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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산로드 7000km - 의열단 100년, 약산 김원봉 추적기
김종훈 지음 / 필로소픽 / 2019년 8월
평점 :
『약산로드 7000km』로 살펴본 약산 김원봉과 무장독립투쟁 대장정
― 密陽(밀양)에서 重慶(충칭)까지, 독립운동기 1919~1945
1. 정리 범위 및 전체 흐름
가. 정리 범위
ㅇ(책의구성) 『약산로드 7000km』는 서울에서 출발하여 密陽(밀양), 吉林(지린), 北京(베이징), 上海(상하이), 南京(난징), 廣州(광저우), 武漢(우한), 桂林(구이린), 重慶(충칭)을 거쳐 平壤(평양)까지 김원봉과 그 동지들의 흔적을 따라가는 답사기임.
ㅇ(정리범위) 본 정리는 책 전체 가운데 약산 김원봉의 항일독립운동과 무장투쟁이 집중된 1919~1945년을 중심으로 하며, 密陽(밀양)은 독립운동의 출발 배경으로 포함하고 광복 이후 서울과 平壤(평양)의 행적은 본문에서 제외함.
ㅇ(주의사항) 김원봉은 정부기관처럼 한 방향으로 순차 이전한 것이 아니고 여러 도시를 오가며 활동하였으므로, 아래 경로는 정확한 일회성 이동경로가 아니라 주요 활동거점을 역사적 시간순으로 배열한 것임.
나. 주요 활동거점의 역사적 흐름
ㅇ(주요거점) 密陽(밀양) → 吉林(지린) → 北京(베이징), 上海(상하이) → 廣州(광저우) → 南京(난징) → 武漢(우한), 漢口(한커우) → 桂林(구이린) → 綦江(치장), 重慶(충칭)
다. 독립운동 노선의 변화
ㅇ(의열투쟁) 1919년 의열단을 조직하여 일제 식민통치기관과 주요 인물을 직접 공격하는 암살, 폭파 중심의 의열투쟁을 전개함.
ㅇ(혁명이론) 1923년 신채호가 작성한 「朝鮮革命宣言(조선혁명선언)」을 통해 의열단의 투쟁목표와 민중 직접혁명 노선을 이론적으로 정립함.
ㅇ(군사교육) 1926년 黃埔軍官學校(황포군관학교)에서 근대 군사교육을 받은 뒤 소수 인원의 개별 의거를 넘어 조직적인 군사운동과 간부양성으로 활동영역을 확대함.
ㅇ(간부양성) 1932년 이후 南京(난징)에서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운영하여 장기적인 무장독립전쟁을 담당할 군사, 정치간부를 양성함.
ㅇ(통일전선) 1935년 民族革命黨(민족혁명당), 1937년 朝鮮民族戰線聯盟(조선민족전선연맹)을 통해 여러 독립운동세력을 묶는 통일전선운동을 추진함.
ㅇ(무장부대) 1938년 조선의용대를 창설하여 중국군과 연계한 항일선전, 적군와해, 정보수집 등 조직적인 전선활동을 전개함.
ㅇ(임정참여) 1942년 이후 重慶(충칭)에 남은 조선의용대 세력이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고 김원봉도 한국광복군 부사령관,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으로 활동함.
2. 주요 거점별 활동 및 역사적 의의
가. 제1기 ― 의열단 창단과 의열투쟁의 확립(1919~1925)
1) 密陽(밀양) 【출발점】
ㅇ(독립운동배경) 약산 김원봉의 고향으로 김원봉뿐 아니라 윤세주 등 의열단과 조선의용대에서 활동한 여러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지역임.
ㅇ(주요사적) 현재 김원봉과 의열단의 활동을 기리는 의열기념관이 조성되어 있으며 김원봉이 다닌 밀양보통학교, 동화중학교 관련 흔적과 독립운동가 박차정 묘 등이 남아 있음.
ㅇ(역사적의의) 김원봉의 성장과 항일의식 형성뿐 아니라 훗날 의열단에서 함께 활동한 동지들과의 인적 기반이 형성된 출발점이라는 의미를 가짐.
2) 吉林(지린) 【의열단 창립지】
ㅇ(의열단창단) 1919년 11월 9일 밤부터 10일 새벽 사이 김원봉을 중심으로 한 청년 독립운동가들이 吉林省(지린성) 吉林市(지린시)에서 의열단을 결성함.
ㅇ(창립목표) 의열단은 일제 식민통치기관 파괴와 일제 고관, 군부 수뇌, 친일세력 등에 대한 직접투쟁을 주요 행동방식으로 설정함.
ㅇ(단체명) 의열단이라는 명칭에는 “천하의 정의의 사를 맹렬히 실행한다”는 취지가 담겨 있었음.
ㅇ(주요사적) 『약산로드 7000km』에서는 吉林市(지린시) 光華路(광화로) 57호 일대를 의열단 창립 관련 장소로 답사함. 당시 기록에는 吉林(지린) 巴虎門(파호문) 밖 중국인 집에서 결성한 것으로 전하는 자료도 있음.
ㅇ(자료차이) 의열단 창립단원 수는 자료와 연구에 따라 13명 또는 10명으로 다르게 정리됨. 전통적으로는 13명설이 널리 알려졌으나 최근 연구와 밀양 의열기념관에서는 10명으로 정리하기도 함.
ㅇ(역사적의의) 1920년대 국내외에서 일제 식민통치기관과 주요 인물을 직접 공격한 대표적인 의열투쟁 조직이 탄생한 곳임.
3) 北京(베이징), 上海(상하이) 【의열단 활동의 중심】
가) 北京(베이징)
ㅇ(본부활동) 의열단은 吉林(지린)을 떠난 뒤 北京(베이징)을 주요 활동근거지로 삼았으며, 1922년 말 일본 측 정보자료에는 外交部大街(외교부대가)에 의열단 통신처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됨.
ㅇ(신채호교류) 김원봉은 류자명 등의 연결을 통해 신채호와 교류하였으며, 의열단의 독립운동 이념과 투쟁방향을 체계화할 선언문 작성을 요청함.
ㅇ(혁명선언) 신채호는 1922년 말부터 집필하여 1923년 1월 「朝鮮革命宣言(조선혁명선언)」을 완성함.
ㅇ(선언내용) 「朝鮮革命宣言(조선혁명선언)」은 외교론과 준비론만으로는 독립을 달성할 수 없다고 비판하고 민중이 직접 폭력혁명을 통해 일제의 식민지배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의열단의 혁명이론을 제시함.
나) 上海(상하이)
ㅇ(활동거점) 上海(상하이)는 北京(베이징)과 함께 의열단의 연락, 자금과 무기 조달, 거사 준비에 중요한 역할을 한 국제도시였음.
ㅇ(황포탄의거) 1922년 김익상, 오성륜, 이종암 등이 上海(상하이) 黃浦灘(황포탄)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 암살을 시도함.
ㅇ(국제적활동)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비롯한 여러 독립운동단체와 중국 혁명세력이 활동하던 上海(상하이)는 의열단이 국제적 연락망과 활동공간을 확보하는 데 중요한 지역이었음.
다) 의열단의 대표 의거
ㅇ(부산의거) 1920년 박재혁이 釜山(부산)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함.
ㅇ(밀양의거) 1920년 최수봉이 密陽(밀양)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함.
ㅇ(총독부의거) 1921년 김익상이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함.
ㅇ(황포탄의거) 1922년 김익상, 오성륜, 이종암이 上海(상하이) 黃浦灘(황포탄)에서 다나카 기이치 암살을 시도함.
ㅇ(종로의거) 1923년 김상옥이 鍾路(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뒤 일본 경찰과 시가전을 벌임.
ㅇ(니주바시의거) 1924년 김지섭이 일본 東京(도쿄) 二重橋(니주바시)에 폭탄을 투척함.
ㅇ(동척의거) 1926년 나석주가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식산은행을 공격함.
ㅇ(역사적의의) 의열단은 일제 식민통치의 핵심기관과 인물을 직접 공격함으로써 국내외에 지속적인 무장저항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었음.
나. 제2기 ― 군사교육과 통일전선으로의 확대(1926~1937)
1) 廣州(광저우) 【군사노선 전환의 출발점】
ㅇ(황포군관학교) 김원봉은 1926년 3월 동지들과 함께 黃埔軍官學校(황포군관학교) 제4기에 입교하여 같은 해 10월 졸업함.
ㅇ(군사교육) 黃埔軍官學校(황포군관학교)는 당시 중국 국민혁명의 핵심 군사교육기관으로, 김원봉은 이곳에서 정규 군사교육과 정치교육을 받음.
ㅇ(노선확대) 황포군관학교 입교는 소수 정예 의열단원의 개별 의거에 의존하던 방식에서 대규모 조직과 군사간부를 양성하여 장기적인 독립전쟁을 준비하는 방향으로 활동노선을 넓히는 중요한 계기가 됨.
ㅇ(주요사적) 黃埔軍官學校(황포군관학교) 옛터는 김원봉의 군사노선 전환을 보여주는 핵심 사적이며, 廣州起義烈士陵園(광저우기의열사능원)에는 1927년 광저우기의와 관련하여 희생된 한국인 혁명가들의 흔적도 남아 있음.
ㅇ(역사적의의) 廣州(광저우)는 1938년 이후 조선의용대 활동지가 되기 이전부터 김원봉이 근대 군사교육을 받고 조직적인 무장투쟁을 구상하게 된 핵심 거점임.
2) 南京(난징) 【군사간부 양성과 통일전선의 중심】
가) 조선혁명간부학교
ㅇ(학교설립) 김원봉과 의열단은 중국 국민정부의 지원을 받아 1932년 南京(난징)에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전쟁을 담당할 군사, 정치간부 양성에 착수함.
ㅇ(제1기) 1932년 10월부터 湯山(탕산) 동쪽 善祠廟(선사묘) 일대에서 교육을 실시하여 26명을 배출함. 시인 이육사가 제1기생으로 참여함.
ㅇ(제2기) 江寧鎭(강녕진) 曾祖寺(증조사) 일대에서 교육하여 55명을 배출함.
ㅇ(제3기) 上方鎭(상방진) 天寧寺(천녕사)에서 교육하여 44명을 배출함.
ㅇ(교육성과) 1935년까지 3기에 걸쳐 총 125명의 군사, 정치간부를 배출함.
ㅇ(역사적의의) 개인 의거 중심의 투쟁을 넘어 장래 독립전쟁에 필요한 인적 기반을 직접 양성했다는 점에서 김원봉의 독립운동 노선이 크게 확대된 시기임.
나) 民族革命黨(민족혁명당) 결성
ㅇ(정당통합) 1935년 7월 5일 南京(난징)에서 의열단, 한국독립당, 신한독립당, 조선혁명당, 대한인독립당 등 5개 독립운동단체가 참여하여 民族革命黨(민족혁명당)을 결성함.
ㅇ(김원봉역할) 김원봉과 의열단 계열은 民族革命黨(민족혁명당)의 핵심 세력을 이루며 의열투쟁과 군사교육을 넘어 정치적 통일전선 구축을 시도함.
ㅇ(주요사적) 胡家花園(호가화원)은 民族革命黨(민족혁명당) 본부가 자리하고 김원봉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활동했던 주요 장소임.
다) 朝鮮民族戰線聯盟(조선민족전선연맹)
ㅇ(연맹결성) 民族革命黨(민족혁명당)에서 일부 세력이 이탈한 뒤 김원봉 계열은 1937년 南京(난징)에서 朝鮮民族戰線聯盟(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함.
ㅇ(통일전선) 여러 좌파계열 독립운동단체를 결집시켜 중국의 항일전쟁과 연계한 한중 공동항전을 준비함.
ㅇ(역사적의의) 南京(난징) 시기는 김원봉의 활동이 의열단이라는 비밀결사에서 군사교육기관, 정당, 통일전선조직으로 단계적으로 확대된 시기임.
다. 제3기 ― 조선의용대 창설과 한중연합 항전(1938~1942)
1) 武漢(우한), 漢口(한커우) 【조선의용대 창설지】
ㅇ(조선의용대창설) 1938년 10월 10일 漢口(한커우) 中華基督敎靑年會(중화기독교청년회)에서 조선의용대가 창설됨.
ㅇ(조직성격) 조선의용대는 중국 관내에서 결성된 최초의 한인 무장부대로, 중국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정치부의 지휘와 지원 아래 활동함.
ㅇ(표현주의) 조선의용대를 독립된 국가의 정규군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으며, 중국군과 협력하여 활동한 조직적인 한인 항일무장부대로 보는 것이 타당함.
ㅇ(주요임무) 일본군 포로 심문, 일본군을 대상으로 한 항일, 반전 선전, 중국 민중 대상 항일선전, 정보수집, 전선지원 등을 수행함.
ㅇ(주요사적) 당시 결성식이 열린 中華基督敎靑年會(중화기독교청년회) 건물은 현재 남아 있지 않으며, 현재의 漢口(한커우) 中山大道(중산대도), 黎黃陂路(리황피로) 교차지역 일대가 관련 장소로 파악됨.
ㅇ(역사적의의) 김원봉의 투쟁이 소규모 의열활동과 군사간부 양성 단계를 넘어 실제 전선에서 중국군과 함께 활동하는 조직적 무장투쟁으로 발전한 전환점임.
2) 桂林(구이린) 【조선의용대 본부와 항일선전활동】
ㅇ(본부이동) 1938년 武漢(우한) 함락 이후 조선의용대 본부는 桂林(구이린)으로 이동하여 활동을 계속함.
ㅇ(선전활동) 조선의용대는 일본군과 조선인 병사들을 대상으로 한 항일, 반전 선전활동, 중국 민중을 대상으로 한 항전선전, 정보수집과 전선지원 등을 전개함.
ㅇ(활동거점) 七星公園(칠성공원) 일대 등에는 조선의용대 활동과 관련한 흔적이 남아 있으며 『약산로드 7000km』에서도 桂林(구이린)을 주요 답사거점으로 다룸.
ㅇ(역사적의의) 조선의용대는 단순한 전투부대가 아니라 언어능력과 선전역량을 활용하여 일본군의 전투의지를 약화시키고 중국의 항일전쟁을 지원한 특수한 성격의 무장조직이었음.
3) 綦江(치장) 【독립운동세력 통합 시도】
ㅇ(공개통신) 1939년 5월 김구와 김원봉은 공동명의로 「동지, 동포 제군에게 보내는 공개통신」을 발표하여 독립운동세력의 통합을 촉구함.
ㅇ(7당통일회의) 1939년 8월 綦江(치장)에서 김구, 김원봉 계열을 포함한 독립운동 정당과 단체들이 7당통일회의를 열어 단일정당 결성을 논의함.
ㅇ(통합실패) 통합논의는 이념과 조직노선의 차이로 최종적인 단일정당 결성에는 이르지 못함.
ㅇ(역사적의의) 김구와 김원봉이 서로 다른 정치노선에도 불구하고 항일전선 통합을 위해 직접 협력한 중요한 과정으로, 이후 重慶(충칭)에서 이루어질 임시정부 참여와 광복군 합류의 전단계라는 의미를 가짐.
4) 重慶(충칭) 【조선의용대의 분화】
ㅇ(본부이동) 조선의용대 본부는 桂林(구이린)을 거쳐 1940년 重慶(충칭)으로 이동함.
ㅇ(북상이동) 조선의용대 내부에서는 일본군과 직접 싸우기 위해 華北(화북)지역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요구가 커졌고, 1940년 말부터 1941년 사이 다수의 대원들이 黃河(황허)를 넘어 太行山(타이항산) 일대로 이동함.
ㅇ(화북지대) 華北(화북)으로 이동한 주력은 1941년 7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개편되었으며 중국공산당계 팔로군과 연계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벌임.
ㅇ(조선의용군) 화북의 조선의용대 세력은 1942년 조선독립동맹 산하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되어 重慶(충칭)의 김원봉 계열과는 별도의 무장투쟁 노선을 이어감.
ㅇ(구분필요) 따라서 “1942년 조선의용대 전체가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었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음. 화북으로 이동한 주력은 조선의용군으로 이어졌으며, 重慶(충칭)에 남아 있던 김원봉 계열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으로 편입됨.
라. 제4기 ― 임시정부 참여와 한국광복군 합류(1942~1945)
1) 重慶(충칭) 【독립운동세력 연합의 최종 거점】
가) 한국광복군 편입
ㅇ(편입결정) 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중국 국민정부의 협의를 거쳐 重慶(충칭)에 남아 있던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에 편입됨.
ㅇ(제1지대) 조선의용대 잔류세력은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개편되었으며 김원봉이 제1지대장을 맡음.
ㅇ(부사령관) 김원봉은 1942년 한국광복군 부사령관에 임명되어 임시정부 계열 무장세력과 함께 대일항전을 준비함.
ㅇ(역사적의의) 이는 조선의용대 전체의 통합이 아니라 重慶(충칭)에 남은 김원봉 계열 무장세력이 한국광복군에 합류한 것으로 이해해야 함.
나)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여
ㅇ(정치참여) 김원봉과 조선민족혁명당 계열은 1942년을 전후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에 참여하면서 오랫동안 분열되어 있던 독립운동세력의 협력범위를 넓힘.
ㅇ(군무부장) 김원봉은 194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에 취임하여 임시정부의 군사업무를 담당함.
ㅇ(직책구분) 따라서 김원봉이 1942년부터 곧바로 군무부장을 맡았다고 서술하면 부정확하며, 한국광복군 부사령관은 1942년, 임시정부 군무부장은 1944년으로 구분해야 함.
다) 박차정과 重慶(충칭)
ㅇ(동지이자배우자) 박차정은 김원봉의 배우자이자 독립운동가로 의열단, 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 활동에 참여함.
ㅇ(순국) 박차정은 오랜 독립운동과 병고 끝에 1944년 重慶(충칭)에서 생을 마침.
ㅇ(주요사적) 『약산로드 7000km』에서는 박차정의 순국지이자 김원봉의 重慶(충칭) 거주 관련 장소를 중요한 답사대상으로 다룸.
라) 광복까지의 활동
ㅇ(연합투쟁) 김원봉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 체제 안에서 광복군의 확대와 대일항전을 위한 활동을 계속함.
ㅇ(광복) 1945년 8월 일본의 패망으로 26년에 걸친 중국 대륙에서의 김원봉의 항일독립운동은 일단락됨.
ㅇ(역사적의의) 重慶(충칭)은 의열단 창단 이후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온 독립운동세력이 완전한 정치적 일치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일본의 패망이라는 공동목표를 위해 협력한 김원봉 독립운동의 마지막 중국 거점임.
3. 『약산로드 7000km』에서 함께 보아야 할 주요 인물
가. 윤세주
ㅇ(평생동지) 김원봉과 같은 密陽(밀양) 출신으로 의열단 창립에 참여하고 조선의용대와 화북지역 항일투쟁까지 함께한 핵심 동지임.
ㅇ(최후) 華北(화북)으로 이동하여 太行山(타이항산) 일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다 1942년 전사함.
나. 신채호
ㅇ(혁명이론) 김원봉의 요청을 받아 1923년 「朝鮮革命宣言(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하여 의열단의 무장혁명노선을 사상적으로 정립함.
다. 류자명
ㅇ(연결자) 의열단의 핵심 이론가이자 활동가로 김원봉과 신채호를 연결하고 「朝鮮革命宣言(조선혁명선언)」 작성과 의열단의 사상정립에 중요한 역할을 함.
라. 이육사
ㅇ(독립운동가) 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의열단계열 독립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932년 南京(난징) 조선혁명간부학교 제1기생으로 군사교육을 받음.
마. 박차정
ㅇ(무장독립운동) 김원봉의 배우자라는 위치에 한정되지 않고 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에서 직접 활동한 독립운동가로 여성 독립운동사의 중요한 인물임.
4. 약산 김원봉의 독립운동 노선 변화
가. 제1단계 ― 의열투쟁
ㅇ(의열단활동) 吉林(지린)에서 의열단을 창단하고 일제 식민통치기관과 주요 인물을 직접 공격하는 암살, 폭파투쟁을 전개함.
나. 제2단계 ― 혁명이론 정립
ㅇ(혁명선언) 北京(베이징)에서 신채호와 연계하여 「朝鮮革命宣言(조선혁명선언)」을 마련하고 의열투쟁을 민중혁명론으로 이론화함.
다. 제3단계 ― 군사교육과 간부양성
ㅇ(군사간부) 廣州(광저우) 黃埔軍官學校(황포군관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南京(난징) 조선혁명간부학교를 통해 독립전쟁을 담당할 군사, 정치간부를 직접 양성함.
라. 제4단계 ― 정치조직과 통일전선
ㅇ(통일전선) 民族革命黨(민족혁명당), 朝鮮民族戰線聯盟(조선민족전선연맹)을 통해 여러 독립운동세력을 하나의 정치, 군사전선으로 묶으려 함.
마. 제5단계 ― 조직적 무장항전
ㅇ(조선의용대) 武漢(우한)에서 조선의용대를 창설하고 중국의 항일전쟁과 연계하여 선전전, 정보활동, 전선지원 등 조직적인 항일무장활동을 전개함.
바. 제6단계 ― 임시정부와 광복군 참여
ㅇ(임정광복군) 重慶(충칭)에 남은 조선의용대 세력을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시키고 자신도 한국광복군 부사령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으로 활동함.
5. 약산로드 7000km 대장정 종합
가. 전체 흐름
ㅇ(대장정) 密陽(밀양)에서 형성된 항일의식은 吉林(지린)의 의열단 창단으로 구체화되었고, 北京(베이징), 上海(상하이)의 의열투쟁과 혁명이론 정립, 廣州(광저우)의 근대 군사교육, 南京(난징)의 군사간부 양성과 통일전선운동, 武漢(우한), 桂林(구이린)의 조선의용대 활동을 거쳐 重慶(충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 참여로 이어짐.
나. 핵심 변화
ㅇ(노선변화) 의열단 창단 → 암살, 폭파 의열투쟁 → 「朝鮮革命宣言(조선혁명선언)」을 통한 혁명이론 정립 → 黃埔軍官學校(황포군관학교) 군사교육 → 조선혁명간부학교 군사간부 양성 → 民族革命黨(민족혁명당), 朝鮮民族戰線聯盟(조선민족전선연맹)을 통한 통일전선 추진 → 조선의용대 창설 → 조선의용대 분화 → 한국광복군 참여 →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
다. 역사적의의
ㅇ(투쟁방식확대) 김원봉의 독립운동은 단순히 의열단의 암살, 폭파투쟁에 머무르지 않고 군사교육, 간부양성, 정당운동, 통일전선, 한중연합 항전, 임시정부와 광복군 참여로 끊임없이 활동방식을 확대해 간 과정이었음.
ㅇ(무장투쟁연속성) 의열단, 조선혁명간부학교, 조선의용대, 한국광복군으로 이어지는 김원봉의 활동은 조직의 명칭과 형태는 계속 변했지만 무장력을 갖춘 독립운동을 통해 일제 식민지배를 타도해야 한다는 기본방향에서는 일관성을 유지함.
ㅇ(통일전선한계) 김원봉은 여러 차례 독립운동세력의 통합을 추진하였으나 이념과 정치노선의 차이를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했으며, 조선의용대 역시 화북세력과 중경세력으로 분화됨. 따라서 그의 독립운동을 하나의 조직이 단계적으로 그대로 발전한 과정으로 단순화하기보다는 분열과 재편, 연합이 반복된 중국 관내 독립운동사의 흐름 속에서 보아야 함.
ㅇ(종합평가) 약산 김원봉의 1919~1945년 독립운동은 비밀결사 의열단에서 출발하여 군사교육과 정치조직, 통일전선, 조선의용대, 한국광복군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의 항일투쟁을 지속적으로 모색한 과정으로, 한국 무장독립운동사의 중요한 한 축을 형성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