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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공책 ㅣ 도코노 이야기 2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온다리쿠의 작품이 봇물처럼 쏟아지는 상황에서 그간 단하나의 작품도 접하지 못한 내게 첫번째로 다가온 작품이 이 책 <민들레공책>이다. 딱히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지만 그간 만나왔던 많은 일본작가들을 접하면서 그때마다 그들의 작품에 녹아드는 나를 보면서 또다시 온다리쿠라는 영향력있는 작가의 매니아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독자가 새로운 작가를 만난다는 것은 그때마다 새로운 경험의 시작이며 새로운 세계로의 초대이지만 수 많은 일본작가의 인해전술앞에서 하릴없이 삐그덕거리는 우리나라 문단의 모습을 보니 한편으로는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던 것 같다. 어찌됐든 추리, 미스테리, 호러소설 작가로만 인식되어 있는 온다리쿠를 이 작품 <민들레공책>을 통해 만나게 되면서 따뜻한 감성이 있는 이야기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작품은 신비하고 정체모를 힘을 갖고 있지만 사람들을 피해 무리를 짓고 살지 말라는 원칙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도코노일족의 이야기가 아름다운 민들레가 활짝 피어 있는 아름다운 언덕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작품에서 말하는 민들레 공책은 주인공인 미네코의 유년시절이 젖어있는 일종의 일기로 그 시절을 회상하는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지금은 할머니가 된 미네코의 회상이 흐르는 이 소설의 배경은 메이지유신이 일어나고 러일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인 19세기 후반쯤인 것으로 추정된다. 아직까지 제국주의라는 망령이 일본을 휩쓸기전 고요한 한 마을에서 벌어지는 신비하고 기이한 체험을 작중화자인 미네코의 당시의 열두살소녀가 바라보던 순수한 기억으로 그리고 있다. 미네코가 살고 있는 마을은 마키무라라는 마을을 선도하는 집안을 중심으로 서로 도우며 화목하게 살아가고 있는 마을이다. 미네코의 집뒤의 민들레 언덕너머로 마키무라 가문의 저택이 있다. 그리고 그 저택에는 주인부부와 5남매가 있으며 그중의 바로 막내가 미네코의 소녀시절을 함께했던 사토코이다. 미네코는 총명하지만 병약해 바깥출입을 거의 못하고 아마도 성인이 될 때까지도 살기 어렵다는 사토코의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된 다음날 의사인 아버지로부터 병약한 사토코의 말동무가 되어 달라는 부탁과 함께 저택을 찾아가게 된다.
사토코가 마키무라 집안을 드나들게 되면서 바라본 저택엔 여러 계층의 손님들이 있었고 어느날 저택주인의 친구라는 하루타 집안이 찾아온다. 바로 그들이 도코노일족이었고 천청회의 밤을 통해 그들의 비밀이 낱낱이 밝혀진다. 본래 도코노일족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넣는' 힘을 가졌고 미래의 일을 볼 수있는 등의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원칙을 충실히 지켜내면서 조용히 살아가는 일족이다. 아마도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메세지이기도 한 '넣는다'에 대해 도코노의 일족인 요타로는 이렇게 표현한다.
"단순히 말이나 사건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일족 한 사람, 한 사람의 생애와 정신을 자기 통째로 보존하는 것이야. 그것을 우리는 '넣는다'라고 하거든"
결국 도코노 일족의 여러가지 힘 중의 하나인 이 '넣는다'라는 의미가 주는 것이 무엇일까. 작가는 왜 여러가지 신비하고 기이한 능력 중에서 이러한 힘을 선택했을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힘든 '넣는다'의 과정을 거쳐 마음이 포화 상태가 되면 보관하고 있는 수많은 기억들을 정리하기 위해 '거풍'이라고 하는 잠을 잔다고 한다. 마키무라 집안의 딸답게 사토코는 미네코와 함께 산사태가 덮친 마을의 외딴집에서 마을아이들을 구해내고 죽음을 맞이한다. 온 마을이 시름에 잠겨있는 장례식장에서 하루타 집안의 미쓰히코를 통해 사토코는 자신의 촘명하고 밝은 빛을 전한다. 바로 마쓰히코가 사토코를 '넣어'두었기 때문이다.
"나 사토코 님을 '넣어'두었거든요."
도코노 일가가 마을을 떠나면서 이 아름답고 몽환적인 이야기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소설속에 흐르는 그리움과 안타까움 그리고 애잔함까지 여성적인 문체는 이렇게 우리들에게 다가온다. 그리움이라는 이름은 기억이라는 단순함보다는 애절한 법이다. 미네코가 그렇게 아프게 그리워하는 사토코는 이미 떠난지 오래이지만 미네코의 기억 속에서는 영원히 살아있는 듯하다. 그것은 미네코와 사토코의 모두의 민들레 공책의 지켜지지못한 약속처럼...
"사토코 님! 미네코와도 약속하셨잖아요. 꼭 미네코랑 함께 여학교에 가신다고. 함께 연분홍색리본을 머리에 달고 여학교에 가신다고 약속하셨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