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유럽은 암흑시대였는가? - 중세 민음 지식의 정원 서양사편 3
박용진 지음 / 민음인 / 201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내게 들어와 마치 그것이 사실인냥 인식하고 있는 것은 없는가? 혹은 너무나 당연해 의심조차 하지 않는 일은? 가령 북한은 진짜 (마르크스가 주장한)공산주의식 국가일까하는 문제와 같은... 이런 문제의식과 비슷한 형태로 이 책은 내게 질문을 던진다. 과연 중세의 서양은 어두컴컴한 암흑기였는지. 내가 고등학생 때 외웠던... 그런데 정말 이게 사실일까???

인간은 유아기나 청소년기 없이 청년기나 장년기로 넘어갈 수 없다. 대부분의 인간은 특정한 발달 단계를 거치면서 성장해 간다. 이는 그 인간이 살고 있는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를 시기구분이라 이름한다면 이해하기 쉽겠다. 성장의 속도가 사람마다 다르듯이 사회도 성장의 단계나 속도에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발달 단계를 거쳐야만 한단계 도약하는 것만은 사실인 듯하다. 따라서 서양에서 근대라고 하는 단계에 이르기까지 중세의 역할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나름의 의미가 있었던 셈이다. 마치 청소년기의 어떠한 경험이 청장년기의 누군가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처럼.

서양에서 중세는 대체로 400~500년부터 1400~1500년 사이의 약 천년을 말한다. 솔직히 이 1000년 동안 아무런 발전이 없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지 않은가? 물론 중세에 대한 비판은 일정부분 수긍할만하다. 기독교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인간과 이성의 약화를 불러왔고 신 중심의 세상을 만들었으니까. 생각해보면 숨막히는 공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호이징가의 <중세의 가을>이란 책을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당시에는 성행위를 불결한 것으로 간주하여 심지어 부부관계도 하지 않도록 계몽하였다고 한다. 이는 일종의 야간 통행금지를 만들었고 당국에서는 순찰조를 만들어 야간에 불켜진 집을 단속하였다고 한다. 이 얼마나 웃기고 어이없는 일인가. ㅎㅎㅎ

그런데 중세의 속살을 약간만 뒤집어 보면 미처 알지 못했던 흥미진진한 장면들도 나온다. 우선 백년전쟁을 살펴보자. 우리에게 잔다르크의 등장으로 유명한 이 전쟁은 중세 봉건제가 가진 한계에서 나온 전쟁이다. 즉 프랑스에 자신의 땅(봉토)를 가지고 있는 프랑스 출신의 영국왕은 프랑스 왕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할까 하는 데서 이 전쟁은 시작된다. 여러가지 복잡한 사정에 의해 결국 두 나라는 100년이 넘는 기간을 전쟁에 매달려야 했다. 이 전쟁 기간 동안 영국와 프랑스에서는 자국에 대한 인식(혹은 민족의식)과 애국심이 싹 텃으며 중세적 무기(갑옷을 입은 기병)에서 근대적 무기(장궁, 대포)로 군사적 변화를 경험했다. 이런 과정을 거처 지방 분권적 중세는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 집권 국가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또한 현재 대학과 의회의 모델이 되는 스콜라(성당학교)나 신분의회가 성립되어 근대로의 이행을 준비했다. 십자군 전쟁은 또 어떤가? 종교적 열정으로 시작된 이 국제전은 비록 완전한 실패로 끝났지만 상업의 발달을 견인해 지중해 무역이 부활되고 농업 중심의 사회에서 상업 중심의 사회로 중세를 이끌었다. 그리고 르네상스까지.

위와 같은 몇 가지 예를 통해 중세는 죽은 사회가 아니라 그 내부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잠재력을 가진 시대였음이 명백해 보인다. 이를 통해 근대는 이미 예비되고 있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책에 나오지는 않지만 중세는 왜 어두운 시대가 되고 말았을까? 바로 이어 나온 르네상스와 근대의 지식인들이 중세를 좋지 않게 평가했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시대를 강조하기 위해 앞 시대를 저평가했고 이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져 왔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 그런 전통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서양 중세를 무조건 부정할 수도 긍정할 수도 없다. 어쩌면 내가 보기에 두 시대는 두 가지 면이 모두 공존했던 시대가 아니었을까 싶다. 혼란스러울 수 있다. ^^

<중세 유럽은 암흑시대였을까>는 명확한 정답(혹은 결론)을 독자들에게 주지 않는다. 마이클 샌댈이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했던 것처럼 독자가 알아서 판단하라고 한다. 단지 저자는 여러가지 증거를 내세울 뿐이다. 그렇다고 결론 내리기가 어렵지는 않다. 책 속에 정답이 다 녹아 있으니까. 하지만 나처럼 모범답안을 찾는 독자들에게는 답답한 노릇이다. 정답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해서 속이 후련하니까 말이다.

책은 아주 쉬운 필체로 쓰여졌다. 역사학 전문용어가 거의 없으며 있다해도 자세한 설명을 해주었다. 게다가 얇기까지 해서 읽는 즐거움(?)을 더해준다. 주제별로 편찬되는 책이라 내용은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보다 깊이가 있으며 전문학술서적보다는 훨씬 다가가기 쉽다. 역사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권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근대정신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 르네상스 시대 민음 지식의 정원 서양사편 6
장문석 지음 / 민음인 / 201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현재 이어지고 있는 독서의 주제는 중세와 르네상스이다. 올해 들어 유난히 이 주제에 눈이 확~ 박힌다. 그래서 연속 선상에서 대체 근대 정신 혹은 개인주의라는 것은 언제쯤부터 생겨났을까 하는 점이다.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으나 구체적인 사례는 보지 못했던 터이다. 그래서 이 책을 골랐다.

집단이 아닌 ‘나‘, 신이 아닌 ‘나‘를 인식하게 된 것은 언제인가. 대체 인간은 어떻게 ‘나‘를 인식하기 시작했고 ‘인간‘중심의 사고를 하게 되었을까. 바로 그 시점이 이탈리아 르네상스기이고 상업의 발달 덕분이라고 하겠다. 여기에는 인본주의(휴머니즘)와 예술의 발달도 한몫을 했다.

하지만 내 눈을 끈 대목은 이 르네상스가 근대의 시작(혹은 봄)이 아니라는 점이다. 호이징가의 책 제목이기도 한 ‘중세의 가을‘ 이 르네상스에 적합하다는 주장이다.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는 탁견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 여전히 중세이기는 하지만 이제 서서히 저물고 근대를 잉태하고 있는 그런 계절이 바로 르네상스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근대 정신은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위의 이야기는 다분히 서양 중심적 세계관의 일부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도에서 온 허왕후, 그 만들어진 신화
이광수 지음 / 푸른역사 / 2017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상당히 공격적인 책이었다. 저자 이광수 교수는 설화와 허구가 뒤섞인 허왕후 이야기에 대해 가차없었다. 특히 그가 비판하는 논자들에 대해서는 실명과 그의 저작들을 거론하여 날을 세웠다. 가끔 읽는 이도 부담스러워지긴 했으나 저자의 주장에 대체로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로 한국에서 ‘인도에서 온 허왕후‘이야기를 주도한 인물은 한양대 고고학 교수 김병모였다. 물론 <삼국유사>를 통해 접하기는 했으나 그것은 피상적인 것이었다. 그의 화려한 언론플레이를 통해 비전문가들은 허왕후가 어떠한 이유와 경로를 통해 가야에 오게 되었는지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의 주장에 허구가 많다. 두 가지만 예를 들어 보자. 하나, 그는 허왕후가 고대 인도의 아유타국(아요디야)에서 왔다고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당시의 인도에는 아유타국이 없었다. 둘, 수로왕릉의 쌍어문이 인도와의 교류 증거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수로왕릉의 쌍어문은 그려진지 200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쌍어문은 불교만이 아니라 힌두교에서 주로 사용하며 인도 전역에서 사용된다(아유타국만 아니라). 심지어 동남아 국가에서도 그려진다고 한다.

김병모 교수에게만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닌 듯하다. 허왕후 설화의 최대 작사가는 사원이었으며, 그 다음은 양천 허씨 가문이었다. 먼저 전자는 사찰 비즈니스를 위해, 후자는 가문의 현창을 위해 설화를 날조하고 왜곡했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있는 신화의 전부다. 아니 지금도 그 신화는 확장되고 부풀려지고 있다. 허왕후가 인도에서 올 때 파사석탑을 가져왔다거나, 오빠(혹은 남동생) 장유화상을 데리고 왔다거나, 아들 열 둘과 딸 둘을 낳았다거나, 그중 딸 하나는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을 지배했다거나, 남방불교를 가져왔다거나, 아들 중 두 명은 허씨 성을 쓰게 했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후대로 갈수록 설화에 살이 덧붙여져 그녀는 신비로움이 더해지고 있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양상의 허왕후 이야기가 국경을 넘어서까지 왜곡이 확장되고 있다는 점이다. 십 수년 전부터 허왕후 설화는 한국에서 인도로 수출되고 있다. 극우 보수주의자들이 권력을 잡고 있는 두 나라 정부(혹은 두 이익세력)는 허왕후 설화를 매개로 자신들의 정치 권력을 강화하는 데 이용했다. 아울러 사이비역사학이 창궐하는 배경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신화는 장구한 시간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야기들이 모여 있는 장이다. 신화는 특정 시대의 사람이 어떤 시건을 두고 비이성적으로 해석해놓은 이야기들을 모은 것이다.˝ 따라서 신화의 역사화는 위험이 따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단군신화나 고구려건국신화는 쉽게 믿지 않으면서 허왕후와 관계된 설화는 큰 의심없이 받아들인 경향이 있다. 저자는 이를 한 학자와 황색언론(조선일보) 탓으로 돌린다.

이 책을 읽으며 역사학의 본질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역사의 역할이 무엇일까?

단! 이 책이 완벽한 해설서가 되지는 못한다. 그것은 한국고대사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관련 사료가 너무 없기 때문에 저자의 추론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다. 글을 읽다보면 저자의 합리적인 듯하지만 무리한 추론도 제법 나온다. 그것은 사이비역사학자들와 사찰 설화에는 더 강하게 나타나는 듯하다. 명료한 대답을 내놓기 힘든 한국고대사의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사진 제목
1. 허왕후와 김수로왕
2. 김수로왕릉(납릉)의 쌍어문
3. 파사석탑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프니까 청춘이다 - 인생 앞에 홀로 선 젊은 그대에게
김난도 지음 / 쌤앤파커스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도서 구매 습관상 베스트셀러는 잘 사지 않는다. 좋은 책은 현재 많이 팔리는 책이 아니라 꾸준히 오래 팔린다는 신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가능하면 출간된 지 1년 넘어서까지 팔리는 책 위주로 사는 편이다. 물론 예외는 있다. 사회적 이슈가 되는 주제를 다룬 책이거나 좋아하는 출판사/저자의 책은 당장 사버린다. 아무튼 좋은 책은 시간이 지나도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여 자신이 읽든 남에게 선물하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최근에 읽은 ‘좋은 책’을 꼽으라면 나는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들고 싶다. 청춘을 넘어선 내게 이 책은 무슨 의미일까? 나는 이제 청춘이 아니니 별의미가 없을 것 같은 데 이 책은 대체 어떤 내용을 담고 있기에 이다지도 오래 베스트셀러 대열에 끼어 있는 것일까?(2011년 12월에 산 이 책은 이미 532쇄였다)

우선 이 책은 따뜻하다. 제자를, 이 땅의 청춘들을 아끼고 사랑할 줄 아는 김난도 교수의 따뜻한 심성과 감성이 그대로 책에 녹아 있다. 오랜 세월 자식을 키우고 제자들을 길러왔지만, 그들이 지금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 그들에게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 기성세대들조차 힘겨워 한 것이 사실 아닌가. 청춘의 세월을 겪어본 어른들에게는 나름의 극복 노하우가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지금의 세대들에게는 낯설고 힘든 현실 앞에 좌절과 낙망만 있을 뿐이다. 그것은 청년 실업의 증가, 자살률 상승, 과도의 스펙 쌓기 등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런 문제는 사실 부모 세대라고 하여 쉽게 조언을 건넬 수도 위로하기도 힘든 문제다. 이미 20대들은 힘들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란도 샘(서울대생들은 이렇게 부른단다)은 정답이 아닌 따뜻한 위로와 경험이 뭍은 충고를 해준다.

“ 인생에 관한한, 우리는 지독한 근시다. 바로 코 앞 밖에 보지 못한다. 그래서 늦가을 고운 빛을 선사하는 국화는 되지 않고, 다른 꽃들은 움도 틔우지 못한 초봄에 향기를 뽐내는 매화만 되려고 한다. (중략) 그대 좌절했는가? 친구들은 승승장구하고 있는데, 그대만 잉여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가? 잊지 말라. 그대라는 꽃이 피는 계절은 따로 있다. 아직 그때가 되지 않았을 뿐이다. 그대, 언젠가는 꽃을 피울 것이다. 다소 늦더라도, 그대의 계절이 오면 여느 꽃 못지않은 화려한 기개를 뽐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고개를 들라. 그대의 계절을 준비하라.”

이것은 강요가 아니다. 읽는 이의 자발성을 불러내는 훌륭한 글이다. 나는 직업이 있고 이미 기성성대에 편입이 되어 있지만 나조차 란도 샘에게서 위안을 받았으니까.

둘째, 란도 샘의 글에는 제자와 청춘들에 대한 사랑이 녹아 있다. 이는 그의 글 속에 나타난 일들을 통해 내가 유추해 낸 결론이다. 즉 그는 교수로서 강의와 학생지도에 열심이다(서울대 우수강의와 한국갤럽 최우수 박사학위 논문지도상 선정). 또한 선생님으로서 재학생과 졸업생에 대한 상담에 열심이다. 여기에 행정, 논문작성, 각종 사회단체 활동까지... 학교 현장에 있는 나로서는 솔직히 부끄러운 대목이다. 어느 하나에 열심이면 분명 다른 하나를 놓치기 때문이다. 이것은 직업 정신이나 교수로서의 사명감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들다. 추상적으로 말해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고밖에 정의할 수 없을 듯하다.
“포기가 항상 비겁한 것은 아니다. 실낱같이 부여잡은 목표가 너무 벅차거든, 자신 있게 줄을 놓아라. 대신 스스로에 대한 믿음의 날개를 펼쳐라.”

법대와 행정대학원을 다닌 란도 샘. 당연한 코스였지만 자신에게 깊은 좌절감만 안겨주었던 고시를 때려치운 이후, 두려워했던 것보다 바닥이 깊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온 몸이 부스러질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발목도 삐지 않았다. 몇 달 동안 삶의 여백을 가지면서 힘을 얻은 그는 석사장교, 박사과정, 유학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니 그는 청춘들에게 포기나 추락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다. 자신의 경험대로 자신 있게 미련의 끈을 놓으라고 권한다. 대신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의 날개를 펼치고.

셋째, 저자의 힘겨웠던 경험이 읽는 이에게는 위안거리가 된다. 란도 샘은 이제 유명인이지만 그가 위인은 아니기에 그의 경험을 특별한 경우로 치부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순신이나 김구처럼 불세출의 영웅이라면 그들의 삶을 예외로 인정하고 배우길 거부할 수 있겠으나 란도 샘은 그런 인물이 아니지 않은가. 서울대 법대를 나왔지만 고시에 낙방했고, 가족의 연이은 사망과, 유학 후의 경제적 어려움 등은 같지는 않지만 어려운 처지에 있는 청춘들에게 도전 의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한 사례라고 본다. 자신의 전공을 옮겨가며 자기에게 맞는 일을 찾고 또한 도전을 게을리 하지 않은 그. 이런 란도 샘이기에 청춘들에게 해줄 말일 많은 것이다.

“그러니 그대여, 늘 ‘지금의 나’를 뛰어넘을 것을 생각하라. 기성의 성취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의 잠재력을 끝없이 확대해야 한다. 자기 세계에만 안주하고 있으면 무너진다. 그대가 스스로를 새롭게 만들지 않으면 사회가 그대를 오래되게 만들어버린다. (중략) 잊지 말라. 알은 스스로 깨면 생명이 되지만, 남이 깨면 요리감이 된다. ‘내 일’을 하라. 그리고 ‘내일’이 이끄는 삶을 살라.”

진정 무릎을 치는 탁견이 아닐 수 없다. 알이 생명이 되기 위해선 스스로 깨고 나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프라이나 찜이 될 수밖에 없기에.

이외에도 저자는 다양한 주제로 청년들에게 조언한다. 일찍 재테크하지마라, 혼자 놀지 마라, 신문을 읽어라, 백수로 지내기보다 작은 회사에라도 취업해라, 스펙이 아닌 내 꿈을 위해 투자하라 등... 하나같이 전부 주옥이다. 이런 글은 하루아침에 써지는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을 두고 느끼고 생각하고 경험한 것들이 쌓이고 쌓여 한 줄의 글로 나오는 것이다. 그렇기에 란도 샘의 글에는 따뜻함과 사랑이 녹아 있다고 한 것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사실 직업적 이유 때문에 산 책이다. 에비 20대를 가르치고 있고 또한 졸업생들이 종종 찾아오는 현실에서 나는 그들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해왔을까 돌이켜보면 농담 따먹기 수준의 대화만 하지 않았나 싶다. 물론 약간의 위로와 조언을 했겠지만 그들의 가슴에 그리 깊이 있게 다가가진 않았으리라. 란도 샘의 글을 통해 내가 위로를 받았음은 물론 교사로서의 사명감도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분명 좋은 책이다.

참! 이 책은 청춘들만 읽을 책이 아니다. 선생님은 물론 부모들도 읽어야 할 필독서다. 내 제자와 자녀들을 제대로 껴안고 다독이기 위해서 읽고 머리에 저장해두어야 할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다’(도종환 시인의 시에서 인용)는 점을 기성세대들은 잘 안다. 하지만 청춘들에게 제대로 전달해주기 어려웠다. 그렇기에 이 책을 읽고 청춘들에게 잘 전달해주기 바란다.

개인적 바람이라면, 교수나 교사와 같은 이들의 글도 좋지만 종교인들의 글도 보고 싶다. 이 땅의 힘들어 하는 청춘들을 위한 글 말이다. 내 종교를 믿어라! 하는 일차원적인 주장이 아니라 종교라는 매개를 통해 힘겨워하는 청춘들을 안아주고 보듬어주는 글을. 한때 달라이 라마의 글이 큰 유행을 한 적이 있었다. IMF 사태 이후 힘든 사회 상황에서 큰 위안을 준 책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제 우리 한국인의 시각에서, 우리 종교인의 시각에서 청춘들을 위한 글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
(2012.12.20.에 쓴 글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공터에서
김훈 지음 / 해냄 / 2017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개인적으로 역사의식을 지닌 작가를 좋아한다. 지극히 개인의 취향 문제겠지만 개인의 소소한 일상과 감상만을 다루는 작금의 현대 소설에는 그다지 눈길이 가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대하소설이나 역사소설에 끌리는 모양이다. 이점이 나를 김훈의 매니아로 만드는 모양이다.

이번 김훈의 글, <공터에서>는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책이다. 마동수 - 마장세/마차세로 이어지는 2대에 걸친 비극의 가족사가 그 중심이다. 일제 치하의 한반도,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한국전쟁, 피난 생활, 가족 해체, 가난, 베트남 파병, 부모의 죽음 등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흐름과 가족은 대응은 한 개인에게는 견디기 벅찬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굴절된 개인사는 남은 가족들에게 숨쉬기조차 힘든 환경을 만들어준다. 어쩌면 이 글은 긍정적 현대사를 강조하며 이승만, 박정희 시대를 찬양하는 이들에게 그 반대의 증거를 미시적으로 보여준다고도 볼 수 있겠다.

2대에 걸친 아픔이라고 쓰니 갑자기 하근찬의 <수난이대>가 떠올랐다. 일제 징용과 한국전쟁으로 인한 이대에 걸친 수난. <공터에서>도 다르지 않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한 가족이 만들어졌지만 그들의 피난생활과 가난은 가족을 해체시키고 비정상적으로 만든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좀머씨 이야기처럼> 마동수는 세상을 헤매인다. 아내 이도순은 치매에 걸려 망각한 아픔을 새록새록 기억하며 힘들게 죽음을 맞이한다. 이 시대를 살아낸 한 세대의 슬픈 퇴장인 셈이다. 지금의 나로서는 할아버지 - 할머니 세대인 그들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장면이다. 물론 그들의 다음 세대에게도 세상은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았다. 두 아들들의 인생도 파란만장하여 장-차남 모두 전쟁과 가난의 굴레에서 아파하며 일상은 견디어낸다. 가족와 연을 끊고 싶어하는 장남, 가족의 아픔을 모두 안고 살아가야 하는 차남. 골곡 많은 이땅의 현대사만큼이나 개인사 역시 치열했고 아픔은 충만했다. 그렇다고 좌절만으로 끝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일까? 저자는 막내 마차세에게 안식을 주는 아내 박상희를, 희망의 상징 딸 누니를 주었다.

이렇게 책을 덮자니 표지에 <공터에서>라는 제목이 써 있다. 이게 무슨 뜻일까? 저자는 왜 이런 제목을 붙였을까 곰곰이 생각해본다. 사실 잘 모르겠다. 그의 의도를 . 다만 공터에서 느낄 허무함을 그리 표현했겠거니 생각했다. 착각이겠지만.

김훈의 문체는 명불허전이다. 묘사와 표현은 나로서는 전혀 흉내낼 수 없는 것들이다. 인간 심리와 자연에 대한 그의 관찰은 남다른 것이어서 그의 글을 이해하려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읽어야만 했다. 그렇다. 김훈의 소설은, 소설이지만 내용이 무겁고 깊어서 무난히 살아온 나같은 범인들은 추체험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