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고흐는 1889년 12월과 1890년 1월에 (당시에는 간질로 진단받은 심각한 발작을 일으키지만 겨울 내내 작업을 계속한다. 그리고 브뤼셀에서 열린 그룹 전시회에도 더 많은 그림을 출품해 비평가들로부터 큰 갈채를 받는다. 누군가 이 그림들 중 한 점을 구입하기까지 하는데, 이것은 고흐가 살아 있는 동안 처음으로 팔린 작품이었다. - P353
5월 말에는 다시 거처를 옮겨 북쪽지방에 위치한 오베르로 가는데, 가는 도중에 파리에 들러 제수와 조카를 만난다. 오베르에서는 예술가들의 신경 질환을 연구해온 동종요법 외과의사인 폴 가셰의 치료를 받는다. 아마추어 화가였던가세와 고흐는 긴밀한 우정을 쌓아간다. 몇 차례 발작을 더 겪는 와중에도 고흐는 의사의 치료를 잘 따르는 것처럼보인다. 자신의 예술에 대한 고흐의 헌신은 여전했는데, 이것은 보다 큰 화폭의 몇몇 새로운 작품에서 드러난다. - P353
오베르에 머무르던 70일 동안 고흐는 70여 점의 그림을 그린다. 창조적인 에너지의 놀라운 발산이었다. 남쪽지방에서 보여주었던 밝은 색조 및 화려한 톤과는 대조적으로 오베르의 풍경화들은 보다 시원한 푸른색과 보라색이 지배적이다. 동시에 초상화에서는 더욱 과감한 색채를 사용한다. 절박한 심정으로 작업을 해나간 이 시기 내내 그의붓질은 계속 원기 왕성한 테크닉을 과시한다. - P353
동생에게 보내는 고흐의 마지막 편지에서 평상시보다 심한 우울증의 기미는 발견하기는 어려우며, 심지어는 늘 그렇듯 그림에 필요한 도구들을 더 보내달라는 요청까지 읽을 수 있다. 하지만 7월 27일, 그는 밀밭에서 그림을 그리다 말고 자신의 가슴에 총을 쏜다. - P353
이 소식을 듣고 테오가 달려오지만 이틀 뒤 고흐는 숨을 거둔다. 그의 나이 37세였다. 상심한 테오 역시 같은 해 자리에 눕게 되어 이듬해 1월에 네덜란드에서 사망한다. - P353
요즈음은 아버지 생각을 자주 한답니다. 아무튼 사정이 그렇게 되어 저는 테오가 침실에 걸어두도록 곧 그림을 한 점 그리기 시작했지요. 푸른하늘을 배경으로 굵은 가지에 피어 있는 흰 아몬드 꽃이에요. - P356
가셰 박사의 초상화를 그렸단다. 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의사의 멜랑콜릭 한 표정을 보며 그가 얼굴을 찌푸리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바로 이런 식으로 그려야 하는 거야. 냉정한모습의 옛 초상화들과 비교하면 오늘날 사람들의 얼굴에는 얼마나 다양한 표정과 열정이 새겨져 있는지를 이 그림을 통해 깨달을 수 있겠지. 어떤 기대감이랄지, 고전적인 특성이랄지, 그런 거란다. 슬프지만 부드럽고, 분명하고도 명철한 모습. 바로 이런 식으로 많은 초상화들이 그려져야 할 거야. - P366
내가 작업을 하면서 가장 관심을 갖는 건즉 최대의 관심 분야는 초상화법이야. 현대 초상화법이란다. - P370
솔직히 말해 우리는 오직 자신의 그림을 통해서만 말할 수 있단다. 하지만 아우야, 내가 늘 네게 했던 말이 있지. 그걸 다시 한번 아주 진지하게 말하마. 무언가를 가능한 한 잘 해내려고 부단히 애쓰는 마음만이 표현할수 있는 진지함으로 말이다. 되풀이해 말하지만, 난 언제나 너를 단순히 코로의 그림을 파는 화상 이상으로 생각할 거야. 어떤 그림들이 실제로 완성될 때 넌 나를 통해 네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어. 그리하여 이런 재난 속에서도 이 그림들은 평온을 유지하는 거지. - P389
나의 일로 말하면, 난 그것을 위해 목숨을 걸었고 그것 때문에 반쯤 미쳐버렸지. 정말이야. 하지만 내가 아는한, 넌 인간을 거래하는 자들 중 하나가 아니야. 네가 선 자리를 고수하며 진정한 인간성을 지키면서 행동하는건 아마도 네 선택의 문제겠지. 하지만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지? - P389
구두 A pair of shoes 삶의 고단함과 쓸쓸함을 잘 표현하고 있는 이 작품은 1886년에 그려졌다. 1879년 겨울, 고흐는 평소에 좋아하던 화가 쥘 브르통을 만나기 위해 120킬로미터를 걸어서 그의 집 앞까지 갔지만 용기가 부족해 만나지 못하고 결국 되돌아와야 했다. 고흐는 끝없이 그를 괴롭혔던 절망감과 외로움 속에서도 노동의 현장에서 발견한 진정한 삶의 가치를 자신만의 화법으로 그리고자 했다. 강렬한 색채와 거친 붓놀림이 삶의 비통함과 강렬한 생의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 P406
폴 고갱의 의자 Paul Gauguin‘s armchair1888년은 고흐에게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안겨준 해다. 대도시 파리에서 정신적, 육체적으로 지친 고흐는 프랑스 남부의아를로 떠나 그곳에서 노란 집을 빌려 화가 공동체를 세우고자한다. 10월에 고갱이 아를에 도착하고 이들은 예술에 관해 의견을 나누며 유익한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두 달이 채 지나지않아 둘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고 결국 고갱이 떠나자 고흐는스스로 자신의 오른쪽 귀 일부를 잘라낸다. 이 작품에서 가스등과 촛불은 어두운 방을 밝히고 있고, 의자 위에 놓인 두 권의책은 고흐가 믿고 있던 고갱의 학구열을 나타낸다. - P407
1887년 반 고흐의 작품은 일본 판화의 영향을 받아 색채가 밝아지고 양식이 점차 바뀐다. 봄에는 친구가 된 화가 에밀 베르나르와 야외에서 함께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여름에는 해바라기를 그리기 시작한다. 이 해에도 자화상을 많이 그리는데 모델을구하기 어려운 가난한 현실 때문이기도 하지만 반 고흐에게 자화상은 단순한 자기 모습의 묘사 그 이상이었다. 그것은 끊임없는 자기 탐색과 분석의 연장으로 고독과 불안, 탐욕과 결핍감에 내몰린 자신을 들여다보는 거울이었으며 동시에 붓끝으로 만들어나갈 미적 세계를 내다보는 창이었다. - P413
1889년 정신병원에서 퇴원했지만 반 고흐의 정신발작은 더욱 심해진다. 음식에 독이 들었다고 생각해 식음을 전폐하기도 하고, 환청과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하며, 물감과 등유를 먹으려 하기도 한다. 결국 주민들에 의해 다시 정신병원으로 이송되지만 그림에 대한 그의 열정은 곧 다가올 생의마지막을 예견이라도 하는 듯 조바심 속에서 더욱 뜨거워진다. 일평생 고독한 자신의 초상을 마주하기 위해 스스로의 운명을 믿고 견뎌야 했던 빈센트 반 고흐 그림에 대한 그의 열정은 투쟁에 가까웠다. - P415
외젠 보흐 Eugène Boch 벨기에인 외젠 보흐는 파리의 보나와 코르몽 아틀리에에서 수업을 받았던 화가이다. 고흐는 1888년에 그린 이 작품에 대해 이렇게 썼다. "보흐 덕분에 나는 오랫동안 꿈꾸어왔던 그림 <시인>의 첫 번째 스케치를 할 수 있었다. 초록색 눈을 가진 그의 섬세한얼굴은 별이 반짝이는 짙은 군청색 하늘을 배경으로 도드라진다. 그는 노란 재킷을입고 얼룩무늬 넥타이를 하고 있다." 노란색을 주조색으로 한 덕분에 보흐는 어두운배경에서 빛을 발하는 듯하다. 고흐는 그가 배경과 분리되어 보이도록 하기 위해 어두운 머리카락 둘레에는 노란색 선을 그려 넣었는데 덕분에 보흐는 마치 후광을 두른것 같다. - P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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