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티볼리의 고백
앤드루 손 그리어 지음, 윤희기 옮김 / 시공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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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소설 모두 스포일러 있음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보통 책 표지 속의 이 소년이 막스 티볼리라고 생각하게 된다. 겉보기에는 열두 살짜리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고단한 삶을 견뎌온 60세 노인인 막스의 모습을 이 소년의 모습에 겹쳐 보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그림을 보면서 어둠 속에서 그렁그렁한 눈으로 누군가(아마도 앨리스)를 바라보면서, 슬픔을 안으로 꾹꾹 눌러 담고 있는 막스를 떠올릴 것이다.

 

 사실 이 그림은 ‘데니스 매케일의 초상’이라는 그림으로 이 책과는 아무 연관이 없는 그림이다. 그리고 이 그림 속의 소년이 막스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소년은 특별히 슬픈 표정을 짓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큰 중절모 위에 작은 중절모가 얹힌 모호한 이미지의 원서 표지와 달리, 소년의 얼굴을 한 슬픈 막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한국판의 표지는 독자들에게 평생에 걸친 막스의 간절한 마음을 더 절실히 느끼게 해준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나이를 거꾸로 먹는 사람’이라는 설정이 신선하다고 하지만, 이 설정은 이미 스콧 피츠제럴드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서 쓰였던 설정이다. ‘벤자민...’의 주인공 벤자민 버튼은 막스 티볼리처럼 노인의 모습으로 태어나 점점 젊어지는 운명을 타고 났다. 70세까지의 수명을 살도록 예정되어 있고, 겉보기의 나이와 진짜 나이의 합이 70세라는 설정도 같고, 심지어 (소설 속에서) 둘은 동시대를 살아간 인물이다.(막스 티볼리-1871년생~1930년 사망, 벤자민 버튼-1860년생~1930년 사망))

 

 하지만 그러한 운명을 받아들이는 막스 티볼리와 벤자민 버튼의 태도는 정반대이다. 벤자민은 사람들이 자신을 몇 살로 생각하든, 자신의 실제 나이를 그대로 밝히며 살아간다. 그 때문에 같은 또래인 힐데가르드와 결혼할 때도 젊은 여자를 탐하는 호색한 취급을 받고, 대학에 입학하려고 했을 때도 사람들에게 놀림을 받는 수모를 겪는 등의 고충을 겪어야 했다. 반면 막스는 ‘사람들이 네 나이가 얼마쯤이라고 생각하면 그에 맞춰 행동해야 한다.’라는 어머니의 말을 평생 동안 따라온 덕분에 사람들에게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의 진짜 모습을 감추고 사람들에게 보이는 모습대로 살아가야 하는 아픔을 평생 지고 살아가야 했다.

 

 벤자민과 막스 모두 쉽지 않은 삶을 살아왔지만, 더 절실히 와 닿는 것은 막스의 삶이다. 시간의 흐름과 자신의 기이한 운명에 휩쓸려 살아가는 벤자민과 달리, 그 둘의 강력한 힘을 이겨내려고 평생을 발버둥 쳐 왔던 막스의 삶이 더 치열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원숙하다는 이유로 나이든 남자들을 좋아하는 힐데가르드의 취향 덕분에 벤자민은 쉽게 그녀와의 결혼에 골인한다. 하지만 막스는 50대 중년 남성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에 첫사랑이자 평생의 사랑인 앨리스에게 그저 ‘옆집에 사는 친절한 아저씨’ 이상이 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와의 사건에 휘말려 그녀가 떠나고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녀를 볼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자신의 실제 나이처럼 보이는 35세가 되었을 때 기적처럼 그녀를 만난 뒤에야 그녀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결혼까지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 진짜 자신과 자신의 가족, 유일한 친구 휴이까지 버려야 했다. 힐데가르드와 결혼하기 위해 주위의 눈총 빼고는 어떤 어려움도 겪지 않았던 벤저민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벤자민은 자신이 젊어지고 힐데가르드가 늙어가자, 그녀에 대한 사랑이 식어가는 것을 느끼고, 젊은 여성들과 어울리면서 자신의 젊음을 즐긴다. 하지만 막스는 늙어가는 앨리스의 모습조차 너무나 사랑스럽게 여기고, 자신이 젊어지는 것을 들킬까봐 전전긍긍해 한다. 벤자민의 모습은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 사랑이 식고 권태기를 겪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반면 막스의 사랑은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앨리스가 어떤 모습으로 변해가도 변하지 않는다. 앨리스가 그를 사랑하든 사랑하지 않든 앨리스에 대한 그의 사랑은 끝나지 않는다.

 

또 하나 살펴볼 부분은 아들과의 관계이다. 대학교를 중퇴하고 아무 희망도 없이 하숙집 한 구석에서 술만 마시면서 세월을 보내던 막스는, 오랜만에 자신을 찾아온 친구 휴이에게서 앨리스가 자신의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제 그에게는 앨리스와 자신의 아들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그는 그 희망 하나를 붙들고 미국 전국을 휴이와 함께 돌아다니면서 아들을 찾았고, 마침내 앨리스와 자신의 아들을 찾았다. 하지만 이제 그는 열두 살짜리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휴이의 아들 행세를 해야 했다. 자신과 함께 살자는 휴이의 부탁을 매몰차게 거절하고, 그는 앨리스와 아들과 함께 살겠다고 고집한다. 결국 휴이는 그를 위해 자살한다. 자신이 죽어야 고아가 된 막스가 앨리스와 아들과 함께 살 수 있기 때문에. 휴이의 희생으로 앨리스와 아들과 함께 살 수 있게 된 막스는 아들과 친구처럼 지내게 된다. 아들 새미는 막스를 늘 ‘오리 대가리’라고 부르고 ‘잠꼬대를 유난히 많이 하고 늙은이 같은 데가 있는 괴짜’라고 생각하지만, 함께 지내기에 괜찮은 친구로 여기는 듯하다. 막스는 친구의 모습으로라도, 그저 새미의 곁에서 함께 지내고 새미를 지켜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하다.

 

반면 벤자민은 자신의 아들 로스코가 태어나는 것을 지켜보고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는 행운을 누렸지만, 점점 어려지면서 로스코에게 애물단지가 된다. 로스코는 아버지가 자신보다 더 어려지면서부터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을 잃고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 아버지에게 자신을 삼촌으로 부르게 한다. 로스코에게 나이를 거꾸로 먹는 아버지는 혐오의 대상, 자신이 어쩔 수 없이 돌봐야 할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인생의 단 한 순간 친구로라도 아들의 곁에 있을 수 있는 삶과, 자신의 아들과 평생을 함께 하지만 아들에게 애물단지로 전락하는 삶 중에 어떤 것이 더 힘겹고 어떤 것이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또 하나 살펴볼 것은 시간과 운명을 대하는 태도이다. 벤자민 버튼은 자신이 점점 어려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저 시간과 자신의 운명이 흘러가는 대로 살아간다. 그는 어려지면서 점점 자의식을 잃어가고 마침내 아무것도 모르는 갓난아기의 상태로 생을 마친다. 벤자민 버튼의 정신도 나이를 거꾸로 먹기 때문에 그의 정신은 몸의 나이에 따라 흘러간 것이다.

 

 반면 막스 티볼리의 몸은 거꾸로 나이를 먹지만, 정신은 보통 사람들처럼 나이를 먹는다. 그렇기 때문에 점점 어려져도 막스 티볼리의 정신은 어려지지 않고 오히려 점점 성장해 간다. 그는 자신이 아기의 모습이 되어 자의식마저 잃어버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끔찍한 상황에 놓일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이미 그런 상황이 오기 전에 아직 자의식이 남아있을 때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결심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점점 어려지고 있다는 것을 더 이상 앨리스와 새미에게 숨길 수 없는 순간, 그리고 앨리스의 새로운 남편인 하퍼 박사가 앨리스와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한 집안에서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13번째 생일날(실제로는 60번째 생일날) 밤, 아무도 없는 강가로 나가, 작은 조각배에 몸을 뉘였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자신이 아팠을 때 처방전을 조작해 모아둔 약들을 삼킨 뒤 영원의 나라로 떠났을 것이다.

 

 벤자민 버튼이 나이를 거꾸로 먹는 특이한 운명을 가졌지만, 보통 사람들처럼 시간의 흐름에 휩쓸려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면, 막스 티볼리는 그런 자신의 운명과 시간의 흐름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모든 것에 맞서 끝까지 한 사람을 사랑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벤자민 버튼...’이 시간에 휩쓸려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의 나약한 모습을 풍자한 블랙코미디라면 ‘막스 티볼리의 고백’은 시간에 휩쓸려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그에 맞서 평생 동안 사랑하기로 선택해 왔던 인간의 치열한 삶을 담은 일대기이다. 내게 더 와 닿는 것은 후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살아가고 사랑하는 것을 택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늘 나를 감동시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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