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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나는 유독 관능이나 욕망 같은 것들을 다룬 소설들이 불편하다. 대개는 옳지 않은 관계들을 그리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고리타분할 정도로 융통성 없는 나는 언제나 사람은 바른 생활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목사가 어린 소녀를 스토커처럼 사랑하거나(내가 읽었던 가장 끔찍한 소설이었다.) 나이 든 사람이 어린 소녀들을 유린하는, 그런 내용을 접하면 온 몸에 소름이 돋는다. 나 또한 어린 소녀 시절을 거쳐왔고 내 아이 또한 어린 소녀 시절을 거쳐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17살 소녀를 욕망하다"라는 <<은교>>의 홍보성 카피는, 그 작가가 아무리 박범신이라 하더라도 이 소설을 읽고 싶지 않게 만드는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그래도 이 소설을 집어들었던 이유는... 친구의 말 한 마디 때문이었다. "그게 다가 아니야~!" 라는 말.
"한은교를 사랑했다는 것과 서지우를 죽였다는 이적요 시인의 고백은, 관능적이다, 라는 마지막 문장과 강력하게 맺어져 있다고 느꼈다."...19p
그랬다.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소설은 70세의 이적요 시인이 죽고 일년 후, 그의 유언에 따라 변호사가 시인이 남긴 노트를 읽으며 시작된다. 그 노트에는 어떤 내용들이 담겨 있을까. "곧은 정신, 높은 품격, 고요한 카리스마 등으로 둘러 싸인, 대중들이 품은 시인 이적요에 대한 일반적 이미지"(...69p)를 모두 깨뜨릴 수 있는... 진짜 시인 이적요가 담겨 있다. 사실 그가 문학계를 어떻게 유린해 왔는지, 제자 서지우가 베스트셀러의 작가가 된 배경, 어린 소녀 한은교를 사랑하게 된 계기 등. 그리고 시인이 죽기 6개월 전 교통사고 사망한 서지우의 일기가 소녀 한은교를 통해 변호사에게 전해진다.
스승과 제자가 한 소녀를 놓고 사랑 싸움을 벌이는 듯한 인상을 주던 이 소설은, 사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놓인 애증의 관계를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 두 사람의 표면적 평화가(사실은 서로가 서로를 보살필만큼 절실한 애정을 바탕으로 하였으나...) 은교의 등장으로 인하여 어떻게 금이 가고 어떻게 서로를 불신할 수밖에 없었는지. 은교를 사이에 둔 이 두 사람의 내적 갈등은 그야말로 처절할 정도이다. 놀라웠다. 이토록 사람의 마음을 철저하게 파헤칠 수도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심리는 모든 것이 까발려져 함께 파멸에 이르는 순간을 원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끔찍이 두려워했다는 점이었고, 그 이중성은 우리 사이에 치명적인 요소가 됐다. "...148p
그것이 다인가. 그렇지 않다. 이적요 시인이 은교에게 느낀 그 감정은, 바로 사랑 그대로이다.
"나는 어느 한때 그애를 욕망으로 보았고, 또 한때 그애를 덧없이 흘러간 내 청춘의 마지막 보상으로 보았다."...235p
"그것은 고요한 욕망이었다. 한없이 빼앗아 내 것으로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아니라 내 것을 해체해 오로지 주고 싶은 욕망이었다. 아니 욕망이 아니라 사랑, 이라고 나는 처음으로 느꼈다. 비로소, 욕망이 사랑을 언제나 이기는 건 아니라는 확고한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다."...311p
이 세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또, 어떻게 이해하지 않을 수 있을까. 누군가를 너무나 사랑해서 죽여서라도 그의 명예나 자존심을 지켜주고싶은 그 관계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렇게 두 사람이 죽고 소녀만이 남았다. 소녀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인간의 욕망과 그 끝없는 갈증을... 끝까지 본 듯하다. 그러고나니 왠지 사람의 삶이라는 것을, 늙어감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한동안 내가 너무나 좋아하여 지금도 핸드폰 벨소리로 지정해놓은 노래를, 소설 속에서 마주쳤다. 아! .... 누군가에게 전화가 올 때마다 이적요 시인이 받았을 젊음에 대한 상처가 생각날 것 같다. 나 또한 매일매일 늙어가고 있음을 기억하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