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 단편소설 걸작선 행복한책읽기 세계단편소설걸작선 4
얀 네루다 지음, 이바나 보즈데호바 외 엮음, 김규진 외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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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포함


우리가 접하기 어려운 체코 문학을 접할 수 있게 이런 책을 기획했다는 의도 자체가 반갑다. 그리고 주한 체코 대사까지 이 책에 실릴 체코 단편소설들을 채택하는 데 참여했다니 나름대로 공을 많이 들인 책이다. 다만 카렐 차페크의「배우 벤다의 실종」만 체코어 직역이고, 나머지 단편소설들은 영어나 독일어 중역이라는 것이 아쉽다. 체코어를 전공하시는 교수님이 많이 바쁘셨던 건가. 그래도 중역 치고는 번역이 나쁘지 않다.

 

1. 금주인의 밤, 또는 미국식 즐거움(야로슬라프 하셰크)

 풍자소설로 이름을 얻은 작가답게 문장 하나하나가 단순명쾌하면서 재치 있다. 쾌락에 지나치게 탐닉하는 것도 좋지 않지만 쾌락을 지나치게 억제하는 것도 좋지 않은 법. '금주인의 밤' 덕분에 바사타 씨네 술집 매상이 더 올랐다는 촌철살인 같은 마지막 문장으로 깔끔한 마무리를 짓는다.

 

2. 나의 애견 가게(야로슬라프 하셰크)

 같은 작가가 쓴「금주인의 밤, 또는 미국식 즐거움」처럼 단순명쾌하면서 재기발랄한 문장들이 인상적이다. 다만 '나'와 점원 치첵이 하는 짓들은 사기와 동물학대에 가까워 그냥 웃고 넘어가기는 찜찜하다.

 

3. 마이너스 1(이르지 하우스만)

 돈의 가치가 마이너스가 되면서 사람들은 돈에 대한 욕심이 사라지고 오히려 서로 돈을 떠맡기려 한다. 겉으로 보기엔 이타적인 행동이지만 사실은 돈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손해를 보기 때문에 손해를 덜 보려는 이기적인 행동.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을 묘사하고 있지만 인간의 본성을 현실적으로 묘사한다. 다만 주요 등장인물 없이 상황들만 묘사하고 있어 소설이라기보다는 시놉시스에 더 가깝다는 느낌이 든다.

 

4. 프라하 가는 길(마리에 푸이마노바)

 한 소년의 어린 시절의 한 장이 끝나는 모습은 서글프다. 하지만 자라나기 위해서 꼭 거쳐야 할 과정이겠지. 전쟁에서 돌아와 잠깐 동안의 정을 나누었던 아버지와도, 온 세상의 모든 것이 내 것 같이 느껴졌던 시절의 고향, 그곳에서 모았던 자신만의 보물과도 헤어지고 소년은 무엇을 만나게 되었을까. 그들과 헤어지는 슬픔을 묵묵히 참아내며 새로운 것과 만날 준비를 하는 소년의 모습을 보니 먹먹해진다.

 

5. 살로메의 죽음(이르지 카라세크 제 르보비츠)

늙은 살로메라, 상상이 가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는 살로메라면 세례 요한이 죽은 뒤 다른 남자와 결혼하고 나서도 세례 요한의 환상 속에 살다가 권태에 못 이겨서 일찍 자기 목숨을 끊었을 것 같은데. 무엇보다도 자기가 늙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늙기 전에 목숨을 끊었을 것 같은데. 늙고 추해져서 청년에게 사랑을 구걸하는 살로메는 생각지도 못해서 내 머릿속 살로메의 이미지와의 괴리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살로메가 잠시 젊은 시절처럼 빛나던 춤추는 모습은 읽는 나까지 매혹시켰고, 살로메의 마지막 선택은 확실히 살로메다운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6. 리샤네크 씨와 슐레글 씨(얀 네루다)

화자의 생각과 달리 슐레글 씨는 정말 리샤네크 씨가 없어서 활개를 친 것이 아니라, 리샤네크 씨가 없는 허전함 때문에 더 허세를 부렸던 것 같다. 그렇게 오랫동안 미워했다 하더라도, 아주 사소한 것에서 화해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에 미소가 지어지고 마음이 따뜻해진다.

 

7. 물의 정령(얀 네루다)

 그토록 자부심을 가졌던 보석들이 한낱 반짝이는 돌멩이에 지나지 않았지만 '물의 정령' 리바르시 씨에게는 보석보다 더 귀한 마음씨를 가진 사위를 비롯한 가족들이 있었다. 그렇기에 결말은 씁쓸하지 않고 따뜻하다.

 

8. 산속의 기적(이반 올브라흐트)

 남들한테 빵 조각 하나, 1, 2크로나를 구하지 못해 비굴해지던 유대인 바이니시가 사실은 1000크로나나 되는 비상금을 챙기고 있었다는 것이 반전. 그토록 많은 돈을 저축했으면서도 남들에게 구걸하거나 사기를 쳐서 빵조각이나 동전 몇 푼을 구하는 모습이 옹색해 보이지만, 그의 자식들을 향한 사랑만큼은 따뜻하다. 그가 배가 고파 울면서 떼를 쓰는 아이들에게 불러주는 유쾌한 노래에 그의 따뜻한 사랑이 담겨 있다.(하지만 그보다 저축해 놓은 돈으로 아이들이 먹고 싶어 하는 음식을 사 먹이는 게 더 나을 것 같긴 한데.)

 

9. 파우스트 박사의 집(알로이스 이라세크)

 욕심에 빠져 결국 파멸로 이르는 사람을 보여주는 설화 같은 작품. 나라면 하루는 은화를 음식과 생필품, 학용품, 옷을 살 돈, 교통비 같이 생활하는 데 필요한 비용으로 사용하고 하루는 은화를 학비, 학자금대출과 우리 집 빚 갚을 돈, 여행비용, 우리 집을 살 돈으로 저축하겠다. 악마는 무서워서 소환할 엄두조차 못 내겠고, 그저 하루하루 살아갈 돈과 저축할 돈이 있고, (전설만 무섭지 않다면) 안락한 집에서 살 수 있는 걸 감사하면서 살겠다. 하지만 나도 막상 그 상황이 된다면 주인공과 같은 유혹에 빠질지도 모르겠다.

 

10. 붉은 용(요세프 이르지 콜라르)

이야기 짜임새가 탄탄한 작품. 범인의 범행 동기가 자세히 나왔다면 더 좋았겠지만 주인공과 범인 사이의 신경전을 잘 묘사해냈다. 마지막 주인공과 범인의 대결에서는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다만 '로텐 드라헨'은 그냥 '붉은 용'으로, '슈바르첸 무터고테스'는 그냥 '검은 성모'라고 계속 표기했다면 표기의 일관성이 있었을 것 같다. 이런 집의 이름들은 체코어도 아니라 독일어 단어인데, 독일어판 중역이어서 독일어 단어로 표기된 것 같다.

 

11. 악령(지크문드 윈테르)

 내가 어린 시절 괴담집에서 읽었던 고골의 '마녀의 관(棺)' 비슷한 오싹한 괴담일 줄 알았는데, 결말에서 밝혀지는 진상은 싱겁다. 다만 별 것 아닌 거에 겁먹고 하루 종일 죽어라 종만 친 아버지와 하루 종일 종소리에 시달렸을 동네 주민들과 비명횡사한 매(鷹)가 안타까울 뿐이다.

 

12. 외투 논쟁(스바토플루크 체흐)

 우리 고전소설「규중칠우쟁론기」처럼 사물들을 의인화한 작품. 하지만 외투들의 대화라기보다는 그냥 선술집에 모인 사람들의 대화처럼 보이는 것이 아쉽다. 외투로서 사람 몸에 입히고, 땀에 찌들고, 세탁되고, 낡아서 해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애환들을 담아서, 외투의 시각으로 본 주인들의 이야기를 했다면 진짜 외투들의 이야기처럼 실감 나고, 풍자의 효과도 더 컸을 것이다.

 

13. 끝이 좋으면 모든 게 좋다(블라디슬라프 반추라)

자기 아내와 동네 소년이 불륜을 저지른다고 오해를 했다 결국 오해를 풀었지만, 그 뒤 정말로 아내와 소년이 불륜에 빠져 버린 황당한 일을 겪은 주인공.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일을 하려고 하지도, 아내의 마음을 헤아리려고도 하지 않은 채 책과 자신의 지식에 대한 자부심에 빠져 살다 큰 코 다치는 주인공의 모습이 남 같지 않아 씁쓸하다.

 

14. 발자국들(카렐 차페크)

눈길 위에서 갑자기 끊겨버린 발자국에 대한 미스터리를 풀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주인공보다, 새벽 두 시가 넘도록 취객들과 불량배들을 상대하다 사소한 미스터리 때문에 불려온 경감의 애환에 더 마음이 쓰이는 걸 보니, 나도 나이를 먹었나 보다. 고양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하녀가 무슨 꿈을 꾸었는지, 아내가 창문 밖을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우리가 알 수 없는 다른 사람들의 속내도 미스터리한 것이고, 경찰은 미스터리가 아니라 법과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동에 관심을 가진다는 경감의 말이 신선하면서도 속 깊은 말로 느껴진다. 오랜 연륜을 지닌 베테랑 경찰다운 통찰력이다.

 

15. 배우 벤다의 실종(카렐 차페크)

추리하는 과정은 흥미롭지만 그게 끝이어서 '그래서 어쩌라고?'라고 묻고 싶어진다. 증거를 좀 더 모아서 범인을 잡지, 왜 범인한테 진상을 다 이야기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범인한테 해코지당할 수도 있는 데다, 범인은 죄책감에 시달릴 인간이 아닌 것 같은데. 이 책에 실린 단편소설 중 유일하게 체코어 직역이어서 그런지, 표기법이 다른 단편소설들과 다르다. 이 책 안의 다른 단편소설들과 달리 체코어 표기가 표준 외래어 표기법과는 맞지 않는데, 체코어 원본을 직역하신 교수님이 체코어에 가까운 발음이라고 고집해서 그렇게 된 듯싶다.

 

16. 사도(얀 와이스)

다른 사람들 수십 명까지 죽음으로 몰아넣었지만, 노인의 망상은 제 정신인 사람들의 상상력을 뛰어넘는다. 그의 더 없이 화려하고 신비한 망상은 암울한 포로수용소의 현실을 잊고 싶은 사람들을 홀렸다. 이래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초현실주의자들, 표현주의자들이 정신병자들이 그린 그림들에서도 영감을 받은 걸까. 분명히 건강하지 못하고 위험하지만 매혹적인 상상이다.

 

17. 복사꽃 정원의 행복(율리우스 제이에르)

 액자 속의 이야기는 중국의 괴담집『요재지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야기 두 개를 엮어 놓은 것 같다. 적어도 작가가 살았던 시대에 유럽에 들어온 중국 문학 여러 편을 읽어보고 쓴 듯하다. 주인공들 이름이야 작가가 의도한 원래 한자를 알 수 없으니 한자로 표기할 수 없지만, 근대 이전의 이야기이니 무제(武帝)나 성제(成帝) 같은 중국 고유명사들은 한자음으로 표기해 주고 한자도 병기했으면 좋았을 걸.

 

 그리고 중국 고사나 한시에 대한 주석도 좀 더 꼼꼼히 달아놓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예를 들자면 밍에가 소년(움브리아니의 전생)에게 떨어뜨린 부채에 적힌 시는 한나라 성제의 후궁 반첩여의『원가행(怨歌行)』을 살짝 변형시킨 듯하다. 반첩여의 원가행도 주석으로 함께 적어놓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데 액자 속 이야기에 나오는 시들은 한시(漢詩)라기엔 너무 직설적이고 주저리주저리 말들을 늘어놓고 있어서 함축적이지 못하다. 한시라면서 비유와 상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루비, 사파이어, 커튼보다 홍옥, 청옥, 장막 같은 한자어를 썼다면 동양 이야기라는 느낌이 더 잘 살았을 것이다. 루비, 사파이어, 커튼 같은 서양 언어의 단어들이 나오니까 서양인이 만들어낸 동양 이야기라는 느낌이 더 강해진다.

 

 요재지이에서 볼 법한 흔한 이야기이지만 그래도 중국 드라마로 만들어지면 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카시아 나무로 만든 금(琴)은 들어보진 못했지만 버드나무로 만든 유금(柳琴)이라는 악기는 있다니 소년의 그림 속 어머니 이름은 유금이었을 것 같다. 특히 금과 달리 유금은 이 책에서 말하는 '류트'와 모습이 비슷하다. 유금의 중국어 발음은 책에 나온 라오친이 아닌 류친이긴 하지만. 그리고 밍에는 명아(明娥) 정도? 밍은 밝은 명(明) 자일 가능성이 높고 에(e, 중국어 병음으로는 어에 가까운 발음이다.)가 병음인 한자 중에서는 여자 이름에 쓸 만한 글자가 고울 아(娥) 자이다. 아, 그리고 작가는 소년의 이름을 '황제(黃帝)'라고 지었지만, 나라면 황제(黃帝)의 본명인 헌원(軒轅)이라고 지었을 것이다. '황제(黃帝)'는 이름이라기보다는 군주에게 붙인 시호이고, 황제(皇帝)와 발음이 같아서 불경한 느낌도 있으니까.

 

 이런 설화를 많이 봐서 그런지 액자 속 이야기는 전개가 눈에 훤하게 보였다. 소년의 아버지는 결국 아내가 일러준 금기를 어겨서 아내와 이별하겠구나, 밍에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겠구나. 그 정도로 정교하고 화려한 유물을 지니고 있던 걸 보면 밍에는 이전 왕조 황제의 후궁이나 궁녀였는데, 평생 동안 황제의 눈에 띄지 못했거나, 황제의 총애를 받았다가 잃어서 평생을 외로워하다 젊은 나이에 죽은 여인의 혼령인 것 같다. 정에 굶주려 자신과 사랑할 사람을 찾다 마음에 드는 소년을 홀린 거겠지. 자기 무덤 근처를 지나가던 소년을 홀린 것도 아니고 태수의 행차를 따라가 저자 거리의 가게에 있는 소년을 찾아낸 데다, 소년이 자신에게 호기심을 가질 수 있도록 이따금씩 소년의 앞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그 집념이 참으로 무섭다. 소년은 밍에와 헤어진 걸 안타까워했지만 조금만 더 지났더라면 밍에한테 정기 다 빨려서 죽었을 것 같다. 밍에와 헤어진 뒤에도 소년은 밍에를 찾는 일에만 시간을 허비하다 죽었을 것 같지만 말이다.

 

 내 생각에는 이 이야기가 움브리아니의 진짜 전생 이야기였을 확률보다는 움브리아니가 중국 여행에서 듣거나 책에서 읽은 중국 설화들을 가지고 자기를 대입시켜 망상하다가 만든 이야기였을 확률이 더 높을 것 같다. 환상에 빠져 사는 남편에게 집 지키는 개 취급이나 받는 움브리아니의 아내가 가여울 뿐이다. 그래도 꽤 그럴 듯하게 만들어낸 중국풍 이야기이다. 나카시마 미카의 '벚꽃이 춤추며 질 때'를 리메이크한 중국어 노래인 '부생미헐(浮生未歇, 덧없는 삶은 끝나지 않았네)'이 이 단편과 잘 어울린다.

 

18. 꿈을 이룬 정원(얀 하블라사)

「복사꽃 정원의 행복」처럼 동양의 정원이 주 소재로 나오는 단편이지만, 중국 설화에 가까운「복사꽃 정원의 행복」과 달리 담담한 수필 같은 소설이다. 적막하고 고요하고 담담한 일본 단편 소설의 느낌과 비슷하다.「복사꽃 정원의 행복」보다는 주석을 꼼꼼하게 달아놓았다. 일본어 문장에는 일본어 원문까지 함께 써 놓았다.

 

19. 우리는 다섯 명이었어(카렐 폴라체크)

사실 이 소설은 단편소설이 아니라 장편소설 중 두 개의 에피소드를 뽑아온 것이다. 이 에피소드들만으로는 주인공 소년과 친구들의 캐릭터와 관계에 대해 깊이 알 수는 없지만, 천진난만한 소년과 친구들의 이야기가 잔잔한 웃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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