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맛
히라마쓰 요코 지음, 조찬희 옮김 / 바다출판사 / 2016년 9월
평점 :
품절


  어른이 되고 나서 좋아진 음식들이 있다. 어렸을 때는 입에도 못 대던 신김치가 이제는 겉절이보다 더 좋아졌고, 밍밍하다고 싫어했던 두유가 이제는 달달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콩나물국밥, 깻잎, 마늘쫑무침처럼 어렸을 때는 먹어보려는 시도도 안 했다가, 어른이 된 이후에 먹어 보고 '생각보다 괜찮네' 싶어서 먹게 된 음식들도 있다. 이렇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세상의 다양한 맛들을 알게 되었고, 기억 속에 그 맛들이 쌓여 왔다. 일본의 작가 히라마쓰 요코의 음식 에세이집 『어른의 맛』은 어른이 되면서 알게 된 맛들, 세월이 지나면서 기억 속에 쌓여 온 맛들을 이야기한다. 

  코 끝이 찡해질 정도록 알싸한 와사비의 맛, 온갖 감칠맛이 응축된 말린 음식의 맛, 더운 여름날 마시는 시원한 맥주의 맛까지, 작가는 어른이 되어서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맛들을 예찬한다. 사실 나는 이런 맛들을 아직도 좋아하지 않는다. 아마 영영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작가가 이야기하는 일본 음식들 중 아는 것은 몇 개 되지도 않는다. 일본인 독자라면 공감했겠지만 나는 공감하는 대신 상상했다. "유부의 안쪽으로부터 맛이 스며 나온다. 온화해 보이지만 야만적이다. 조용한 척하고 있지만 수다쟁이다. 변변찮아 보이는 모양인데 무척이나 풍요롭다." 음식 하나에서도 그 음식이 자아내는 맛들을 섬세하게 포착해내는 맛의 묘사 덕분에 맛을 상상하는 즐거움을 누렸다. 

  그리고 음식을 먹을 때의 계절감과 분위기를 생생하게 살려낸 묘사에 빠져들었다. 사람들이 자아내는 열기와 정감이 흐르는 이자카야(일본식 술집)부터 비를 맞아 녹음이 더욱 짙어진 여름날 산골 여관, 온갖 길거리 간식들이 모여 맛있는 냄새를 내는 축제날 거리까지. 무더운 여름날에 읽어서 그런지 특히 여름에 먹는 음식들 이야기에 더 몰입이 되었다. 특히 어린 시절 여름 방학 때 먹었던 간식들 이야기에서는 여름 특유의 청량감이 느껴졌다.


여름에 먹는 간식 미츠마메. 삶은 완두콩에 우무와 꿀을 넣어 만든다. 

사진 출처: https://dolcevita-sana.blogspot.com/2015/07/blog-post_11.html


"낮잠에서 깨면 반드시 차가운 보리차를 마셨다. ... 컵 표면이 순식간에 물방울을 두른다. 잠시 기다린 다음 손가락을 대고 직 그어 투명한 창을 만든다. ... 오후 세 시의 간식은 수박, 아이스캔디. 빙수, 차가운 찹쌀 경단, 미츠마메(みつ豆, 삶은 완두콩에 깍둑썰기 한 우무를 넣고 꿀을 친 음식-역주). 이것들 중 하나를 번갈아 내주셨는데, 그 중에서도 미츠마메가 나온 날은 뛸 듯이 기뻤다. 우무의 사각 단면이 정오를 조금 넘긴 여름빛에 반짝였다."

  미츠마메라는 음식을 잘 모르는데도 무더운 여름날 시원한 간식을 먹을 때 느끼는 여유와 상쾌함, 청량감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튀김을 튀겨내는 세세한 타이밍에 맞춰 함께 튀김을 먹으며 이야기하려면 두 사람이 적당하고, 세 명 이상은 무리라는 부분에서는 "아니, 뭘 이렇게까지 해야 돼?"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예전에는 거래처 손님을 대접할 때 어느 계절에는 어느 식당에 가고, 어떤 것을 주문해야 한다는 것까지 신입사원에게 깐깐하게 가르쳤는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마음 맞는 사람끼리만 먹고 마시니 그럴 수가 없다는 어느 중년 회사원의 이야기도 공감되지는 않았다. 그런 가르침에 얽매이기보다 먹고 싶은 것을 마음 맞는 사람들과 먹는 것이 더 좋으니까. 하지만 상대의 입장에서 배려하면 뭘 골라야 할지 정해진다는 마음가짐은 이해가 되었다. 이런 일본적인 정서는 이름도 낯선 일본 음식들만큼이나 낯설지만, 책을 통해 다른 누군가의 정서를 이해하는 것도 새로운 경험일 것이다.

  일본적인 정서가 책 전체에 짙게 배어 있음에도 음식을 통해 작은 위로와 행복, 즐거움을 얻는다는 메시지에는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특히 음식으로 누리는 작은 호사에 공감했다. 비싼 음식을 먹는 것이 호사가 아니다. 평소에는 가격이나 칼로리 때문에 선뜻 손을 대지 못했던 음식들을 어느 날 마음껏 먹어보는 것. 이런 호사에는 "평소 해 오던 억제와 인내를 힘껏 걷어치우면서" 느끼는 쾌감이 숨어 있다고 작가는 말한다. 숨막힐 듯 단조로운 일상에서 이런 작은 기쁨이 막혀 있던 숨을 틔워주곤 한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다양한 음식을 먹어 왔고, 다양한 맛을 알게 되었다. 그 맛들이 쌓여 우리의 추억뿐만 아니라 우리 자체를 이루기도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살아가는 것은 맛을 알아가는 것, 맛이 쌓여 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쌓여 온 맛들이 소중하고, 앞으로 만날 맛들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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