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카를로스 - 희곡 대산세계문학총서 78
프리드리히 폰 실러 지음, 장상용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스포일러 포함


이 희곡집에는 잔 다르크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인 '오를레앙의 처녀'와 스페인의 왕자인 카를로스 왕자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인 '돈 카를로스'가 실려 있다.

 

1. 오를레앙의 처녀

-돈 카를로스 이후에 쓴 작품임에도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돈 카를로스의 등장인물들보다 그 깊이가 얕고 평면적이어서 종이인형 같다. 주인공 잔느는 적군의 장군과 사랑에 빠진다는 점만 제외하면 수많은 기독교의 전설들에 나오는 전형적인 성녀이다. 그리고 적장과 사랑에 빠져서 잔느의 캐릭터가 더 입체적으로 변한 것도 아니다. 잔느가 자신이 적장을 사랑한다는 것에 죄책감을 가져, 자신이 마녀로 몰리는데도 아무 변명도 하지 못하는 상황은 답답하기만 하다. 그런데 정작 적장을 만났을 때는 자신의 사랑을 단번에 포기한다. 잔느와 적장 사이의 아슬아슬한 감정, 잔느를 동료로 존중하고 존경하면서도 또한 여자로서 사랑하는 뒤누아 백작의 감정,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잔느를 마녀라고 손가락질해도 변함없이 잔느를 믿고 아끼는 고향 친구 레이몽의 순박한 사랑을 좀 더 풀어갔다면 인물들에 생기가 돌았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너무 멜로에만 치중하게 되나?)

 

- 잔느를 더 영웅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화형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전사하는 것으로 바꾸었는데, 실제 역사대로 화형당하게 하는 편이 순교자적인 면과 비장함을 더 강조할 수 있지 않았을까.

 

- 전해지는 이야기대로 쓰는 것이니 어쩔 수 없었겠지만 잔느의 말에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보인다. 하지만 전지전능해 보이는 잔느도 그녀를 믿지 못한 아버지와 자신의 감정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너무나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실러가 낭만주의 시기의 작가이다 보니 잔느는 그야말로 열혈 소녀이다. 잔느의 대사는 종교적인 열정이 넘쳐나는 문어체 대사들인데, 자연스러운 구어체를 문어체보다 좋아하는 나로서는 좀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번역자 분이 나이 드신 학자여서 그런지 잔느와 언니들, 또는 레이몽과의 일상적인 대사에서는 평범한 소녀로서의 말투는 잘 살리지 못하셨다.


2. 돈 카를로스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는 포사 후작 로드리고이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 전형적인 캐릭터이고 완벽한 캐릭터이다. 꺾이지 않는 올곧은 성품과 자유를 위해 싸우는 용기, 자신을 희생해 카를로스 왕자를 지켜내는 우정 등 완벽한 캐릭터의 전형인데도 오히려 그 점이 매력적이다. 실러도 포사 후작에게 애정을 많이 쏟았는지 주인공인 카를로스 왕자와 엘리자베트 왕비보다 비중도 더 많이 할애한 것 같다. 겉보기에는 카를로스 왕자의 엘리자베트 왕비를 향한 사랑이 중심 내용인 것 같지만 사실은, 포사 후작의 자유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이 중심 내용이 아닌가 싶다. 자유를 향한 열망을 쏟아내는 포사 후작의 대사에 공을 들인 것을 보아,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은 오히려 이쪽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또, 겉으로는 펠리페 왕에게 충성하는 척하면서 펠리페 왕과 카를로스 모두를 속이면서까지 카를로스와 엘리자베트, 네덜란드를 구하는 작전을 펼치는 치밀함이 매력적이다.

 

-그런 포사 후작조차도 "제 아무리 날아다녀도 길지만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 끈"에 한평생 묶여 있었다는 것이 소름이 끼친다. 왕국을 자유에게 물려주느니 파멸에게 물려주겠다는 종교재판장의 대사에서 종교적 독선의 지독한 집요함을 느꼈다. 종교재판장은 후반에만 잠깐 등장하지만, 왕자를 파멸로 몰아넣는 데 직접적인 역할을 한 도밍고 신부와 알바 공작보다도 더 무서운 악역이다.


-주인공인 카를로스 왕자는 주인공이지만 포사 후작보다는 매력이 떨어지는 캐릭터이다. 펠리페 왕과 카를로스까지 속여가면서 치밀하게 카를로스와 네덜란드를 구할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포사 후작에 비하면 실행력도 떨어진다. 그리고 지나치게 감정적이어서 신중함도 떨어진다. 포사 후작이 왕의 자객에게 살해당했을 때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겠지만, 자신을 살리려는 포사 후작의 뜻을 생각해서라도 펠리페 왕 앞에서는 연극을 해야 했다. 그리고 정숙한 왕비로 살려고 했던 엘리자베트의 마음을 돌려놓은 것도 카를로스 왕자가 아닌 포사 후작이었다.

 

- 이 작품은 카를로스 왕자와 엘리자베트 왕비의 사랑을 둘러싸고 일어난 사건들을 그리는 소설이지만, 정작 카를로스 왕자는 엘리자베트 왕비보다는 친구인 포사 후작을 더 아꼈던 것 같다. 그렇게 엘리자베트 왕비에 대한 사랑의 감정으로 괴로워하던 카를로스 왕자는 포사 후작이 죽은 뒤 엘리자베트 왕비에 대한 감정을 놓아버린다. 정작 엘리자베트 왕비가 남편과 딸, 왕비 자리를 버릴 각오를 하고 자신과 함께 하겠다는 고백을 했음에도. 포사 후작을 잃은 후에야 자신의 무모한 열정 때문에 친구가 자신을 희생했고, 그 친구가 자신에게 엘리자베트 왕비보다도 더 소중한 존재였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에볼리 공녀는 치밀하고 악독한 악녀 캐릭터일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생각보다는 그리 독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자신의 사랑이 거절당한 것에 대한 분노 때문에 카를로스 왕자의 적들과 손을 잡았지만 상황이 생각보다 악화되자 카를로스 왕자와 엘리자베트 왕비를 모함하는 데 동참한 것을 후회하고,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 그래 봤자 때는 이미 늦었지만.

 

- 돈 카를로스에 대한 실제 역사 이야기를 찾아보고 나니, 돈 카를로스는 이 작품에서처럼 자유를 위해 싸우고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게 살려 하는 고결하면서도 비극적인 인물이라기보다는 정신장애가 있는 자폐아일 확률이 더 높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정말 선량한 정치적 희생양이었는지 단순한 미치광이였는지는 분명히 알 수 없는 인물인 것 같다.

 

-베르디의 오페라에서는 원작보다 멜로를 더 강화했다. 원작 안에서는 정작 두 사람이 직접 만나는 장면은 많이 나오지 않는다. 반면 오페라에서는 카를로스가 혼사가 성사되기도 전에 약혼녀로 내정된 엘리자베트 공주를 몰래 찾아가 그녀와 사랑에 빠지는 장면이 추가되었다. 그럼에도 오페라를 보는 관객들 중 많은 사람들이 카를로스와 엘리자베트의 사랑보다는 카를로스와 포사 후작의 우정에 더 깊은 감명을 받는다고 한다. 원작에서 포사 후작의 캐릭터와 카를로스와의 우정이 워낙 잘 구축되어 있었으니, 멜로를 보강해도 그를 뛰어넘을 수는 없었던 것 같다.

 

-번역하신 분은 원작에서 모두 독일식으로 바뀐 인명을 프랑스식과 스페인식으로 다시 바꾸는 수고를 하셨지만 좀 더 꼼꼼이 하셨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스페인식 이름인 로드리고로 바꾸었어야 하는데 독일식 이름인 로데리히로 그대로 두거나, 스페인식으로 클라라 에우헤니아라고 해야 할 공주의 이름을 클라라 에우게니아, 클라라 오이헤니아라고 독일식으로 그대로 둔 것, 스페인식 이름인 펠리페라고 하지 않고 필립으로 그냥 둔 것(펠리페 왕은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으로 독일 쪽으로도 관련이 있는 인물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스페인 국왕으로서 스페인식 이름으로 표기되는 것이 맞다.), 프랑스 공주인 엘리자베트의 이름을 영어식 이름인 엘리자베스로 표기한 것이 그 예이다. 그리고 '낫다'를 계속 '낳다'로 말하는 것이 거슬렸다.



                                   한스 홀바인, 사이먼 조지의 초상


                                     산체스 코엘로, 카를로스 왕자의 초상


-책 표지의 우아한 남자의 초상화는 한스 홀바인의 <사이먼 조지의 초상>이다. 홀바인이 카를로스 왕자와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인 것으로 보아, 그의 모델 사이먼 조지도 카를로스와 동시대 인물이지만, 카를로스와 직접적인 관련성은 없는 인물이다. 하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우아하고 기품 있는 인상을 주고 있다. 오히려 실제 카를로스의 초상화에서 느껴지는 카를로스의 인상은 경박하고 야비하다. 실제 역사 속의 미치광이 카를로스와 달리 작품 속의 카를로스는 고결하고 올곧은 인물인 것처럼. 책 표지의 초상화는 작품 속의 고결하고 올곧지만 주변의 중상모략에 시달리는 비운의 왕자의 이미지와 잘 어울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