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1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12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김학수 옮김 / 문예출판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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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포일러 포함(『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의 스포일러도 포함)

  톨스토이의『부활』에 대한 서평 중 인상 깊었던 것은 "작가의 설교는 이미 충분히 들었다."였다. 이 서평 외에도『부활』이 지나치게 종교 쪽으로 치우쳐져, 문학적인 면에서는 아쉽다는 이야기들을 들어왔다. 그래서 『부활』에는 그렇게 흥미가 가지 않았었는데,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를 읽고 나니  그 두 작품과 함께 톨스토이를 대표하는 장편소설이라는 점에서 궁금해졌다.『부활』은 정말 톨스토이의 설교에 불과할까,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을까?
 
  톨스토이는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전쟁과 평화』를 통해 자신의 역사관을 펼치고『안나 카레니나』를 통해 자신의 가정관을 이야기했다면, 『부활』에서는 법과 행정 제도, 교회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이야기한다. 『부활』에서는 소설은 형식이고 말하려는 주장은 따로 있다는 것이 전작들에서보다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그럼에도『부활』은 소설 작품으로서도 매력적이다. 

 『부활』에서는 어떻게 하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 에 대한 네흘류도프의 고민과 법 제도의 폐해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토지는 누군가가 사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법 제도는 기득권 체제를 유지하는 수단일 뿐이고, 법 제도의 잘못된 운영 때문에 가난하고 신분 낮은 사람들이 오히려 더 고통 받는다'는 톨스토이의 주장은 소설 내내 계속된다. 네흘류도프, 또는 작가 자신의 입으로 줄줄이 이런 이야기들이 나오니 이게 소설인가, 논문인가 하고 반감을 가지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회주의가 실패하고 법 없이는 사회가 돌아가지 않을 정도로 당시보다 사회가 더 복잡해진 지금, 그의 의견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언제나 현실은 법이 다 처리하지 못할 만큼 세밀하기에, 법의 허점으로 많은 사람이 고통 받아왔다. 하지만 법과 행정, 정부, 그 외 사회 제도는 늘 개선해나가야 하는 것이지 철폐해야 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부활』은 당시를 살아가던 인간들과 사회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 설교나 논문, 계몽소설에 그칠 수 있다는 위험에서 벗어난다. 주인공 네흘류도프와 카츄샤뿐 아니라 법조계의 인물, 귀족부터 혁명가들, 평범한 서민들까지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서사를 가지고 있다. 선하든 악하든 호감이 가든 가지 않든 각자의 개성과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 작가가 자신과 동시대를 살아간 인물들을 깊이 관찰하고 그들을 깊이 이해하지 않았다면 이런 디테일이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톨스토이는 당시 러시아의 사회상을 이 소설 하나로 압축시켜 100여 년 뒤의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또한 네흘류도프를 통해 개인의 삶과 사회를 어떻게 개선할지에 대한 작가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하지만, 네흘류도프를 완전무결한 캐릭터로 만들지 않았다. 네흘류도프는 카추샤와 반강제적으로 성관계를 갖고 카추샤가 임신했을 때 책임을 지지 않았다. 뒤늦게라도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카추샤를 책임지려는 행동 자체는 바람직한 것이지만, 그조차도 "저 세상에서도 
나를 미끼로 자신을 구하려는 거죠."(1권 p. 271.)라는 카추샤의 말처럼 네흘류도프 자신의 갱생을 위한 수단으로 보인다. 또한 그는 농민들에게 헐값으로 영지를 분배하고, 카추샤가 있는 감옥 사람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고관들에게 청원하면서도, 아름다운 귀족 유부녀의 유혹에 흔들린다. 집과 재산을 처분하고 카추샤를 따라 시베리아로 떠난 뒤에도, 그는 지방 관리의 저택에 머무르면서 다시 편안하게 지내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금욕적인 삶을 살면서도 딸들에게 오늘 무도회는 어땠냐고 물어보면서 상류사회에 여전히 매혹되었던 톨스토이 자신도, 새롭게 살고 싶어도 번번이 제 자리로 돌아오는 우리 자신도 그와 닮았다.

  
네흘류도프의 생각이 반영되고 네흘류도프의 생각을 실천하는 수단에서 한 인간으로 자립하는 카추샤의 변화도 인상적이다. 네흘류도프의 회심과 갱생에 비하면 카추샤의 변화는 소설 안에서 그리 많은 분량으로 다루어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가정이라는 틀 안에 머물렀고 자기 사상을 가지지 않았던『전쟁과 평화』의 나타샤와『안나 카레니나』의 키티와 달리, 카추샤는 네흘류도프의 도움, 정치범들과의 관계를 통해 눈을 뜨고 성장한다. 나타샤와 키티가 귀족 집안 아가씨였던 반면, 카추샤는 창녀 일까지 하면서 밑바닥 인생을 살아왔기 때문에 오히려 부조리한 현실과 혁명의 필요성을 더 잘 인식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남주인공들과 맺어졌던 이전 작품들의 여주인공들과 달리, 카추샤가 네흘류도프와 맺어지지 않는 것도 신선하다. 네흘류도프와 카추샤의 실제 모델들은 결혼했고, 초고에서 네흘류도프와 카추샤는 결혼했다고 한다. 그러나 완성작에서 카추샤는 네흘류도프와 이별하고, 함께 시베리아로 이송되었던 혁명가이자 정치범인 시몬손과 결혼한다. 작가가 직접적으로 말했듯이, 네흘류도프가 카추샤에게 갖는 감정은 사랑이라기보다 부채감과 의무감이었지만 시몬손은 지금 있는 그대로의 카추샤를 사랑했다. 네흘류도프를 떠나보내고 자신의 인생을 새롭게 시작할 만큼 카추샤는 성숙했다. 그렇기에 그들의 이별이 슬프지 않았다.

  그리고
 카추샤와 여성 정치범들은  톨스토이 소설 속 여성 캐릭터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톨스토이는 작품 속 여성 캐릭터들을 가정에만 머무르게 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가정의 가치를 지키지 않는 여성 캐릭터들을 단죄하는 것 때문에 비판 받는다. 그러나『부활』 속 여성 정치범들, 여성 혁명가들은 남성 동지들과 동등한 관계이고 스스로 생각하고, 서로 유대한다. (혁명가였던 남편을 사랑해서 그의 사상을 따라 혁명에 뛰어든 여성 혁명가도 있지만, 그녀는 남편과 떨어져서도 힘든 투쟁을 계속한다.) 특히 마리아 파블로브나 시체티니나는 분량이 적은 조연이지만, 주체적이고 총명하면서도 독선적이지 않고 사랑이 많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캐릭터이다. 그녀는 귀족의 딸이었지만 어릴 때부터 평민들에게 깊은 애정을 가져 왔고 그들의 부당한 처지에 의문을 품어 혁명가가 되었다. 그녀는 강자들에게는 담대하고 약자들에게는 따뜻하며, 결혼과 가정이라는 틀 안에 갇히는 것을 거부한다.  톨스토이가 이런 여성 캐릭터들을 만들었다는 것이 놀랍고,『부활』 이후 톨스토이의 작품들에서도 이런 여성 캐릭터들이 나오는지 궁금해진다. 

  톨스토이가 소설을 자기 사상을 설명하는 도구로 삼는 것에 거부감을 가질 수도 있고, 그가 말하는 사상에 공감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날카롭게 그 시대의 문제점을 통찰했고, 그 시대 사람들에 대해 애정을 갖고 그들이 더 나은 세상에서 살아가게 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소설 자체의 문학성도 놓치지 않았다. 등장인물들, 특히 여성 캐릭터들의 성장과 유대에 있어서는 전작들보다 성숙한 면을 보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적어도 내게 『부활』은 설교 이상의 가치를 지닌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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