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잘 지내나요, 내 인생
최갑수 글.사진 / 나무수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세상이 아직 말랑말랑하게 보이던 시절, 어른이 된다는 것은 막연함에 포위되는 일이다. 가물거리는 기억을 헤집어 떠올려보면 마흔이라는 나이는 이미 모든 것을 알아 챈 나이로 기억된다. 인생의 쓴맛과 단맛의 절묘한 배합을 깨달은 나이라고나 할까. 그땐 그렇게 커 보이기만 하고 웅장해 보이던 그곳은 인생의 근엄함이 깃든 지점이었다. 하지만 그 치열한 순간을 통과하는 지금에서야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에 멈췄다. 무엇이 진실인지 무엇이 옳은 것인지에 대해 말이다. 사실 인생에 정답이 없다하건만 불확실함은 인생의 경계를 끝없이 맴도는 회오리바람이다.
그렇다보니 누군가가 걸어 간 그 길 위에서 우리는 망설이게 되고 주저하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모험보다는 안전함을, 새로움보다는 편안함을 짜여 진 틀에서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산다. 이상理想보다는 명분名分이 차곡차곡 포개지는 그 속에서 열정은 밀려난다. 혹자는 그럴지도 모른다. 인생은 그렇게 명분을 쌓다 허물기를 통해 살다 가는 것이라고. 지리멸렬하게 반복되는 삶의 던적스러움에 때론 명분도 야속하게 다가설 때도 있다. 한 움큼의 위로가 한 덩어리의 빵보다 필요할 때도 있더라는 말이다.
<잘 지내나요, 내 인생>은 딱 그만큼의 거리감과 밀접함에 선 이야기다. 저자 최갑수가 인생의 풍광을 찍어대고 그 속에 담긴 인생의 파노라마를 마감 시간에 쫓겨 글을 휘날릴 때, 우리는 다른 곳 다른 자리에서 삶에 쫓기고 지쳐가고 있었다. 모양은 달라도 그 속살은 어슷비슷하다. 잘 나가는 지인들의 승승장구하는 소식에 한없이 위축되다가도 모르핀처럼 따박따박 꼽혀 금세 바닥을 보이며 사라지는 월급날에 즐거워한다.
인생은 언제나 요령부득,
운명과 우연의 절묘한 조합.
약간의 행운과 수많은 불행이 합쳐져 만들어진 것.
그러니 잘 사는 비법 같은 게 있을 리 없지.
끝까지 가든지 아니면 기름이 떨어져 포기하든지.
(p.198)
인생은 패턴이다. 낯설거나 익숙하거나 혹은 멀거나 가깝다. 그리고 삶의 무게만큼 무너지는 새로움 또한 휘발성이 강하다. 그러나 기약 없는 희망은 나를 살게 하는 동인이 되는지 모른다. 치이고 베인 자리에 새살이 돋아나듯 희망은 등대처럼 영롱하다. 그것은 나를 위무하고 사그라진 에너지를 채워주는 충전재가 된다. 그래서 누군가의 위로가 마흔에 즈음한, 인생을 치열하게 달려온, 그들에게 맞춤한 공감의 울타리를 만들 터이다.
감성코드는 환경에 따라 변한다. 그 옛날 공자가 쓴 <논어>의 위정 편에 보면 마흔, 즉 불혹은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게 되는 지점을 뜻한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의 그곳은 정반대의 대척점에 서 있는지 모르겠다. 아직 나아가야할 길이 많음에도 어디로 이어지는지 알 수 없는 혼돈의 순간처럼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게 다가선다. 이럴 때 멀리서 날아든 반가운 소식 한 자락처럼 최갑수의 글은 메마른 감성을 돋우게 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하는 건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p.175)
최갑수의 글은 지나쳐 버린 감성의 조각들을 끄집어내어 공감하게 만든다. 그의 곳곳을 둘러 싼 주위의 사물을 분해하고 재해석하여 전해 오는 이야기를 통해 따뜻함이 봄날 햇살처럼 아련하게 퍼져 오른다. 내가 하지 못한 일들, 가보지 못한 미지의 그곳을 동경하고 대리만족하게 만드는 그것은 인생이라는 고독한 순간을 모두 통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아님을 뼈저리게 인식했지만 그 아무것도 아닌 그곳을 채울 순간의 에너지를 채워야 한다. 가수 이석원이 쓴 <보통의 존재>마냥, 보통으로 산다는 것 어렵고도 또 어렵다. 그러나 인생은 판타스틱하다.
생을 마감하는 그 순간까지 후회하고 또 후회하는 삶을 반복한다할지라도 열정의 불씨를 지펴 올리는 것이 인생이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지치고 힘든 점 위에 올라 선 우리 모두를 향한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