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 뒤에서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루이자 메이 올콧 지음, 서정은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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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포함


   문학동네 블로그를 둘러보다 우연히 루이자 메이 올컷의 단편소설  「가면 뒤에서」 를 소개하는 카드뉴스를 발견했다. 겉으로는 수수하고 단정해 보이는 가정교사가 알고 보니 음침한 본모습을 지녔다는 이야기인데, 적절한 데서 끊은데다 흥미로운 지점만 잘 집어내서 호기심을 유발했다. 「가면 뒤에서」 의 결말이 궁금해서 결국 책을 빌렸다. 가히 도서계의 김경식이라 할 만하다. 

   김경식에게 낚여서 본 영화들이 그렇듯, 이 책도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 올컷의 대표작인 『작은 아씨들』 도 읽지 않았기 때문에, 『작은 아씨들』 과는 정반대로 어두운 분위기의 단편들이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어둡고 위험한 분위기는 매력적이었지만, 스릴 있게 읽기에 19세기의 소설은 너무 낡은 느낌이다. 그래도 당시 사회의 한계를 뛰어넘어 자기 욕망을 추구하는 여성 캐릭터들은 신선하게 다가왔다. 각 단편에 대한 감상은 이렇다.

-------------- 스포일러 ----------------------------------------





* 가면 뒤에서: 표제작이고, 카드뉴스 덕분에 기대했지만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던 단편이다. 진 뮤어의 어두운 모습이 일찌감치 드러나고, 진 뮤어의 속내도 그대로 노출되기 때문에 스릴감이 떨어진다. 뭔가 더 거대하거나 심오한 것이 숨어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진 뮤어가 귀족들에게 큰 원한을 품을 정도로 슬픈 사연이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다는 게 오히려 반전이었다. 다만 가정교사 일을 하면서 대놓고, 또는 미묘하게 차별하는 귀족들을 많이 겪어 왔다는 점은 감안할 만하다. 

  이 소설은 신분을 뛰어넘는 낭만적인 로맨스에 대한 환상을 산산이 부순다. 가정교사임에도 귀족 고용주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게 되는 주인공을 그린 소설  『제인 에어』 를 비틀어 버린 것 같은 소설이다. '진 뮤어'라는 이름 자체도 제인 에어의 패러디처럼 느껴진다. 진 뮤어에게 빠지는 남자 셋(형, 동생, 숙부) 모두 나름대로 진 뮤어에게 순정을 바치지만, 이들 또한 진 뮤어와 자신의 신분 차이는 절대 잊지 않는다. 이들이 진지하게 진 뮤어를 결혼 상대로 생각하는 건 진 뮤어의 어머니가 귀족 출신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뒤이다.(이 귀족 출신 어머니는 진 뮤어의 친어머니가 아니라 새어머니, 즉 진 뮤어와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이였다는 게 나중에 밝혀진다.) 고고하고 품위 있는 척 하던 이들은 진 뮤어에게 완전히 농락당하고, 진 뮤어의 정체를 밝혀냈는데도 진 뮤어의 마지막 반격에 허무하게 당한다. 이것이 로맨스 소설 속 남주인공인 귀족 도련님, 나리들의 실체다. 

  진 뮤어가 악녀이기는 하지만, 그녀가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하는 노력은 오늘날 우리 자신들도 하고 있지 않나 싶다. 상대방이 무의식적으로 하는 차별에 상처를 받아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상냥하게 상대방을 대한다. 그리고 매력적이고 유능해 보이기 위해 노력한다. 우리 자신도 원만한 사회생활을 위해 하는 감정노동이 아닌가. 신분제 사회에서 낮은 신분인데다 여성인 진 뮤어는 지금의 우리보다 더 큰 압박감을 느끼고 감정노동에 시달려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30살밖에 되지 않은 진 뮤어의 본모습을 이 빠지고 머리 벗겨진 노파처럼 묘사한 것은 부당하다. 매력적인 악녀 캐릭터를 만든 작가 자신에게도 나이 든 여자에 대한 편견과 혐오가 있었던 건 아닐까 싶다. 

* 어둠 속의 속삭임: 이 단편도 생각만큼 엄청난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피가 섞이지 않은 조카에게 흑심을 품고 있는 삼촌 캐릭터의 묘사, 삼촌과 주인공 사이의 묘한 긴장감, 주인공과 약혼자 기 사이의 풋풋한 로맨스는 잘 쓰여졌다고 본다. 주인공이 강제로 오두막에 갇혀 미쳐가는 과정도 생생하게 그려진다. 하지만 마지막에 주인공이 너무도 쉽게 해방되어 긴장감이 떨어진다. 뒷표지의 '남자보다 완벽한 남장여자'라는 홍보 문구를 보고 처음에는 기가 남장여자인 줄 알았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주인공을 속이기 싫다고 한 줄 알았다. 그런데 내가 잘못 짚은 거였다. 지금 생각해 보니 기가 남장여자인 이야기로 가는 게 오히려 더 재밌었겠다 싶다. 

* 수수께끼: 이 책에 실린 네 편의 단편들 중에서 제일 매력적인 단편이었다. 표제작인 「가면 뒤에서」보다 더 흥미롭게 다가왔다. 뒷표지에 적힌 '남자보다 완벽한 남장여자'라는 문구 덕분에 버나드가 여자라는 건 처음부터 눈치챘지만. 여자임에도 완벽하게 남자 역할을 소화하는 모니카(버나드의 진짜 정체)의 모습이 매력적이었다. 모니카가 여자로 돌아온 후 '남자 역할을 했던 것을 부끄러워했다'는 건 당시의 한계로 보이지만, 남성과 여성의 경계라는 게 그렇게 뚜렷하고 확고한 건 아니라는 메시지는 확실히 시대를 앞서간다. 클라이드와 모니카가 맺어지지 못한 건 안타깝지만, 당연히 클라이드가 치러야 할 대가라고 생각하고 모니카가 사랑에 연연하지 않아 신선한 결말이었다. 그나저나 친언니와 연인 연기를 한 모니카는 정말 대단하다. 악동뮤지션의 이수현은 자기 오빠와 듀엣으로 사랑 노래 부르기가 징그러웠다는데. 

* 위험한 놀이: 솔직히 제1세계 금수저들이 마약 하고 노는 이야기를 내가 왜 읽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번역자 해설에서 올컷이 지병인 루푸스 때문에 아편, 해시시, 모르핀 같은 약물을 상습적으로 복용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조금은 이해가 가긴 한다. 올컷은 약물에 의존하지 않으려 했지만, 약물이나 최면을 통해 통제되지 않은 자아와 조우하는 데 큰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그리고 금욕을 강조하는 아버지의 교육과 통제에 반발했다고 한다. 그래서 해시시에 취해 평소의 자기통제를 버리고 서로 감정을 털어놓으며 맺어지는 연인들의 이야기를 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둘 다 운이 좋아서 살아남은 거지 해시시에 취해 요트 운전도 제대로 못하고 둘 다 죽었을 확률이 더 높았다. 작가의 창작 배경까지는 이해하겠지만 '해시시가 억눌려 있던 감정을 해방시켜 준다'는 메시지에는 절대 동의 못하겠다.

 『작은 아씨들』 을 읽지 않아 올컷의 밝고 사랑스러운 면모를 잘 모르니, 이 어두운 단편에 충격을 받거나 배신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번역자는 올컷의 작품 세계를 밝고 사랑스러운 『작은 아씨들』 과  어둡고 위험한 『가면 속에서』 로 나누는 이분법적 해석을 거부한다. 어느 작품에나 인권 운동가이자 대중 소설가였던 올컷의 다양하고 복합적인 면모가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소개되어 있지 않았지만 인권 운동가로서의 올컷의 면모가 드러난 단편들도 언젠가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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