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습격 - 영화, 역사를 말하다
김용성 지음 / MBC C&I(MBC프로덕션)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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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현대인의 여가에 영화란 빠질수 없는 존재중의 하나가 되었다. 영화가 상영되는 두어시간 우리는 현실의 모든 잡념을 잊고 그 안에 빠져든다. 그렇기에 몰입이라고 할 만큼 영화의 매력은 절대적이다. 라디오나 TV가 없던 시절 영화는 사람들을 거의 유일하게 꿈과 이상의 공간으로 인도하던 수단이었고, 각종 첨단 매체가 쏟아지는 현대에 와서도 여전히 그 절대적인 자리를 내어놓지 않고 있다. 도대체 어떠한 요소때문에 불과 이 땅에 생겨난지 100년이 조금 넘는 일천한 역사를 갖고 있는 영화라는 매체에 우리는 일희일비 하는 것일까.

 

"영화는 현실을 그대로 보여줄 수도 있고, 현실을 극복하게 할 수도 있고, 가상의 현실을 비춰줄 수도 있다."
우리들의 앞에 주어진 현실은 개인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그리 녹록치만은 않다. 아마도 그것은 뜻하고 원하는 대로 세상이 움직여주질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휴식이고 여가이다. 어쩌면 영화는 그러한 우리들의 답답함을 풀어주는 해방공간인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반드시 무얼 배운다거나 교훈을 얻으라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저 킬링타임으로 보내기엔 그 시간이 조금은 아까워 보일수도 있다. 결국 영화 한편이 주는 효과는 그 영화를 어떠한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수 있다. 이 책 <제국의 습격>은 그렇듯 영화를 보는 하나의 시각을 제시하고 있는 책이다. 영화에는 많은 것들이 담겨 있으며 그 수많은 것들 중에는 우리의 역사 또한 담겨 있다. 그리고 또한 그안에는 숨기고 감추려 했던 인류의 치부 역시도 가감없이 드러나곤 한다. 침략과 수탈 어쩌면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 볼 수 있는 코드이며 동시에 인류가 성장하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이 책은 그러한 영화들을 선별해 그 아픔과 수난의 세계로 우리들을 인도하고 있다.

 

<제국의 습격>이라는 제목처럼 책은 근대 이후 서구제국들의 침략의 역사를 되돌아 본다. 동아시아, 라틴 아메리카, 북아메리카 그리고 아프리카로 이어지는 아픔의 역사는 잊고 있지만 분명히 존재했던 인류의 역사이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역사이기도 하다. 책은 우선 해당 지역의 역사를 조망하며 그 시대와 공간을 그리고 있는 영화를 소개한다. 홍콩은 한 시대를 대표했던 단어인 냉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던 곳이다. 책은  중국의 원조를 받기 시작하면서 오늘날 번영의 시작을 알렸던 1962년의 홍콩을 '화양연화'에서, 공식적인 반환직전 내일을 알 수 없는 불안한 시기인  1997년의 홍콩을 '차이니즈 박스'를 통해 보여준다. 물론 해당 영화들이 직접적인 정치적 상황이나 숨가쁘게 돌아가는 국제관계에 초점을 맞추는 영화들은 아니다. 하지만 그때 그곳을 살았던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들이 겪었던 시대의 아픔과 혼란함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책은 영화의 그러한 면에 주목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영화는 단 한작품만이 수록되어 있다. 흥행에도 사회적인 반향도 그리 크게 몰고 오진 못했지만 강우석 감독의 '한반도'는 책의 제목에 부합하는 적절한 선택으로 보인다. 역사적 고증이나 사실여부를 떠나 '한반도'는 혼란했던 100여년전의 한반도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서구열강과 새롭게 태어난 일본 제국주의 사이에서 방향을 잃고 표류하는 대한제국 황실의 모습에서 우리는 지나간 시대의 역사를 조용히 돌아볼 기회를 가진다.

 

지역적인 거리는 아니겠지만 상대적으로 우리에게 라틴 아메리카는 너무나 멀어 보인다. 그것은 아프리카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곳의 사람들에겐 다시는 돌이키고 싶지않은 아픔의 시대가 있었다. 그것은 인디언과 원주민의 나라였던 북미 대륙 역시 마찬가지일듯 하다. 학창시절 세계사 수업시간에 마치 우리들의 일인양 자랑스럽게 배웠던 신대륙의 발견 뒤에는 총칼을 앞세운 문명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져버린 원주민의 학살이 있었다. 서구제국들은 자신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어떠한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문명을 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그곳을 자랑스럽게 식민지로 건설한다. 혁명가 체 게바라의 젊은 시절을 조망한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는 그러한 라틴 아메리카의 아픔을 생생히 전한다. 역사적 아픔은 지금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오랜동안 서구의 식민지로 지내온 라틴 아메리카의 인구구성은 그러한 역사의 아픔이 그대로 나타난다. 책은 현대 브라질을 상징하는 '중앙역'과 언제나 혼란의 중심에 서있던 쿠바의 모습을 보여주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을 소개하면서 정체성을 잃고 혼란속에 빠져 있는 라틴 아메리카 모든 이들의 오늘을 보여준다.

 

본격적인 제국들의 전장이었던 아프리카는 그 아픔의 강도에 있어서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듯 하다. 무려 500여년에 걸친 노예무역의 공급원이 바로 아프리카였기 때문이다. 책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내용에 관한 영화보다는 아프리카인이 겪어야 했던 또다른 아픔을 그린 영화를 소개한다. 노예에서 해방되어 조국으로 돌아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블러드 다이아몬드'를 통해 TIA(This is Africa!)라는 절망의 의미를 배운다. 아름다운 화면이 인상적이었던 '아웃 오브 아프리카'가 서구인의 시각으로 그려졌다면 감명깊게 보았던 '호텔 르완다'는 그들의 시선에서 아프리카를 바라본다. 그러한 시선에서 저자는 현재의 우리가 아프리카를 바라보는 시각역시도 100여년전 서구인들이 아프리카를 바라본 것과 그리 다르지 않음을 지적한다. 우리 역시도 똑같은 아픔을 겪었음에도 겨우 살만해졌다고 그러한 식민주의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보아야하는 문제가 아닐까 싶다.

 

"지나간 시간은 그저 지나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공간과 시간의 묶음이 되어 오늘의 우리를 규정하고 있다."
책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운다. 또한 그저 흥미거리 오락거리라 생각하는 영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무한함을 알려주는 듯하다. 다양한 시각은 우리앞에 펼쳐진 세상을 보다 올곧게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제공할 것이다. 책은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균형잡힌 시각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저 평범히 보았던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영화들 속에서 역사라는 커다란 흐름속에서 그 안을 살아갔던 어제의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게끔 한다. 그래서 이 책이 영화와 역사의 만남에서 출발해 그 이면의 아픔을 이해하는 멋진 시도라 보여지는 이유라 느껴진다. 승자와 패자라는 시각을 떠나 그것마저도 모두 역사였으며 그러한 과정을 거쳐 오늘의 우리가 존재함을 배웠던 좋은 책이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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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폴라의 유혹 - 화가 남궁문의 산티아고 가는 길 - 봄 화가 남궁문의 산티아고 가는 길 계절별 시리즈 3
남궁문 지음 / 시디안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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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쩌면 세상은 혼자 왔다 조용히 혼자 사라지는 절대고독의 공간일런지 모른다. 세상의 모든 일은 어찌됐든 자신의 책임이며 또한 그 누구도 그것을 대신해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 틈에서 정신없이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그러한 사실은 그리 가까이 다가와있지는 않은 것 같다. 그것은 늘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의 원리라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가끔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보기도 하지만 이내 다가오는 또다른 하루에 우리는 그것을 금방 잊어버린다. 그렇듯 우리에게 삶은 익숙함의 연속이며, 그안에서 우리는 좀처럼 자신을 돌아볼 여유를 찾지 못한다. 그럴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여행이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익숙함에서 벗어나 만나는 새로움을 통해 우리는 어쩌면 우리가 잊고 있는 자신의 진정한 모습과 만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프랑스에서 시작해 피레네 산맥을 넘고 스페인 북부를 횡단해 성 야고보의 무덤에 이르는 800Km가 넘는 산티아고 순례길은 기나긴 고행의 길이다. 중세 유럽인들의 종교적 열정과 속죄의 순례길이었던 그 길이 이제는 또다른 의미의 순례길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이 책 <아마폴라의 유혹>은 벌써 이 산티아고 길을 세 번이나 걸었던 화가 남궁 문이 세번째 펴낸 책이다. 스페인에서 유학했던 경험으로 그는 2001년 처음 그 길을 걸었고 이듬해 <아름다운 고행, 산티아고 가는 길>이라는 책까지 펴냈다고 한다. 그는 2004년초에도 그 길을 걸었고, 이 책의 배경이 된 2007년에도 그 길을 걸었다고 한다. 세번의 경험이 다른 것은 각각 여름, 겨울, 봄으로 바뀐 계절뿐이다. 그는 40일이 넘는 그 고행의 길을 무엇 때문에 세번이나 걷게 되었을까. 그리고 그는 어떠한 다른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일까.
 
"... 그리고 항상 내 뇌리에 자리잡고 있었던 그 붉은 아마폴라가 핀 들판을 걸어갈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작용했다. 그것만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조바심까지 나던 나였으니까..."
이미 시중에는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많은 책들이 나와있다. 많은 이들이 산티아고 순례를 통해 새로운 자신과 만났다고 이야기 한다. 작가 파울로 코엘료 역시 어느날 일상에서 벗어나 그 길을 걸었고 그 순례의 경험을 통해 세계적 작가로 거듭나게 되었고, 독일의 유명MC 케르켈링 역시 순례를 마치고 돌아와 흐트러진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해주는데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경험이 되었다 이야기한다. 그런 면에서 저자 남궁 문은 특히 유별나 보인다. 그 힘들다는 고행의 길을 세 번이나 걸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세번째 여행을 하게 된 것은 친구의 권유에 의한 함께하는 여행이었다. 하지만 친구의 갑작스런 사정으로 인해 그는 역시나 이전에 그러한 것처럼 혼자서 대부분의 길을 걷는다. 결국 저자는 화려한 아마폴라 꽃을 통해 여행의 기쁨을 만끽한다. 마치 오줌을 저릴 것같은 전율까지 느껴진다는 아마폴라가 그래서 이 책의 타이틀이 되었나 보다. 

 

무엇보다 화려하고 생동감 넘치는 사진은 여행책자의 가장 큰 매력으로 작용한다. 사진을 통해 우리는 마치 자신이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착각에 빠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러한 사진은 물론이고 화가라는 작가의 특이한 이력으로 인해 다양한 그림을 함께 할 수 있는 행운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거기에 그림과 사진을 조합한 포토샵 이미지들이 더해지면서 상상과 실제의 공간을 넘나드는 착각속에 우리를 빠져들게 만들기도 한다.

 

"길에 나 지신을 내팽개친다는 심정으로..."
세번째 길 임에도 하룻 밤 누울 곳이 없기도 하고 넘치는 욕심때문에 지쳐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길에서 만나는 동행자들로 인해 힘을 얻는다. 여행마저도 꽉 짜여진 일정표대로 소화하는 우리에게 때론 친구로 때론 경쟁자로 그 길을 걷는 그들이 부러울 뿐이다. 혼자 걸어가지만 그 속에도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는 존재한다. 저자 역시 길 위에서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과의 관계가 아름답게 펼쳐지는 풍경 만큼이나 빠질 수 없는 책의 커다란 부분으로 작용하기에...  

 

책은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지침서로는 적당해 보이지 않는다. 자세한 일정도 디테일한 계획조차도 언급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 아마폴라의 붉은 빛 만큼이나 우리들을 유혹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오히려 소개에 급급한 책 보다는 좀 더 강한 흡입력으로 우리들을 산티아고 길로 이끄는 듯 하다. 그렇게 보까딜료와 오렌지 그리고 하모니카와 함께 하는 저자의 자유로운 여행은 부러움을 넘어 많은 매력들을 발산해 낸다. 아마도 그러한 면들이 현대인들에게 걷기여행을 보다 새로운 여행의 모델로 제시하고 또한 각광받게 한 것은 아닐까...

 

언젠가 떠나고 싶다는 생각은 늘 삶의 언저리를 휘감아 돈다. 하지만 결국 용기다. 모든 것을 던지고 떠나는 용기 앞에서 어쩌면 조금은 두려워하는 모습을 쉽게 만난다. 그런면에서 계절별로 그 길을 걷고 그때마다 책을 펴낸 저자의 용기에 감탄할 따름이다. 세상의 끝에서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앉아 있는 마지막 그림이 무척이나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 아직도 할 이야기가 많이 남은 듯 저자는 가을의 산티아고 길을 떠나려 한다. 가을 산티아고 길의 정취는 어떠한 또다른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줄까 기대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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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기별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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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쩌면 언제나 같은 패턴이다. 바짝 마른 입술에서 나오는 갈라진 목소리처럼 그의 글은 딱딱하게 한이 서려있다. 화려한 미사여구나 날카로운 수사도 그 흔한 인용조차도 없이 그저 시간의 흐름만을 쫓는듯 무미건조한 진행은 언제나 그랬듯 우리를 그저 차가운 절망의 나락으로 인도할 뿐이었다. 희망도 없이 내일에 대한 그 어떤 기약도 없이 보이는 그대로 그는 표현하길 좋아한다. 그 자신 조차도 겨우겨우 적막이 지나간 세월의 흔적아래에서 조금은 담담히 현실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자전거를 탈때나 겨우 즐거움을 표현하는 작가 김훈이 오랫만에 에세이집을 펴냈다. 지금껏 작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으려 하던 그가 이 책 <바다의 기별>을 통해 자신의 삶과 가족 그리고 언제나 힘들기만한 치열한 글쓰기의 일상과 일평생 그의 밥벌이였던 기자시절에 대한 기억 등을 조용히 들려주려 하고 있다.

 

우리는 언제나 작품을 통해서 작가와 만난다. 작가의 글은 그의 사상이며 또한 영혼이기에 그가 써낸 작품은 독자와 작가가 소통하는 공간이며 독자는 작품을 통해 작가의 세계를 탐구해 나간다. 그런면에서 보면 작가 김훈은 누구보다도 우리에게 친숙한 작가이기도 하다. 하지만 절망과 고통만을 보여주는 말라버린 그의 글에 우리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은 어쩌면 그가 우리가 기억하고 싶지않은 우리의 치부를 들춰내는 남다른 능력을 가졌기 때문만은 아닐까. 아버지에 대한 아련한 기억을 전하면서 그는 조용히 아버지에 대한 소개를 하고 있다. <문학기행>에서 보여주었던 것처럼 어쩌면 그가 보여주는 가장 완곡한 아버지에 대한 이해가 아닐까 생각해 보게 만든다. 딸의 성장을 바라보며 느끼는 경이 그리고 장모의 죽음을 통해 그는 생명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 생각한다. 각자가 지닌 생명은 당연히 개별적이겠지만 누구나가 맞이하는 죽음은 보편적이다. 하지만 결코 분리되지 않는 생로병사를 통해 결국은 죽음 역시도 개별적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에 그는 절망하기도 한다.

 

'고향과 타향'을 통해 그가 일산에 산다는 것을 기억해 낸다. 원래 베스트셀러를 즐겨 읽는 편이 아니었는데 몇 년전 어느 날 서점에서 <남한산성>이 손에 들렸고 단 하루만에 다 읽어 버렸다. 그리고 한동안 소설이 주는 그 절망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적이 있다. 누구나 다 아는 그 처절한 이야기를 그렇게까지 살아 숨쉬는 글귀로 표현한 그가 무서웠다. 무엇보다 무서운 글귀는 '임금이 남한산성에 있다.'였다. 그래서 책을 던져 버렸다. 그 기억이 조금 사라질 무렵 후배가 사는 일산의 어느 주점에 갔다가 자리 앞에 놓여 있는 작은 깃발을 하나 보았다. '김훈 선생님이 좋아라 하는 자리예요.'라는 글귀가 자그맣게 적혀 있었다. 순간 떠오른 것은 작가 김훈이 아니라 우습게도 태권 V의 김훈이었다. 김훈도 모르냐는 주점 종업원의 경멸하는듯한 시선 때문에 때아닌 김훈 매니아 행세를 했던 생각이 갑자기 나기도 한다.

 

가끔 그의 글 서문에 나타나는 만경강이 늘 궁금했다. <칼의 노래>와 <밥벌이의 지겨움>을 비롯한 많은 작품들에서 그는 그의 글을 만경강에 바친다는 표현을 썼다. 마침 책 속에 수록된 '시간의 무늬'라는 글을 통해 조금은 그 의미를 찾아볼 수 있는 힌트를 주는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어렵고 난해한 글 속에서 그 답을 찾기는 쉽지 않아 보일 뿐이다. 짧고 간결한 소설 작품을 통해 보이는 것만이 가장 정확하고 확실한 것임을 그가 알려주었기에 어쩌면 생명과 시간이 맞닿아있는 그 공간이 어쩌면 그에겐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게 하는 곳이 아니었을까라고 그저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도심을 뒤흔드는 소방차의 행렬을 보며 그것이 인간이 인간에게 베푸는 절박한 신뢰이며 사랑이다라고 표현한 것은 어찌보면 대단히 감성적인 작가적 표현으로 들렸다. 하지만 그것이 그저 막연한 환상이나 기대가 아닌 유년시절의 기억에서 부터 기자시절 그들과 함께 겪은 체험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고는 그가 가진 인간에 대한 기대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듯 했다. 오치균과의 대담은 글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작업인가에 대해 이야기 한다. 무엇보다 이 책의 백미는 '회상'과 '말과 사물'이다. 그가 살아왔던 힘든 나날들을 그는 되내이며 그는 절망의 기억들이 그리 오래전 이야기가 아님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서 똑같은 절망속의 한 인간 이순신을 만난다. <난중일기>는 그의 영혼을 흔들었다고 표현할 만큼 그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술회한다. 그는 그제서야 소통과 단절에 대해 이야기 한다. 언어는 인간을 소통하게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기도 하지만 우리시대의 언어는 이미 정의라는 이름으로 무기화되어 오히려 소통을 단념한 단절이 되어가고 있다고 그는 아쉬워 한다. 하지만 언어가 가진 허약한 소통력만이 우리를 좀 더 나은 세계로 인도해줄 수 있다는 꿈을 버리지 말자고 그는 강조한다. 

 

"만약 글을 쓰는 사람으로 나에게 사명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아름다움과 인간의 고귀함을 언어로써 증명하는 것이겠죠."     
하지만 그는 그 아름다움에는 이 세상의 더러운 악과 폭력 그리고 인간의 야만성이 공존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이야기한다. 그는 소설을 쓴다는 것이 불완전한 세계에서 사는 불완전한 인간에 대해서 쓰는 것이며, 자신의 소설 역시 불완전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라며 언어가 가진 어쩔수 없는 취약성에 대해 말한다. 남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닌 여전히 배우는 사람이라 말하는 그에게서 여전히 글쓰기 그 내면의 고통에 대한 이해가 느껴지는 듯 하다. 그는 여전히 빈약하다 하지만 그가 빚어내는 치열한 작가로서의 삶을 통해 그가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소통의 힘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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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 묻고 답하다 - 세상을 읽는 119개의 키워드, 노교수의 핵심 강의 노트
니시베 스스무 지음, 정경진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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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들은 늘상 바쁘기만 하다.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속에서 무엇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판단할 겨를도 없이 새로운 정보를 맞이할 뿐이다. 그러한 검증되지 않은 시스템을 통해 얻어낸 정보의 주입으로 인해 현대인들은 결국 어느 순간 판단의 근거를 잃어버리고 마는 형국에 처해 있는 것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것은 공유라는 인터넷의 정보가 가져다준 일부 왜곡된 정보에서 비롯되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인터넷이 스스로 무언가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애쓰는 수고스러움을 덜어주는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동시에 그러한 노력이 없이 이루어지는 과정이기에 개인은 본질을 찾아가면서 접하게 되는 여러가지 또다른 사실들을 만날수도 없고 또한 만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하다. 어쩌면 그러한 새로운 사실과 만나고 기뻐하고 하나하나 체득해갔던 예전의 과정들이 좀더 순수한 의미로서 학문의 과정은 아니었을까.

 

현대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어느 한분야의 전문가가 되어야 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직업이라는 수단을 통해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물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직업의 의미는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그만큼 우리는 자신의 분야 이외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관심으로 일관하지는 않을까. 오랫동안 강단에서 학생을 가르쳤던 일본의 노교수 니시베 스스무는 이 책 <학문, 묻고 답하다>를 통해 그러한 소위 현대인의 전문주의에 대해 경계를 나타낸다. 그리고 그러한 전문주의가 자신의 좁은 분야에만 빠져 다른 지식에 대해 전혀 모르는 '무지한 지식인'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지식인을 양산하고 있음을 우려한다. 이 책은 그러한 노교수의 걱정에서 비롯되어 보다 폭넓은 지식으로 대상을 그저 보이는 것이 아닌 전체적인 윤곽을 갖고 바라볼 수 있도록 권유하고 있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책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살아가면서 배우고 부딪히고 느끼는 여러가지 학문과 대상에 대해 풀이하고 있다. 커다란 여덟개의 주제는 정치, 국제관계, 도덕, 사교, 삶, 역사, 철학, 실리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각 주제 아래에는 좀 더 세분화된 주제에 대해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들에 대해 화두를 던지고 있다. 물론 각 세부 주제들은 우리가 살아오면서 익히 들어왔고 또한 배워왔으며 지금 현재에도 체득해 나가고 있는 우리들의 삶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정치라는 커다란 주제에는 정치, 권리, 의무, 자치, 의회 등이 도덕이라는 주제에는 자유, 매너, 지혜, 전통 등이 삶이라는 주제에는 질병, 나이듦, 죽음, 사춘기 등이 들어있는 식이다. 119개에 이르는 각 주제들이 워낙 방대하고 또한 세세하다 보니 각각의 주제에 대해 저자의 풀이나 해석이 어쩌면 조금은 포괄적이며 모호하기도 하다. 하지만 저자는 각각의 주제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할 핵심 포인트들을 일깨워주려 하고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일본의 학자가 쓴 글이기에 책은 다분히 일본적인 색채가 많이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천황제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나타내고 맹목적으로 미국을 따르는 일본의 정치행태를 꼬집는 항목을 통해 조금은 일본인의 시각을 벗어보려는 모습이 비춰지기도 하는듯 하다.

 

권리와 의무 그리고 의회와 권력, 권위 등을 통해 현재 우리의 정치행태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각자의 이익을 위해서 용서받지 못할 행위들을 일삼고 있는 공무원이나 국회의원들이 공복(供僕)이라는 정의에 대해 그리고 개별이익의 추구자가 아닌 공공이익의 추구자라는 가장 기본적인 정의에 대해 과연 얼마나 느끼고 있는지 다시 한번 묻고 싶어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보통 책을 보기 시작하면 전체적 맥락의 이해를 위해 책의 목차부터 살펴보기 마련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 책은 그러한 과정들을 생략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전체적으로 이해를 해야하는 것도 아니거니와 아무 부분이나 펼쳐놓고 읽어도 크게 무리가 따르지 않기 때문인것 같다. 또한 각각의 연관되는 주제를 통해 앞뒤의 주제를 계속해서 연결해주기에 어느 부분을 읽던 흥미를 느낄수 있을 것 같다. 예를 들어 글로벌, 이데올로기에 이어 미국이라는 주제가 나오는 시점은 웬지 절묘해 보이기까지 하다.  

 

학문이란 우리가 평생 배워도 모자랄 대상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언제나 배운다는 자세로 세상을 대해야 할 것이다. 물론 어느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것이 좀 더 세상을 편안하게 살아가는 방법일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떠한 한 분야의 특정 측면에만 매달리는 것은 전체마저도 단순화시켜버릴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를 위해 이러한 119개의 많은 문제를 우리에게 던져주었는지도 모른다. 단순한 문제와 답이 아닌 좀 더 커다란 시각으로 대상을 관조적으로 바라보는 노교수의 시각은 그래서 우리에게 세상을 좀 더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보라는 권유로 보이는듯 하다. 단순한 지식의 습득이 아닌 세상을 살아나가는 법을 이 책을 통해 배워볼 수 있는 기회가 된 것으로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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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민족종교 말살책 - 개정판
윤이흠 지음 / 모시는사람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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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가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단순히 설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떠한 시대건 종교는 존재했으며 당대의 수많은 세상 사람들에게 안식과 위안을 주었다는 점이다. 어쩌면 바로 그러한 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종교를 찾게 만든 원인이기도 하다. 그렇듯 종교는 단순히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역할에서 동시대의 사람들을 선도하고 깨우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서구의 개화문물이 유입되고 민중들이 새로운 각성을 하게 되면서 구한말의 조선에도 그러한 종교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것은 그때까지 유교나 불교만을 알고 있던 조선의 민중들에게는 새로운 물결이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동학이라는 새로운 변화는 강렬한 민중의 목소리가 되어 표출되기도 했다. 위태위태하던 대한제국이 문을 닫고 민중들은 구심점을 잃고 방황하기 시작한다. 한일합방 이후 식민지 조선을 영원히 자국의 영토로 삼으려는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종교는 마침내 민중을 하나로 모으는 새로운 형태의 민족종교로 자리잡아 간다.

 

이 책 <일제의 민족종교 말살책>은 그러한 변혁과 혼란의 시기 조선의 민중을 한데 모으고 엄청난 세력으로 성장했지만 끝내 몰락 아닌 몰락의 길을 걸어야 했던 일제하 한국의 민족종교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책이다. 당시의 민족종교들은 지금 현재는 쇠퇴하여 겨우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수준이지만 천도교, 보천교, 대종교로 대표되는 민족종교들은 각각 수백만의 신도를 지닌 사회선도적인 종교였으며 동시에 핍박받고 있는 민중에게 내일의 희망을 보여주었고 또한 체계적인 독립운동을 주도하는 구국운동의 주체이기도 했다. 이 책은 그러한 민족종교들을 조선총독부가 어떠한 방법으로 핍박했으며 또한 어떠한 과정을 거쳐 말살이라는 단계에 까지 이르게 했는지 심도있게 조망하고 있다. 또한 저자는 거기서 더 나아가 그러한 종교들이 지금까지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이유 역시도 일제의 체계적이고 주도면밀한 계획하에 씌워진 사교라는 굴레가 지금까지도 남아있음을 지적해낸다. 한때의 영광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외세가 어떠한 방법으로 민중의 힘을 농락하고 짓밟았으며 우리 역시 여전히 같은 시각으로 우리의 민족종교를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 것인지 이 책을 통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기회를 가진다.

 

혼란한 시기 망국의 한은 민족종교라는 수단으로 서서히 한데 모아진다. 그러한 통합을 우려했던 일제는 다각적인 방법을 통해 민족종교들을 탄압한다. 당시 일본의 제국주의는 자신들의 국체를 보호하거나 확대하는데 유용하지 않거나 조금이라도 방해가 된다면 절대 용인하지 않는 종교 공인 정책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종교를 통치의 한가지 수단으로 악용했음을 이르고 있다. 결국 기독교, 불교, 유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의 조직들이 유사종교, 사교, 사이비종교라고 정책적으로 결정되었고 종교의 사회적인 기능이라는 최소한의 역할조차도 할 수 없도록 탄압받게 되었다. 그러한 이중적인 종교정책하에서 더군다나 언론들은 민중의 시각을 돌려놓는 결정적인 역할을 자행하기까지 한다. 물론 시대적인 상황이 정상적인 언론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고 변명할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앞장서서 조선 총독부와 동일한 시각을 보여주고 있는 언론은 그저 단순히 무자비한 공격만을 일삼고 있는 모습만을 보여줄 뿐이다.

 

동학의 정신을 이어받은 천도교는 3.1운동의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고 민중의 결집을 이끌어낸 민족종교였다. 특히 300만에 이르는 교도의 숫자는 단순히 숫자를 넘어 일제에게 커다란 부담으로 작용한듯 보인다. 비중있는 사회세력으로 성장한 천도교를 일제는 지도부의 내분을 이끌어내면서 쓰러뜨린다. 이를 두고 저자는 끄나풀을 상대 조직에 심어두고 그를 이용해 조직의 붕괴를 도모하는 마피아의 행태와 같다고 비난한다. 증산교계의 하나였던 보천교는 창교주 차경석의 신비주의 메세지를 통해 민중들의 커다란 호응을 얻는다. 비밀스런 조직을 통해 유례없이 폭발적인 성장을 보여준 보천교는 3.1운동 이후 수백만의 신도를 가진 사실상 당대 최고의 종교로 떠오른다. 하지만 일제에 의해 조종된 시국 대동단 사건을 통해 민중의 지탄을 받게 되고 마침내 조직적인 일제의 해체작업을 통해 교단이 붕괴되는 결과를 맞이한다. 그러한 보천교의 해체과정을 설명하면서 저자는 정글의 맹수가 아무런 방어력을 갖추지 못한 초식동물들을 공략하는 장면과 같다 이야기한다. 단군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은 대종교는 강력한 민족자존의 사상을 갖고 성립초기부터 항일구국운동을 전개했다. 독립의식의 고취와 인재양성이라는 그들의 목표는 일제에게 교단이 항일을 위한 비밀결사체라 단정하고 가혹하게 탄압하기에 이른다. 그결과 대종교는 한반도를 떠나 만주등지로 피신하게 되었고 일제는 천도교와 보천교를 대하던 것과 달리 직접적인 군사행동을 통해 대종교를 압박하는 방법을 택한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천도교, 보천교, 대종교는 그 교리와 사상은 다르지만 일제하 민족과 문화의 자주성을 생명으로 삼는 민족종교라는 점에서 하나의 시각으로 일제에게 비춰진다. 그리고 종교가 아닌 유사종교라는 굴레를 씌워 종교 자체를 부정하는 정책으로 그들의 성장을 막아선다. 결국 책에서 언급된 종교들은 사라지거나 사실상 그 기능이 마비되기에 이른다. 저자는 그러한 굴레가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음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러한 개념들이 여전히 한국의 언론과 지성인들 사이에서 통용되고 있는 논리임을 지적한다.
"아직까지도 일제의 문화정책이 얼마나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저자는 한국 민족종교에 대한 일제의 정책을 살펴보는 이 책을 통해 적어도 그들이 그들앞에 닥친 역사적 선택에서 민족을 지키는 구심력이 되었다고 판단한다. 그리고 그 판단의 주체의식이 민족주의였고 바로 우리 민족이었음을 상기 시켜주고 있다. 그리고 성숙한 주체의식이 그러한 민족종교를 탄생시키고 일제에 저항해왔음을 강조한다. 결국 저자가 이야기하는 것은 불행한 우리민족의 과거사를 좀더 정확히 이해하여야 하며 그래야만 우리에게 보다 건강한 미래가 다가올 것이라 이야기한다.
"미래 지향적인 시각에서 과거의 역사를 종합적이고 비판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은 당연히 가해자의 악랄함과 피해자의 약점을 동시에 조명하면서, 인간 지성의 보편적 목소리에 귀 기울려 과거를 비판하고 내일을 준비하는 것이다."

 

책에는 당시의 신문기사를 가감없이 그대로 서술되어 있다. 그를 통해 언론이 얼마나 각 종교들에 대해 부정적 이미지를 전파하는데 주력했는가를 보여주는듯 하다. 조직적인 탄압과 언론의 적극적인 동조 아래 민족자존의 꿈은 사라져 갔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말아야 할 것은 그러한 정신 자체를 망각하는 것이다. 적어도 역사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후손이 되기 위해 그리고 보다 정당한 그들의 평가를 위해 좀 더 열린 시각으로 민족종교에 대해 살펴보는 시간이 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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