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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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차창의 잔상이 아니라, 살아서 아팠던 사람이다

― 요코가 돌아본 『설국』

그 사람은 나를 기차 유리창에 비친 투명한 환영처럼 바라보았다고 했다. 어스름한 저녁 풍경과 겹쳐진 내 눈동자 한가운데로 산골짜기의 불빛이 스쳐가던 순간, 그는 나를 세상에 없는 아름다운 그림처럼 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차창 안에서 내가 붙들고 있던 것은 환상이 아니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던 유키오 씨의 여윈 몸이었고, 눈 덮인 신호소에서 첫겨울을 보내야 할 어린 동생의 앞날이었다.

역장님을 향해 창밖으로 몇 번이고 동생을 부탁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누군가에게는 밤눈 위로 울려 퍼지는 맑은 목소리였겠지만, 내게는 추운 산골에 남겨질 피붙이를 걱정하는 다급한 외침이었다.

고마코를 바라볼 때면 마음이 복잡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면서도 샤미센을 놓지 않고, 웃고 울며 제 삶을 버텨내던 여자. 그리고 그 뜨거운 마음을 사랑하면서도 언제나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보던 시마무라.

나도 그 사람을 의식했고, 고마코 역시 나를 의식했다. 때로는 서로를 경계했고, 마음 한구석에서는 질투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시마무라에게 고마코를 잘 대해달라고 부탁했고, 또 한편으로는 우리를 더 흔들지 말고 이곳을 떠나라고 했다.

그 사람은 언제나 조금 떨어져 있었다. 사람의 슬픔과 열정마저 아름다운 무용이나 풍경처럼 바라보는 그 시선이 때로는 서늘하게 느껴졌다.

그러던 밤, 누에고치 창고에 불이 났다.

나는 불길 속 이층에서 아래로 떨어졌다. 스스로 모든 것을 놓아버린 것인지, 혼란 속에서 추락한 것인지 이제는 나조차 말할 수 없다.

기억은 거기에서 끊긴다.

내가 떨어지자 가장 먼저 달려온 사람은 고마코였다. 나를 의식하고 때로는 경계했던 그 여자가 검게 젖은 잔해 속으로 뛰어들어 나를 가슴에 안았다. 사람들이 나를 받아 안으려 몰려들었지만, 고마코는 울부짖으며 쉽게 놓지 못했다.

그 순간 우리 사이에는 시마무라도, 질투도, 경쟁도 없었을 것이다. 한 사람이 쓰러졌고, 다른 한 사람이 그 사람을 필사적으로 끌어안았을 뿐이다.

시마무라는 나를 처음 보았을 때 차창에 비친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지막에도 불빛 아래 쓰러진 나를 바라보았고, 고마코에게 다가가려다 사람들에게 밀려난 뒤 은하수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나는 차창에 겹쳐 비치던 덧없는 잔상도, 설국의 아름다운 풍경도 아니었다.

나는 죽어가는 이를 곁에서 지켰고, 어린 동생의 안부를 애타게 물었으며, 누군가를 걱정하고 사랑하고 상처받으며 이 눈 속에서 살아가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나를 바라보던 사람의 시선 속이 아니라 나에게 달려온 한 여자의 품에 안겨 있었다.

나는 살아서 지독하게 아팠던 한 인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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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샤는 부엌에서 일이 바쁘면 푸성귀를 따오라며 손님들을 채소밭으로 내보낸다.
독일붓꽃, 안개꽃 등 꽃이 지천으로 핀 테라스들을 지나야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 P111

2타샤의 집에 다닌 후로 여러 곳에서 차를 마셨다. 한동안은 작약정원이 내려다보이는 중간 테라스에서 인동덩굴과 으아리나무 밑에 앉아차를 마셨다. 등나무 줄기가 벤치를 타고 오르지만, 타샤의 정원은 너무 추워서 등나무꽃이 피지는 않는다. 하지만 인동덩굴은 6월에서 9월까지 꽃을피우고, 늦여름이 되면 노란 으아리꽃이 치고 들어온다. 차를 마시기에 아늑한 자리였지만, 타샤가 찻잔 쟁반을 들고 꼬이고 엉킨 덩굴 사이를 지나기가 너무 힘들어져서, 요즘은 현관 앞자리를 선호한다. 식기실에서 편리하게 다과를 옮길 수 있는 자리니까. - P113

화분은 움직이기가 쉽고,
또 꽃을 어디나 두고 싶은 마음에타샤는 애지중지하는 꽃들을 화분에 심는다.
앉아서 차를 마실 때면 디기탈리스나다른 화려한 꽃들이 그녀 옆에서 꽃대를 곧추세운다. - P117

언젠가 비밀의 화원은 장미 천지가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거름을 자주 풍성하게 받은 덕에 디기탈리스가 위용을 뽐낸다. - P118

타샤의 여러 정원 가운데 작약 정원만 형식미를 갖추고 있다. 정원은 작약 꽃밭 두 곳으로 이루어져 있고, 가운데 난 잔디길을 따라가면 벤치에 이른다. 다른 정원사의 관점으로 보면 대단히 진지하게 구도를 잡았다고 느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타샤의 영역이라서, 유머 감각과 패러디의 느낌까지 묻어난다. 작약은 다른 화초의 도움 없이 공간을 멋지게 이루긴 하지만, 정원의 가장자리에는 보랏빛 버베나가 피어, 드러난 발목 부분을 숨겨준다. 한쪽에서는 작약이 시들면 모습을 드러내려고 아시아 백합이 대기 중이다.
- P120

타샤에게 폭탄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지만그녀는 ‘페스티바 맥시마 같은 폭탄 모양의 작약을 특히 아낀다. - P120

타샤는 어떤 꽃이든 가장 좋아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몇 종류는 워낙 애지중지해서 그 종만의 정원이 따로 있다.
작약은 타샤의 마음을 쏙 빼앗는 꽃이고, 작약 정원은 그 매력을 증명한다. - P122

작약은 타샤의 자랑이요 기쁨이다. 한때는 작약 꽃밭 주변에 주목 울타리가 있었다. 하지만 나무가 크면서 타샤는 정원이 전화 부스처럼 보일까봐 속을 태우다가, 결국은 울타리를 없애버렸다. - P123

잡초 뽑기는 늘 해야 되는 일이고,
타샤는 직접 하겠다고 고집한다. 물망초와양귀비 같은 꽃들은 저절로 씨를 뿌리게 내버려둔다.
하지만 똑같이 번식력이 좋은 봉숭아는 뽑아서거름더미에 던진다. - P126

장미는 타샤에게 열정의 대상이기에, 비밀의 화원으로 들어가는 곳에 유난히 향이 좋은 데이빗 오스틴‘ 교배종을 심어놓은 것도 이상할 게 없다.
타샤는 장미에 대해서라면 쉼없이 이야기한다. 장미는 그만큼 소중하다. - P129

장미는 비밀의 화원에서만 만발하지는 않는다. 어딜 가나 장미가피어 있다. 테라스 주변의 구불구불한 미로를 거닐 때, 길에 뻗은 장미나무에 긁히지 않으려면 이리저리 피해야 한다. - P131

리처드는 타샤의 로자 ‘윌리엄 배핀(영국의 해양탐험가, 제독. 타샤는 이 식물을로자 윌리엄 배핀이라고 자유롭게 부르는 모양이다. 옮긴이)에 반해서그의 정원에 옮겨 심었다. "여기서 드물게 위로 타오르며 자라는 식물이지요."
그 꽃을 좋아한다고 놀리면 그는 변명조로 그렇게 말하곤 한다. - P131

6월이면 패랭이가원을 이루며 초롱꽃을 에워싼다.
타샤의 세계 전체가 그렇듯 이 원도 순수한 환상을 안겨준다. - P132

"나를 계속 나아가게 하는 것은정원 가꾸기와 신선한 염소젖이랍니다." - P137

2여러분도 짐작이 되겠지만, 타샤는 유별나게 부지런한 사람이다.
나이도 그녀의 추진력을 막지 못한다. 앉아서 유쾌하게 오래도록 수다 떠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인생과 자유와 층층이부채꽃 이야기를 하면서도 손에 일거리를 들고 있는 것을 좋아한다. 7월이면 현관 앞에서 마법에 걸린 듯한 친지들을 앞에 두고, 테라스를 바라보는 타샤를 만나게 된다. - P138

타샤의 초지에서는 데이지가 위세를 떨치지만귀리와 노랑데이지, 말뱅이나물, 토끼풀, 나비나물, 오리새가 군데군데 피어 있다. - P140

누구나 쥐오줌풀을 좋아하진 않지만타샤는 그것이 ‘고운 허브이고 그 향이 좋아요‘ 라고말한다. 그래서 테라스 하단에 쥐오줌풀이무리지어 피어 있다. - P-1

타샤는 단지에 있는 덩굴식물은 뭐든 내력을 알고 있다.
집 옆의 파란 으아리가 뭔지 물으면 그녀는 대답한다. "아 그거요, ‘라모나지요.
재미난 노인한테 샀어요. 그 양반, 오래 전에 천국에 갔을 걸요." - P151

한여름이면 한때 원추리가 피었던 자리에 붓꽃이 피고,
현관 옆에 덩굴식물이 뒤엉켜 자란다.
라일락인 로자 ‘마담 하디와 으아리 ‘잭마니‘가 보기 좋게 엉겨 있다. - P152

당당하게 뻗은 참제비고깔을 떠받칠 때,
타샤는 흉한 막대기 대신 담에 기대게 하는 경우가 많다.
참제비고깔이 동자꽃, 작약과 함께 피어 있다. - P155

27월, 타샤의 정원은 풍성하다. 꽃송이가 풍성하고, 할 일이 넘친다.
해마다 다른 종류의 문제가 생겨서 신속히 처리해야 한다. 언덕 꼭대기를내리치는 천둥번개와 분투를 벌여야 되는 해도 있다. - P156

2정원사들이 8월에는 일을 슬쩍 제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을알고 있는지? 속도에 지치고 끝없는 정원 일에 지치거나, 여름의 흐드러짐에 약간 싫증이 나서 늦여름의 정원이 약간 지저분해져도 내버려두는 수가있다. 하지만 타샤는 다르다. 화초를 가꾸는 기간이 워낙 짧아서 매순간을아깝게 여긴다. 8월의 정원은 5월과 다름없이 눈부시다. - P164

수확할 때 돕겠다는 사람이 많아서,  나무에서 딴나무딸기가 고스란히 식기실로 가지는 못한다. 개들도 나무딸기를 달라고 떼를 쓰고, 배불리 먹는다고 한다. - P167

타샤는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기억해요. 토바가 나에게몬티첼로 산 검은 접시꽃을 나눠주기로 약속했어요.
그래도 가장 맘에 드는 종류는 이파리가 멜론빛인 종류예요."
<애그웨이>에서 구입한 스위트피가 화사하게 피어 있다. - P173

스티브 데이비가 잔디를 깎아주지만타샤가 다른 사람에게 낫질을 시키지 않는 곳이 많다.
그녀는 아끼는 접시꽃 주변의 풀을 직접 깎고,
잘린 풀을 조심스럽게 갈퀴로 긁는다. - P174

타샤는 ‘임페리얼 실버‘ 백합을 유난히 좋아한다.
이 백합은 꽃송이가 크지만 2주일밖에 가지 않는다.
꽃이 많을 때는 족두리꽃, 안개꽃, 콘플라워, 야생당근과 함께 꽂는다. - P176

타샤는 엘윈 미더의 릴라이언스 복숭아의 팬이다. 특히 북쪽 정원에서 생산된 것을 좋아한다.
블루베리와는 달리 복숭아는 파이에 넣지 않는 것 같다. - P183

맛있는 식재료를 구할 목적으로만 채소밭을 가꾸는 것은 아니다. 금잔화와 딜, 양귀비.
데이지도 채소밭에서 자란다. 나팔꽃은 강낭콩 넝쿨과 뒤엉겨서 막대기를 타오른다.
서늘한 기후 때문에 키우지 못하는 채소도 있지만, 타샤는 대단한 양배추를 길러낸다. - P189

"어젯밤에는 서리가 내렸어요.
낡은 천으로 포도나무를덮어줘야 했지요." - P194

가을에 타샤의 정원을 색스럽게 하는 꽃은 사프란이다. - P195

9월, 화분을 온실에 들여놓을 때가 되면 타샤는 윈슬로를 부른다.
그 즈음이면 정원은 여름의 화려함을 맛보고, 옆바람과 햇살의 특혜를 누린 상태다. 화초를 실내로 옮기는 것은 큰일이고, 해마다 화초에 주는 거름이 점점 많아지면서, 화분을 옮기는 일도 커진다. 특히 월계수는 너무 커져서 타샤가 ‘그 총각‘ 이라고 부를 정도다. 앞에서 말했듯 타샤의 눈에는 모든 화초가 ‘아가씨‘ 이다. 튼튼한 고광나무를 말할 때도 아가씨가 온실의자리를 많이 차지하잖아요‘ 라고 말할 정도. - P198

타샤는 배가 아직 단단할 때 수확한다.
"배나무의 품종을 정확히 모르겠지만, 아주 늦게 익어요." - P201

열매류는 타샤와 새들에게 먹거리가 된다. 매자 열매는 잼을 만드는 반면,
마가목 열매는 날개 달린 친구들의 먹이 - P203

한번은 타샤에게 가을에 견과류를 주우러 가냐고 묻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녀가 숨 쉴 새도 없이 단호하게 ‘난 견과류는 좋아하지 않아요‘ 라고 대꾸하는 바람에, 더 말하지 않는 게 좋겠다 싶었다. 확실히 타샤의 정원에는견과류 나무가 없지만, 그녀는 검은 호두껍질과 히코리 (북미산 호두나무라의 나무: 옮긴이) 껍질을 염료로 쓴다고 한다. - P203

타샤는 뭐든 이용하는 재주가 있다. 가을이면 가장 붉고 큰 잎으로 단풍잎을 모아서 헛간에보관했다가, 추울 때 염소에게 먹인다. 쑥부쟁이는 모나크 나비들의 먹이가 된다. - P204

사계절 내내 타사의 차림새는 늘 비슷하다. 항상 무늬 있는 긴 팔드레스를 입는다. 몸통은 달라붙고 치마는 발목까지 내려오는 드레스다.
하지만 기온이 떨어지면 옷을 덧입는다. 가을에는 진달래 정원 부근에 친빨랫줄에 숄, 망토, 속치마를 널어 다가올 겨울에 대비해 거품을 한다. 빨간 플란넬 속치마와 검은 모 스타킹으로 옷 속을 따뜻하게 하고, 숄을 몇겹 두른다. 집안에 내려오는 예쁜 브로치로 숄이 어깨에서 흘러내리지 않게 고정한다. 계절이 깊어지면, 바깥에 일하러 가기 전에 후드 달린 망토를걸친다. 사실 망토 두른 모습은 꽤 화려하고 약간 별스러워 보인다. 그런차림새로 타샤는 밭에서 감자를 캔다. - P205

타샤는 ‘그린마운틴‘과 ‘카타딘‘ (메인주에 있는 산: 옮긴이)에서 나는 감자류를 좋아한다.
성심껏 감자밭을 일군 덕분에 매년 풍성한 수확을 한다. - P206

타샤는 언제든 대단한 꽃다발을 만들어낼 수 있다.
가을이면 현관에는 낙엽과 참제비고깔, 능금나무,
수국이 한 아름 꽂힌다. 해마다 이맘때면 브라마닭과코친닭이 돌아다녀도 해를 입을게 별로 없다. - P210

과일과 채소를 추수하는 한편 구근을 심는다. 매년 타샤는 심는구근의 종류를 늘린다. "겨울마다 들쥐들이 가져갈 몫도 챙겨줘야지요." 그녀는 구근을 많이 심는 것을 그런 식으로 변명한다. 그래서 해마다 봄이면드라마틱한 구근식물 쇼가 펼쳐지고, 가을마다 타샤는 털옷을 껴입고 단단한삽을 들고 나가 구근을 심는다. - P214

타샤는 늘 구근을 더 많이 심는다. 특히 ‘욕심 사나운 들쥐들 몫으로 사프란을 많이 심는다.
구근 심는 시기가 되면, 겹겹이 껴입고 누빔 속치마까지 덧입는다. - P214

타샤는 늘 새를 위해 돌능금을 남긴다.
특히 능금이 발효되어 꿀술이 되면 새들은 타샤의 후한 인심을 만끽한다.
서리가 내리면 양치류 식물이 보기 좋게 얼지만, 정원에 손실을 입힌다. - P216

타샤는 난 온기가 있어야 된다고 믿어요‘ 라고말한다. 바깥 날씨가 추울수록 집은 포근하고따스하다. 그런 따스함을 위해그녀는 외눈 고양이와 함께 땔감을 줍는다. - P219

29월에서 10월로 넘어가면서 가을이 깊어가도 타샤는 할 일이 여전히 많다. 한겨울에 꽃을 보려면 구근을 화분에 심어야 한다. 또 염소젖치즈는 세이지를 뿌리고 누른 다음 왁스를 발라서 간수해야 한다. 냉상(난방장치가 없는 프레임: 옮긴이)에 앵초 화분과 팬지 씨앗을 뿌린 판을 올려놓아야하고, ‘욕심 사나운 쥐떼‘ 를 막기 위해 모두 망으로 단단히 덮어야 한다. 한번은 타샤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내년에는 제대로 된 냉상을 만들 작정이에요. <벤자민 버니 이야기> 영국의 동화작가 베아트릭스 포터가 쓰고 그린 그림책 토끼들이 주인공으로 정원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이다: 옮긴이)에 나오는 것과 비슷한 걸로, 옆면에 단단한 벽돌을 쌓아 멋진 솜씨로 만든 냉상이지." 타샤가 베아트릭스 포터의 그림책들을 넘기면서, 더 훌륭한 정원사가 되기 위해 배우고 아이디어를 얻는 모습이 그려지지 않는지? - P221

계절이 깊어지면 타샤는 저녁 내내 불가에 앉아서, 흰 수선을 옆에 두고 그림을 그린다.
겨울에는 뜨개질이나 바느질을 하고 옷을 입는다. 그녀의 손은 늘 분주히 움직이고,
머릿속에는 항상 꿈이 넘친다. -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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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가 떠날 사람인 줄 알면서도 사랑했다

― 고마코가 돌아본 『설국』

나는 그 사람이 떠날 사람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시마무라는 이곳 사람이 아니었다. 도쿄에는 아내와 아이들이 있었고, 나는 이곳에서 살아야 했지만 그는 언제든 국경의 긴 터널을 다시 거슬러 자기 삶으로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걸 모르면서 좋아한 것은 아니다.

나는 하루하루를 허투루 살고 싶지 않았다. 샤미센을 연습했고, 모르는 곡은 악보를 찾아 익혔다. 산속 온천 마을의 게이샤라 해도 내가 하는 일만큼은 제대로 하고 싶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았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끝까지 해보고 싶었다.

그런 나를 시마무라는 아름답다고 했다.

처음에는 그 말이 좋았다. 이 눈뿐인 산골에서 누군가가 나를 바라봐 준다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술에 취하면 그에게 달려갔고, 돌아서면 다시 보고 싶었다. 그가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자꾸만 마음을 내어주었다.

가끔은 화가 났다. 나는 이렇게 진심인데 그는 늘 한 걸음 떨어져 있었다. 내가 웃으면 바라보고, 울면 바라보고, 취하면 또 바라보았다. 마치 눈 내리는 산을 구경하듯이.

요코도 마음에 걸렸다. 시마무라를 사이에 두고 그 아이를 의식했고, 때로는 질투도 했다.

그러던 밤, 누에고치 창고에 불이 났다. 불길 속에서 요코가 떨어지는 순간 나는 비명을 질렀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그 아이에게 달려가 있었다. 나는 쓰러진 요코를 가슴에 안고 사람들 쪽으로 비틀거리며 나왔다. 사람들이 요코를 받아 안으려 했지만 나는 쉽게 놓을 수가 없었다.

그 순간에는 질투도 경쟁심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 품에 있는 것은 내가 의식하던 여자가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이었다.

그의 삶에서 설국은 한 발 비켜 서 있는 풍경이었지만, 내게는 사랑하고 상처받으며 살아가야 하는 삶의 자리였다. 눈 속에서도 먹고살아야 했고, 웃고 울고 사랑하며 하루를 견뎌야 했다.

그 사람은 애초부터 이곳에 머물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가 이곳에 머문 동안만큼은, 나는 풍경이 아니었다고 믿고 싶다.

요코가 풍경이 아니었던 것처럼, 나 역시 풍경이 아니었다.

나는 눈 속에서 웃고, 울고, 취하고, 사랑했던 한 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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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랑하지 않았고, 다만 바라보았을 뿐이다

― 시마무라가 돌아본 『설국』

나는 특별히 할 일이 없는 사람이었다. 물려받은 재산이 있었고, 생계를 위해 몸을 움직일 필요도 없었다. 서양 무용에 관한 글을 쓰면서도 정작 무대를 찾아다니지는 않았다. 책과 사진을 바라보며 혼자 상상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삶에서도 늘 그런 식이었다. 직접 뛰어들기보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는 사람.

국경의 긴 터널을 지나 눈의 고장에 들어섰을 때도 그랬다. 차창에 비친 요코의 얼굴과 저녁 풍경이 겹쳐지는 모습은 아름다웠다. 나는 그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러나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아왔고 무엇을 견디고 있는지까지 깊이 알려 하지는 않았다.

고마코에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뜨겁게 살아 있었다. 샤미센을 연습하고, 술에 취하고, 웃고 울면서 자신의 삶을 온몸으로 견뎠다. 그런 그녀가 내게 마음을 주었다. 나는 그 마음을 거절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책임지지도 않았다. 도쿄에는 아내와 아이들이 있었고, 나는 결국 이곳을 떠날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다시 설국을 찾았다.

고마코를 사랑했던 것일까. 지금도 잘 모르겠다. 어쩌면 나는 그녀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녀가 나를 사랑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일이 좋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가 온몸으로 살아가는 동안 나는 그 곁에서 잠시 살아 있다는 감각을 빌려 쓰고 있었다.

그러던 밤, 누에고치 창고에 불이 났다. 불길 속에서 요코가 떨어지자 고마코는 비명을 지르며 달려가 그녀를 안았다. 나도 다가가려 했지만 사람들에게 밀려났고, 고개를 든 순간 은하수가 가슴속으로 쏟아지는 듯했다.

그 비극 앞에서도 나는 끝내 삶과 풍경을 함께 바라보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것이 나라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고마코에게 설국은 삶이었다. 요코에게도 그러했다. 그곳에서 사랑하고, 상처받고, 누군가를 돌보며 살아가는 모든 것이 그들의 현실이었다. 그러나 내게 설국은 언제든 찾아왔다가 다시 떠날 수 있는 곳이었다.

나는 설국의 눈을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고마코 역시 그 눈 속에서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녀는 설국에서 자신의 삶을 계속 살아가야 했고,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다시 나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어쩌면 나는 끝까지, 고마코의 아름다움을 설국의 아름다움과 굳이 구별하려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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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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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묻히는 밤, 차창 너머의 메아리

― 신호소 역장이 돌아본 『설국』

국경의 겨울은 아름답다고만 하기에는 너무 고되다.

목도리를 코 위까지 두르고 모자의 털가죽을 귀까지 내려도 차가운 기운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옷을 네 벌이나 껴입은 채 다친 몸으로 병원을 오가던 때였다. 산기슭에는 철도 관사 같은 허술한 바라크들이 흩어져 있었고, 젊은 사람들은 추우면 술을 마시다가 감기에 걸려 뒹굴곤 했다.

작년에는 눈사태가 잦아 기차가 꼼짝하지 못했다. 마을에서도 밥을 지어 나르느라 혼이 났다. 올해도 러셀 세 대를 준비하고 수천 명의 제설 인력이 출동할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이곳의 눈은 우리들에겐 도시 사람들이 차창 너머로 바라보는 낭만적인 풍경이 아니었다. 선로를 묻고 기차를 세우며 사람들의 생활을 뒤흔드는, 매년 맞서야 하는 현실이었다.

그날도 기차가 신호소에 잠시 멎었다.

“역장님! 역장님!”

차가운 밤공기를 가르며 익숙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고개를 드니 요코였다. 유리창을 열고 몸을 밖으로 내민 채 나를 부르고 있었다.

“아, 요코구나. 돌아오는 길인가?”

그 아이는 인사하자마자 동생 이야기를 꺼냈다. 금년 겨울부터 우리 신호소에서 일하게 된 어린 녀석이었다.

“아직 어린애니까 역장님이 잘 가르쳐 주세요. 부탁드리겠어요.”

나는 동생이 일을 잘하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이런 눈 많은 산골에서 첫겨울을 맞는 어린 역원이 안쓰럽기는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추위도 견디기 힘들었고 다친 몸도 성가셔 대화를 마치고 돌아서려 했다. 그런데 요코는 눈 위를 두리번거리며 다시 동생을 찾았다.

“역장님, 동생을 잘 부탁해요.”

맑은 목소리였다. 차가운 눈바람을 뚫고 가슴 한구석을 쩡하게 울리는 소리였다.

기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뒤에도 요코는 몸을 창밖으로 내밀고 있었다. 기차가 내 곁을 지날 즈음 또다시 외쳤다.

“역장님, 이번 휴일에 집에 오라고 동생한테 말해 주세요.”

“알았어.”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눈은 많은 소리를 삼킨다.

발밑에서 눈이 뭉개지는 소리도, 육중한 쇠바퀴가 선로를 울리는 소리도 멀어지면 이내 눈 덮인 산속으로 잦아든다.

그런데 그날 요코의 목소리만은 내 귓속에서 오랫동안 메아리쳤다.

자기 동생을 걱정하며 몇 번이고 부탁하던 그 맑고 높은 울림은 눈 속에 묻히지 않고 밤공기 위에 한동안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기차 안의 사람들에게 이곳은 긴 터널을 빠져나오면 펼쳐지는 아름다운 설국일 것이다. 잠시 감탄하고 바라보다 다시 기차를 타고 떠날 수 있는 풍경.

그러나 우리에게 이곳은 삶이었다.

눈사태를 걱정하고, 선로를 지키고, 기차가 멈추지 않도록 눈을 치워야 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요코에게도 그날의 눈은 단순한 풍경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눈 속에서 겨울을 보내야 할 어린 동생이 있었으니까.

기차는 다시 어둠 속으로 멀어져 갔다.

나는 그 뒤 요코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눈이 많이 내리는 밤이면 가끔 그날을 떠올린다.

기차 창밖으로 몸을 내밀고 몇 번이고 나를 불러 세우던 한 처녀와, 그 차갑고 깊은 설국의 밤을 잠시 흔들어 놓고 사라졌던, 눈 속에서도 좀처럼 잦아들지 않던, 그 맑고도 서늘한 목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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