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바뀐 딸
마크 탭 외 지음, 김성웅 옮김 / 포이에마 / 2009년 9월
절판


당신에게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을 어디에선가 받는다면.. 많은 사람들이 아마도 저의 가족입니다..라고 대답하지 않을까? 나를 낳고 길러주신 부모님, 나를 든든히 지켜준 언니나 오빠, 그리고 나의 보호와 관심을 언제나 사랑스러운 눈으로 기다리는 동생.. 그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래서 그들의 아픔은 나의 아픔보다 더욱 아프고, 그들의 기쁨은 나의 기쁨보다 더욱 기쁘다. 그들이 나의 가족이기 때문에..

사고로 죽은 딸, 사고에서 유일하게 살아난 딸

어느날 두 가족에의 딸들에게 사고가 일어난다. 학교의 버스를 타고 가던 두 가족의 딸은 교통사고를 당하고, 한 가족의 딸은 사고로 즉사를 당하고, 한 가족의 딸은 그 사고의 유일한 생존자로 살아 남는다. 그렇게 두 가족은 사랑하는 딸들의 사고 앞에 슬픔과 기쁨을 동시에 맞는다. 사고로 즉사한 한 가족의 딸은 휘트니 세락, 뉴웰 세락과 콜린 세락의 막내 딸이며 언니인 칼리와 동생인 라이자 그리고 자매와 같은 산드라와 한 가족을 이루며 모든 가족이 한 학교의 동문인, 단란하고 평화로운 가족의 일원이다. 사고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는 로라 반 린, 아버지 돈 반 린과 어머지 수지 반 린의 막내 딸이자, 언니인 리사와 오빠인 케니, 마크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가족의 즐거움이다. 세락 가족은 딸의 죽음앞에 눈물을 흘리고, 반 린의 가족은 사고 중 유일하게 살아난 막내 딸 로리를 간호하기 위해 병원으로 달려간다. 세락의 가족은 막내 딸 휘트니의 영결식을 준비하고, 반 린 가족은 로라가 다시 웃을 수 있게 간호를 시작한다.


다시 돌아온 휘트니, 먼저 하늘로 간 로라.

5주의 시간이 지난후 두 가족에게 놀랄만한 사실이 드러난다. 침상에 누워있는 여학생이 로라 반 린이 아닌 휘트니 세락이라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사고 후 영결식까지 마친 세락 가족에게 휘트니가 살아서 돌아오고, 5주간 온 가족이 매달려 기도하고 간호하며 눈으 을 뜨고 다시 웃어주길 바랬던 로라는 이미 죽은 사람이 되어버린다. 사고 당시 육안으로는 신원을 확인할 수 없었던 처절한 사고, 그리고 죽은 딸의 모습을 차마 눈으로 확인할 수 없었던 세락 가족의 마음, 병원에서 치료를 진행하던 중에도 얼굴을 확인 할 수 없었던 로리의 상태들이 섞여 만들어낸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이야기, 그것이 바로 뒤바뀐 딸의 이야기이다..


아픔을 이겨낸 두 가족의 이야기.

<뒤바뀐 딸>에는 완벽한 행운도 완벽한 행복도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딸이 죽고, 누군가의 딸이 살아 돌아온 이야기는 다시 누군가의 딸이 살아나고, 누군가의 딸은 죽었다는 반쪽짜리 해피엔딩임과 동시에 반쪽짜리 새드무비일 뿐이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렸던 이유는 무엇일까? 누군가의 기쁨이 누군가의 눈물이 되었다면 어짜피 그런 이야기는 세상에 많고 많은 흔한 이야기일 뿐인데 말이다. 아마도 그것은 이 가족들이 슬픔과 아픔을 이겨내는 과정이 주는 특별함에 있을 것이다. 딸을 사고로 잃은 세락의 가족은 딸을 잃은 슬픔을 슬픔만으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자신들이 믿는 종교의 힘을 빌어 안타까움과 사랑의 마음으로 남은 가족들을 위로하는 데에 사용한다. 떠나간 딸이 행복할 것이라 믿고 기도하며 남은 가족들이 슬픔에 빠지지 않도록 배려하는 힘을 발휘함으로써 떠나간 딸에 대한 마음을 달래는 세락가족은 가족을 잃었을때 끝없는 슬픔속으로 자신들을 밀어넣기만 하는 슬픔의 모습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비현실적이지만 그것이 아픔에 빠져 있는 것 보다는 나은 방법임을 느끼게 해준다고 해야할까? 살아남았다고 믿고 있었던 막내 딸 로리가 사실은 휘트니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반 린의 가족 역시 남다른 방법으로 슬픔을 이겨낸다. 그들이 로리의 상태를 기록해 나가던 블로그는 이제 로리가 아닌 휘트니의 일기가 되고 살아남은 휘트니를 자신들의 딸 로리를 보는 눈으로 바라봄으로써 로리에 대한 마음을 다독이고 세락 가족에게도 힘을 주는 배려를 보여준다.


불가능해 보일 것 같은 그들의 힘.

<뒤바뀐 딸>에 나오는 두 가족의 슬픔을 이겨내는 방법은 사실 우리에게는 조금 낯설다 싶을 만큼의 이질감을 느끼게 한다. 충분히 슬퍼하고 더 많이 아파하는 것이 먼저 세상을 떠난 가족에 대한 사랑을 대변하는 것이라 생각해오는 우리의 문화와는 다르다. 그들은 남은 가족들을 위로하고 남아있는 사람들과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에 대한 기억을 나눔으로써 그 슬픔을 다독이니 말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을 떠나간 사람을 그리워하는 상처 속에 묻혀 지내는 것이 과연 그 사람을 위하는 것일까? 남아 있는 사람들은 또 남은 삶을 살아야 하는데 말이다. 어쩌면 오랜 아픔과 상처로 그 사람을 기억하는 것 보다는 그 사람과 나누었던 행복했던 기억으로 그 사람을 기억하는 것이 먼저 떠난 사람에 대한 더 좋은 사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뒤바뀐 딸>을 통해 해보게 된다. 세상을 먼저 떠난 그 사람도 남은 가족을 아낌없이 사랑했던 또 한명의 가족이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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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거나 혹은 버리거나 in 부에노스아이레스
정은선 지음 / 예담 / 2009년 9월
품절


사람들은 일상을 살아가며 힘에 부치거나 탈출하고 싶은 마음이 들때 속칭 '일탈'을 꿈꾼다. 일탈에도 여러가지 모양새가 있겠지만 평범한 이들이 꿈꾸는 가장 평범한 일탈은 대부분 여행이라는 말로 형태를 갖추곤 한다. 왜 하필이면 여행일까? 어느 노래처럼 아파트 옥상에서 번지점프를 한다던지, 신도림 역안에서 스트립쇼를 한다던지 하는 말 그대로 쇼킹한 것들도 많을텐데, 왜 하필이면 여행을 떠나고 싶어하는 것일까? 아마도 내가 속하지 않은 곳, 한번도 속하지 않았던 곳에서만이 누릴 수 있는 막연한 자유에 대한 동경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도 나를 모르고, 나도 그들을 모르기에 전혀 새로운 내가 될 수 있을것이라는 생각, 그 생각이 많은 사람들이 일탈을 꿈꿀때 여행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가장 쉬운 이유가 아닐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일탈을 노래한 그 노래에서도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할일이 쌓였을때 훌쩍 여행을' 떠나라는 것이었다.

지구의 반대편, 모든 것이 낯설고 어쩌면 두려울지 모를 그곳.
사람들은 자신의 영역이 아닌 곳에 갑자기 떨구어지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모를 두려움을 느낀다. 꼭 다른 나라가 아니라도, 말이 통하고 생긴것도 똑같은 한 나라 안에서 길 모르는 외딴 동네에만 가도 길을 잃을까 걱정하고 막연하게 공포를 느끼는 것이 사람이다. 하물며 말도 통하지 않고, 생긴것도 나와는 전혀 다른, 내가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전혀 없을 것만 같은 지구의 반대편이라면 어떨까? 길을 잃을까 걱정하는 차원을 넘어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게 되지않을까? 그런 공포를 무릎쓰고라도 선택하게 되는 지구 반대편으로의 여행. 그 여행에 각자의 사연과 이야기가 담겨 있으리라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알지 못하는 곳을 향하고 있다는 곳에 대한 두려움보다 더한 어떤 것이 그들을 그곳으로 향하게 하고 있을지 모두가 다른 사연을 담고있지만 모두가 바라는 것은 같지 않았을까?

부에노스 아이레스, 낯설음의 그곳.
<찾거나 혹은 버리거나 in 부에노스 아이레스>에는 여러명의 사람들이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게스트 하우스인 게스트하우스OJ에 모여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던 과거를 벗어던지고 새로운 시작을 하기 위한 옷을 갈아있는 과정이 펼쳐진다. 어느날 홀연히 사라진 연인을 찾아 무작정 떠나온 OK김, 막장에 표절드라마 작가라는 오명을 쓰고 세인들의 비난을 견디지 못해 떠나온 나작가, 사랑했던 연인과 헤어지고 삶의 이유였던 사진에 대한 열정마저 되살리지 못해 좌절하는 원포토, 가족을 위해 끝없는 희생을 강요받음에 스스로를 구석으로 몰아넣었던 박벤처의 이야기가 아름다운 아르헨티나의 풍경과 함께 나지막하게 흐른다. 자신들을 격렬한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던 고국에서의 일들은 모두 잊어버리고 싶은 듯, 과거를 버리기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게스트 하우스로 걸음한 사람들. 그리고 조금은 희안하니까지 한 게스트 하우스의 주인 OJ여자의 독특한 사고방식과 행동은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고 갈곳을 잃은 듯 흔들리든 그들의 사연들은 잘 다지고 골라 평평한 땅으로 만들어내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한다.

'찾거나 혹은 버리거나'가 아닌 '버리고 찾아 채우는' 여행의 의미.
<찾거나 혹은 버리거나 in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모든 이들이 낯설은 곳으로의 여행을 갈망하고 꿈꾸는 단 하나의 이유에 대해 말하는 이야기이다.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나 역시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그곳에서 그들이 원하는 것, 그것은 어떤 사람에게는 스스로를 억눌렀던 과거를 버리는 것이고, 어떤 이에게는 새로운 나를 찾는, 어찌보면 단편적인 것들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것들을 버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나를 찾아 넣는 두가지 것들을 모두 할 수 있을것이라는 희망이라고 말한다. 찾거나 혹은 버리거나의 양자택일이 아닌, 버리고 비워낸 자리에 새로움을 가득채우는 것이 여행을 원했던 당신의 진정한 바람이라고 반문한다.

지구의 반대편이 아니라도..
책 속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가장 먼곳으로 도망을 와도 그곳 역시 또 하나의 일상일 뿐이라고, 거기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신기할 것이 하나도 없는 지루한 일상..이라고 말이다. 버리기 위해, 혹은 찾기 위해 어디로 도망을 가도 그곳에서 기다리는 것은 또 하나의 지루한 일상이라는 말은, 얼핏 어딜가나 다를바 없다는 체념섞인 이야기로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본다. 어딜가나 다를 바 없는 또 하나의 일상인 그곳에서 내가 무엇인가를 버리고 찾길 원했다면 누군가는 내가 지겨워 하는 이 일상에서 다시 스스로를 버리고 찾으려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꼭 지구의 반대편이 아닐지라도 스스로를 버리고 다시 채워넣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사는 바로 이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찾거나 혹은 버리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일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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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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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사랑한다는 마음은 어떤 것일까? 사랑이라는 말을 내뱉기위해 사람들은 그 안에 얼마만큼의 감정들을 한꺼번에 담고 있는 것일까? 사랑이라는 감정을 만들기 위해 도대체 얼마만큼의 깊이가 필요한 것일까? 그리고 그 사랑이 언젠가는 내 어깨에 온전히 내려앉아 영원히 함께 하리란 약속을 하는 그날이 오기는 하는 것일까? 수 많은 노래와 수 많은 영화와 수많은 책들이 사랑을 말하고 사랑을 설명하고 사랑을 그려내려고 하지만, 언제나 사람들은 사랑에 대해 궁금해하고 알고 싶어하며, 사랑을 원하고 사랑을 꿈꾼다. 사랑이란 어쩌면 어떤 말로도, 어떤 그림으로도, 어떤 선율로도 설명해낼 수 없는, 그래서 더욱 그립고 갈구하게 되는 대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을 아름다워하는 것.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못생긴 여자와 그렇지 않은 남자의 사랑 이야기이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책의 주인공인 '그'는 정확하게 잘생겼다는 설명이 나오진 않지만 탤런트 출신의 미남 아버지를 꼭 닮았다는 말을 볼때 아마도 꽤나 미남이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그와 함께 책 속에 나타나는 또 한명의 남자 '요한'역시 탤런트 출신 미녀 어머니를 두었다는 설정을 볼때 아무래도 미남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등장인물은 '그'의 '어머니'와 '그녀'를 제외한다면 모두가 미남이나 미녀가 아니었던가 잠시 생각해본다. 물론 등장 인물 자체가 몇 되지 않은 탓도 있으리라. 미남인 '그'와 너무도 못생겨 사람을 얼게 만들 정도였던 '그녀'의 사랑이야기. 그것이 현실이 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몇 해 전 공전의 히트를 쳤던 '내이름은 김삼순'의 삼순이마저, 평소보다 좀 더 살을 찌워 나왔을 뿐, 일반인에 비해 뛰어난 미모를 가진 탤런트로 등장인물을 써야했을만큼 '미'에 대해 절대적인 가치를 두는 세상에서, 못생긴 얼굴 하나로 사람을 얼어붙게 만들 정도의 '추녀'가 사랑을 이루게 될 확률은 얼마나 되는 것일까? 아름다움이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나 당연히 한번쯤은 누려야 할 감정조차 사치로 만들만큼 그토록 절대적인 것일까? 책은 그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저 보이는 아름다움은 그것일 뿐이라고, 그것은 아름다움이지만 그것만이 아름다움은 아니라고 내내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책을 읽는 동안, 아름다움 이상의 아름다움과 그것을 보는 눈에 대해 스스로 고민하게 만들었다. 아름답지 않은 어머니를 둔 탓에 아름답지 못했으나 아름다웠던 한 여성을 사랑했던 '그'를 이해하고, 세상으로부터 아름답지 못하다고 손가락질 받았으나 사실은 너무도 아름다웠던 '그녀'를 향해 어렴풋이 애정을 쏟게도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책의 힘이 아니었을까?

 

조용히, 그리고 강렬하게..

화려한 미사어구도, 자극적인 사건도 없다. 그저 '그'와 '그녀'의 사랑만이 있을 뿐인 책이다. 어찌보면 한없이 평범하고 지루할 수도 있었던 이 책을 한 순간도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은, 이 책이 나를 자극하고 나를 흥분하게 만들었던 것이 아니라, 조용하고 차분하게 이해하고, 공감하고, 느끼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런 사건이 없어도, 그저 그들의 낮은 읊조림 뿐이라도, 이 책은 그것만으로 내 모습을 돌아보고, 나를 다독이고, 내 눈을 맑게 해주었다. 그리고 그래서 이 책을 오랫동안 아주 강렬하게 기억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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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심, 마음 다스리기 - 조선 선비들의 마음 경영법
문효.이소영 지음 / 왕의서재 / 2009년 9월
절판


몸을 닦고, 가정을 다스리고, 나라를 다스린 후에야 천하를 평정할 수 있다라는 말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는 우리나라 사람들이라면 다들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법한 구절이다. 천하를 다스리는 것에는 그만큼 갖추어 나아가야 할 단계가 있다는 말로도 해석될 수 있겠지만 거꾸로 말하면 무엇보다 먼저 자신의 몸을 닦는 것이 우선이라는 말도 또한 포함하고 있는 것이 바로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 할 수 있겠다. 몸을 닦는 것은 무엇일까? 단순이 몸을 보전하고 건강을 유지하는 것을 일컫는 말일까? 아마도 몸이 담고 있는 것, 바로 스스로의 마음을 먼저 다스릴 수 있는 자라야 몸을 닦을 수 있고~라는 앞 구절이 생략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을 해본다.

치심, 마음을 다스리다.

마음을 다스린다는 의미의 치심이라는 단어는, 현대적인 용어로 대체한다면 아마도 스트레스 해소 정도가 아닐까 싶다. 살아가면서 쌓이는 스트레스들을 적당히 푸는 방법, 그것을 우리의 선조들에게서 배우는 책. 그 책이 바로 <치심, 마음 다스리기>이다. 대학진학을 위해 오랜 시간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하고 싶은 것 못하고, 보고 싶은 것 못 보는 어린 학생의 스트레스, 대학에 들어가서는 일신의 삶을 남들만큼 영위하기 위해 이루어내야하는 바늘 구멍보다 좁다는 취업의 관문을 뚫어야 하는 스트레스, 취업후에는 직장내 경쟁을 통해 남들보다 잘나고 남들보다 앞서가는 자신을 만들기 위한 스트레스, 가정을 이루고는 그 가족을 충실히 건사해야하는 스트레스, 자식들을 남들보다 나은 심성과 나은 재주를 가진 이들로 키워내기 위한 스트레스, 부부간의 스트레스, 고부간의 스트레스.. 스트레스를 열거하자면 아마도 수십 수백가지를 가지고도 부족할지도 모를 일이다. 어디 현재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만 이런 스트레스가 존재했겠는가. 정쟁이 가득했던 조선의 선비들에게도 스스로의 학문적 소양의 깊이가, 부부관계가, 부모와의 관계가, 자식과의 관계가, 사회적 지위가 모두 압박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압박을 어떻게 이겨내느냐에 따라 어떤 이는 일생을 무병장수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화로 인해 몸에 병을 얻기도 했을 것이다. 모든것은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하였으니 그렇게 얻어진 병 또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에 다름하지 않테니 말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래서 스트레스 해소, 혹은 치심이 그들에게는 중요한 관심사가 아니었을까?


다양한 방법으로 마음의 화를 이겨내다.

학문적 소양이 깊고 사고의 깊이 또한 넓고 깊었던 선비들이니만큼 그들에게도 나름대로의 치심의 방법이 각자 하나씩은 있었던 것듯 싶다. 어떤 이는 음악으로, 어떤 이는 책으로, 어떤 이는 여행을 떠났으며, 어떤 이는 마음 자체를 가벼이 해 무겁게 몸을 짓누르는 마음의 고통을 덜어내기도 했나보다. 각가 특유의 방법으로 스스로의 마음을 위안하는 방법을 얻고 그 방법을 통해 어진 정치를 펴거나 제자들을 가르치는 공을 세우기도 했으니 최소한 그들은 치심 이후 수신을 하고 제가와 치국까지 도달했던 것은 아닌가 싶다.


당신에게 맞는 치심의 방법을 생각하라.

책에는 많은 선비들의 각자 다른 치심법이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그가 세운 업적과 함께 그들이 치심의 방법으로 삼았던 여러 방법들을 설명하고 그 방법들의 장단점과 그들이 이 방법들에 대해 생각했던 관점들을 풀어놓는 형식이다. 방법은 언급된 선비의 수만큼 많고 분야도 다양하며 모두가 우리에게 친숙한 것들이다. 어쩌면 이것들 중 한두가지는 이미 당신도 자주 애용하고 있는 아주 익숙한 것일지도 모른다. 치심에는 정해진 길이 없다. 이렇게 당신에게 가장 즐겁고 당신이 가장 유쾌하게 스트레스를 풀어낼 수 있는 방법.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책에 소개 된 여러 방법들을 체득하는 것이 중요한 목적이 아니라, 최종 목적은 마음을 다스리고 스스로 안정을 찾는 '치심'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을 억누르고 있는 무거운 마음의 짐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을 찾고, 그것으로 몸의 건강을 얻으라. 그런 후에는 당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새로운 힘이 채워질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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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가 필요해 - 기댈 곳 없는 마음에 보내는 사이토 교수의 따뜻한 메시지
사이토 다카시 지음, 박화 옮김 / 명진출판사 / 2009년 9월
품절


친구가 없으면 없어서 외롭고 있으면 있어서 외롭고, 연인이 없으면 없어서 외롭고 있으면 있어서 외롭고, 가족이 없으면 없어서 외롭고 있으면 있어서 외로운 것이 사람이라고 한다. 외로움은 사람이 살아있는 한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감정이고,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애시당초 없다고들 한다. 누구나 외롭고 외롭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이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는 이유가 될수 있을까? 외로움을 떼어낼 수 없다고 해서 외로움에 대한 위로도 불필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외로움을 없애줄 만병통치약 한알이 아니라 외로움을 조금은 덜어줄 따뜻한 위로가 아닐까? 결국 외로움이란 어쩌면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게 만드는, 그래서 사람의 존재를 더욱 견고하게 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충고가 아닌 그저 위로, 위로가 필요해.

<위로가 필요해>에는 여러가지 이유로 외로움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존재에게 주는 스스로를 위로하는 방법을 담아놓은 책이다. 외로움이 어디 꼭 사람관계에서만 비롯된다고 할 수 있겠는가. 때로는 자신의 능력에 한계를 느낄때, 때로는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상황에서 어찌할 바를 모를때, 때로는 자존감이 사라질때.. 이 모두가, 내가, 그리고 우리가 외로울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되는 것 아닐까? <위로가 필요해>에서 전하는 이야기들은 바로 이런 때에 타인을 통해, 그리고 타인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을 통해 스스로를 위로하고 다시 일어서는 방법에 대해 전한다.


이겨내는 것은 결국, 너 자신

<위로가 필요해>에 담겨있는 내용은 반드시 인간이 인간을 대할때 느끼는 외로움에 대한 것들은 아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겪는 어려움과 스스롤르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찾아나가야 하는 어려움에서 비롯한 힘겨움에 대한 이야기들을 너무 깊지는 않게, 그러나 두루두루 담고 있다. 그리고 위로가 필요한 당신에게 사실은 조금 냉정한 말로 위로가 아닌 조언을 건넨다. 위로는 타인이 아닌 자신에게 받을때 가장 좋은 것이라고, 가장 좋은 위로는 그것을 이겨내고자 하는 스스로의 의지이며, 가장 큰 보상은 그것을 이겨낸 자신의 모습이라고 말이다.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 외치는 위로가 필요해의 답으로 위로가 아닌 조언을 건네는 책. 위로는 다른 곳이 아닌 내면에 있다는 것을 말하는 책. 바로 <위로가 필요해>이다.


다독임은 없다. 냉정하지만 약이 되는 조언은 있다.

<위로가 필요해>를 통해 상처받은 마음에 조금의 위로를 얻고 싶었던 이들이라면, <위로가 필요해>는 사실 큰 감흥이 되지 않을련지도 모르겠다. <위로가 필요해>는 위로를 하는 책이 아니라, 위로보다 먼저 스스로가 필요하다고 역설하는 책이니 말이다. 제목도 <위로가 필요해>보다는 <위로가 필요해?>라고 조금은 냉소적인 분위기를 담고 있는것이 어쩌면 내용에 부합하는 지도 모르겠다. 몸에 좋은 약은 입에는 쓰다고 하는 속담처럼 쓰디 쓴 냉정함으로 조금은 서운함을 느끼게 하는 책. 하지만 그 순간이 지나 다시 한번 이 책을 만나게 된다면 이 책의 이야기가 틀린것이 아니었음을 언젠가는 깨달을 날이 온다는 것을, 지금 이순간도 알것 같은 책. <위로가 필요해>에서 발견할 것은 위로가 아니라 바로 그 냉정함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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