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갖지 못한 과거를 안타까워하는 마음은 술 한 잔에 털어버리자고 계속해서 다짐한다. 내 것이 아닌 과거보다는 눈앞의 소주와 돼지갈비가 더 좋으니까.

경상도 집에서 꿋꿋하게 자라나 경상도집에서 미친 듯이 취해본 K-장녀란 이 정도 고집은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얗던 얼굴이 새빨개진 채 "쟤가 그럴 리 없다"고 하던 내 첫사랑이여, 그럴 리 없기는 뭐가 없어. 나는 울컥해서 첫사랑을 한 대 쳐서 울려버렸다.

보통의 해장은 술의 흔적을 지우는 데만 급급하지만, 진정한 해장은 술을 다시 원하게 만든다. 술이 있어야 해장도 할 수 있고, 해장을 해야 술도 다시 마실 수 있는 법이니까. 이것이 가능할 때, 주정뱅이들은 현실에서 탈출해 2차원의 이상향으로 진입한다. 한 면은 음주, 다른 한 면은 해장이라고 쓰인 뫼비우스의 띠다.

아아. 그곳은 칼국숫집이었으나 제게는 칼국술집이었습니다.

한라산을 좋아한다. 오를 수 있는 한라산이 아니라 마실 수 있는 한라산 쪽이다.

투명하게 비치는 병에 담긴 소주는 한라산 백록담까진 아니어도 그 언저리의 기운 정도는 담긴 영험한 약수 같다. 괜히 신선하게 느껴지는 기분은 덤이다.

한라산이 맛있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한라산을 팔 것.

둘째, 제주도와 관련된 안주를 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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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꾸 잔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다가 내가 뻗게 될 줄도 모르고.

그저 이제는 술을 마시러 갈 때 굽이 높은 신을 신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는다.

주거니 받거니 잔을 부딪치는 횟수와 취하는 리듬도 중요하다. 그 누구도 취기에서 낙오되지 않는 술자리를 공유해본 사람만이, 그렇게 같은 흐름으로 함께 취해본 사람만이 술친구라는 지위를 유지한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상대의 만취를 겪은 뒤에도 계속해서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끔찍한 꼴을 또 볼지언정 다시 잔을 부딪쳐보자는 감정이 비로소 술친구라는 단어를 완성해낸다.

물론 친한 친구 사이에도 적당한 선을 지키는 게 중요하듯 손님은 민폐를 끼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열심히 한다고 잘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지 않나. 나는 술과 술집을 사랑하는 것과는 무관하게 자꾸만 술집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데 일조하곤 한다. 그럼에도 그런 나에게 다시 술잔을 쥐여주는 사람이 바로 술집의 사장님이다!

"미안하다고 말하지 마. 그럼 다음에 또 그렇게 못 마시잖아."

302호를 다녀온 다음 날이면, 나는 고심하다 이렇게 메시지를 보낸다.

- 사장님, 저 두 발로 나갔나요?

적어도 직립보행이 가능한 인간의 모습이었으면 좋겠는데… 나이가 들어서도 두 발로 걷는다는 것에 기쁨을 느낄 수 있다니….

김태윤 씨는 좋은 술친구라는 사실이다. 함께 마셔주는 사람, 내가 부끄럽지 않게 같이 취해주는 존재. 언제라도 다음 잔을 부딪칠 든든하고 포근한 품을 가진 술친구!

온갖 술집을 전전하는 나지만, 인생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아빠와는 한 번도 살갑게 술잔을 부딪쳐본 적이 없다. 어른이 돼서 함께 술집에 간 적도 없을뿐더러, 아빠와 내가 술을 마신다는 것 자체가 잘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때의 난, 왜 남자들과는 한 테이블에 앉아서 밥을 먹지 못하고 반찬도 다른지, 왜 남자들은 일을 하지 않는지, 제사를 지내러 갔는데 난 왜 절조차 할 수 없는 건지 의문조차 가지지 않았다. 그때 그곳에선 그런 일들이 자연스러웠으니까.

누군가 밥을 준비하고 차리고 치울 동안, 아빠는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그러니까 정말 자리에 앉아만 있었다는 뜻이다!

내가 아는 경상도란 지역의 장점으로 가득하다. 시원시원하게 터지는 사투리처럼 호쾌하다. 쿨한 것을 넘어 과감한 구석마저 있다.

우리 집이 을지로의 경상도집을 반만 닮았어도 좋았을 텐데. 살아 있는 사람을, 여성을, 가족이란 이름 아래 억압하고 착취하지 않는 집에서 자랐다면 나는 조금은 다른 사람이 되었을까?

나는 갖지 못한 과거를 안타까워하는 마음은 술 한 잔에 털어버리자고 계속해서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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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라고 해서 밥솥 안에 늘 밥이 있을 리 없었다. 밥이 있다고 해서 없던 반찬이 갑자기 생겨날 리 없었다.

집밥이 그립다는 건 그 밥을 해주는 누군가가 있고, 그 누군가의 온기를 느낄 수 있단 말이었다.

내가 모르는 어떤 집 안의 냄새까지 우려진 듯한 사골국 같은 것들이었다. 재료는 사람에 따라 다른 맛을 낸다는 걸, 같은 이름이 붙은 반찬이어도 무한히 달라질 수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하수는 답변이 채택될 때마다 내공을 쌓으며 고수로 성장하고, 나아가 영웅, 지존, 초인이 된 뒤 마침내 인간의 영역을 벗어나 신이 된다.

그렇게 신이 되려는 중생들과 신에게 답을 구하는 중생들로 가득한 이 사이트에서, 나 역시 내공을 쌓는 한 (초)중생이었다.

"우리 포대포에서 볼까요?"

 

‘포대포’에 가자는 말은, 밥 한 끼보단 술 한잔하자는 뜻이다.

이제 소주다. 흔히 볼 수 있는 소주가 아니다. 무려 17년산이다. 라벨에 네임펜으로 ‘17’이라고 덧쓰여 있고, 모 브랜드 피자집 로고가 박힌 빨간 리본을 병목에 둘러 위스키 흉내를 내고 있는 소주다. 지나치게 어설퍼서 어처구니없는 모양새지만 기꺼이 속아주기로 한다. 술값을 걱정하지 않고 여유롭게 17년산 하나 달라고 외칠 수 있는 곳은 여기뿐일 테니까.

지식iN에서 나의 답변을 받은 사람들도 사실은 나에게 속아주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 앞에서 도망치고 싶은 나는 황급히 17년산 소주를 가지러 일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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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트로의 쿠바 - 체 게바라와 함께 한 혁명의 현장
그레고리 토지안 지음, 홍민표 옮김, 오스왈도 살라스.로베르토 살라스 사진 / 황매(푸른바람) / 2005년 12월
평점 :
품절


역사가 나를 자유케 하리라.

피델 알레잔(한)드로 카스트로 루스,
Fidel Castro, Fidel Alejandro Castro Ruz
쿠바의 국부, 정치가, 변호사, 혁명가

출생: 1926. 8. 13. 🇨🇺
사망: 2016. 11. 25.
신장: 191cm
가족: 동생  라울 카스트로
학력: 아바나 대학교 법학사
1943~44. 쿠바 최고의 만능 운동선수 선정

1959.2~2008.2. 제16대 쿠바 총리
1976~2008.2.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

어록

너희들이 지금 온갖 더러운 모함으로 나를 더럽혀도 그것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것도 아니며,
1. 역사가 나의 무죄를 증명하리라.
2. 역사가 나를 자유케 하리라.
3.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

혁명은 패배자의 침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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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말 카스트로는 쿠바의 동쪽 끝에서 나와 섬을 가로질러 천천히 서쪽으로 진격했다. 카스트로는 1953년 몬카타에서그가 마주했던 압도적인 적과는 너무나 대비되게 총 한 방 쏘지않고도 정부군 진지들이 게릴라들에게 투항하는 것을 보았다.
반군은 10배로 늘었다. 체 게바라의 유명한 산타클라라 해방에이르러서는 그 숫자가 5만 명에 달했다. - P93

1959년 1월 1일 새벽 2시, 바티스타가 도미니카공화국으로 달아나자 카밀로 시엔푸에고스와 그의 군대는 라스 빌라스에서 아바나로 진격하여 캠프 콜롬비아에 위치한 바티스타의 사령부를장악했다. 체 게바라는 근처의 라 카바나 요새를 확보했다. 반군은 승리했다. - P93

카스트로는 1월 2일 산티아고 데쿠바에서 첫번째 승리의 연설을 했다. 그는 "혁명은 지금부터"라고 말했다. 그는 사방에서들려오는 열광적인 갈채를 만끽하며 쿠바 전역에 걸친 6백 마일의 행진을 시작했다. - P93

카스트로는 즉시 마누엘 우루티아Manuel Urrutia를 임시 대통령으로 임명하긴 했지만 5개월 후 그를 그 자리에서 끌어내렸다.
누가 진짜 쿠바의 지도자인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장‘은 바로 피델 카스트로였다. - P93

"애국이 아니면 죽음을Patria o Muerte." - P96

그들의 머리카락과 수염이 그렇게 긴 것은 오랫동안 산속에있었기 때문이다. 산속 생활에서 면도는 너무나 고통스런 일이었다. 긴 머리는 강렬한 햇빛과 벌레, 모기를 막아주었다. 그때 처음으로 긴 머리와 수염이저항의 상징으로 등장했다. - P119

60년대 미국의 대학생들과 히피들은 쿠바인들로부터 그것을따왔다. - P69

모든 적들에 맞서서 피델 카스트로는 오랜 세월 동안 쿠바 ‘최대의 지도자‘로 남아 있다. 명석하고 카리스마를 가진 사나이,ㅈ웅변과 여론 조종의 달인으로서  카스트로는 조그만 섬나라를 언론과 역사의 최전선에서 머물게 했다. 그런 가운데 그는 현대의가장 일관된 관심을 끄는 세계적 지도자가 되었다. 이 말은 그가가장 보편적으로 존경받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 P130

헤밍웨이와 함께, 사람들과 함께
1960년 바르로벤토
왼쪽의 사진은 1960년 피델 카스로와 어네스트 헤밍웨이가 공식적으로 만났을 때 찍은 사진이다.
이듬해 헤밍웨이는 미국에서 자살한다. 헤밍웨이의 작품들이 피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피델이 <누구를 위해 좋은 울리나>를 통해 게릴라전에 대해 배웠다고 한 말은 유명하다.
이 사진을 찍기 전 20년 동안 헤밍웨이는 간간히 쿠바에 살았는데그와 피델이 만난 적이 없다는 것은 이상하다.

솔직히 내가 보기에 피델은 대체로 물질적인 것과는 매우 동떨어져 있었다. 그는 내가 아는 한 아주 단순하게 살았다.

게바라는 동시에 피델 카스트로가 마르크스-레닌주의식 정부를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은 결국 체게바라의 영향력을 감소시켰다. 카스트로의 정부가 점점 소비에트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통제를 받게 되면서 쿠바 시민들은 체게바라가 미숙하고 관료적이라고 생각했고, 그는 이에 격분했다. 그는 오직 광범위한 게릴라전을 통해서만 가능한 제국주의와의 직접적인 투쟁을 갈망했다. - P163

그 누구도, 카스트로 체제를 경멸하는 쿠바 망명자들조차도게바라처럼 살았던 사람은 없다. 그는 자신의 원칙을 절대로 굽히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다. - P164

체게바라와 그의 딸
1960년 아바나, 체게바라와 4살 된 그의 첫딸 일디타. 딸은 체와무척 닮았다. 일디타는 1995년에 죽었는데, 아버지가 죽은 나이와 같은 39살이었다. 일디타의 왼손을 잡고 있는 군인은 안토니오 누네즈지메네스로 카스트로의 측근이다. - P167

그리스도를 닮은 체
1963년 아바나, 체게바라를 찍은 강렬한 사진 가운데 하나다. 여기서 그는 어떤 사람들이 말했듯이 거의 그리스도처럼 보인다. - P177

체 게바라를 위한추도 벽화
1967년 10월 17일. 1967년 10월 9일 볼리비아에서 체는 추격당했고, 죽었다.
당시 쿠바에 있던 사람들은그것을 몰랐다. 한 주가 지난 후그가 죽었다는 소문이 아바나에돌기 시작했다. 
나는 신문사에가서 사실을 확인했다. 카스트로는 24시간 후 텔레비전에 나와서 모든 이에게 그사실을 밝혔다. - P182

케네디 행정부의 가장 커다란 재앙은 말할 필요도 없이 피그만 침공의 실패다. 이 침공 작전은 미국 정부의 훈련과 무기지원을 받은 약 1,500명의 쿠바 망명자를 주축으로 민주당 출신 대통령이 취임한 뒤 3개월 후인 1961년 초, 피델 카스트로가 집권하고 있던 쿠바를 공격한 사건이다. 카스트로를 타도하려는 이 시도는 미사일 위기에 불을 당겼고 이것은 미국과 소련 사이의 냉전을 극에 달하게 만들었다. - P187

공산주의를 환영하다
1974년 1월 아바나, 흐루시초프의 자리를 이은 레오니드 브레즈네의 방문은 카스트로에게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그것은 소비에트 연방이 쿠바를 인정했다는 의미였다. 소비에트의최고 지도자가 쿠바에 온 것은 처음이었고 라틴아메리카를 통틀어서도 그랬다. - P209

쿠바의 최대 아이러니는 천혜의 아름다움으로 축복받은 땅임에도 불구하고 그 역사는 혼란과 피로 가득 차 있다는 점이다. - P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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