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큰 놀이터다 - 화랑세기에서 배우다, 소통편
김정산 지음 / 예담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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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제도는 삼국중에서 상대적으로 가장 빈약했던 국력을 가졌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데 있어 가장 신체적, 정신적으로 기여한 국가의 제도였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여기에서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사가 여기에서 생겼다'라는 <화랑세기>의 문장을 인용해 화랑의 성격과 그 특징을 전하고 있다. 하지만 <화랑세기>는 오랫동안 고서속에서 그 이름만을 볼 수 있었지만 1989년 그 필사본이 발견되면서 국내 사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받게 된다. <화랑세기>는 화랑들의 우두머리 풍월주 32명의 전기가 주로 담겨있는 책이지만 그 안에는 그들의 계보 뿐만 아니라 당시 신라시대의 왕위계승 방식 그리고 왕실내의 근친혼 등 자유분방하기만 했던 신라의 성풍속이 속속들이 들어 있다. 또한 권력을 둘러싼 음모와 암투 그리고 화랑들은 물론 왕족들의 생활상을 통해 당시 신라사회의 전반적인 모습을 전하는 책이기도 하다. 하지만 발견된 이후 부터 시작된 진위논쟁은 끝이 없다. 무엇보다도 <화랑세기>가 그러한 논쟁에서 자유로울수 없는 이유는 그 내용들이 사실로 인정된다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국내역사학계에 커다란 혼란을 몰고올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팽팽한 논란과 대립과는 상관없이 <화랑세기>속의 인물들은 서서히 묻혀진 역사속에서 깨어나 새롭게 평가받기 시작하고 있다.

 

삼한지의 작가 김정산의 소설 <세상은 큰 놀이터다>는 <화랑세기>의 많은 인물들 중에서 화랑의 1세 풍월주였던 위화랑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위화는 본래 날이군이라는 빈촌출신이었으나 여동생 벽화가 비처왕의 황후가 되면서 그 외척이 되어 중앙으로 진출하게 된다. 시골 한량에서 일순간 황후의 오빠라는 막강한 권력의 중심으로 부상했지만 그는 권력을 쫓기보다는 본래 가지고 있던 풍류라는 자신만의 철학을 앞세워 모든 이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된다. 누구를 만나든 막힘이 없고 거리낌없는 그의 행동을 당대의 고승 법화는 '무장무애(無障無碍)'라 한다. 그는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누구앞에서나 욕심을 차릴 필요도 행동과 말에 거짓이 있을 필요도 없었다. 그러한 그의 낙관적인 삶의 태도는 당대 최고의 권력을 가지고 있던 국공 원종을 비롯한 마복칠성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릴수 있게 만든 한는 힘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또한 일반 백성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그의 성격과 생활은 요즈음으로 치자면 천하의 한량이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작품에는 그러한 풍류를 쫓던 위화와 함께 원종의 이야기가 많이 다루어진다. 원종은 후일 법흥왕이 되는 인물로 국공에서 태자로 권력의 최정점에 서 있던 인물이다. 호방하고 남자다운 원종과 삶을 관조한듯 살아가는 위화의 삶의 태도는 여러가지 면에서 대비를 이루기도 한다. 법화는 원종을 일컬어 산과 같고 위화를 일컬어 물과 같다고 했다.
"원종은 어떤 것도 겁내지 않고 무엇으로도 속박할 수 없는 큰 인물이기지만 오직 하나, 백성과 민심만은 누구보다 두려워 했다. 다시 말해 백성과 민심이라는 포승만 있다면 천하의 원종도 붙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위화에게는 그런게 아예 없다. 그를 사로잡아 울타리에 가둘 게 아무것도 없었다는 말이다. 이런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다."
시골 출신의 비렁뱅이에서 경주 최고의 인기인이 되었지만 그에게도 위기는 다가온다. 한 여인때문에 원종과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위화는 일순간에 모든 것을 잃는다. 어쩌면 그의 생애 최악의 시기였지만 그는 스스로 몸을 더욱 낮추고 저자거리에서 사람들과 어울렸다. 그는 자신에게 닥친 어려움을 뒤로하고 백성들에게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만나는 질곡들이 오히려 축복이며 기회라며 위안과 용기를 심어준다.

 

후사를 놓고 고민하던 법흥왕이 그 결정을 하는데 있어 위화는 자신의 외손인 비대 보다는 천리와 인륜에 따라 후일의 진흥왕을 택하게 하는데 기여한다. 그가 욕심을 부렸다면 그의 외손이 다음 왕이 되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그는 복잡하고 어려운 일일수록 순리에 따르자는 조언을 통해 욕심을 버린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그는 그 일로 진흥왕의 어머니 지소태후의 신임을 얻어 화랑의 초대 풍월주가 된다. 화랑도에서 말하는 풍류사상이란 고달픈 현실 생활 속에서도 늘 마음의 여유를 갖고 즐겁게 살아갈 줄 아는 삶의 지혜와 멋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한 멋이 정서적 생활 모습으로는 가무를 즐기고 철따라 물 좋고 산 좋은 경관을 찾아 노닐면서 자연과 기상을 키워나가는 화랑의 기반이 되었고 그것은 위화가 자신의 일생을 통해 타인들에게 보여준 삶의 태도이기도 하다.

 

"사람을 경영하는 일은 곧 사람사이의 관계와 소통을 원활히 하는 것입니다."
<화랑세기>의 진위여부와 상관없이 소설은 우리가 그 안에서 배울수 있는 세상과 소통하는 법과 관계의 재정립이라는 관점에 주목한다. 물론 소설속의 신라인들은 아무리 개방적인 현대인들의 관점으로 보아도 이해하기 힘든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듯하다. 복잡하기만한 세상에서 모든 잣대를 먼저 들이대보고 자신의 이익을 계산해보려는 현대인들에게는 그들의 삶은 무척이나 어렵게만 보일 것이다. 하지만 위화가 보여준 관계를 중시하고 누구와도 소통을 열어 놓는 삶은 태도는 화랑제도의 근간이 되었고 후대의 신라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어쩌면 사람이 세상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고대 신라나 지금이나 그리 다를 것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관계라는 사람 사이의 가장 기초적인 끈 때문에 고민하기도 하고 때로는 어려워 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가장 어려워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아마도 그 바탕에 숨겨진 욕심 때문일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욕심이라는 것을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그러한 사욕에 앞서 자기 자신을 스스로 닦으라는 위화의 말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가장 기본적으로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아닐까 생각해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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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회용 남자 - 성,사랑과 돈 다윈의 눈을 통해 본 당신의 세계
마이클 길버트 지음, 김석규 옮김 / 일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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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은 그 태생부터 집단을 이루어 살아왔다. 그것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각종 육식동물들이 출몰하는 초원에서 생존을 확보하기 위해 공동으로 일하고 협동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공동체는 각자의 배우자와 연결되어 아이를 낳고 기르며, 부모와 친족관계를 맺고, 자녀들과 교감을 나누며 살아가는 가족의 기초가 되었으며, 나아가 가족제도는 피로 연결되어진 끈끈한 서로간의 관계이며 동시에 인류가 가진 중요하고 독특한 유산이기도 하다. 그렇게 각자의 혈족과 인종적 뿌리는 과거에나 오늘날에나 개인이 사회에서 안정적인 위치에서 각자의 일을 해가는데 필요한 가장 중요한 목적의식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바탕에는 남자와 여자가 만나 하나의 가족을 이루는 결혼제도가 그 근간이 되고 있다.

 

전통적으로 남녀는 각자에게 주어진 특성과 임무대로 살아온 것이 명백한 사실이다. 해가 뜨면 남자는 그들의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들로 나가 사냥을 해야했고, 여자는 남자를 기다리며 아이를 양육하고 가정을 지켜왔다. 그러한 서로간의 의지는 치열한 경쟁이 펼쳐지던 초원에서 인류가 지구의 주인으로 자리잡게 하는데 무엇보다 결정적인 역할을 해 왔다. 하지민 현대사회가 도래하고 남녀가 동등하다는 여권신장의식이 뚜렷해지면서 서서히 남녀간의 차이는 조금씩 희석되어 갔고 이젠 그러한 자연이 준 각자의 영역을 넘어 그 역할조차도 파괴되어 버리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그것은 남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아이에게 정자를 제공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라고도 할 수 있다. 대학에서 다양한 연구활동을 펼치고 있는 마이클 길버트는 <일회용 남자>를 통해 남자가 그렇게 사회에서 도태되고 과소평가되는 것과 함께 여성의 역할이 급격히 증대되는 것을 우리에게 주어진 또하나의 위기로 바라보고 있다. 그렇기에 그는 이 책을 통해 그러한 역할 파괴의 현 시점에서 인류가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며 원시시대부터 이어진 남녀간의 근본적인 관계를 통해 그러한 위기를 극복하고 혼란한 가족제도의 건전성을 회복해보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인류 조상들의 관심 영역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가족과 친인척을 부양하는 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영구적인 임무였을 뿐이다. 그러나 그 부양의 과정에서 남자들은 항상 도전하고 또한 새롭게 문명을 창조하면서 그들 앞에 나타나는 수많은 방해요소들과 싸워왔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수많은 가능성과 함께 기회를 발견했다. 그것들은 모험, 정복, 지배라는 근본적인 남자의 욕구로 드러났다. 하지만 근대문명과 제국의 출현은 남과 여 그리고 보다 근본적인 부부관계에 까지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근대 산업사회의 활기찬 가정의 부인들은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세기가 되면서 인류의 기술과 혁신은 이전의 시대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의 도약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급속한 사회적, 환경적 여건은 부부계약과 가족제도에 도전장을 던지기 시작했다.

 

현대의 사회와 직장 심지어 군대까지도 남녀간의 차이는 없어져버렸다. 그것을 저자는 어린 학생들이 학교에서부터 남녀간의 차이를 없애버린 교과과정을 통해 습득하며, 그러한 교육은 소녀들에게는 실망과 정서적 혼란을 만들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소년들에게는 자신들의 독특한 기능이나 자존심에 대한 모든 감각을 상실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은 그들의 남성적 에너지를 낙담하게 만들며 여자들이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기에 자신들은 특별히 필요없다는 인식을 불러와 결국에는 그들을 허약한 존재로 만들고 더 나아가 여성들과 격리되고 말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부부계약과 결혼은 남자를 성적 혼돈에서 벗어나 헌신적 육체관계와 양육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고 있다. 남자는 정자를 가진 인형이자 일하는 기계이고, 나아가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는 존재이다. 남자들은 독특한 역할이 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남자는 원칙없는 쾌락, 방향없는 에너지, 목적없는 운동일 뿐이다. 그는 폐기처분될 수 있다. 그는 일회용 남자이다."
저자의 말처럼 이제 더 이상 남자에게는 독특하고 없어서는 안될 기능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남녀간의 생물학적 차이를 무시하고 동등한 교육과 기회가 제공되는 현대 기술로 무장한 여성들은 이제 남성의 영역으로 들어와 있다. 학교에서도 거세되고, 운동에서도 일정 자리를 내주고, 직장에서도 함께 경쟁하게 되면서 더이상 남자에게는 자신들의 특성을 뚜렷하게 드러낼수 있는 활동무대는 없는듯 하다.

 

물론 현대사회에서 여성들이 보다 많은 기회를 제공받고, 보다 공정한 대접을 받으며 그것이 마땅하다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또한 여성들은 많은 영역에서 성공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지만 남성들은 타고난 성격상 여성적인 영역으로는 진입이 어려워 보이기만 하는 것이 현실이다. 저자는 그러한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우선 여성다움의 감정과 정신을 부활시켜 여성들의 완전한 잠재성을 존중하고 북돋을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그것은 더이상 여성들이 남성다움의 모방으로 인해 자신들의 장점을 축소시킬 것이 아니라 자연에서 주어진 본능처럼 남성의 거친 면을 순화시켜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공동체를 재건하고 자연의 모습을 지키기 위해 양육과 번식을 문화의 중심으로 되돌려 놓는다면 실현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남녀간의 성은 자연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남성을 폐기처분 하면서까지 남녀간의 성의 분화 자체를 거스르고 있다. 그것은 이전의 시대보다 더욱 거칠고 경쟁적인 세상의 모습이 될 것이라고 저자는 걱정스럽게 이야기 하기도 한다. 여성이 남자의 업무를 떠맡게 돼 불행해지기 보다는 자연의 부름을 존중함으로써 가장 행복한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자는 저자의 제안은 지금 우리가 서 있는지 느끼게 해 주는 것 같다.

 

"자연이 준 유산에 닻을 내려라."
대체적으로 저자는 여권운동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여권신장은 여성의 여성다움이 없어지고 결혼제도가 도전에 직면하면서 보다 근본적인 남녀간의 관계조차도 위협받는 결과를 낳았다고 이야기 한다. 스스럼없는 낙태, 책임없는 이혼, 그리고 남자들과의 경쟁에서 오는 새로운 스트레스 등은 이제 모두가 안고 있는 문제점이기도 하다.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저자의 말처럼 현대 사회의 위기는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그러한 당면한 과제를 종교적 관점으로 풀어내려는 것은 웬지 미국식 사고가 아닌가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이 책이 현 미국 사회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있는 책이지만 이 책 속의 이야기들이 결코 우리에게도 그저 남의 이야기로 들리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남과 여 따로가 아닌 모두가 함께 공존하는 행복한 사회를 바라는 것은 모두가 바라는 꿈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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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 미술에 대한 오래된 편견과 신화 뒤집기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 지음, 박이소 옮김 / 현실문화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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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첫 번째 장을 열며 '미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평가받는 유명한 미술작품들에 대해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라고 단언한다.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나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심지어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까지도. 그렇다면 저자는 무엇때문에 인류의 유산이라고까지 칭송받는 그러한 작품들에 대해 감히 미술이 아니라는 전제를 던지게 했을까라는 질문에 우리는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그것이 아마도 이 책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의 작가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가 말하려고 하는 이 책의 주제일 것이다.

 

 원래 이 책의 원제는 <Believing is Seeing> 즉,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다시 말해 제목에서도 유추할 수 있지만 우리가 미술작품을 접하는 태도 자체에 선입관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앞에서 말했던 예술작품 혹은 미술작품들을 우리가 접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있던 '예술'이라는 단어에 대한 이미지만을 쫓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각자의 경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예술에 대해 지닌 선입관들 이를테면 고귀한 것, 지위, 진선미의 가치, 문명의 꽃등에 대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원래의 이미지를 오해하게 만든다는 것이며, 이러한 선입관들은 과거를 신비화 시키며 불투명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것은 미술에 대한 개념과도 일치한다. 뒤샹은 자신이 만든 변기에 '샘'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미술작품인 조각이라고 칭했다. 즉, '샘'은 변기이긴 하지만 현재의 미술제도, 다시 말해 미술전시장에 전시함으로써 원래의 변기라는 기능을 버리고 재탄생되었기에 미술작품으로 본다는 것이다. 또한 뒤샹은 아프리카의 제례용품들을 '원시미술'이라고 부르던 20세기 초반의 미학적 인식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다.
"종교적 물건들에 '미술'이란 이름을 붙인 것은 우리들이며 사실 그러한 단어는 원시인들에게도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는 다만 우리 자신의 만족을 위해 이 개념을 창조했으며, 사실상 우리 자신만의 용도를 위해 이를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
이것이 바로 뒤샹의 근본적인 반미학적 경향이기도 하다. 그는 미술 자체에 대한 반성과 그 토대에 대한 공격에서 발생한 반미학적경향을 확립하기도 했다. 이러한 뒤샹의 본질적인 파헤침은 후에 다다이즘이나 초현실주의에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책의 원제 <Believing is Seeing> 중의 하나인 'Believing'이란 무엇일까. 존 버거는 자신의 책 <보는 방법 - Ways of Seeing>를 통해 현실 이데올로기에 대해 언급한다. 버거가 말하는 이데올로기는 '현실에 대한 우리의 살아있는 관계'로 묘사된다. 이데올로기란 자연스럽거나 그럴법한 상태처럼 보이는 것을 말하지만 항상 유동적이기도 하며 특정한 역사적 순간을 맞아 형성되기도 한다. 결국 효과적인 이데올로기는 쉽게 우리들 인간에게 받아들여지기도 하며, 또한 다른 것이 생겨나기 전까지는 아무런 것에 대해 도전받지도 않는다. 그것은 그때의 '고정관념'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하지만 오랜 인간의 역사처럼 이데올로기는 그 누구도의 강요도 없이 사라지기도 하며 또한 새로운 것이 생겨나기도 한다. 바로 그것이 미술작품을 보는 시대적인 차이의 이데올로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미술은 무엇을 말하는가

 

 첫 단락에서 미술작품이 아니라고 언급된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는 로마 시스티나 성당의 프레스코 벽화의 일부이다. 즉, 그것은 다시 말해 그 그림이 그려지게 된 배경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아담의 창조'는 교황의 종교적 권위와 정치적 권위를 위한 도구였으며 기독교와 교황청의 권력을 시각화한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미술작품의 개념과는 거리는 있었던 창작물이었던 것이다. 결국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미술의 개념 즉, 그 작품에 대해 절대적 권위를 가진 미술가에 의해 창조되고 그 시각과 권위는 개인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에 미술작품이 아니라고 단언했던 것이다. 오늘날 잘 알려진 다빈치의 '해부학 스케치'역시 마찬가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다빈치에게 그 그림은 세계를 이해하는 수단이었으며 보고 관찰하고 기록하던 지식의 수단일 뿐 이었다. 시대의 바뀌는 이데올로기는 현대에 와서도 그대로 적용되기도 한다. 1960년대 앤디 워홀은 '달러화'라는 화폐그림을 통해 현대의 추앙받는 존재인 스타 역시도 우리 사회에서 의미와 가치가 만들어지는 추상적인 영역 속에서 탄생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형태의 미술은 서구문화에서 개인이 자신의 인간성을 인식해 가는 방식이 혁명적으로 변화하는데 발맞추어 발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술 역시도 18세기부터 그 근대적 의미, 즉 천재적 개인의 독창적인 산물이라는 의미를 지니기 시작했다. 확실히 그 이전과는 다른 이 창작물들은 아프리카의 그것과는 다른 기본적으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동떨어져 있으며, '아담의 창조'처럼 종교적인  배경을 갖고 있지도 않으며 정치적인 선동을 위한 것도 아닌 미적 아름다움을 지닌 것이다.

 

 고대의 예술은 배워야 할 지식이며 기술 혹은 기능이기도 했다. 그것은 중세까지도 계속해서 그러한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르네상스의 시대가 열리면서 미술이라는 용어는 현대적 의미의 그것으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독립된 장르가 아닌 자유기예의 하나로 인식되었다. 17세기 말 프랑스에서 일어난 신구논쟁을 통해 예술은 과학으로부터 분리되기 시작했고 서서히 예술이 과학과 같은 이성적 활동이 아닌 상상력의 소산이아는 관념이 싹트기 시작한다. 이러한 의식은 미학이라는 개념에서도 공존했다. 미학 역시도 18세기말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는 개념 중에 하나였다. 근대적인 미학의 윤곽을 처음 세운 칸트는 자신의 책 <판단력 비판>을 통해 순수한 아름다움은 자연과 예술에서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즉, 자연은 신에 의해 창조된 아름다움이고  그에 비해 인간에 의해 창조된 아름다움이 바로 예술이라고 평가했다.

 

 초기 근대 미술은 근대 초기의 사회를 이루는 유기적이고 진보적이고 자기반영적인 질서를 재현하고 있다. 그러나 20세기 초반이 되면서 근대 미술사는 사실적이고 환영적인 재현에서 좀 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이미지로 점진적인 발전을 보이기 시작한다. 몬드리안은 자신의 그림 '적, 청, 황의 구성'에서 수직과 수평, 세 가지 원색(적, 청, 황)과 흑백만으로 축소시키면서 그림의 구성요소들을 시각의 본질로까지 환원시켰다고 생각했다. 즉, 추상미술만이 근대 세계에 걸 맞는 유일하고 특별 보편한 언어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추상적인 작품들의 나열은 그들이 꿈꾸던 이상주의 사회와 유토피아의 세계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추상미술은 그들의 바람대로 근대 세계의 보편적 언어가 되기보다는 소수의 지식인들만이 이해하고 감상할 줄 아는 신비하고 어렵기만한 주제로 남게 되었다. 그러한 사실들은 오늘까지도 이어져오고 있으며 그것이 바로 모더니즘과 추상미술이라는 근대를 열려했던 미술들의 실패로 이름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산업혁명을 거쳐 19세기가 되면서 유럽의 대도시에는 노동자 계층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사람들이 생겨나게 된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어진 여가시간이라는 존재는 18세기까지 귀족층만의 특권이었던 오페라, 고전음악, 문학, 미술 등이 아닌 뭔가 새로운 형태의 문화를 요구하게 된다. 물론 그것이 고급문화에 반하는 모더니즘 문화였지만 그것은 대중문화라는 새로운 이름의 예술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20세기 초의 미술은 대중문화와 대중매체라는 주제와 연관 지어 이해해야 할 것이다. 20세기의 문화적 코드는 새롭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보다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대량생산이라는 전제하에 발전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사진술, 인쇄기술, 라디오, 영화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시대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었다. 또한 미술이라는 전제하에 사각의 캔버스위에서만 행해지던 틀의 한계를 뛰어 넘으려는 시도가 행해지기 시작한다.

 

 현대 미술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피카소는 콜라주라는 형태를 창시한다. 이것은 서구회화의 획일적인 전통에 중대한 전환점을 가져오게 된다. 유화물감과 캔버스의 통합은 대량생산된 재료의 활용과 도입으로 제동이 걸리고 순수회화의 성역은 파괴되기 시작한다. 그러한 그의 시도는 미술가들의 능력이 자신이 창조하지 않은 요소들 즉 대량생산된 재료에 의존했다는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이후 피카소는 보다 독창적인 양식에 접근하기 시작한다. 그것을 현대적 의미로 이해해본다면 아마도 주체성에 대한 연구라는 주제로 이해 될 것이다. 개인이 지닌 정체성과 창조성의 원천이었던 주체라고 하는 자유주의적 인간개념을 시각적으로 훌륭히 비판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미술은 급격한 형태의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그것은 순수미술 뿐만 아니라 팝 아트, 포스트모더니즘 등의 다양한 형태를 통해 제시되기 시작한다. 또한 틀에 박한 박물관, 미술관에서 탈피해 대안적인 전시공간에서 비디오 아트, 퍼포먼스, 설치미술 등 실험적인 시도로 발전하게 된다. 이제 미술이라는 형태는 그러한 현대적인 형태를 지닌 새로운 형태의 미술과 순수미술로 나뉘게 된다. 그러나 예전과 달리 순수미술은 이제 일반인이 오히려 접근하기 힘든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순수미술이라는 형태가 비교적 한정된 이들의 여가활동의 한가지이며, 그림을 그리는데 있어 기초적인 학습의 한 과정으로 인식되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순수미술이 그 이전의 시대만큼 문화에 끼치는 영향력이 약함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대중과 함께 호흡하고 교차하기도 하며 늘 우리 곁에 있는 우리가 쉽게 만날 수 있는 거리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적 의미의 미술을 보는 시각 
 
 우리가 살아나가고 있는 현재의 세상은 현란하고 다양한 시각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가 미술을 대하는 시각 역시도 다양함이 공존하기도 하지만 어쩌면 획일적인 시선으로 미술작품을 대하는 미적 시선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물론 우리의 학습의 결과가 큰 영향을 끼치기도 하지만 텔레비젼과 인터넷이라는 매체의 영향을 쉽게 간과할 수 없다. 이 책은 그러한 점을 주시할 것을 요구한다. 즉 우리들의 눈에 보이는 것과 바라본 사물을 이해하는 눈은 우리 인류가 오랫동안 세워놓은 지식과 권력의 다양한 형태, 욕망의 모습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며, 그 시각과 진실 사이에는 자연적 관계가 아닌 사회적인 관계만 존재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문화에 의해 형성되는 것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우리의 현실을 창조한다는 것을 쉽게 인정할 수 있다. 그것이 우리가 기여할 수 있는 문화의 모습이며 우리가 살아가는데 우리 자신이 주체가 되는 모습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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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20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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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이 청춘이 언제나 아름답게 기억속에 남아있는 것은 아마도 그 안에 누군가에 대한 열정적 사랑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대부분이 가져봤을만한 짝사랑에 대한 기억들, 그리고 그 상대방에 다가가기 위한 방법을 연구하기 위해 보냈던 숱한 불면의 밤들을 기억한다면 지금도 마음이 설레여 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고민 끝에 얻어내는 결론은 어쩌면 가장 쉽게 생각할수 있는 방법이기도 한 그녀와 우연히 마주치는 것 뿐이다. 기대와 설레임을 안고 그녀와 우연히 마주쳤지만 그녀는 나의 존재조차도 모르고 지나쳐 버린다. 이러한 연애의 시작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많이 쓰여진 연애의 패턴이지만 그것은 지금도 어쩌면 가장 확실한 방법이 아닐까. 

스물아홉의 젊은 작가 모리미 토미히코의 소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그러한 연애의 기본 패턴처럼 그녀를 쫓는 한 대학생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분명 연애 소설이지만 약간은 비현실적인 요소와 함께 판타지적이고 몽환적인 모습이 때때로 그려지면서 작품은 내내 꿈을 꾸듯 전개된다. 또한 소설은 두개의 시선이 교차적으로 지나가며 철저히 두개의 시점으로 갈라져 묘사된다. 그러한 구성을 통해 작가는 갈라져 나온 각자의 시선을 쫓아가는 독자에게 치밀한 그들의 심리묘사를 통해 과연 이 연애의 끝이 어떻게 될지 끝까지 궁금하게 만들고 있는 듯하다. 

주인공 '나'는 어느날 클럽선배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이미 첫눈에 반해버린 그녀를 만난다. 어차피 잘 알지도 못하는 선배였기에 나의 관심은 오로지 클럽의 후배이기도 한 그녀 뿐이었다. 윤기나는 검정색 머리를 가진 그녀에게 차마 다가설 용기가 없던 나는 피로연이 끝나고 귀가하는 그녀를 쫓아 가다가 그녀를 시야에서 놓치고 만다. 그리고는 이내 괴한의 습격으로 골목에 끌려 들어가 바지와 빤스까지 강탈당하는 기괴한 상황에 놓이고 만다.
갓 스물, 아직은 사랑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대학 1학년생 그녀의 시점은 피로연이 끝나고 귀가하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날따라 갑자기 미치도록 술이 먹고 싶어진 그녀는 매혹적으로만 보이는 어른들의 세계로 나서보기로 결심한다. 그리고는 아는 사람이 미리 일러준 '월면보행'이라는 바에서 비단잉어센터 사장이라 하는 알 수 없는 중년의 남자 도도를 만나고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다니면서 애니메이션에나 나올법한 이상한 인물들과 만나기 시작한다. 아마도 월면보행이라는 낭만적인 바의 이름이 그녀의 오늘밤 모험을 미리 예견해 주고 있는 것만 같다.

소설은 이렇게 5월의 어느 밤을 시작으로 하지만 여름과 가을 그리고 겨울까지 4개의 연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밤을 걷는 그녀와 그녀의 뒤를 하릴없이 쫓는 나는 잊을 수 없는 시끌벅적한 밤을 보낸다. 그안에서 그녀는 목욕탕이 딸린 3층전차를 타고 다니는 고리대금업자이며 애주가인 이백 노인과 술 시합을 하기도 하고 도무지 알 수 없는 히누키와 히구치를 만나기도 한다. 밤새 그녀를 따라다니다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단잉어를 맞고 쓰러진 그를 바라보는 그녀는 아직까지도 그의 이름을 모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여름이 되어서도 상황은 변한게 없다. 이미 그녀를 몇달 동안 따라 다니며 그녀의 뒷모습에 관한한 세계적 권위자라 자부하는 그는 다시금 헌책시장에서 그녀와 우연히 마주치길 기대한다. 그의 분투는 더더욱 눈부시다. 그녀가 갖고 싶어하는 어린 시절의 그림책 <라타타탐>을 찾기위해 가장 뜨거운 곳에서 엄청나게 매운 요리까지 먹어대지만 별 효과가 없다. 가을이 되면서 대학 교정은 축제의 열기가 한창이다. 그는 축제 자체에는 관심이 없지만 그녀가 축제를 보러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금 그녀와 우연히 마주치기 위해 교정으로 나선다. 여기서도 역시 '빤스 총반장' '축지법 고타츠' '괴팍왕'등 각종 기이하고 황당한 인물과 사건들이 줄을 잇는다. 오로지 그의 목표는 하나다. 사격의 상품으로 획득한 커다런 비단잉어를 등에 매고 다니는 그녀를 쫓는 그의 분투는 계속되고 이어진다. 가을편인 '편의주의자 가라사대'에 등장하는 게릴라 연극 '괴팍왕'을 통해 그는 그녀와 마침내 마주하게 되고 벅찬 감동으로 눈물까지 흘린다.

목숨걸고 그녀의 마음을 끌기위해 봄부터 달려 왔건만 겨울이 되어서도 그다지 변한 것이 없다. 봄에는 녹초가 되어 밤거리를 헤메고 다녔으며, 여름에는 그녀의 그림책을 얻어내기 위해 사투를 벌였으며, 가을에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공학부 옥상에서 뛰어내렸지만 여전히 그녀는 난공불락의 성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는 그가 사투를 벌였던 과정을 이성과 신념을 가지고 성의 주변을 흐르는 해자를 메워가는 지리한 작업이라 표현한다.
모든 길의 모퉁이에 나타나는 그에게 그녀는 언제나 환한 얼굴로 "아! 선배 또 만났네요!"라고 말한다. 그러면 그 역시 말한다. "뭐, 어쩌다 지나가던 길이었어" 하지만 그는 이미 목에서 피가 나도록 그 말을 반복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그러한 노력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소설은 읽는 내내 입가에 흐르는 미소를 느끼게 된다. 어쩌면 모두들 한번쯤은 해봄직한 상황들에서 갑자기 작가가 연출해 버리는 황당하고 우스꽝스러운 상황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작가는 천진하고 행복한 여주인공을 통해 세상의 너무나 많은 일들을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만하는 순수한 캐릭터로 만들어 냈다. 그저 매사를 긍정적으로 느낄뿐 아무런 복잡함이 없기에 그녀는 늘 행복하다. 떠나가는 그녀에게 이백 노인이 던진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역시 그녀가 그녀의 젊은 날을 그저 아름답고 행복하게 보내라는 메세지가 아니었을까, 아마도 그것이 작가가 독자에게 주는 가장 평범하고도 일상적인 주제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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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자살 클럽
전봉관 지음 / 살림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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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떤 이유에서든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것 만큼 무책임한 처사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자살은 극단적이며 모든 것의 끝을 의미하지만 어느 나라에서든 또한 어느 시대였건 자살이라는 선택은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지나간 역사인 근대의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 시대는 일제에 의해 국가의 주권을 빼앗긴 암울한 시기였지만 격변하는 서구문화의 유입 속에서 조선의 수도 서울은 하루가 다르게 근대의 모습에서 현대적으로 변화하는 중심에 놓여있었던 것만큼은 분명했다. 이 책 <경성자살클럽>은 그러한 격변과 혼란의 시기 우리 사회를 자살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접근해보는 또다른 시도일 것이다. 어쩌면 자살은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수많은 사회현상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다른 어떤 행위보다 개인에게 그만큼 치명적이고 절망적인 선택은 없다는 것이다.

 

사랑과 그 반대편에 자리하고 있는 배신은 시대를 초월해 언제나 인간과 함께 하는 단어인듯하다. 만남과 헤어짐이 이 세상의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숙명이겠지만 한없이 여리기만한 인간들은 그러한 선택에서 언제나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책의 1부 근대 조선의 사랑과 전쟁은 그러한 사랑의 종말에 대해 다루고 있다. 헤어진 사랑을 가슴속에서 지워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서구문물의 본고장에서 유학을 했던 인텔리였건 댕기머리를 자르고 짧은 치마를 입었던 신여성이었건 장안의 남자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기생이었건간에 결코 다르지 않았다. 사랑하던 상대방에게 속절없이 배신당하고 그 아픔을 이겨내지 못해 자살이라는 극단으로 치달았던 그들의 선택은 비록 시대는 다르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그리 다르지만은 않은 것 같다.

 

윤영애의 자살은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당시의 신여성의 딜레마를 그대로 보여주는듯 하다. 결혼하기전 온갖 멋을 내며 시대를 앞서가는 신여성으로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펼쳐간 그녀였지만 결혼은 그녀에게 더이상 그러한 삶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대를 대표하던 성악가 윤심덕과 김우진은 한편의 미스터리를 만나는 것만 같다. 의문의 죽음뒤엔 과연 어떠한 진실이 숨겨져 있을지...

 

2부의 근대 조선 잔혹사는 당시의 시대상을 대변하고 있다. 이화여전 학생 고창숙의 자살은 한사람을 집단으로 따돌리는 오늘날의 학교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음을 느끼며 입시지옥 속에서 죽어간 수많은 학생과 그들의 부모들이 그러한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시대적 아픔이 느껴질 뿐이다. 식민지 사회 아무런 내일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교육은 단하나의 희망이었기에 그 희망이 사라진 상태는 결국 그들을 죽음으로 밖에 내몰수밖에 없었으리라.


9화와 10화의 주인공 김상옥과 나석주는 이 책에 소개된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의미의 죽음을 택한 사람들이다. 전자가 개인적인 이유로 죽음을 택했다면 이들은 자신의 목숨을 걸어 정의에 항거한 인물들이다. 종로 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김상옥이나 조선 침략의 본거지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진 나석주는 하나 밖에 없는 자신의 목숨을 던짐으로서 일제에 항거하는 조선인의 의지를 보여주었고 그것은 당시의 조선인들에게 커다란 의미가 되기에 충분했다. 또한 그러한 그들의 뜻은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전해져 우리는 그들을 열사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책은 자살을 통해 불과 몇십 년전 서울이라는 사회의 모습을 가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당시의 경성은 커다란 뿔테 안경을 쓴 인텔리와 양산을 받쳐든 신여성이 활보하는 활력넘치는 사회였지만 그 이면엔 나라없는 백성의 설움이 있었으며 또한 그것을 극복하려는 새로운 희망이 꿈틀되는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엇갈린 사랑에 울고 극복할 수 없는 시대상에 울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일수 없는 오늘날 우리들이 살아가기 힘든 현실과 그리 다르지 않은 모습을 지닌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자살을 선택했고 그렇게 자신의 생을 마감하고야 말았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든 자살은 절대 용인될수 없으며 그 누구에게도 인정받을 수 없는 행위임이 분명하다.

 

시대를 초월해 우리들의 앞엔 언제나 수많은 시련과 아픔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 험난한 현실의 고통속에서 우리들은 신음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구나 극단적인 선택으로 치닫지는 않는다. 다만 그 치유의 과정을 누가 잘 극복해나가는냐가 관건일 것이다. 최근 몇년간 일어난 몇몇 연예인의 자살은 과거와는 또다른 의미의 죽음을 알리는 것만 같다. 그 역시도 자신을 극복하지 못하는 연약한 심성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자살을 통해 바라본 근대 경성의 모습, 그리고 이 책에 소개된 애절한 사연의 주인공들을 통해 좀 더 강한 삶의 의미를 새롭게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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