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까지 정확히 정리되지 않았으나 몇 년 전에 밀양초등교에서 나온 자료에서 3월 14일로 나왔으니 맞는 듯도 합니다, 당시가 제대로 된 호적도 없던 시절이라 그것 역시도 정확한지 알수가 없지요" - P72

박차정 지사의 묘
약산 김원봉 장군의 처박자정 여사의 묘라고 쓰여 있지만, 약산의 아내이기 전에 그 역시 당당한 독립운동가였고 애국지사였음을 기억하자. - P75

"약산, 우리 국내로 돌아가 독립운동을 함께 하자." - P94

의열단 창립지 지금은 아무 흔적도 찾을 수 없지만, 그래도 저 자리에서 의열단이 탄생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말없이 그들을 생각하며 하얀 국화를 올려드렸다. - P99

<의열단 공약 10조〉
1. 천하의 정의를 맹렬히 실행한다.
2.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해 신명을 희생한다.
3.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히 자라야 의열단원이 된다.
4.우선하고, 단원의 의도 급히 실행한다.
5. 의백 일인을 선출해 단체를 대표케 한다.
6.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매월 일차식 사정을 보고한다.
7.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초회(부름)에 반드시 응답한다.
8. 피사被死(죽임을 당함, 함부로 죽음) 아니하며  단의에 전력을 다한다.
9. 하나가 아홉을 위하여 아홉이 하나를 위해 헌신한다.
10. 단의團義를 배반한 자는 척살한다. - P100

의열단 창립지 찾아가는 법 주소가 정확하다. 지린역에서 택시로 10분정도 걸리는 거리이고 찾기도 쉽다. 필자의 경우는 근처에 숙소를 잡아서 이동했다. 창립지를 중심으로 안창호 선생이 구금됐던 길림 감옥,
뒤에서 살펴볼 만보산사건 발생지, 손정도 목사 교회 터 모두 가깝다. - P104

약산의 휘호 
‘신국가는 신청년이 건립할 것이오, 신청년은 신사상이 확구한 자를 의미함이라.‘라고 씌여 있다. 약산 스스로 청년 시절부터 의열 정신이 투철했기에 할 수 있는 말이 아닐까. - P109

지린에서 약산이 남긴 공식적인 흔적은 의열단 창립지뿐이다. 1920년 초에 진행된 1차 암살파괴 계획까지 지린시 의열단 본부에서 준비하고 진행했다는 기록은 있으나 정확히 어디에서 어떻게 진행됐는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약산이 지린을 떠난 이후에도 직간접적으로 약산과 의열단이 남긴 지린에서의 흔적들을 찾아 나섰다. 길게 보면 이 책을 통해 지린을 방문할 수많은 청년들이 우리가 잘 몰랐던 약산과 독립운동가들의 흔적들을 찾아주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이어언급할 조선일보 김이삼 기자의 암살지와 지사들이 활동했던 북산공원을 넣은 이유이기도 하다.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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