃한 뒤 신칸센을 타고 도야마로 넘어왔다.

다시 다카오카로 가서 즈이류지를 둘러보고 도라에몽 산책길을 걸었으며, 버스를 타고 아마하라시까지 갔다.

그곳에서는 바다 너머 구름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다테야마 연봉의 설산을 바라보았다.

꼭 타보고 싶었던 히미선 열차를 눈앞에서 놓쳐버린 것은 아쉬웠다.

하지만 그 아쉬움까지도 여행의 한 장면으로 남았다.

마지막으로 내일 쿠로베 협곡으로 가기 위한 덴테츠도야마역 사전정찰과 승차권 수령까지 마쳤다.

참 많은 일이 있었던 하루였다.

오전에는 한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천하영웅 윤봉길 의사님의 마지막 길을 걸었고, 오후에는 다시 마님과 함께 여행자의 모습으로 돌아와 도야마와 다카오카를 돌아다녔다.

슬프고 먹먹했던 아침과 아름답고 즐거웠던 오후가 한날 안에 함께 있었다.

그래서 더 오래 기억에 남을 하루가 될 것 같다.

내일은 쿠로베 협곡이다.

이번 여행의 또 다른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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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로드 2000㎞ - 광복 80주년, 일본에서 다시 만난 독립투사들
김종훈 지음 / 필로소픽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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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로드 2000km』로 살펴본 일본열도 항일독립운동과 식민지배 기억의 현장
― 長崎(나가사키)에서 宮城(미야기)까지, 10개 지역 50개 역사 현장

1. 전체 답사경로 및 역사적 성격

가. 전체 답사경로

ㅇ(주요경로) 長崎(나가사키) → 福岡(후쿠오카) → 下関(시모노세키) → 広島(히로시마) → 大阪(오사카) → 京都(교토) → 金沢(가나자와) → 東京(도쿄) → 千葉(지바) → 宮城(미야기)

ㅇ(답사규모) 『항일로드 2000km』는 광복 80주년을 맞아 일본 열도 약 2,000km를 이동하며 10개 지역, 50개 주요 역사 현장을 찾아 독립운동가들의 의거, 수감, 순국과 일제 식민지배, 침략전쟁, 강제동원, 재일조선인, 원폭피해,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등의 흔적을 살펴본 역사답사기임.

나. 임정로드, 약산로드와의 차이

ㅇ(경로성격) 『임정로드 4000km』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중국 대륙 이동경로를, 『약산로드 7000km』가 김원봉, 의열단, 조선의용대의 활동을 중심으로 따라간다면, 『항일로드 2000km』는 특정 인물이나 조직의 이동경로가 아니라 일본 각지에 흩어진 항일독립운동과 식민지배의 현장을 하나의 답사로로 연결한 것임.

ㅇ(시대범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뿐 아니라 임진왜란, 메이지유신, 청일전쟁, 일본의 군국주의와 침략전쟁, 강제동원, 해방 이후 재일조선인 문제와 과거사 기억까지 함께 다룸.

다. 항일로드의 네 가지 역사적 축

ㅇ(독립운동) 박재혁, 김익상, 백정기, 윤봉길, 양근환, 김지섭, 이봉창, 조명하, 염상섭, 윤동주, 송몽규, 김시현 등 일본 땅에 남은 독립운동가들의 활동과 마지막 흔적을 추적함.

ㅇ(제국주의) 메이지유신, 청일전쟁, 일본군 군사시설, 야스쿠니 신사 등 일본이 근대 군국주의와 제국주의 국가로 성장하고 조선을 식민지화한 구조를 살펴봄.

ㅇ(식민피해) 군함도, 원폭피해, 우토로, 단바 망간광산,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을 통해 식민지 민중이 겪은 피해를 확인함.

ㅇ(기억연대) 고려미술관, 우토로 평화기념관, 윤동주 기억과 화해의 비, 후세 다쓰지 현창비, 大林寺(다이린지) 등을 통해 역사를 기억해 온 재일동포와 일본 시민들의 연대도 함께 살펴봄.

2. 지역별 주요 답사경로 및 핵심 사적지

가. 長崎(나가사키)

1) 長崎刑務所(나가사키형무소)

ㅇ(백정기순국) 흑색공포단 계열 독립운동가 백정기는 1933년 上海(상하이) 六三亭(육삼정)에서 일본 주중공사 아리요시 아키라 등을 공격하려다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934년 6월 5일 당시 長崎刑務所(나가사키형무소)가 있던 諫早(이사하야)에서 순국함.

ㅇ(김익상옥고) 의열단원 김익상도 1922년 上海(상하이) 黃浦灘(황포탄)에서 다나카 기이치 암살을 시도하다 체포된 뒤 일본으로 압송되어 나가사키에서 재판과 복역을 시작함.

ㅇ(수감경로) 김익상은 이후 福岡(후쿠오카), 熊本(구마모토), 鹿児島(가고시마) 등의 형무소로 옮겨져 장기간 옥고를 치른 뒤 1936년 출옥함. 따라서 약 15년의 옥고 전체를 나가사키형무소에서 보냈다고 표현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음.

ㅇ(역사적의의) 일본 본토의 형무소가 조선 독립운동가들을 장기간 가두고 끝내 목숨까지 빼앗은 식민지 탄압의 현장이었음을 보여줌.

2) 長崎港(나가사키항)

ㅇ(박재혁귀국길) 의열단원 박재혁은 1920년 부산경찰서 의거를 위해 上海(상하이)에서 국내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長崎港(나가사키항)을 거쳤음.

ㅇ(마지막편지) 나가사키에서 부산의 동지에게 자신의 귀국을 암시하는 편지를 보낸 뒤 부산으로 이동하여 1920년 9월 14일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 슈헤이를 겨냥해 폭탄을 투척함.

ㅇ(순국지구분) 長崎(나가사키)는 박재혁의 순국지가 아니며, 박재혁은 체포 후 사형을 선고받고 大邱刑務所(대구형무소)에서 단식투쟁을 벌이다 1921년 5월 11일 순국함.

3) 端島(하시마), 軍艦島(군함도)

ㅇ(해저탄광) 軍艦島(군함도)는 미쓰비시가 운영한 해저탄광으로 일본 근대산업화의 상징적 장소 가운데 하나임.

ㅇ(조선인동원) 일제 말기 조선인 노동자들이 이곳에 동원되어 해저탄광에서 가혹한 노동을 하였으며, 산업유산이라는 가치와 식민지 노동동원의 역사를 함께 보아야 할 장소임.

ㅇ(역사기억) 현재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으나 조선인 노동자의 동원과 노동환경을 어떻게 설명하고 기억할 것인지를 둘러싼 한일 간 역사문제가 이어지고 있음.

4) 爆心地(폭심지), 長崎原爆資料館(나가사키원폭자료관)

ㅇ(원폭투하) 1945년 8월 9일 미국이 長崎(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여 막대한 민간인 희생이 발생함.

ㅇ(조선인피폭) 당시 식민지배와 노동동원 등으로 일본에 거주하던 다수의 조선인도 원폭에 피폭되어 사망하거나 후유증을 겪음.

ㅇ(피해규모) 조선인 피폭자와 사망자의 정확한 규모는 자료와 연구에 따라 차이가 있으므로 특정 숫자를 확정하기보다 상당수 조선인이 함께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중심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음.

ㅇ(역사적의의) 일본의 전쟁피해만이 아니라 조선인이 왜 일본 땅에서 원폭피해를 입게 되었는지 식민지배와 전쟁의 인과관계를 함께 살펴보게 하는 장소임.

5) 岡まさはる記念長崎平和資料館(오카 마사하루 기념 나가사키 평화자료관)

ㅇ(가해책임) 일본 시민운동가 오카 마사하루의 뜻을 이어 설립된 자료관으로 원폭피해뿐 아니라 일본의 조선 식민지배, 강제동원, 난징학살 등 일본의 침략과 가해의 역사를 함께 다룸.

ㅇ(역사적의의) 일본의 전쟁피해만을 기억하는 것을 넘어 일본이 아시아에서 가한 침략과 식민지배를 동시에 기억해야 진정한 평화에 도달할 수 있다는 문제의식을 보여주는 공간임.

6) グラバー園(글로버 가든)

ㅇ(근대화배경) 영국인 상인 토머스 글로버의 활동공간으로 막부 말기부터 메이지 초기 일본이 서구의 무기, 선박, 산업기술을 받아들이며 근대화되는 과정을 보여줌.

ㅇ(역사적연결) 직접적인 항일독립운동 사적지는 아니지만 서구식 군사력과 산업력을 빠르게 받아들인 일본의 근대화가 이후 군국주의와 대외팽창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는 장소임.

ㅇ(연계사적) 出島(데지마), 浦上天主堂(우라카미 천주당), 如己堂(뇨코도), 日本二十六聖人記念館(일본 26성인기념관), 大浦天主堂(오우라 천주당) 등과 함께 長崎(나가사키)의 대외교류, 종교탄압, 전쟁과 평화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음.

나. 福岡(후쿠오카)

1) 福岡刑務所(후쿠오카형무소)

ㅇ(윤동주순국) 윤동주는 京都(교토)에서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되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수감 중 1945년 2월 16일 福岡刑務所(후쿠오카형무소)에서 사망함.

ㅇ(송몽규순국) 윤동주의 고종사촌이자 독립운동가인 송몽규 역시 같은 사건으로 수감되어 1945년 3월 7일 같은 형무소에서 사망함.

ㅇ(주사의혹) 송몽규가 가족에게 형무소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맞았다는 취지로 말한 기록이 있어 생체실험 의혹 등이 제기되어 왔으나, 윤동주와 송몽규의 정확한 의학적 사망원인은 현재까지 확정되지 않았음.

ㅇ(역사적의의) 식민지 청년들의 사상과 민족의식까지 범죄로 규정했던 일제의 치안유지법과 사상탄압을 상징하는 장소임.

2) 櫛田神社(구시다 신사), 聖福寺(쇼후쿠지)

ㅇ(히젠도) 櫛田神社(구시다 신사)에는 1895년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도 가쓰아키가 1908년 봉납한 肥前刀(히젠도)가 전해짐.

ㅇ(사실관계) 봉납기록과 칼집에 남은 글 등을 근거로 명성황후 시해에 사용된 칼로 전해지지만, 직접적인 물증에 대한 검증 문제도 있으므로 “명성황후 시해에 사용된 것으로 전해지는 칼”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함.

ㅇ(성복사) 聖福寺(쇼후쿠지)까지 함께 살펴보면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일본인들의 행적과 일본 사회에서 이 사건이 어떻게 기억되어 왔는지를 추적할 수 있음.

ㅇ(우범선고영근)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연결하여 친일 행적을 보인 우범선과 그를 처단한 고영근의 삶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음.

ㅇ(연계사적) 水城(미즈키) 유적, 大宰府政庁(다자이후 정청), 九州国立博物館(규슈국립박물관)은 고대 한반도와 일본의 교류사를 확인할 수 있는 장소임.

다. 下関(시모노세키)

1) 山口地方裁判所下関支部(야마구치지방재판소 시모노세키지부)

ㅇ(관부재판) 부산지역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3명, 근로정신대 피해자 7명 등 10명이 1992년 일본 정부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며 제기한 關釜裁判(관부재판)의 현장임.

ㅇ(일부승소) 1998년 4월 27일 1심 재판부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3명에게 각각 30만 엔을 지급하도록 명령하는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내림.

ㅇ(후속재판) 이후 항소심과 최고재판소에서는 피해자 측이 패소하였으나, 일본 법원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에 대한 국가 책임을 일부 인정한 매우 중요한 재판으로 평가됨.

ㅇ(역사적의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침묵을 깨고 일본 사법부에 직접 책임을 물은 전후 과거사 투쟁의 대표적 장소임.

2) 朝鮮通信使上陸地(조선통신사 상륙지)

ㅇ(교류역사)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들어올 때 중요한 관문 역할을 한 지역으로 조선과 일본이 침략과 지배의 관계만이 아니라 외교와 문화교류를 지속해 온 역사도 보여줌.

ㅇ(역사적의의) 한일관계를 침략과 항일이라는 한 가지 틀만으로 보지 않고 전쟁 이전 오랜 외교, 문화교류의 역사까지 함께 살펴볼 수 있음.

ㅇ(연계사적) 赤間神宮(아카마 신궁), 関門海峡(간몬해협) 등과 함께 조선통신사의 이동경로와 한일 해상교류를 확인할 수 있음.

3) 日清講和記念館(청일강화기념관)

ㅇ(시모노세키조약) 1895년 청일전쟁을 끝낸 下関条約(시모노세키조약)이 체결된 장소임.

ㅇ(조선문제) 조약에서 청이 조선의 독립을 인정하도록 하였지만 이는 조선의 실질적인 자주독립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청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일본이 조선에 대한 지배력을 확대하는 계기가 됨.

ㅇ(역사적의의) 청일전쟁 이후 동아시아 세력균형이 일본 중심으로 급속히 재편되고 조선 식민지화가 본격화되는 과정을 이해하는 핵심 장소임.

4) 長州藩(조슈번), 薩摩藩(사쓰마번)

ㅇ(메이지유신) 長州藩(조슈번)과 薩摩藩(사쓰마번)은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리고 明治維新(메이지유신)을 주도한 핵심세력임.

ㅇ(군국주의연결) 이들 세력에서 배출된 정치인과 군인들이 메이지 정부의 핵심을 차지하면서 중앙집권국가와 근대 군대를 건설하였고, 이후 일본의 대외침략과 조선 식민지화에도 중요한 역할을 함.

ㅇ(역사적의의) 일본 근대화를 단순한 성공담으로 볼 것이 아니라 근대화, 군국주의, 제국주의 팽창이 어떻게 연결되었는지를 함께 살펴보아야 함.

라. 広島(히로시마)

1) 広島平和記念公園(히로시마평화기념공원), 韓国人原爆犠牲者慰霊碑(한국인원폭희생자위령비)

ㅇ(원폭피해) 1945년 8월 6일 広島(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면서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으며, 강제동원 등을 포함하여 일본에 거주하던 다수의 조선인도 피폭됨.

ㅇ(한국인위령비) 한국인 원폭희생자위령비는 1970년 건립되었고 처음에는 평화기념공원 밖에 위치하다가 1999년 공원 안으로 이전됨.

ㅇ(기억의주변화) 위령비의 위치변화는 원폭피해의 역사 속에서도 조선인 희생이 오랫동안 주변부에 머물러 있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줌.

ㅇ(피해규모) 조선인 피폭자와 사망자 수는 연구마다 추정치가 다르므로 정확한 규모를 단일 숫자로 단정하지 않고 다수의 조선인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중심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함.

2) 広島大本営跡(히로시마대본영 터)

ㅇ(청일전쟁)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広島城(히로시마성) 안에 일본군 大本営(대본영)이 설치되었고 메이지 일왕도 이곳에 머무름.

ㅇ(군사도시) 広島(히로시마)는 병력과 무기, 군수물자를 아시아 대륙으로 보내는 일본의 핵심 군사, 병참도시로 기능함.

ㅇ(양면성) 따라서 히로시마는 1945년 원폭피해의 상징인 동시에 그 이전 일본의 아시아 침략전쟁을 수행한 군사거점이었다는 두 측면을 함께 보아야 함.

마. 大阪(오사카)

1) 大阪城(오사카성)

ㅇ(윤봉길수감) 윤봉길은 1932년 上海(상하이) 虹口公園(홍커우공원) 의거 후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일본으로 압송됨.

ㅇ(오사카수감) 1932년 11월 20일 神戸(고베)에 도착한 뒤 大阪城(오사카성) 안 육군위수형무소에 수감되어 약 한 달을 보냄.

ㅇ(가나자와이송) 12월 18일 金沢(가나자와)로 이송되었으며 다음 날인 12월 19일 총살되어 순국함.

ㅇ(역사적의의) 大阪城(오사카성)은 윤봉길이 생애 마지막 한 달을 보낸 장소이자 일본군이 독립운동가를 군사재판과 형무소를 통해 처형한 과정을 보여주는 현장임.

2) 天王寺公園(덴노지공원)

ㅇ(염상섭독립선언) 염상섭은 국내 3.1운동이 일어난 직후인 1919년 3월 19일 大阪(오사카) 天王寺公園(덴노지공원)에서 조선인 유학생과 노동자들의 독립선언대회를 열 계획을 세움.

ㅇ(사전준비) 독립선언서와 격문까지 작성하여 준비했으나 일본 경찰의 탄압으로 체포되면서 계획한 형태의 대중집회는 성사되지 못함.

ㅇ(역사적의의) 3.1운동의 독립열기가 일본 본토의 유학생과 노동자 사회로 빠르게 확산되었음을 보여주는 장소임.

ㅇ(연계사적) 大阪市中央公会堂(오사카시중앙공회당) 일대에서도 재일조선인들의 집회와 사회운동 흔적을 함께 살펴볼 수 있음.

3) 生玉公園(이쿠타마공원) 지하 방공호, 大阪陸軍造兵廠(오사카육군조병창)

ㅇ(재일조선인) 大阪(오사카)는 일제강점기 많은 조선인이 이주하여 노동하며 살아간 대표적인 재일조선인 집거지역 가운데 하나였음.

ㅇ(방공호) 生玉公園(이쿠타마공원)의 지하 방공호는 전쟁 말기 미군 공습과 전시체제 속에서 살아간 주민들의 삶과 전쟁의 흔적을 보여줌.

ㅇ(군수도시) 大阪陸軍造兵廠(오사카육군조병창)은 일본 육군의 대표적 군수공장으로 大阪(오사카)가 거대한 군수산업도시로 기능했던 역사를 보여줌.

ㅇ(역사적의의) 전쟁을 지휘한 군부뿐 아니라 그 전쟁을 떠받친 군수산업과 그 아래에서 살아야 했던 조선인 노동자들의 삶을 함께 살펴보게 하는 장소임.

4) 조명하의 大阪(오사카) 생활지

ㅇ(일본생활) 조명하는 1926년 일본으로 건너가 大阪(오사카)에서 노동하며 공부하다 臺灣(대만)으로 이동함.

ㅇ(실제의거지) 조명하의 실제 의거지는 大阪(오사카)가 아니라 1928년 5월 14일 臺灣(대만) 臺中(타이중)임.

ㅇ(타이중의거) 조명하는 臺中(타이중)에서 일본 왕족이자 육군대장 구니노미야 구니요시를 독검으로 공격함.

ㅇ(역사적의의) 大阪(오사카)의 흔적은 의거 현장이 아니라 조명하가 노동과 생활을 통해 식민지 현실을 체감하고 항일투쟁으로 나아간 생애의 한 단계로 이해해야 함.

바. 京都(교토)

1) 耳塚(미미즈카)

ㅇ(조선침략) 豊臣秀吉(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당시 일본군이 전공의 증거로 조선인들의 코와 귀를 베어 일본으로 가져와 묻은 곳으로 전해짐.

ㅇ(역사적의의) 일제강점기 항일사적지는 아니지만 일본의 조선 침략이 근대 식민지배 이전부터 존재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소임.

ㅇ(연계사적) 方広寺(호코지) 종에 새겨진 「国家安康(국가안강)」, 「君臣豊楽(군신풍락)」 글귀와 도쿠가와, 도요토미 세력의 갈등도 일본사와 조선침략의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줌.

2) 同志社大学(도시샤대학)

ㅇ(윤동주유학) 윤동주는 1942년 東京(도쿄) 立教大学(릿쿄대학)에 입학한 뒤 같은 해 京都(교토) 同志社大学(도시샤대학)으로 옮겨 수학함.

ㅇ(체포) 京都(교토)에서 시를 쓰고 생활하다 1943년 7월 일본 경찰에 체포됨.

ㅇ(역사적의의) 우리말과 민족정체성 자체가 억압받던 시기 일본에서 조선어로 시를 쓰며 자신의 시대와 양심을 성찰한 윤동주의 마지막 청년기를 보여주는 장소임.

3) 윤동주, 송몽규 하숙집 터

ㅇ(유학생활) 京都(교토)에는 윤동주와 송몽규가 유학생활을 하던 하숙집과 두 사람의 생활동선을 보여주는 흔적이 남아 있음.

ㅇ(공동운명) 두 사람은 함께 일본에서 공부하고 독립운동 관련 혐의로 체포된 뒤 福岡刑務所(후쿠오카형무소)에서 차례로 생을 마침.

ㅇ(역사적의의) 거대한 역사적 사건 이전에 두 청년이 실제로 먹고 자고 공부하고 미래를 고민했던 일상의 공간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큼.

4) 高麗美術館(고려미술관)

ㅇ(정조문) 재일조선인 정조문이 평생 모은 한국 문화재를 바탕으로 세운 미술관임.

ㅇ(문화운동) 일본으로 건너간 한국 문화재를 수집하고 보존하여 일본 사회에 한국 문화의 가치를 알리는 데 힘씀.

ㅇ(역사적의의) 독립운동을 무장투쟁만으로 한정하지 않고 해방 이후 재일동포가 자신의 문화와 정체성을 지켜온 노력까지 확장하여 볼 수 있게 함.

5) 京都御所(교토어소), 二条城(니조성)

ㅇ(메이지유신) 막부 말기 일본 정치권력의 변화와 明治維新(메이지유신)에 이르는 과정을 살펴보는 핵심 장소임.

ㅇ(왕정복고) 막부체제가 붕괴되고 천황 중심의 근대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은 이후 중앙집권적 군사국가와 일본 제국주의의 출발점이 됨.

ㅇ(역사적의의) 일본의 근대화와 조선 식민지배가 서로 분리된 역사가 아니라 하나의 연속된 역사과정이었다는 점을 이해하게 함.

6) 宇治(우지) 윤동주 기억과 화해의 비

ㅇ(마지막사진) 윤동주가 1943년 귀국을 앞두고 학우들과 宇治(우지)를 찾아 생전 마지막으로 알려진 사진을 남긴 장소 부근임.

ㅇ(비건립) 일본 시민들의 노력으로 2017년 「시인 윤동주 기억과 화해의 비」가 세워짐.

ㅇ(역사적의의) 윤동주를 단순한 한국의 저항시인으로 기리는 것을 넘어 한일 시민이 과거의 역사를 함께 기억하고 화해를 모색하는 현장임.

7) ウトロ平和祈念館(우토로평화기념관)

ㅇ(마을형성) ウトロ(우토로)는 1940년부터 추진된 京都飛行場(교토비행장) 건설에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들의 숙소를 바탕으로 형성된 마을임.

ㅇ(해방이후) 해방 뒤에도 많은 주민이 일본에 남아 빈곤과 차별, 강제퇴거 위기 속에서 공동체를 지켜옴.

ㅇ(평화기념관) 2022년 우토로 평화기념관이 개관하여 전시동원, 재일조선인의 삶, 강제퇴거 반대운동과 한일 시민연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음.

ㅇ(역사적의의) 식민지배가 1945년 8월 15일에 단절된 것이 아니라 재일조선인의 삶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주는 장소임.

8) 丹波マンガン記念館(단바망간기념관)

ㅇ(광산노동) 전쟁에 필요한 군수물자인 망간을 채굴하던 광산의 흔적을 보존한 장소임.

ㅇ(조선인노동) 일제강점기 조선인과 피차별부락 출신 노동자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광산노동을 담당함.

ㅇ(기억계승) 광산에서 직접 일했던 사람과 그 가족이 중심이 되어 노동의 역사를 보존하고 전해왔다는 점에서 의미가 큼.

ㅇ(역사적의의) 일본의 전쟁수행을 가능하게 만든 산업현장 뒤에 식민지 노동자들의 희생이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공간임.

사. 金沢(가나자와)

1) 윤봉길 순국지

ㅇ(순국) 윤봉길은 1932년 12월 19일 金沢(가나자와)의 일본군 육군형무소 공병작업장 일대에서 총살되어 25세로 순국함.

ㅇ(현재현장) 순국지 일대는 현재 군사시설과 관련된 지역으로 자유로운 접근이 제한되는 곳이 있음.

ㅇ(역사적의의) 上海(상하이) 의거로 중국과 세계에 한국 독립운동의 존재를 각인시킨 윤봉길이 생을 마감한 장소임.

2) 野田山(노다야마) 윤봉길 암장지

ㅇ(비밀매장) 일제는 윤봉길의 유해를 野田山(노다야마) 공동묘지 일대에 은밀하게 매장함.

ㅇ(14년세월) 유해는 광복 이후인 1946년 발굴될 때까지 약 14년 동안 일본 땅에 묻혀 있었음.

ㅇ(박인조) 현지에서 윤봉길 암장지와 관련 유적을 지키고 알리는 데 힘쓴 박인조 등 재일동포의 노력도 함께 기억할 필요가 있음.

ㅇ(역사적의의) 독립운동가의 죽음 이후 시신마저 숨기려 했던 일제의 처우와, 광복 뒤 유해를 찾아 조국으로 모신 사람들의 노력을 동시에 보여줌.

3) 金沢城(가나자와성)

ㅇ(마지막밤) 윤봉길이 순국 전 마지막 밤을 보낸 일본군 관련 시설이 金沢城(가나자와성) 일대에 있었음.

ㅇ(현재흔적) 『항일로드 2000km』는 당시 시설의 위치를 옛 지도와 현재 공간을 비교해 추적하며 그 위치가 오늘날 성 안의 일상적인 시설로 변해버린 현실을 보여줌.

ㅇ(역사적의의) 화려하게 복원된 관광지의 현재 모습 아래 독립운동가가 마지막 밤을 보낸 식민지 군사시설의 기억이 묻혀 있음을 보여줌.

4) 윤봉길 유해 안치소 터

ㅇ(유해발굴) 1946년 윤봉길의 유해가 野田山(노다야마) 암장지에서 발굴됨.

ㅇ(임시안치) 유해는 조국으로 봉환되기 전 金沢(가나자와)의 관련 장소에 임시 안치됨.

ㅇ(국내봉환) 이후 이봉창, 백정기의 유해와 함께 국내로 봉환되어 현재 서울 孝昌公園(효창공원) 삼의사 묘역에 안장됨.

ㅇ(역사적의의) 순국과 암장으로 끝났던 윤봉길의 마지막 길이 광복 후 유해발굴과 조국봉환으로 완성되는 장소임.

5) 金沢(가나자와) 윤봉길 추모관

ㅇ(추모관추진) 광복 80주년인 2025년 윤봉길 의사의 上海(상하이) 의거일인 4월 29일에 맞추어 金沢(가나자와)에 윤봉길 추모관을 개관하는 계획이 추진됨.

ㅇ(개관연기) 그러나 일본 우익단체 등의 반발이 이어지면서 당초 예정된 개관이 연기됨.

ㅇ(역사적의의) 윤봉길을 일본 현지에서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를 둘러싼 논란 자체가 식민지배와 독립운동에 대한 역사인식 문제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줌.

6) 大東亜聖戦大碑(대동아성전대비)

ㅇ(전쟁미화) 石川護国神社(이시카와호국신사) 앞에 세워진 대형 비석으로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성전’으로 규정하는 역사관이 담겨 있음.

ㅇ(팔굉위우) 비석에는 八紘為宇(팔굉위우)와 같이 일본 제국주의의 아시아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된 이념과 연결되는 표현도 남아 있음.

ㅇ(역사적의의) 일본 사회 내부에 침략전쟁을 미화하거나 정당화하려는 역사인식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현장으로 비판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음.

아. 東京(도쿄)

1) 양근환 의거 관련지

ㅇ(민원식처단) 유학생 양근환은 1921년 2월 16일 조선인의 일본 의회 참정권운동을 추진하던 친일인사 민원식을 단도로 공격하여 처단함.

ㅇ(장소기록) 당시 자료에는 의거 장소가 帝国ホテル(제국호텔), 동경역전호텔, 철도호텔 등으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음.

ㅇ(답사현장) 『항일로드 2000km』에서는 東京ステーションホテル(도쿄스테이션호텔)을 관련 현장으로 답사하므로, 이를 현재의 답사거점으로 보되 당시 장소 명칭에는 자료 차이가 있음을 함께 이해할 필요가 있음.

ㅇ(역사적의의) 일제가 내세운 식민지 조선인의 참정권이라는 회유책에 맞서 식민지배 자체의 철폐를 요구한 의열투쟁이었음.

2) 二重橋(니주바시), 김지섭 의거지

ㅇ(왕궁의거) 의열단원 김지섭은 1924년 1월 일본 왕궁 二重橋(니주바시) 일대에서 일본 왕실을 겨냥해 폭탄 3개를 투척함.

ㅇ(불발) 폭탄은 모두 폭발하지 않았고 김지섭은 현장에서 체포됨.

ㅇ(역사적의의) 일본 제국주의와 천황제의 가장 직접적인 상징인 왕궁을 공격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의열투쟁사상 중요한 의미를 가짐.

3) 警視庁(경시청) 앞, 이봉창 의거지

ㅇ(사쿠라다문의거) 한인애국단원 이봉창은 1932년 1월 8일 桜田門(사쿠라다몬) 밖 警視庁(경시청) 정문 앞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히로히토 일왕의 행렬을 향해 폭탄을 투척함.

ㅇ(거사결과) 일본 궁내대신의 마차를 일왕의 마차로 오인하여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현장에서 체포됨.

ㅇ(역사적의의) 침체되어 있던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고 같은 해 윤봉길 의거로 이어지는 계기가 됨.

4) 이봉창 순국지

ㅇ(사형선고) 이봉창은 비공개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음.

ㅇ(순국) 1932년 10월 10일 市谷刑務所(이치가야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함.

ㅇ(역사적의의) 일본에서 오랫동안 생활하며 차별을 경험했던 한 청년이 한인애국단에 들어가 일왕을 직접 겨냥한 독립운동가로 변화한 삶의 마지막 장소임.

5) 日比谷公園(히비야공원), 2.8독립운동 관련지

ㅇ(2.8독립선언) 1919년 2월 8일 일본 유학생들이 東京(도쿄)에서 조선독립청년단 명의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함.

ㅇ(실제발표장소) 독립선언서가 실제로 낭독된 장소는 당시 東京朝鮮基督教青年会館(도쿄조선기독교청년회관)임.

ㅇ(히비야공원) 『항일로드 2000km』는 日比谷公園(히비야공원)을 2.8독립운동 관련 현장으로 답사하지만 실제 독립선언 낭독장소라고 보아서는 안 됨.

ㅇ(역사적의의) 2.8독립선언은 국내 3.1운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며 독립운동의 불길이 국내외로 확산되는 중요한 계기가 됨.

6) 明治神宮(메이지신궁)

ㅇ(천황숭배) 메이지 일왕과 왕비를 신격화하여 제사하는 신사로 근대 일본의 천황숭배와 국가신도체제를 상징함.

ㅇ(제국주의배경) 메이지 시대 일본은 중앙집권국가와 근대 군대를 구축한 뒤 청일전쟁, 러일전쟁, 조선 식민지화와 대륙침략으로 나아감.

ㅇ(역사적의의) 메이지 시대를 단순한 일본 근대화 성공사로만 볼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이 군국주의와 제국주의로 이어진 역사까지 함께 살펴보게 함.

7) 乃木神社(노기신사)

ㅇ(군인신격화) 러일전쟁에서 일본군을 지휘한 노기 마레스케를 신으로 모신 장소임.

ㅇ(순사) 노기는 메이지 일왕이 사망하자 부인과 함께 자결하였고 이후 일본 사회에서 충성과 희생의 상징으로 미화됨.

ㅇ(군국주의) 이러한 죽음과 충성의 미화는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군국주의적 가치관과 이후 가미카제 특공대의 정신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례임.

8) 靖国神社(야스쿠니신사)

ㅇ(전쟁영령) 일본이 벌인 전쟁에서 천황을 위해 죽은 군인과 군속 등을 신으로 제사하는 국가신도와 군국주의 기억의 핵심공간임.

ㅇ(조선인합사) 식민지 조선인 가운데 일본군과 군속 등으로 동원된 뒤 본인이나 유족의 의사와 관계없이 합사된 사람들도 존재함.

ㅇ(역사논란) 일본 정치인의 야스쿠니 참배는 침략전쟁과 식민지배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와 연결되어 현재까지 한국, 중국 등 주변국과 갈등을 일으키고 있음.

9) 伊藤博文(이토 히로부미) 묘

ㅇ(조선침략)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근대국가 형성의 핵심 정치인이자 초대 한국통감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과 식민지화 과정에 깊숙이 관여함.

ㅇ(안중근의거) 1909년 10월 26일 安重根(안중근)이 哈爾濱(하얼빈)역에서 이토를 사살함.

ㅇ(역사적의의) 일본에서 국가적 인물로 추모되는 이토의 묘와 한국에서 독립운동의 영웅으로 기억되는 안중근을 함께 살펴보면 한 인물을 둘러싼 양국 역사인식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음.

10) 布施辰治(후세 다쓰지) 현창비

ㅇ(조선인의변호인)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쓰지는 2.8독립선언 관련 학생들과 김지섭, 박열 등 조선인 독립운동가와 식민지 민중을 적극적으로 변호함.

ㅇ(학살진상규명)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서도 노력함.

ㅇ(건국훈장)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활동을 기려 2004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함.

ㅇ(역사적의의) 식민지배국 일본 안에서도 조선인의 독립과 인권을 위해 싸운 일본 시민이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임.

11) 立教大学(릿쿄대학), 윤동주 하숙집 터

ㅇ(도쿄유학) 윤동주는 1942년 立教大学(릿쿄대학)에 입학하여 東京(도쿄)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함.

ㅇ(시작품) 東京(도쿄)에서 생활하며 우리말로 시를 썼고 이후 京都(교토) 同志社大学(도시샤대학)으로 옮김.

ㅇ(하숙집) 윤동주의 하숙집 터는 식민지 조선 청년이 일본의 중심부에서 모국어로 시를 쓰고 자신의 시대와 삶을 고민했던 일상의 공간임.

ㅇ(역사적의의) 윤동주의 저항은 무장투쟁은 아니었지만 우리말과 양심을 지키는 문학적 저항이라는 점에서 항일로드의 중요한 한 축을 이룸.

12) 早稲田(와세다) 스코트홀

ㅇ(신간회도쿄지회) 1927년 新幹会東京支会(신간회 도쿄지회)가 창립된 장소임.

ㅇ(민족협동전선) 신간회는 민족주의세력과 사회주의세력이 일제 식민지배에 맞서 연합한 대표적인 민족협동전선 조직임.

ㅇ(재일운동) 도쿄지회 창립은 국내에서 시작된 신간회운동이 일본에 살던 조선인 사회까지 확산되었음을 보여줌.

13) 女たちの戦争と平和資料館(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

ㅇ(위안부자료) 2005년 개관한 시민자료관으로 일본군 위안부 제도와 전시 성폭력 피해자의 증언, 자료를 수집하고 전시함.

ㅇ(가해책임) 피해자의 고통을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일본군과 국가가 위안부 제도를 어떻게 운영했는지 일본의 가해책임을 함께 다룸.

ㅇ(역사적의의) 일본 내 시민사회가 정부의 역사인식과 별개로 전쟁가해의 역사를 기록하고 알리기 위해 노력해 온 대표적인 공간임.

14) 明治大学(메이지대학), 김시현 관련지

ㅇ(김시현) 김시현은 일본 유학을 경험한 뒤 의열단에서 활동하며 국내외 독립운동에 참여한 인물임.

ㅇ(청년시절) 明治大学(메이지대학) 관련 흔적은 일본에서 공부하던 조선 청년이 식민지 현실을 인식하고 독립운동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줌.

ㅇ(역사적의의) 일본 유학이 단순한 개인의 학업과 출세를 위한 길만이 아니라 식민지 조선 청년들이 민족문제를 자각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음을 보여줌.

15) 横網町公園(요코아미초공원), 東京都復興記念館(도쿄도부흥기념관)

ㅇ(관동대지진) 1923년 9월 1일 關東大震災(관동대지진)이 발생한 직후 “조선인이 방화했다”, “우물에 독을 넣었다”는 등의 허위정보와 유언비어가 퍼짐.

ㅇ(조선인학살) 일본 군과 경찰, 자경단 등에 의해 많은 조선인이 살해되는 대규모 학살이 발생함.

ㅇ(희생규모) 정확한 조선인 희생자 수는 사료와 연구에 따라 차이가 크므로 특정 숫자를 확정하기보다 대규모 학살이 발생했다는 사실과 그 발생구조를 중심으로 살펴보아야 함.

ㅇ(추도비) 공원에는 관동대지진 당시 학살된 조선인을 추도하는 비가 있으며 일본 시민들이 오랫동안 추도행사를 이어옴.

ㅇ(역사적의의) 국가와 언론, 사회가 만들어낸 혐오와 유언비어가 실제 집단학살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비극적 역사현장임.

16) 新大久保駅(신오쿠보역), 이수현

ㅇ(의로운죽음) 2001년 1월 26일 한국인 유학생 이수현은 新大久保駅(신오쿠보역) 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다가 일본인 세키네 시로와 함께 숨짐.

ㅇ(성격구분) 항일독립운동 사적지는 아니지만 한일 두 나라 시민 사이의 인간애와 연대를 상징하는 장소로 『항일로드 2000km』의 도쿄 답사에 포함됨.

ㅇ(역사적의의) 가해와 피해의 과거를 기억하면서도 오늘의 한일관계를 인간적 연대와 미래로 이어가야 한다는 책의 문제의식을 보여줌.

자. 千葉(지바), 宮城(미야기)

1) 千葉刑務所(지바형무소)

ㅇ(김지섭옥고) 김지섭은 1924년 二重橋(니주바시) 의거 후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市谷刑務所(이치가야형무소)를 거쳐 千葉刑務所(지바형무소)로 이감됨.

ㅇ(순국) 장기간 옥고를 치르던 중 1928년 2월 20일 뇌내출혈로 千葉刑務所(지바형무소)에서 순국함.

ㅇ(역사적의의) 일본 왕궁을 직접 겨냥한 의열단원의 투쟁이 결국 일본 감옥에서의 죽음으로 끝난 마지막 현장임.

2) 宮城県(미야기현) 大林寺(다이린지)

ㅇ(안중근지바도시치) 旅順(뤼순) 감옥에서 안중근을 감시했던 일본군 헌병 千葉十七(지바 도시치)는 안중근의 인품과 신념에 감화된 것으로 전해짐.

ㅇ(안중근유묵) 안중근은 지바 도시치에게 「為国献身軍人本分(위국헌신군인본분)」이라는 유묵을 남김.

ㅇ(기억계승) 지바 도시치는 유묵을 평생 간직하였고, 이후 그의 고향과 관련된 大林寺(다이린지)에서 안중근을 기리는 기억이 이어짐.

ㅇ(역사적의의) 식민지배와 독립투쟁으로 서로 적대했던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서도 인간에 대한 존경이 생길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장소임.

ㅇ(답사종착) 항일로드의 마지막을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물이 아니라 안중근과 일본인 헌병 사이의 인간적 인연을 기억하는 장소에서 끝낸다는 점에서 책 전체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보여줌.

3. 『항일로드 2000km』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주요 인물

가. 직접 의열투쟁

1) 박재혁

ㅇ(부산의거) 1920년 부산경찰서 폭탄 의거를 결행한 의열단원으로 長崎港(나가사키항)은 거사 직전 귀국길의 중요한 경유지임.

2) 김익상

ㅇ(의열투쟁) 1921년 조선총독부 폭탄 의거, 1922년 上海(상하이) 黃浦灘(황포탄) 다나카 기이치 암살 시도를 전개하고 일본 여러 형무소에서 장기간 옥고를 치름.

3) 백정기

ㅇ(육삼정의거) 1933년 上海(상하이) 六三亭(육삼정) 의거를 준비하다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934년 長崎刑務所(나가사키형무소)에서 순국함.

4) 윤봉길

ㅇ(홍커우의거) 1932년 上海(상하이) 虹口公園(홍커우공원) 의거 후 일본으로 압송되어 大阪(오사카)에 수감된 뒤 金沢(가나자와)에서 순국함.

5) 양근환

ㅇ(민원식처단) 1921년 東京(도쿄)에서 친일 참정권운동을 추진하던 민원식을 처단함.

6) 김지섭

ㅇ(왕궁의거) 1924년 東京(도쿄) 二重橋(니주바시)에서 일본 왕실을 향해 폭탄을 투척하고 이후 千葉刑務所(지바형무소)에서 순국함.

7) 이봉창

ㅇ(사쿠라다문의거) 1932년 東京(도쿄) 桜田門(사쿠라다몬) 밖에서 히로히토 일왕을 겨냥해 폭탄을 투척하고 같은 해 사형으로 순국함.

8) 조명하

ㅇ(타이중의거) 일본 大阪(오사카)에서 생활한 뒤 臺灣(대만)으로 이동하여 1928년 臺中(타이중)에서 일본 왕족 구니노미야 구니요시를 공격함.

나. 청년, 학생, 문학운동

1) 윤동주

ㅇ(문학저항) 東京(도쿄), 京都(교토)에서 유학하며 우리말로 시를 썼고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福岡刑務所(후쿠오카형무소)에서 생을 마침.

2) 송몽규

ㅇ(독립운동)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한 경험이 있으며 京都帝国大学(교토제국대학) 유학 중 체포되어 福岡刑務所(후쿠오카형무소)에서 순국함.

3) 염상섭

ㅇ(오사카독립선언) 1919년 大阪(오사카) 天王寺公園(덴노지공원)에서 유학생과 노동자들이 참여하는 독립선언대회를 추진함.

4) 김시현

ㅇ(의열단활동) 일본 유학 이후 의열단에 참여하여 국내외에서 무장독립운동을 전개함.

다. 일본인 연대자

1) 布施辰治(후세 다쓰지)

ㅇ(조선인의변호인) 독립운동가와 식민지 조선인을 변호하고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의 진상규명에 힘쓴 일본인 법률가임.

2) 千葉十七(지바 도시치)

ㅇ(안중근기억) 旅順(뤼순) 감옥에서 안중근을 감시했던 일본군 헌병이었으나 그의 인품과 신념을 존경하게 되었고 안중근의 유묵을 평생 간직함.

4. 『항일로드 2000km』 대장정 종합

가. 일본 제국주의의 형성과 팽창

ㅇ(제국주의형성) 下関(시모노세키), 広島(히로시마), 京都(교토), 東京(도쿄)의 현장을 통해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이 중앙집권적 군사국가를 건설하고 청일전쟁, 러일전쟁, 조선 식민지화, 아시아 침략전쟁으로 확대해 간 과정을 살펴볼 수 있음.

나. 일본 본토에서의 직접 항일투쟁

ㅇ(적지항쟁) 長崎(나가사키), 大阪(오사카), 金沢(가나자와), 東京(도쿄), 千葉(지바)는 박재혁, 김익상, 백정기, 윤봉길, 양근환, 김지섭, 이봉창 등 독립운동가들이 식민지배국 일본의 심장부까지 들어가 직접 투쟁하거나 수감되고 순국한 현장임.

다. 일본 유학생과 청년들의 저항

ㅇ(청년운동) 福岡(후쿠오카), 大阪(오사카), 京都(교토), 東京(도쿄)에는 윤동주, 송몽규, 염상섭, 2.8독립선언 참여 유학생 등 일본에서 공부하고 생활하며 식민지 현실에 저항했던 조선 청년들의 흔적이 남아 있음.

라. 식민지 민중의 피해

ㅇ(민중피해) 軍艦島(군함도), 広島(히로시마), 長崎(나가사키)의 원폭피해, ウトロ(우토로), 丹波(단바) 망간광산,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이름 없는 조선 민중이 식민지배와 침략전쟁 속에서 겪어야 했던 피해를 보여줌.

마. 기억과 연대

ㅇ(기억계승) 高麗美術館(고려미술관), 윤동주 기억과 화해의 비, ウトロ平和祈念館(우토로평화기념관), 布施辰治(후세 다쓰지) 현창비, 大林寺(다이린지)는 재일동포와 일본 시민들이 과거의 역사를 외면하지 않고 기억하고 계승해 온 현장임.

바. 항일로드의 핵심 흐름

ㅇ(역사흐름) 일본 근대국가 형성 → 군국주의와 제국주의 팽창 → 조선침략과 식민지배 → 일본 본토에서의 독립운동 → 체포, 수감, 순국 → 침략전쟁과 강제동원 → 원폭과 민간인 피해 → 재일조선인의 삶과 차별 → 과거사 진상규명 → 기억과 한일 시민연대

사. 종합평가

ㅇ(역사적의의) 『항일로드 2000km』는 독립운동가들의 의거지만을 찾아가는 단순한 항일답사로가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가 어떻게 형성되고 조선을 침략했는지, 이에 맞서 조선인들이 일본 본토에서 어떻게 저항했는지, 식민지 민중이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 해방 이후 그 역사를 누가 기억하고 지켜왔는지를 일본 열도 약 2,000km의 현장을 통해 연결하여 보여주는 역사기행임.

ㅇ(독립운동확장) 독립운동을 이름난 독립운동가들의 무장투쟁만으로 한정하지 않고 유학생의 독립선언과 문학적 저항, 식민지 노동자의 삶, 재일조선인 공동체, 일본 시민들의 양심적 연대까지 함께 바라보게 한다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음.

ㅇ(기억의현재성) 金沢(가나자와) 윤봉길 추모관 개관 논란과 大東亜聖戦大碑(대동아성전대비)에서 볼 수 있듯이 일본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를 둘러싼 문제는 과거에 끝난 것이 아니라 현재도 이어지고 있음.

ㅇ(최종의미) 『항일로드 2000km』는 일본을 단순히 과거의 적국으로 바라보는 데 그치지 않고, 가해의 현장과 저항의 현장, 피해자의 흔적과 양심적 일본 시민의 연대를 함께 살펴봄으로써 올바른 역사기억 위에서 미래의 한일관계를 생각하게 하는 답사로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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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산로드 7000km - 의열단 100년, 약산 김원봉 추적기
김종훈 지음 / 필로소픽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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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산로드 7000km』로 살펴본 약산 김원봉과 무장독립투쟁 대장정
― 密陽(밀양)에서 重慶(충칭)까지, 독립운동기 1919~1945

1. 정리 범위 및 전체 흐름

가. 정리 범위

ㅇ(책의구성) 『약산로드 7000km』는 서울에서 출발하여 密陽(밀양), 吉林(지린), 北京(베이징), 上海(상하이), 南京(난징), 廣州(광저우), 武漢(우한), 桂林(구이린), 重慶(충칭)을 거쳐 平壤(평양)까지 김원봉과 그 동지들의 흔적을 따라가는 답사기임.

ㅇ(정리범위) 본 정리는 책 전체 가운데 약산 김원봉의 항일독립운동과 무장투쟁이 집중된 1919~1945년을 중심으로 하며, 密陽(밀양)은 독립운동의 출발 배경으로 포함하고 광복 이후 서울과 平壤(평양)의 행적은 본문에서 제외함.

ㅇ(주의사항) 김원봉은 정부기관처럼 한 방향으로 순차 이전한 것이 아니고 여러 도시를 오가며 활동하였으므로, 아래 경로는 정확한 일회성 이동경로가 아니라 주요 활동거점을 역사적 시간순으로 배열한 것임.

나. 주요 활동거점의 역사적 흐름

ㅇ(주요거점) 密陽(밀양) → 吉林(지린) → 北京(베이징), 上海(상하이) → 廣州(광저우) → 南京(난징) → 武漢(우한), 漢口(한커우) → 桂林(구이린) → 綦江(치장), 重慶(충칭)

다. 독립운동 노선의 변화

ㅇ(의열투쟁) 1919년 의열단을 조직하여 일제 식민통치기관과 주요 인물을 직접 공격하는 암살, 폭파 중심의 의열투쟁을 전개함.

ㅇ(혁명이론) 1923년 신채호가 작성한 「朝鮮革命宣言(조선혁명선언)」을 통해 의열단의 투쟁목표와 민중 직접혁명 노선을 이론적으로 정립함.

ㅇ(군사교육) 1926년 黃埔軍官學校(황포군관학교)에서 근대 군사교육을 받은 뒤 소수 인원의 개별 의거를 넘어 조직적인 군사운동과 간부양성으로 활동영역을 확대함.

ㅇ(간부양성) 1932년 이후 南京(난징)에서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운영하여 장기적인 무장독립전쟁을 담당할 군사, 정치간부를 양성함.

ㅇ(통일전선) 1935년 民族革命黨(민족혁명당), 1937년 朝鮮民族戰線聯盟(조선민족전선연맹)을 통해 여러 독립운동세력을 묶는 통일전선운동을 추진함.

ㅇ(무장부대) 1938년 조선의용대를 창설하여 중국군과 연계한 항일선전, 적군와해, 정보수집 등 조직적인 전선활동을 전개함.

ㅇ(임정참여) 1942년 이후 重慶(충칭)에 남은 조선의용대 세력이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고 김원봉도 한국광복군 부사령관,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으로 활동함.

2. 주요 거점별 활동 및 역사적 의의

가. 제1기 ― 의열단 창단과 의열투쟁의 확립(1919~1925)

1) 密陽(밀양) 【출발점】

ㅇ(독립운동배경) 약산 김원봉의 고향으로 김원봉뿐 아니라 윤세주 등 의열단과 조선의용대에서 활동한 여러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지역임.

ㅇ(주요사적) 현재 김원봉과 의열단의 활동을 기리는 의열기념관이 조성되어 있으며 김원봉이 다닌 밀양보통학교, 동화중학교 관련 흔적과 독립운동가 박차정 묘 등이 남아 있음.

ㅇ(역사적의의) 김원봉의 성장과 항일의식 형성뿐 아니라 훗날 의열단에서 함께 활동한 동지들과의 인적 기반이 형성된 출발점이라는 의미를 가짐.

2) 吉林(지린) 【의열단 창립지】

ㅇ(의열단창단) 1919년 11월 9일 밤부터 10일 새벽 사이 김원봉을 중심으로 한 청년 독립운동가들이 吉林省(지린성) 吉林市(지린시)에서 의열단을 결성함.

ㅇ(창립목표) 의열단은 일제 식민통치기관 파괴와 일제 고관, 군부 수뇌, 친일세력 등에 대한 직접투쟁을 주요 행동방식으로 설정함.

ㅇ(단체명) 의열단이라는 명칭에는 “천하의 정의의 사를 맹렬히 실행한다”는 취지가 담겨 있었음.

ㅇ(주요사적) 『약산로드 7000km』에서는 吉林市(지린시) 光華路(광화로) 57호 일대를 의열단 창립 관련 장소로 답사함. 당시 기록에는 吉林(지린) 巴虎門(파호문) 밖 중국인 집에서 결성한 것으로 전하는 자료도 있음.

ㅇ(자료차이) 의열단 창립단원 수는 자료와 연구에 따라 13명 또는 10명으로 다르게 정리됨. 전통적으로는 13명설이 널리 알려졌으나 최근 연구와 밀양 의열기념관에서는 10명으로 정리하기도 함.

ㅇ(역사적의의) 1920년대 국내외에서 일제 식민통치기관과 주요 인물을 직접 공격한 대표적인 의열투쟁 조직이 탄생한 곳임.

3) 北京(베이징), 上海(상하이) 【의열단 활동의 중심】

가) 北京(베이징)

ㅇ(본부활동) 의열단은 吉林(지린)을 떠난 뒤 北京(베이징)을 주요 활동근거지로 삼았으며, 1922년 말 일본 측 정보자료에는 外交部大街(외교부대가)에 의열단 통신처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됨.

ㅇ(신채호교류) 김원봉은 류자명 등의 연결을 통해 신채호와 교류하였으며, 의열단의 독립운동 이념과 투쟁방향을 체계화할 선언문 작성을 요청함.

ㅇ(혁명선언) 신채호는 1922년 말부터 집필하여 1923년 1월 「朝鮮革命宣言(조선혁명선언)」을 완성함.

ㅇ(선언내용) 「朝鮮革命宣言(조선혁명선언)」은 외교론과 준비론만으로는 독립을 달성할 수 없다고 비판하고 민중이 직접 폭력혁명을 통해 일제의 식민지배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의열단의 혁명이론을 제시함.

나) 上海(상하이)

ㅇ(활동거점) 上海(상하이)는 北京(베이징)과 함께 의열단의 연락, 자금과 무기 조달, 거사 준비에 중요한 역할을 한 국제도시였음.

ㅇ(황포탄의거) 1922년 김익상, 오성륜, 이종암 등이 上海(상하이) 黃浦灘(황포탄)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 암살을 시도함.

ㅇ(국제적활동)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비롯한 여러 독립운동단체와 중국 혁명세력이 활동하던 上海(상하이)는 의열단이 국제적 연락망과 활동공간을 확보하는 데 중요한 지역이었음.

다) 의열단의 대표 의거

ㅇ(부산의거) 1920년 박재혁이 釜山(부산)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함.

ㅇ(밀양의거) 1920년 최수봉이 密陽(밀양)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함.

ㅇ(총독부의거) 1921년 김익상이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함.

ㅇ(황포탄의거) 1922년 김익상, 오성륜, 이종암이 上海(상하이) 黃浦灘(황포탄)에서 다나카 기이치 암살을 시도함.

ㅇ(종로의거) 1923년 김상옥이 鍾路(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뒤 일본 경찰과 시가전을 벌임.

ㅇ(니주바시의거) 1924년 김지섭이 일본 東京(도쿄) 二重橋(니주바시)에 폭탄을 투척함.

ㅇ(동척의거) 1926년 나석주가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식산은행을 공격함.

ㅇ(역사적의의) 의열단은 일제 식민통치의 핵심기관과 인물을 직접 공격함으로써 국내외에 지속적인 무장저항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었음.

나. 제2기 ― 군사교육과 통일전선으로의 확대(1926~1937)

1) 廣州(광저우) 【군사노선 전환의 출발점】

ㅇ(황포군관학교) 김원봉은 1926년 3월 동지들과 함께 黃埔軍官學校(황포군관학교) 제4기에 입교하여 같은 해 10월 졸업함.

ㅇ(군사교육) 黃埔軍官學校(황포군관학교)는 당시 중국 국민혁명의 핵심 군사교육기관으로, 김원봉은 이곳에서 정규 군사교육과 정치교육을 받음.

ㅇ(노선확대) 황포군관학교 입교는 소수 정예 의열단원의 개별 의거에 의존하던 방식에서 대규모 조직과 군사간부를 양성하여 장기적인 독립전쟁을 준비하는 방향으로 활동노선을 넓히는 중요한 계기가 됨.

ㅇ(주요사적) 黃埔軍官學校(황포군관학교) 옛터는 김원봉의 군사노선 전환을 보여주는 핵심 사적이며, 廣州起義烈士陵園(광저우기의열사능원)에는 1927년 광저우기의와 관련하여 희생된 한국인 혁명가들의 흔적도 남아 있음.

ㅇ(역사적의의) 廣州(광저우)는 1938년 이후 조선의용대 활동지가 되기 이전부터 김원봉이 근대 군사교육을 받고 조직적인 무장투쟁을 구상하게 된 핵심 거점임.

2) 南京(난징) 【군사간부 양성과 통일전선의 중심】

가) 조선혁명간부학교

ㅇ(학교설립) 김원봉과 의열단은 중국 국민정부의 지원을 받아 1932년 南京(난징)에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전쟁을 담당할 군사, 정치간부 양성에 착수함.

ㅇ(제1기) 1932년 10월부터 湯山(탕산) 동쪽 善祠廟(선사묘) 일대에서 교육을 실시하여 26명을 배출함. 시인 이육사가 제1기생으로 참여함.

ㅇ(제2기) 江寧鎭(강녕진) 曾祖寺(증조사) 일대에서 교육하여 55명을 배출함.

ㅇ(제3기) 上方鎭(상방진) 天寧寺(천녕사)에서 교육하여 44명을 배출함.

ㅇ(교육성과) 1935년까지 3기에 걸쳐 총 125명의 군사, 정치간부를 배출함.

ㅇ(역사적의의) 개인 의거 중심의 투쟁을 넘어 장래 독립전쟁에 필요한 인적 기반을 직접 양성했다는 점에서 김원봉의 독립운동 노선이 크게 확대된 시기임.

나) 民族革命黨(민족혁명당) 결성

ㅇ(정당통합) 1935년 7월 5일 南京(난징)에서 의열단, 한국독립당, 신한독립당, 조선혁명당, 대한인독립당 등 5개 독립운동단체가 참여하여 民族革命黨(민족혁명당)을 결성함.

ㅇ(김원봉역할) 김원봉과 의열단 계열은 民族革命黨(민족혁명당)의 핵심 세력을 이루며 의열투쟁과 군사교육을 넘어 정치적 통일전선 구축을 시도함.

ㅇ(주요사적) 胡家花園(호가화원)은 民族革命黨(민족혁명당) 본부가 자리하고 김원봉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활동했던 주요 장소임.

다) 朝鮮民族戰線聯盟(조선민족전선연맹)

ㅇ(연맹결성) 民族革命黨(민족혁명당)에서 일부 세력이 이탈한 뒤 김원봉 계열은 1937년 南京(난징)에서 朝鮮民族戰線聯盟(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함.

ㅇ(통일전선) 여러 좌파계열 독립운동단체를 결집시켜 중국의 항일전쟁과 연계한 한중 공동항전을 준비함.

ㅇ(역사적의의) 南京(난징) 시기는 김원봉의 활동이 의열단이라는 비밀결사에서 군사교육기관, 정당, 통일전선조직으로 단계적으로 확대된 시기임.

다. 제3기 ― 조선의용대 창설과 한중연합 항전(1938~1942)

1) 武漢(우한), 漢口(한커우) 【조선의용대 창설지】

ㅇ(조선의용대창설) 1938년 10월 10일 漢口(한커우) 中華基督敎靑年會(중화기독교청년회)에서 조선의용대가 창설됨.

ㅇ(조직성격) 조선의용대는 중국 관내에서 결성된 최초의 한인 무장부대로, 중국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정치부의 지휘와 지원 아래 활동함.

ㅇ(표현주의) 조선의용대를 독립된 국가의 정규군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으며, 중국군과 협력하여 활동한 조직적인 한인 항일무장부대로 보는 것이 타당함.

ㅇ(주요임무) 일본군 포로 심문, 일본군을 대상으로 한 항일, 반전 선전, 중국 민중 대상 항일선전, 정보수집, 전선지원 등을 수행함.

ㅇ(주요사적) 당시 결성식이 열린 中華基督敎靑年會(중화기독교청년회) 건물은 현재 남아 있지 않으며, 현재의 漢口(한커우) 中山大道(중산대도), 黎黃陂路(리황피로) 교차지역 일대가 관련 장소로 파악됨.

ㅇ(역사적의의) 김원봉의 투쟁이 소규모 의열활동과 군사간부 양성 단계를 넘어 실제 전선에서 중국군과 함께 활동하는 조직적 무장투쟁으로 발전한 전환점임.

2) 桂林(구이린) 【조선의용대 본부와 항일선전활동】

ㅇ(본부이동) 1938년 武漢(우한) 함락 이후 조선의용대 본부는 桂林(구이린)으로 이동하여 활동을 계속함.

ㅇ(선전활동) 조선의용대는 일본군과 조선인 병사들을 대상으로 한 항일, 반전 선전활동, 중국 민중을 대상으로 한 항전선전, 정보수집과 전선지원 등을 전개함.

ㅇ(활동거점) 七星公園(칠성공원) 일대 등에는 조선의용대 활동과 관련한 흔적이 남아 있으며 『약산로드 7000km』에서도 桂林(구이린)을 주요 답사거점으로 다룸.

ㅇ(역사적의의) 조선의용대는 단순한 전투부대가 아니라 언어능력과 선전역량을 활용하여 일본군의 전투의지를 약화시키고 중국의 항일전쟁을 지원한 특수한 성격의 무장조직이었음.

3) 綦江(치장) 【독립운동세력 통합 시도】

ㅇ(공개통신) 1939년 5월 김구와 김원봉은 공동명의로 「동지, 동포 제군에게 보내는 공개통신」을 발표하여 독립운동세력의 통합을 촉구함.

ㅇ(7당통일회의) 1939년 8월 綦江(치장)에서 김구, 김원봉 계열을 포함한 독립운동 정당과 단체들이 7당통일회의를 열어 단일정당 결성을 논의함.

ㅇ(통합실패) 통합논의는 이념과 조직노선의 차이로 최종적인 단일정당 결성에는 이르지 못함.

ㅇ(역사적의의) 김구와 김원봉이 서로 다른 정치노선에도 불구하고 항일전선 통합을 위해 직접 협력한 중요한 과정으로, 이후 重慶(충칭)에서 이루어질 임시정부 참여와 광복군 합류의 전단계라는 의미를 가짐.

4) 重慶(충칭) 【조선의용대의 분화】

ㅇ(본부이동) 조선의용대 본부는 桂林(구이린)을 거쳐 1940년 重慶(충칭)으로 이동함.

ㅇ(북상이동) 조선의용대 내부에서는 일본군과 직접 싸우기 위해 華北(화북)지역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요구가 커졌고, 1940년 말부터 1941년 사이 다수의 대원들이 黃河(황허)를 넘어 太行山(타이항산) 일대로 이동함.

ㅇ(화북지대) 華北(화북)으로 이동한 주력은 1941년 7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개편되었으며 중국공산당계 팔로군과 연계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벌임.

ㅇ(조선의용군) 화북의 조선의용대 세력은 1942년 조선독립동맹 산하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되어 重慶(충칭)의 김원봉 계열과는 별도의 무장투쟁 노선을 이어감.

ㅇ(구분필요) 따라서 “1942년 조선의용대 전체가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었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음. 화북으로 이동한 주력은 조선의용군으로 이어졌으며, 重慶(충칭)에 남아 있던 김원봉 계열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으로 편입됨.

라. 제4기 ― 임시정부 참여와 한국광복군 합류(1942~1945)

1) 重慶(충칭) 【독립운동세력 연합의 최종 거점】

가) 한국광복군 편입

ㅇ(편입결정) 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중국 국민정부의 협의를 거쳐 重慶(충칭)에 남아 있던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에 편입됨.

ㅇ(제1지대) 조선의용대 잔류세력은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개편되었으며 김원봉이 제1지대장을 맡음.

ㅇ(부사령관) 김원봉은 1942년 한국광복군 부사령관에 임명되어 임시정부 계열 무장세력과 함께 대일항전을 준비함.

ㅇ(역사적의의) 이는 조선의용대 전체의 통합이 아니라 重慶(충칭)에 남은 김원봉 계열 무장세력이 한국광복군에 합류한 것으로 이해해야 함.

나)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여

ㅇ(정치참여) 김원봉과 조선민족혁명당 계열은 1942년을 전후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에 참여하면서 오랫동안 분열되어 있던 독립운동세력의 협력범위를 넓힘.

ㅇ(군무부장) 김원봉은 194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에 취임하여 임시정부의 군사업무를 담당함.

ㅇ(직책구분) 따라서 김원봉이 1942년부터 곧바로 군무부장을 맡았다고 서술하면 부정확하며, 한국광복군 부사령관은 1942년, 임시정부 군무부장은 1944년으로 구분해야 함.

다) 박차정과 重慶(충칭)

ㅇ(동지이자배우자) 박차정은 김원봉의 배우자이자 독립운동가로 의열단, 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 활동에 참여함.

ㅇ(순국) 박차정은 오랜 독립운동과 병고 끝에 1944년 重慶(충칭)에서 생을 마침.

ㅇ(주요사적) 『약산로드 7000km』에서는 박차정의 순국지이자 김원봉의 重慶(충칭) 거주 관련 장소를 중요한 답사대상으로 다룸.

라) 광복까지의 활동

ㅇ(연합투쟁) 김원봉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 체제 안에서 광복군의 확대와 대일항전을 위한 활동을 계속함.

ㅇ(광복) 1945년 8월 일본의 패망으로 26년에 걸친 중국 대륙에서의 김원봉의 항일독립운동은 일단락됨.

ㅇ(역사적의의) 重慶(충칭)은 의열단 창단 이후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온 독립운동세력이 완전한 정치적 일치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일본의 패망이라는 공동목표를 위해 협력한 김원봉 독립운동의 마지막 중국 거점임.

3. 『약산로드 7000km』에서 함께 보아야 할 주요 인물

가. 윤세주

ㅇ(평생동지) 김원봉과 같은 密陽(밀양) 출신으로 의열단 창립에 참여하고 조선의용대와 화북지역 항일투쟁까지 함께한 핵심 동지임.

ㅇ(최후) 華北(화북)으로 이동하여 太行山(타이항산) 일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다 1942년 전사함.

나. 신채호

ㅇ(혁명이론) 김원봉의 요청을 받아 1923년 「朝鮮革命宣言(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하여 의열단의 무장혁명노선을 사상적으로 정립함.

다. 류자명

ㅇ(연결자) 의열단의 핵심 이론가이자 활동가로 김원봉과 신채호를 연결하고 「朝鮮革命宣言(조선혁명선언)」 작성과 의열단의 사상정립에 중요한 역할을 함.

라. 이육사

ㅇ(독립운동가) 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의열단계열 독립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932년 南京(난징) 조선혁명간부학교 제1기생으로 군사교육을 받음.

마. 박차정

ㅇ(무장독립운동) 김원봉의 배우자라는 위치에 한정되지 않고 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에서 직접 활동한 독립운동가로 여성 독립운동사의 중요한 인물임.

4. 약산 김원봉의 독립운동 노선 변화

가. 제1단계 ― 의열투쟁

ㅇ(의열단활동) 吉林(지린)에서 의열단을 창단하고 일제 식민통치기관과 주요 인물을 직접 공격하는 암살, 폭파투쟁을 전개함.

나. 제2단계 ― 혁명이론 정립

ㅇ(혁명선언) 北京(베이징)에서 신채호와 연계하여 「朝鮮革命宣言(조선혁명선언)」을 마련하고 의열투쟁을 민중혁명론으로 이론화함.

다. 제3단계 ― 군사교육과 간부양성

ㅇ(군사간부) 廣州(광저우) 黃埔軍官學校(황포군관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南京(난징) 조선혁명간부학교를 통해 독립전쟁을 담당할 군사, 정치간부를 직접 양성함.

라. 제4단계 ― 정치조직과 통일전선

ㅇ(통일전선) 民族革命黨(민족혁명당), 朝鮮民族戰線聯盟(조선민족전선연맹)을 통해 여러 독립운동세력을 하나의 정치, 군사전선으로 묶으려 함.

마. 제5단계 ― 조직적 무장항전

ㅇ(조선의용대) 武漢(우한)에서 조선의용대를 창설하고 중국의 항일전쟁과 연계하여 선전전, 정보활동, 전선지원 등 조직적인 항일무장활동을 전개함.

바. 제6단계 ― 임시정부와 광복군 참여

ㅇ(임정광복군) 重慶(충칭)에 남은 조선의용대 세력을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시키고 자신도 한국광복군 부사령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으로 활동함.

5. 약산로드 7000km 대장정 종합

가. 전체 흐름

ㅇ(대장정) 密陽(밀양)에서 형성된 항일의식은 吉林(지린)의 의열단 창단으로 구체화되었고, 北京(베이징), 上海(상하이)의 의열투쟁과 혁명이론 정립, 廣州(광저우)의 근대 군사교육, 南京(난징)의 군사간부 양성과 통일전선운동, 武漢(우한), 桂林(구이린)의 조선의용대 활동을 거쳐 重慶(충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 참여로 이어짐.

나. 핵심 변화

ㅇ(노선변화) 의열단 창단 → 암살, 폭파 의열투쟁 → 「朝鮮革命宣言(조선혁명선언)」을 통한 혁명이론 정립 → 黃埔軍官學校(황포군관학교) 군사교육 → 조선혁명간부학교 군사간부 양성 → 民族革命黨(민족혁명당), 朝鮮民族戰線聯盟(조선민족전선연맹)을 통한 통일전선 추진 → 조선의용대 창설 → 조선의용대 분화 → 한국광복군 참여 →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

다. 역사적의의

ㅇ(투쟁방식확대) 김원봉의 독립운동은 단순히 의열단의 암살, 폭파투쟁에 머무르지 않고 군사교육, 간부양성, 정당운동, 통일전선, 한중연합 항전, 임시정부와 광복군 참여로 끊임없이 활동방식을 확대해 간 과정이었음.

ㅇ(무장투쟁연속성) 의열단, 조선혁명간부학교, 조선의용대, 한국광복군으로 이어지는 김원봉의 활동은 조직의 명칭과 형태는 계속 변했지만 무장력을 갖춘 독립운동을 통해 일제 식민지배를 타도해야 한다는 기본방향에서는 일관성을 유지함.

ㅇ(통일전선한계) 김원봉은 여러 차례 독립운동세력의 통합을 추진하였으나 이념과 정치노선의 차이를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했으며, 조선의용대 역시 화북세력과 중경세력으로 분화됨. 따라서 그의 독립운동을 하나의 조직이 단계적으로 그대로 발전한 과정으로 단순화하기보다는 분열과 재편, 연합이 반복된 중국 관내 독립운동사의 흐름 속에서 보아야 함.

ㅇ(종합평가) 약산 김원봉의 1919~1945년 독립운동은 비밀결사 의열단에서 출발하여 군사교육과 정치조직, 통일전선, 조선의용대, 한국광복군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의 항일투쟁을 지속적으로 모색한 과정으로, 한국 무장독립운동사의 중요한 한 축을 형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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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로드 4000km - 대한민국 100년, 상하이에서 충칭까지 임시정부 투어가이드
김종훈 외 지음 / 필로소픽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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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로드 4000km』로 살펴본 대한민국 임시정부 26년 대장정
― 上海(상하이)에서 重慶(충칭)까지, 1919~1945

1. 전체 이동 흐름

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공식 이동경로

ㅇ(공식이동) 上海(상하이) → 杭州(항저우) → 鎭江(전장) → 長沙(창사) → 廣州(광저우) → 柳州(류저우) → 綦江(치장) → 重慶(충칭)

ㅇ 1919년 上海(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32년 윤봉길 의사 의거 이후 일제의 추적과 중일전쟁의 전화를 피해 중국 대륙을 이동하였으며, 1940년 重慶(충칭)에 최종 정착한 뒤 1945년 광복까지 독립운동을 계속함.

나. 『임정로드 4000km』 주요 관련거점

ㅇ(관련거점) 嘉興(자싱), 海鹽(하이옌), 南京(난징), 桂林(구이린) 등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공식 이전도시는 아니지만 임시정부 요인들의 피난과 독립운동 세력의 활동, 조선의용대 활동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주요 답사거점임.

2. 도시별 이동경로 및 주요 사적지

가. 제1기 ― 上海(상하이) 시대(1919~1932)

1) 上海(상하이) 【공식 이전도시, 임정로드 거점】

ㅇ(임시정부수립)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약 13년간 독립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한 출발점으로, 정치, 외교, 언론활동과 의열투쟁의 기반을 마련함.

ㅇ(주요사적)

* 瑞金二路(서금이로) 일대 :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기 활동지
* 馬當路(마당로) : 上海(상하이) 시기 마지막 임시정부 청사
* 永慶坊(영경방) : 김구와 가족 거주 관련 사적
* 元昌里(원창리) : 윤봉길 의거 직전 김구와 윤봉길의 마지막 만남 관련 사적
* 虹口公園(홍커우공원) :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거 현장
* 萬國公墓(만국공묘) : 독립운동가 관련 묘역

ㅇ(역사적의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정부조직과 독립운동체제를 확립하고 국제사회에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기 시작한 최초의 거점임.

나. 제2기 ― 피난과 고난의 장정(1932~1940)

1) 嘉興(자싱), 海鹽(하이옌) 【관련거점】

ㅇ(요인피난) 1932년 윤봉길 의거 이후 일제의 추적을 피해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들이 은신한 핵심 피난지역임.

ㅇ(주요사적)

* 日暉橋(일휘교) 일대 : 이동녕, 이시영, 엄항섭 등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의 피난 거주지
* 梅灣街(매만가) : 김구 피난처
* 南湖(남호) : 김구가 일제의 추적을 피해 배를 이용하여 이동했던 피난공간
* 海鹽(하이옌) 南北湖(남북호)
* 載靑別墅(재청별서) : 김구 은신 관련 사적

ㅇ(역사적의의) 임시정부 청사는 杭州(항저우)에 두면서도 주요 요인 상당수가 嘉興(자싱)·海鹽(하이옌) 일대에 분산 피신하여 독립운동의 명맥을 이어감.

2) 杭州(항저우) 【공식 이전도시·임정로드 거점】

ㅇ(피난정부) 上海(상하이)를 떠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처음 청사를 옮긴 도시로, 윤봉길 의거 이후 본격적인 이동시대가 시작됨.

ㅇ(주요사적)

* 淸泰第二旅舍(청태제2여사) : 上海(상하이) 탈출 직후 임시정부가 사용한 초기 사무공간
* 湖邊村(호변촌) : 대표적인 杭州(항저우) 임시정부 청사
* 西湖(서호) 일대 : 임시정부 요인들의 활동공간
* 한국독립당 관련 사적

ㅇ(역사적의의) 上海(상하이)라는 안정된 근거지를 상실한 뒤에도 정부조직을 유지하면서 독립운동을 지속한 피난정부 시대의 첫 거점임.

3) 鎭江(전장) 【공식 이전도시】

ㅇ(정부이동) 193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杭州(항저우)를 떠나 이동한 공식 이전지임.

ㅇ(조직유지) 임시정부 기관과 요인들이 분산된 상황에서도 정부조직을 유지하며 독립운동세력 재정비를 계속함.

ㅇ(역사적의의) 체류기간이나 남아 있는 사적의 규모는 다른 도시보다 크지 않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 공식 이동사에서 빠질 수 없는 거점임.

※ 『임정로드 4000km』에서는 독립된 장으로 비중 있게 다뤄지지 않으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공식 이동경로에는 포함됨.

4. 南京(난징) 【관련거점】

ㅇ(독립운동재편) 김구, 김원봉 등 여러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하면서 독립운동세력의 통합과 군사간부 양성이 이루어진 핵심지역임.

ㅇ(주요사적)

* 中央飯店(중앙반점) : 김구의 중국 국민정부 관계자 접촉 관련 사적
* 淮淸橋(회청교) 일대 : 김구 피난 관련 사적
* 金陵大學(금릉대학) : 독립운동가 활동 관련 사적
* 天寧寺(천녕사) :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관련 사적
* 南京(난징) 일대 김원봉·의열단 계열 활동지

ㅇ(역사적의의) 임시정부의 공식 이전도시는 아니지만 김구계열과 김원봉계열 독립운동의 흔적이 함께 남아 있는 중국 관내 독립운동사의 중요 거점임.

5) 長沙(창사) 【공식 이전도시·임정로드 거점】

ㅇ(정부이전) 1937년 중일전쟁 확대와 南京(난징) 함락에 따른 위협을 피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長沙(창사)로 이동함.

ㅇ(남목청사건) 1938년 5월 6일 楠木廳(남목청) 6호 조선혁명당 본부에서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의 통합을 논의하던 중 이운환(李雲煥)이 권총을 발사함.

ㅇ 현익철이 사망하고 김구·유동열이 중상을 입었으며 지청천도 부상을 입음. 김구는 湘雅醫院(상아의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고 생명을 건짐.

ㅇ(주요사적)

* 楠木廳(남목청) 6호 : 남목청 사건 현장
* 湘雅醫院(상아의원) : 김구 총상 치료지
* 長沙(창사)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 관련 사적

ㅇ(역사적의의) 독립운동세력 통합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내부의 심각한 갈등과 희생까지 겪었던 임시정부 이동기의 대표적인 시련의 현장임.

※ 남목청 사건의 발생일과 총격자의 이름은 자료에 따라 다르게 기록됨. 본문에서는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등에 기록된 1938년 5월 6일, 이운환(李雲煥)을 사용하였으나, 일부 자료에서는 사건일을 1938년 5월 7일, 총격자를 이운한(李雲漢)으로 기록하기도 함.

6) 廣州(광저우) 【공식 이전도시, 임정로드 거점】

ㅇ(전시피난) 일본군의 진격과 공습을 피해 長沙(창사)에서 廣州(광저우)로 이동하여 단기간 활동함.

ㅇ(주요사적)

* 東山柏園(동산백원) : 대한민국 임시정부 廣州(광저우) 청사
* 黃埔軍官學校(황포군관학교) : 김원봉을 비롯한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군사교육 관련 핵심 사적
* 東較場(동교장) : 중국 혁명운동 및 한국 독립운동 관련 역사공간

ㅇ(역사적의의) 전쟁확대로 중국 동부지역에서 활동하기 어려워진 임시정부가 華南(화남)지역으로 본격적으로 이동한 거점임.

7) 柳州(류저우) 【공식 이전도시, 임정로드 거점】

ㅇ(항일선전) 임시정부의 정치활동과 함께 청년 독립운동가들의 문화·선전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지역임.

ㅇ(주요사적)

* 樂群社(낙군사) : 임시정부 요인 숙소 및 활동 관련 사적
* 柳侯公園(유후공원) : 독립운동 관련 활동이 이루어진 장소

ㅇ(청년공작) 柳州(류저우)에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가 활동하며 연극·합창·벽보 등을 활용한 대중 항일선전활동을 전개함.

ㅇ(역사적의의) 정부의 정치활동과 함께 청년·문화예술을 활용한 대중적 항일선전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거점임.

8) 桂林(구이린) 【관련거점】

ㅇ(조선의용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공식 이전지는 아니지만 김원봉과 조선의용대 활동을 살펴보기 위해 중요한 독립운동 거점임.

ㅇ(주요사적)

* 七星公園(칠성공원) 일대 : 조선의용대 본부 및 활동 관련 사적

ㅇ(역사적의의) 『임정로드 4000km』에서 별도 장으로 다루고 있으며, 김구 중심의 임시정부 계열뿐 아니라 김원봉과 조선의용대 계열의 독립운동까지 함께 살펴볼 수 있는 지역임.

※ 桂林(구이린)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공식 이전도시는 아님.

9) 綦江(치장) 【공식 이전도시】

ㅇ(조직재정비) 重慶(충칭) 최종 정착을 앞두고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세력이 조직을 재정비하고 통합을 추진한 중요 거점임.

ㅇ(주요사적)

* 上升街(상승가) :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관련 사적
* 沱灣(타만) 일대 : 김구·이동녕 등 임시정부 요인들의 거주 관련 지역
* 瀛山賓館(영산빈관) : 독립운동진영 통합회의 관련 사적

ㅇ(세력통합) 독립운동 정당 및 단체의 통합노력이 계속되었으며, 이후 1940년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의 통합 한국독립당 결성으로 이어짐.

ㅇ(이동녕서거) 임시정부를 오랫동안 이끌어온 이동녕이 1940년 3월 綦江(치장)에서 서거함.

ㅇ(역사적의의) 장기간의 피난과 이동생활을 정리하면서 정부·정당·군사조직을 재정비해 重慶(충칭) 시대를 준비한 전환점임.

다. 제3기 ― 重慶(충칭) 시대(1940~1945)

1) 重慶(충칭) 【공식 이전도시·임정로드 최종거점】

ㅇ(최종정착) 1940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정착한 마지막 도시로, 1932년 이후 계속된 장기간의 이동생활을 끝내고 정부·정당·군사체제를 본격적으로 정비함.

가) 임시정부 청사

ㅇ(청사이동) 重慶(충칭) 정착 후에도 일본군 공습과 정부조직 확대 등에 따라 청사를 여러 차례 옮김.

楊柳街(양류가) → 石版街(석판가) → 吳師爺巷(오사야항) → 蓮花池(연화지)

ㅇ 蓮花池(연화지) 청사는 광복을 맞고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할 때까지 사용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임.

나) 한국광복군 창설

ㅇ(광복군창설)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직접 지휘하는 군사조직을 갖춤.

ㅇ(주요사적)

*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관련 사적
* 嘉陵賓館(가릉빈관) :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식 개최 관련 장소

다) 독립국가 건설준비

ㅇ(건국강령) 1941년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발표하여 광복 이후 수립할 국가의 정치·경제·교육제도와 三均主義(삼균주의)를 바탕으로 한 국가건설 방향을 제시함.

ㅇ(대일선전) 1941년 12월 10일 대일선전성명서를 발표하여 일본에 대한 전쟁을 공식 선언함.

ㅇ(군사통합) 1942년 조선의용대 일부가 한국광복군에 편입되면서 중국 관내 무장독립운동세력의 통합이 확대됨.

ㅇ(정부체제) 1944년 임시헌장 개정을 통해 주석·부주석 중심의 지도체제를 정비함.

라) 국내진공작전 준비

ㅇ(국내진공) 1945년 한국광복군은 미국 전략첩보기구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와 합작하여 국내 침투를 위한 훈련을 실시함.

ㅇ 광복군 요원들은 정보·무전·침투·파괴활동 등에 필요한 훈련을 받고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하였으나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하면서 실제 작전은 실행되지 못함.

마) 한인공동체

ㅇ(土橋한인촌) 土橋(토교) 일대에는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 등 많은 한국인이 집단 거주하며 피난지 속 한인공동체를 형성함.

ㅇ(역사적의의) 重慶(충칭)은 단순한 피난지가 아니라 정부·정당·군대를 정비하고 광복 후 국가건설계획과 국내진공작전까지 준비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26년 역사의 최종거점임.

3. 대한민국 임시정부 26년 대장정 종합

가. 공식 이동경로

ㅇ 上海(상하이) :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및 독립운동 기반 구축

ㅇ 杭州(항저우) : 윤봉길 의거 이후 피난정부 시대 시작

ㅇ 鎭江(전장) : 정부조직 유지 및 이동기 독립운동 지속

ㅇ 長沙(창사) : 독립운동세력 통합 추진과 楠木廳(남목청) 사건

ㅇ 廣州(광저우) : 중일전쟁 확대에 따른 華南(화남)지역 이동

ㅇ 柳州(류저우) : 항일선전 및 청년공작활동 전개

ㅇ 綦江(치장) : 독립운동세력 통합과 정부조직 재정비

ㅇ 重慶(충칭) : 한국광복군 창설, 건국강령 발표, 대일선전 및 국내진공작전 준비

나. 주요 관련거점

ㅇ 嘉興(자싱)·海鹽(하이옌) : 김구 및 임시정부 요인들의 피난·은신

ㅇ 南京(난징) : 독립운동세력 활동과 군사간부 양성

ㅇ 桂林(구이린) : 김원봉과 조선의용대 활동

다. 역사적의의

ㅇ(대장정의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중국 대륙 이동은 단순한 도피가 아니라 일제의 추격과 중일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도 정부의 법통과 조직을 유지하고, 독립운동세력을 통합하며, 무장독립전쟁과 광복 후 국가건설을 준비한 26년간의 독립국가 건설과정이었음.

ㅇ(핵심흐름) 정부수립 → 피난과 생존 → 조직재정비 → 세력통합 → 무장투쟁 → 건국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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