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미터의 한라산 정상을 본 기억은 있지만, 21도의 한라산은 도무지 정복해본 적이 없다. 정상에 올라간 것은 분명할 텐데, 하산의 과정이 도무지 생각나질 않기 때문이다. 등반 후의 숙취도 만만찮다. 하지만 두 한라산 중 선택하라면 역시 마시는 쪽이다.

술집에서 시작되는 한라산 등반이라면 언제든 오를 준비가 되어 있다. 몸은 아니지만 마음만큼은 프로 산악인이니까!

이때까지 정답은 ‘바른 답’이 아니라 ‘정해진 답’에 가까웠는데, 앞으로 난 어떤 답을 써내야 할까. 왜 당장 절실하게 하고 싶은 게 없는 거지?

"사주로 큰 테두리는 알려줄 수 있어요. 하지만 그 안에서 어떻게 할지는 결국 본인의 선택입니다."

내가 가진 식재료가 뭔지는 알려줄 수 있지만, 그걸 볶아 먹든 튀겨 먹든 전적으로 내 몫이란 소리였다. 맥이 탁 풀렸다.

"제일 좋아한다고 말하는 건 아무래도 위험하죠."

(그는 라가불린 8년을 ‘솜씨 좋은 아줌마가 무친 겉절이같은 맛’이라고 표현하는 사람이다. 어떤 술이든 그의 말을 거치면 더 맛있어진다)

1962년…? 부모님 연배 수준의 위스키를 우리가 이렇게 버릇없이 마구잡이로 마셔도 되는 걸까요…?

나는 늘 백팩을 메고 다녔다. 가방 안엔 언제 어디서 쓰러져도 출근할 수 있도록 여벌의 속옷과 셔츠가 두 벌씩 있었고 화장을 지워야 할 경우를 대비하여 화장솜, 클렌저, 면봉까지 들어 있었다. 술을 계속해서 마실 수 있게 하는 월급에 대한 집착과 최소한의 사회적 체면 유지를 위한 노력이 묻어나는 아이템들을 짊어지고 광역버스를 타면 언제나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 들었다.

어느 순간부터 여독이, 간에 쌓인 독이 안 풀린다는 게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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