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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 미술에 대한 오래된 편견과 신화 뒤집기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 지음, 박이소 옮김 / 현실문화 / 200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첫 번째 장을 열며 '미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평가받는 유명한 미술작품들에 대해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라고 단언한다.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나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심지어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까지도. 그렇다면 저자는 무엇때문에 인류의 유산이라고까지 칭송받는 그러한 작품들에 대해 감히 미술이 아니라는 전제를 던지게 했을까라는 질문에 우리는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그것이 아마도 이 책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의 작가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가 말하려고 하는 이 책의 주제일 것이다.
원래 이 책의 원제는 <Believing is Seeing> 즉,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다시 말해 제목에서도 유추할 수 있지만 우리가 미술작품을 접하는 태도 자체에 선입관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앞에서 말했던 예술작품 혹은 미술작품들을 우리가 접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있던 '예술'이라는 단어에 대한 이미지만을 쫓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각자의 경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예술에 대해 지닌 선입관들 이를테면 고귀한 것, 지위, 진선미의 가치, 문명의 꽃등에 대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원래의 이미지를 오해하게 만든다는 것이며, 이러한 선입관들은 과거를 신비화 시키며 불투명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것은 미술에 대한 개념과도 일치한다. 뒤샹은 자신이 만든 변기에 '샘'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미술작품인 조각이라고 칭했다. 즉, '샘'은 변기이긴 하지만 현재의 미술제도, 다시 말해 미술전시장에 전시함으로써 원래의 변기라는 기능을 버리고 재탄생되었기에 미술작품으로 본다는 것이다. 또한 뒤샹은 아프리카의 제례용품들을 '원시미술'이라고 부르던 20세기 초반의 미학적 인식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다.
"종교적 물건들에 '미술'이란 이름을 붙인 것은 우리들이며 사실 그러한 단어는 원시인들에게도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는 다만 우리 자신의 만족을 위해 이 개념을 창조했으며, 사실상 우리 자신만의 용도를 위해 이를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
이것이 바로 뒤샹의 근본적인 반미학적 경향이기도 하다. 그는 미술 자체에 대한 반성과 그 토대에 대한 공격에서 발생한 반미학적경향을 확립하기도 했다. 이러한 뒤샹의 본질적인 파헤침은 후에 다다이즘이나 초현실주의에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책의 원제 <Believing is Seeing> 중의 하나인 'Believing'이란 무엇일까. 존 버거는 자신의 책 <보는 방법 - Ways of Seeing>를 통해 현실 이데올로기에 대해 언급한다. 버거가 말하는 이데올로기는 '현실에 대한 우리의 살아있는 관계'로 묘사된다. 이데올로기란 자연스럽거나 그럴법한 상태처럼 보이는 것을 말하지만 항상 유동적이기도 하며 특정한 역사적 순간을 맞아 형성되기도 한다. 결국 효과적인 이데올로기는 쉽게 우리들 인간에게 받아들여지기도 하며, 또한 다른 것이 생겨나기 전까지는 아무런 것에 대해 도전받지도 않는다. 그것은 그때의 '고정관념'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하지만 오랜 인간의 역사처럼 이데올로기는 그 누구도의 강요도 없이 사라지기도 하며 또한 새로운 것이 생겨나기도 한다. 바로 그것이 미술작품을 보는 시대적인 차이의 이데올로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미술은 무엇을 말하는가
첫 단락에서 미술작품이 아니라고 언급된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는 로마 시스티나 성당의 프레스코 벽화의 일부이다. 즉, 그것은 다시 말해 그 그림이 그려지게 된 배경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아담의 창조'는 교황의 종교적 권위와 정치적 권위를 위한 도구였으며 기독교와 교황청의 권력을 시각화한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미술작품의 개념과는 거리는 있었던 창작물이었던 것이다. 결국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미술의 개념 즉, 그 작품에 대해 절대적 권위를 가진 미술가에 의해 창조되고 그 시각과 권위는 개인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에 미술작품이 아니라고 단언했던 것이다. 오늘날 잘 알려진 다빈치의 '해부학 스케치'역시 마찬가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다빈치에게 그 그림은 세계를 이해하는 수단이었으며 보고 관찰하고 기록하던 지식의 수단일 뿐 이었다. 시대의 바뀌는 이데올로기는 현대에 와서도 그대로 적용되기도 한다. 1960년대 앤디 워홀은 '달러화'라는 화폐그림을 통해 현대의 추앙받는 존재인 스타 역시도 우리 사회에서 의미와 가치가 만들어지는 추상적인 영역 속에서 탄생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형태의 미술은 서구문화에서 개인이 자신의 인간성을 인식해 가는 방식이 혁명적으로 변화하는데 발맞추어 발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술 역시도 18세기부터 그 근대적 의미, 즉 천재적 개인의 독창적인 산물이라는 의미를 지니기 시작했다. 확실히 그 이전과는 다른 이 창작물들은 아프리카의 그것과는 다른 기본적으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동떨어져 있으며, '아담의 창조'처럼 종교적인 배경을 갖고 있지도 않으며 정치적인 선동을 위한 것도 아닌 미적 아름다움을 지닌 것이다.
고대의 예술은 배워야 할 지식이며 기술 혹은 기능이기도 했다. 그것은 중세까지도 계속해서 그러한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르네상스의 시대가 열리면서 미술이라는 용어는 현대적 의미의 그것으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독립된 장르가 아닌 자유기예의 하나로 인식되었다. 17세기 말 프랑스에서 일어난 신구논쟁을 통해 예술은 과학으로부터 분리되기 시작했고 서서히 예술이 과학과 같은 이성적 활동이 아닌 상상력의 소산이아는 관념이 싹트기 시작한다. 이러한 의식은 미학이라는 개념에서도 공존했다. 미학 역시도 18세기말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는 개념 중에 하나였다. 근대적인 미학의 윤곽을 처음 세운 칸트는 자신의 책 <판단력 비판>을 통해 순수한 아름다움은 자연과 예술에서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즉, 자연은 신에 의해 창조된 아름다움이고 그에 비해 인간에 의해 창조된 아름다움이 바로 예술이라고 평가했다.
초기 근대 미술은 근대 초기의 사회를 이루는 유기적이고 진보적이고 자기반영적인 질서를 재현하고 있다. 그러나 20세기 초반이 되면서 근대 미술사는 사실적이고 환영적인 재현에서 좀 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이미지로 점진적인 발전을 보이기 시작한다. 몬드리안은 자신의 그림 '적, 청, 황의 구성'에서 수직과 수평, 세 가지 원색(적, 청, 황)과 흑백만으로 축소시키면서 그림의 구성요소들을 시각의 본질로까지 환원시켰다고 생각했다. 즉, 추상미술만이 근대 세계에 걸 맞는 유일하고 특별 보편한 언어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추상적인 작품들의 나열은 그들이 꿈꾸던 이상주의 사회와 유토피아의 세계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추상미술은 그들의 바람대로 근대 세계의 보편적 언어가 되기보다는 소수의 지식인들만이 이해하고 감상할 줄 아는 신비하고 어렵기만한 주제로 남게 되었다. 그러한 사실들은 오늘까지도 이어져오고 있으며 그것이 바로 모더니즘과 추상미술이라는 근대를 열려했던 미술들의 실패로 이름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산업혁명을 거쳐 19세기가 되면서 유럽의 대도시에는 노동자 계층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사람들이 생겨나게 된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어진 여가시간이라는 존재는 18세기까지 귀족층만의 특권이었던 오페라, 고전음악, 문학, 미술 등이 아닌 뭔가 새로운 형태의 문화를 요구하게 된다. 물론 그것이 고급문화에 반하는 모더니즘 문화였지만 그것은 대중문화라는 새로운 이름의 예술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20세기 초의 미술은 대중문화와 대중매체라는 주제와 연관 지어 이해해야 할 것이다. 20세기의 문화적 코드는 새롭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보다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대량생산이라는 전제하에 발전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사진술, 인쇄기술, 라디오, 영화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시대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었다. 또한 미술이라는 전제하에 사각의 캔버스위에서만 행해지던 틀의 한계를 뛰어 넘으려는 시도가 행해지기 시작한다.
현대 미술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피카소는 콜라주라는 형태를 창시한다. 이것은 서구회화의 획일적인 전통에 중대한 전환점을 가져오게 된다. 유화물감과 캔버스의 통합은 대량생산된 재료의 활용과 도입으로 제동이 걸리고 순수회화의 성역은 파괴되기 시작한다. 그러한 그의 시도는 미술가들의 능력이 자신이 창조하지 않은 요소들 즉 대량생산된 재료에 의존했다는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이후 피카소는 보다 독창적인 양식에 접근하기 시작한다. 그것을 현대적 의미로 이해해본다면 아마도 주체성에 대한 연구라는 주제로 이해 될 것이다. 개인이 지닌 정체성과 창조성의 원천이었던 주체라고 하는 자유주의적 인간개념을 시각적으로 훌륭히 비판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미술은 급격한 형태의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그것은 순수미술 뿐만 아니라 팝 아트, 포스트모더니즘 등의 다양한 형태를 통해 제시되기 시작한다. 또한 틀에 박한 박물관, 미술관에서 탈피해 대안적인 전시공간에서 비디오 아트, 퍼포먼스, 설치미술 등 실험적인 시도로 발전하게 된다. 이제 미술이라는 형태는 그러한 현대적인 형태를 지닌 새로운 형태의 미술과 순수미술로 나뉘게 된다. 그러나 예전과 달리 순수미술은 이제 일반인이 오히려 접근하기 힘든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순수미술이라는 형태가 비교적 한정된 이들의 여가활동의 한가지이며, 그림을 그리는데 있어 기초적인 학습의 한 과정으로 인식되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순수미술이 그 이전의 시대만큼 문화에 끼치는 영향력이 약함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대중과 함께 호흡하고 교차하기도 하며 늘 우리 곁에 있는 우리가 쉽게 만날 수 있는 거리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적 의미의 미술을 보는 시각
우리가 살아나가고 있는 현재의 세상은 현란하고 다양한 시각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가 미술을 대하는 시각 역시도 다양함이 공존하기도 하지만 어쩌면 획일적인 시선으로 미술작품을 대하는 미적 시선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물론 우리의 학습의 결과가 큰 영향을 끼치기도 하지만 텔레비젼과 인터넷이라는 매체의 영향을 쉽게 간과할 수 없다. 이 책은 그러한 점을 주시할 것을 요구한다. 즉 우리들의 눈에 보이는 것과 바라본 사물을 이해하는 눈은 우리 인류가 오랫동안 세워놓은 지식과 권력의 다양한 형태, 욕망의 모습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며, 그 시각과 진실 사이에는 자연적 관계가 아닌 사회적인 관계만 존재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문화에 의해 형성되는 것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우리의 현실을 창조한다는 것을 쉽게 인정할 수 있다. 그것이 우리가 기여할 수 있는 문화의 모습이며 우리가 살아가는데 우리 자신이 주체가 되는 모습이기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