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버 보이
팀 보울러 지음, 정해영 옮김 / 놀(다산북스)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에게는 누구나 시절을 관통하는 꿈과 목표라는 것이 존재한다.  어린시절에는 그저 원하고 갈망하는 것들을 꿈이라 부른다. 그리고 현실적인 제약에는 크게 신경쓰지 않을채, 나는 언제고 그것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믿을 가지고 살아간다. 생각해보면 참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밑도 끝도 없이 미스코리아가 될거라고 호언장담을 하고, 초등학교시절 장래희망란에는 반에서 10명 넘는 아이들이 대통령이 꿈이라고 큰소리로 자랑스럽게 말하곤 하니, 도대체 아이들에게 꿈은 무엇일까? 나이가 먹고 점점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어린시절의 꿈을 회상하라 말하면 십중팔구는 이미 괘도수정을 하고 조금 더 낮고 조금 더 실현 가능한 꿈을 말한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꿈은 꿈이 아니라 그저 목표가 되어버린다. 완전한 성인이 되어 어린시절을 회상할때 누구나 가장 가슴아파하고 아쉬움을 담는 것은 그래서 꿈이 아닐까 싶다. 꿈이 꿈이 아닌 목표가 되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땅에 발을 딛고 걸어야 하는 평범한 인간으로 살아가게 때문이다.

 

어린시절 하늘을 날고 싶었던 나의 꿈과 강을 헤엄쳐 나가고 싶었던 그의 꿈

<리버보이>에는 3명의 주인공이 나온다. 제시와 그의 할아버지, 그리고 리버보이. 이야기의 끝에 가서야 자신을 알게 하는 리버보이는 알 수 없는 힘으로 제시를 강으로 끌어내고, 제시는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리버보이와 함께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헤엄치며 그를 이해한다. 그리고 리버보이의 정체를 아는 순간, 그녀가 해야할 마지막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 할아버지와 손녀의 마지막 교감은 그렇게 끝없이 소원했던 할아버지의 어린 시절 꿈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어린시절의 꿈이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조금은 허무맹랑하고 실현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 그 꿈에는 어떤 힘이 있길래 끝없이 성장하는 가운데에서도 뒤를 돌아보게 만드는 것일까? 이제는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는 그저 '꿈'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지금에도 사람들은 끝없이 어린시절을 회상하며 그 시절의 꿈을 그리워 한다. 그리고 그 꿈을 통해 자신이 꾸고 있던 지금의 시간을 살피게 된다. 어쩌면 일생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이자 최후에 닿고자 하는 목적지가 그 꿈 속에 들어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하늘을 날고 싶하던 나의 꿈에 자유로운 인생을 살고 싶은 목표가 들었있었듯이 말이다. 그리고 <리버보이>의 강을 헤엄쳐 나가고 싶었던 꿈에, 영원히 삶을 유영하고 싶었던 꿈이 녹아있는 것처럼 말이다. 제시의 할아버지가 <리버보이>로 남아 인생의 마지막에서 손녀와 함께 해냈던 마지막 꿈은 어쩌면 그렇게 평생의 삶을 이끌어온 원동력이 되어주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꿈으로 살아가는 수 많은 리버보이들에게

책 속의 구절처럼 항상 아름답지만은 않은 삶 속에서 사람들은 인생이라는 강을 따라 흐르는 동안 많은 일을 겪게 된다. 때로는 웃고 때로는 눈물 짓는다는 흔하디 흔한 표현처럼.. 때로는 행복을 느끼고 때로는 절망에 무릎꿇고 하염없는 눈물을 쏟아내는 때도 오게 되지만..그래도 멈추는 법 없이 인생의 강은 그렇게 끝을 향해 흐르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렇게 인생을 살아가며 어딘가로 달려가는 사람들에게.. 멈추지 않고 흘러가게 하며 절망해도 다시 일어서게 하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살아가며 어린날 꾸었던 바로 그 꿈과 모양새는 달라지고 과정은 조금 복잡하게 얽히게 될지라도.. 결국 사람들이 향해 가는 것은.. 어른이 되어 현실과 타협하며 바꾸고 포기한 새로운 어떤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바로 그 때에 어떤 것과도 타협할 필요없이 막연히 꾸었던 바로 그 꿈이 아닐까?

 

그 꿈에서 어린날의 자신이 태어났듯..
그 꿈의 완성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준비를 끝마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바다에 도달하면, 다시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날 준비를 하지.
그들에겐 끝이 시작이야.
난 그 모습을 볼 때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껴."』

 

제시의 할아버지는,
강의 시작점부터 바다까지 흘러가고자 하던 어린시절의 꿈을 이루고 편안함을 느끼며 또 다른 리버보이로 태어나기 위해 준비를 마치셨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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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
엘리자베스 히키 지음, 송은주 옮김 / 예담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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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역사적으로 실존하는 인물의 살아온 삶에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진 이런 책들은 만날때마다 새로운 즐거움과 호기심을 가져다준다.

마치 역사 속 시대를 풍미했던 왕들과 그 주변의 이야기를 새롭게 각색하고 더해 화면에 풀어놓는 시대극이나 사극처럼말이다.

이런 글이나 영상들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하고, 실제 벌어졌던 사건들에 상상력을 더하기 때문에 뭔가 더 현실적이고 실감나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때로는 그저 재미있기도 하지만 때로는 우리의 지식에도 꽤 도움을 준다는 여러가지 이익을 주기도 한다.

물론 가끔은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상상인지 구분이 되지 않아 알던 것 까지도 헷갈리게 하는 부작용이 있긴 하지만..

나도 이런 역사소설들을 이런 이유에서 참 좋아하는 편이다.

이제까지는 주로 우리나라의 왕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많이 읽어왔었는데 이번에 선택한 책은 바로 이 책 클림트였다.

황금빛의 그림을 그리고, 그 그림들에 얽혀 수많은 이야기들을 남겼다는 클림트.

소설속의 클림트의 이야기는 대부분 그의 곁을 가장 오래 지켰다는 여인 에밀리와 클림트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그 이야기들을 통해 클림트의 평소 사고나 생각들을 엿볼 수 있는 즐거움 또한 담고 있다.

 

책의 주인공인 에밀리는 아주 어린나이에 클림트를 그림 개인교사로 만나 한 평생을 그의 곁에서 보내고 그의 사후까지 그를 기억하고 추억하는 한국적 의미의 열녀에 가까운 여성이다. 물론 어린날 단 한번 클림트를 제외한 한번의 연애를 경험하였다고 나오긴 하지만 그저 어린날의 호기심 어린 풋사랑에 지나지 않으며 그 이후 많은 여성들을 전전하는 클림트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자신의 자리를 지켜나가는, 어찌보면 유혹에 약했던 클림트 보다는 훨씬 우직하다시피한 여성이다. 그녀는 클림트를 바라보며 꿈을 그리고 클림트를 통해 꿈을 이루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으로 그에 대한 마음을 보상받는 법을 스스로 터득해나가는데, 그 과정을 읽어내려가는 것은 사실 같은 여성으로서는 살짝 화가 나는 부분이기도 했다. 여성이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고 여성이기 때문에 공감할 수 밖에 없는 이 책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아마 작가가 여성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한켠에 살짝 들었던것 같다.

 

책을 통해서 클림트를 알기에는 아마 무리가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엄연히 소설이고 클림트의 작품세계를 다룬 것이 아니라 그의 연애사를 주요 소재로 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 유명한 클림트라는 한명의 작가가 가졌던 평범한 한명의 남성으로서의 의미,

그리고 그가 사랑했던 여인 에밀리를 통해 읽고 있는 사람 스스로의 모습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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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리플레이 판타 빌리지
켄 그림우드 지음, 공보경 옮김 / 노블마인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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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학창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처음으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딛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20대로 돌아갈 수 있다면, 30대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한번 흘러가면 돌아오지 않는 시간에 대한 인간의 집착은 그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느껴지기에 생기는 것일지도 모른다. (앞으로는 어찌 될지 모르는 일이지만..)현재는 불가능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힘. 그럴 기회가 나에게 주어진다면 내 인생도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안타까움.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보았을 법한 이 이야기가 바로 소설 <다시 한번 리플레이>의 내용이다.


내 인생을 다시 한번 살 수 있다면.. 단!

인생을 다시 한번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는 지금의 나의 인생보다는 조금 더 나은 삶을 살고 싶다는 바람이 담겨있다. 그리고 그렇게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한가지의 전제가 필요하다. 바로 지금의 인생에서 내가 살았던 바를 모두 기억해야 한다는 점이다. 지금의 내 모습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알아야만 과거로 돌아갔을때 나에게 부정적으로 작용했던 일들을 제거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리플레이>의 주인공 제프에게 바로 이런 요건이 갖추어진 다시 살 수 있는 삶이 주어진다. 물론 부작용은 있다. 단 한번의 삶이 아니라 계속해서 재생되어지는 삶이기에 그가 한번의 인생으로 만들었던 모든 결과들이 0으로 돌아간다는 점이다. 더 매력적인 여인과의 사랑, 더 이상적인 가족,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것만 같은 그의 아이들까지.. 모두가 그의 인생이 끝을 내고 시작되는 그 시점에 0으로 돌아가버리는 것이다. 그는 끝없이 삶을 살고 새로운 삶을 얻지만, 모든 것을 잃고 어떤 것도 소유하지 못한다.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은 상실에 대한 절망으로 바뀌고, 어떤 것도 해서는 안되며 할 수도 없다는 무기력함으로 그를 서서히 내몰아간다. <다시 한번 리플레이>는 그렇게 그저 즐거운 무한 반복의 새로운 삶이 아니라 그런 삶에도 인간은 고뇌하며 언제나 무엇을 얻는 대신 잃기도 해야한다는 논제를 던진다.


끝내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저...

<다시 한번 리플레이>의 제프는 결국 최초의 삶을 이어가게 된다. 수없이 반복했던 그 많은 삶들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채.. 그리고 존재했는지 아니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그 인생의 기억들이 영원이 존재하지 않게 되어버린 상태에서의 시작. 0이지만 0이 아닌 상태에서 다시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삶을 이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제프는 설레임을 끌어앉는다. 이제는 다시 되풀이 되지 않을 그 최초의 삶에서 그가 예측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그는 자유로워진것이다. 이제 정해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0의 순간에서 그는 다시 날아오를 수 있는 자유를 안고 살아갈 것이다. 인간이 그렇게 아무것도 없는 어둠속에서 빛을 찾아 날아가기 위해 늘 애를 쓰듯.. 그도 똑같은 방법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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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rteen 써틴
세바스찬 보몬트 지음, 이은정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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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들의 장르란 참으로 다양하다. 큼직큼직하게 장르를 구분하자면 대충 몇가지 종류로 나뉘어질 수는 있겠지만 그 장르들 안에서도 책들이 가지는 분위기란 다들 다른 것인지라 같은 로맨스 소설을 읽어도 어떤 책들은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어떤 책들은 희미하지만 여운이 남는 흔적들을 남긴다. 장르의 구분이란 그래서 때로는 너무도 모호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불필요하거나 무의미하다는 생각까지도 들게 한다. 어짜피 이야기를 담은 책이란, 그 책만의 독특한 느낌과 분위기로 그 책만의 장르를 가지게 되는 것이니 말이다.

 




분위기를 알 수 없는 이야기. 써틴.


13이라는 숫자가 가지는 의미는 이제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우리는 13보다 4를 불길하게 여긴다지만 지금이 어떤 시대인가. 글로벌 시대 아니겠는가. 덕분에 13은 4만큼이나 우리에게도 불길함을 나타내는 상징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할만큼의 인지도를 확보하고 있다. 물론 아직 우리나라에는 13층도 있고 13번지도 있고 13번 버스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이미 널리 알려진대로 13의 의미가 불길하고 아름답지 못한 탓에 이 책 <써틴>은 이름만으로도 대강의 장르가 파악되는 첫인상 만큼은 몹시도 친절한 책임에 분명한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제목과 장르의 연관성에서만 느낄 수 있는 친절일뿐! 첫 장을 넘기는 순간부터 그런 친절함은 기대하지 않는것이 좋을 듯 하다. 간단하게 말해서 공포 혹은 추리소설의 분위기를 띄고 있는 이 소설은 좀 더 세밀하게 따지자면 미스테리 심리소설이라는 하나의 단서가 더 붙는다. 피가 낭자하고 살인마가 출현하는 공포소설이라기보단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기억과 무의식의 퍼즐들이 마지막으로 치닫을수록 하나씩 맞아떨어지며 마무리 되는, 그러나 그 마무리에도 뭔가 석연찮은 구석과 알수없는 몽환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참으로 묘한 소설이다. 그리고 뭐라 단정할 수 없는 이 소설의 바로 그러한 분위기가 희안하게도 어떤 강렬한 분위기보다 오랫동안 머리를 어지럽히는 괴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도대체 이 소설을 뭐라고 말해야 하는 것일까?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이끄는 내면의 상처


<써틴>의 주인공 스티븐은 부유한 어린시절을 보내고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 뒤에 아버지가 운영했던 회사를 물려받아 그럭저럭 지내오던 청년이다. 전혀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아버지의 그럭저럭 잘나가던 회사를 물려받은 스티븐은 경제적 여유를 아무런 생각없이 누리며 되는대로 살다가, 변화하는 시장의 형세를 채 파악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더 발전된 형태의 기업 개발품에 우위를 내어주고 파산을 맞게 된다. 회사가 파산을 맞고 나름대로 부유했던 삶에서 순식간에 허름한 지하의 셋방으로 처지가 달라진 그는 친구에게 1년의 시간동안 택시기사를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게 되고, 별다른 의욕이 없던 그는 역시 아무런 생각없이 그 제의를 수락한다. 그렇게 스티븐은 택시를 운전하며 13번가와의 만남을 시작하게 된다. 13번가의 미스테리는 스티븐 이외에는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할 방법도 없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그의 눈에만 나타나는 13번가의 늘 달라지는 건물들과 그곳의 사람들, 실존하지만 실존하지 않는 사람들과의 만남이 이어지며 스티븐은 자신이 잊고 지냈던, 아니 잊으려 무던한 애를 쓰고 끝내는 기억의 저 밑바닥으로 가라앉혔던 상처를 대면하게 된다. 회사가 파산을 맞이한 것 말고도 그의 무의식에서 끝없이 그를 생채기 내고 있던 상처들, 그리고 13번가를 기회로 그가 그 상처를 이겨내는 과정들이 책의 이야기를 가득 채운다.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것은 누구에게나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써틴>의 스티븐은 과거의 과오로 평생을 스스로 괴롭히며 살아가는 상처받은 사람이다. 그조차도 잊고 있었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끔찍한 자신의 실수들, 그리고 그로 인해 빚어졌던 과거의 참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꾸만 세상 밖으로 밀어냈던 스티븐. 세상을 살아가며 세상에서 살아갈 자신이 없다고 스스로를 책망했던 그의 또 다른 자아가 세상을 살아가고 싶다는 삶에 대한 희망과 대립하며 겪게 되는 갈등들이 미스테리한 현상으로 나타나게 되는 이야기. 이 이야기는 그 모양새는 조금 다를지라도 누구나 가슴에 안고 있을 상처를 딛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큰 힘과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인지를 상상력과 미스테리로 이야기 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상처를 잊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마주함으로써 그 상처를 딛고 이겨내야만 한다는 가르침을 더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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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울 아프리카 - 대자연에서 펼쳐지는 사랑과 우정의 서사시
조세프 케셀 지음, 유정애 옮김 / 서교출판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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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자연의 힘은 위대하다, 자연의 섭리는 거스를 수 없는 것이며 거슬러서도 아니된다. 사람들은 자연을 대상으로 그 위대함과 초월적인 힘들을 너무도 간단하게 말하곤 한다. 자연의 힘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자연의 섭리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을 하기 보단 그저 남들이 하는 말들을 무의식적으로 내뱉는 것에 가까운 그 말들.. 그들의 말처럼 자연의 힘이 거대하고 위대한 것이라면, 자연의 섭리는 거스를 수도 없고 거슬러서도 안되는 것이라면 한번쯤은 그 힘이 무엇을 위해 움직이고 있는지, 그 섭리는 어떤 것인지 한번쯤은 멈추어 서서 고민하고 이야기 해보아야 할 것은 아닐까? 자연이 흘러가는 이치에 대해 조금은 관대한 눈을 가지고 지켜볼 여유란 사람들에 없는 것일까?
 
  
 
킬리만자로의 초원, 그리고 소녀
<소울 아프리카>는 킬리만자로의 자연을 집으로 삼고, 초원을 집으로 삼아 살아가는 동물들과 하나가 된 소녀 '파트리샤'와 그녀가 자연을 이해하게 만든 사자 '킹'의 이야기이다. 공원의 관리인인 아버지와 함께 그곳에 거주하며 아주 어린시절부터 동물들과 함께 자라온 아이. 그리고 그 아이가 새끼일때부터 키운 이제는 초원의 왕이 된 사자 '킹', 그 외에도 아직은 사람의 손때가 덜 묻어 자연이 살아있는 그곳만의 사회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이 책 한권을 웅장하고 아름답게 그리고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자연스럽게 만들어낼만큼 거대하게 자리잡고 있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화자는 휴가차 초원의 공원에 들른 여행객으로 파트리샤와 킹의 모습을 본 후 그들의 신비한 힘과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관계에 매력을 느끼고 남은 여행을 취소하며 그곳에 무기한 머무르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누군들 그러지 않을 수 있을까? 광활한 초원의 수 많은 동물들과 자연스럽게 웃고 떠드는 것만으로도 현대의 문명에 젖어 있는 우리에게 신기한 일일텐데, 작은 소녀가 맹수의 왕이라고 불리우는 사자와 웃고 떠드는 것도 모자라 조금은 위험해 보이는 장난을 치고 맹수의 왕을 제압하는 불가사의한 힘을 발휘한다니... 처음에는 그저 관찰자에 지나지 않았던 화자는 파트리샤와 킹의 관계를 점점 이해하고 파트리샤가 속한 애매한 경계(인간과 동물, 문명과 미개)가 가져다주는 그녀만의 혼란을 이해하며 그녀와의 우정을 쌓아간다.
 
 
 
파트리샤, 킹, 그리고 인간
<소울 아프리카>는 엄밀히 말하면 소녀와 킹의 관계를 묘사하여 자연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려는 동화적이고 꿈같기만한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파트리샤를 이해하는 화자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과 동물로 대변되는 자연과 문명의 관계에 대해 조금은 철학적이고 조금은 신랄한 비판을 가하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어른용 동화랄까?
<소울 아프리카>의 파트리샤는 언제나 자연에 속하려하고 킹과 함께 영원히 존재함으로서 영혼의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가 교육을 받지 못해 미개한 인간으로 남게 될까 두려운 나머지 딸의 영혼을 이해하려 하기 전에 외부에서 세워놓은 기준을 맞춰 그녀가 번듯한 성인으로 자라는 길을 강요한다. 파트리샤는 어린 나이에 어머니의 강요와 자신의 희망 사이에서 고민하고 갈등하는 과정을 겪으며 천진하지만 성숙하고, 따뜻하지만 온화한 여러 모습을 갖춘 소녀가 되어간다. 그리고 이야기의 마지막에 자신을 이해하는 가족의 일원인 아빠의 손에 그토록 사랑했던 킹이 죽음을 맞는 모습을 목격하며, 죽음에 대한 상처와 상실감으로 몸부림치며 공원을 떠난다. 누구누구 공주님은 왕자님과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았다는 식의 전형적인 동화와는 너무 다른 이 책이 말하고 싶은 점은 무엇이었을까? 자연과 인간, 그리고 그 중간의 경계에서 늘 고민하고 갈등하며 결국에는 상처받고 현실을 선택한 파트리샤.. 어쩌면 파트리샤는 마음으로는 자연과 하나 되어 조화롭게 사는 것이 옳음을 알면서도, 현실의 이익을 위해 문명을 택하고 결과적으로는 자연을 희생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갈등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결국 우리모두의 마음에는 파트리샤가 있고, 살아가기 위해 매일 킹을 죽이는 상처를 받으며 사는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다시 문명으로 돌아가는 악순환을 반복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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