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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입은 영혼의 편지 - 아우슈비츠에서 희생된 유대인 여의사 릴리가 남긴 삶의 기록
마르틴 되리 지음, 조경수 옮김 / 북스코프(아카넷) / 2010년 2월
평점 :
품절
<안네의 일기>가 오랫동안 사랑받으며 "명작"의 반열에 오른 이유는, 그 이야기가 허구가 아닌 가장 참혹한 시대를 살았던 가장 순수한 소녀의 "진실"을 담은 일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도저히 희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환경에서 그들만의 생활을 만끽하고 재미를 찾아내었던 소녀의 진실한 내면을 읽을 수 있기 때문에. 비록 그 소녀는 살아남지 못했지만 어쩌면 그렇기에 더욱 그 애절함이 짙게 느껴지는가 보다.
<안네의 일기>를 제외하고는 <쉰들러 리스트>를 비롯한 많은 영화나 소설 속의 제 2차 세계 대전 이야기는 대부분 "살아남은 자"의 이야기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므로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볼 때... <<상처 입은 영혼의 편지>>는 무척이나 귀중한 역사적 자료로 보인다. 어느 날 갑자기 게슈타포에게 잡혀가 브라이테나우 수용소로 끌려가버린 어머니와 뒤에 남은 다섯 자녀들. 이들은 "가족"으로 남기 위해 500통이 넘는 서신 교환을 했고 그 편지들이 어머니와 자식들을 깊게 이어주고 있다.
책은 릴리의 탄생에서부터 그녀가 처음 사랑에 빠지고 열렬하면서도 전적인, 그녀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남자 친구 에른스트와의 관계와 결혼에 이르는 과정이 앞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녀는 비유대인이면서 순수 독일 혈통인 에른스트와 결혼함으로서 나치스의 쓰레기 소거 작전에 휘말리지 않을 확률이 높았음에도 죽음을 면치 못했다. 이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선 에른스트의 성향과 릴리와의 관계를 설명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릴리는 엄마 같은 여자친구였고, 에른스트는 가엾은 불운아처럼 굴었던 것이다."...41p
"아마데, 사랑하는 착한 아마데, 나를 이대로 놔두면 안 돼? 나는 나를 바꿀 수 없고 당신도 나를 바꾸지 못해. 당신은 나를 이를테면 한나처럼 단순하고 소박한 사람으로 만들 수 없어. 나 자신은 침착함과 명료함을 추구하고 그것을 얻고자 하고, 내 안의 여성스럽고 모성적인 부분을 전부 존중하고 나의 가장 멋지고 좋은 점으로 가꾸고 있어."...57p
많은 교육을 받고 의사 면허 시험에까지 합격한 박사학위 의사로서, 또 그렇게 되기까지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은 여성으로서 릴리는 무척이나 명랑하고 진취적인 삶을 지향한 것으로 보인다. 에른스트의 계속된 불만이나 고집에도 불구하고 나치스 정당의 횡포가 본격화되고 마을에서 이들 부부가 고립되기 전까지는 확실히 멋진 여성으로서의 릴리를 상상할 수 있다.
릴리의 편지는 남자 친구 에른스트에게 그리고 결혼 후에는 만하임의 친구들이나 조카이면서 절친했던 로테에게, 수용소로 잡혀간 후에는 자신의 다섯 아이들에게 보냈던 것들이다. 똑똑하고 책과 음악, 연극 등을 사랑하는 이 진취적인 여성이 어떤 식으로, 어떤 사건들로 조금씩 움츠러들고 겁에 질리고 상처받아가는지를 .... 너무나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자신의 잘못도 아닌, 그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마을에서 사회적 보이콧을 당하고, 아이들도 학교에서 쫓겨날까...남편의 사회적 지휘가 낮아질까 노심초사하는 릴리의 마음이 아주 잘 이해된다. 이 모든 것들은 릴리의 편지를 통해서 알 수 있고 그렇기에 모든 것은 진실이며 역사적 사실이 될 수 있다. 그 당시 독일인들의 심리를 아주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어머니한테 하는 짧은 질문과 소식 전달에만 국한되었던 편지들이 곧 점점 일기문의 특성을 띠게 되었고, 릴리는 편지들을 읽고 아이들의 일상과 걱정거리, 작은 기쁨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었다. "...199p
어머니로서 하루아침에 아이들을 버려둔 꼴이 된 릴리는, 수용소에서 아이들의 편지를 위로 삼아 하루하루를 견뎌낸다. 아이들은 어머니와의 유대감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 이틀에 한 번씩 편지를 보낸다. 어머니에게 자신들이 겪은 모든 일을 편지에 담음으로서 이 편지들 또한 생생한 증언이 되고 있다. 영화나 상상으로만 겪은 전쟁의 참상이 아닌, 아이들이 직접 보고 듣고 겪은 모든 것들이 담겨있다.
책은, 릴리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옮겨가며 아이들에게 보낸 편지를 끝으로 맺고 그 이후의 상황을 간략히 소개하고 있다. 이것은 릴리의 생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남겨진 아이들의 분투기이기도 하다. "편지"라는 매개체로 이어진 이들 가족의 생생한 역사이다. 그리고 전쟁이 남긴 참혹한 진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