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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ㅣ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20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0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들이 청춘이 언제나 아름답게 기억속에 남아있는 것은 아마도 그 안에 누군가에 대한 열정적 사랑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대부분이 가져봤을만한 짝사랑에 대한 기억들, 그리고 그 상대방에 다가가기 위한 방법을 연구하기 위해 보냈던 숱한 불면의 밤들을 기억한다면 지금도 마음이 설레여 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고민 끝에 얻어내는 결론은 어쩌면 가장 쉽게 생각할수 있는 방법이기도 한 그녀와 우연히 마주치는 것 뿐이다. 기대와 설레임을 안고 그녀와 우연히 마주쳤지만 그녀는 나의 존재조차도 모르고 지나쳐 버린다. 이러한 연애의 시작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많이 쓰여진 연애의 패턴이지만 그것은 지금도 어쩌면 가장 확실한 방법이 아닐까.
스물아홉의 젊은 작가 모리미 토미히코의 소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그러한 연애의 기본 패턴처럼 그녀를 쫓는 한 대학생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분명 연애 소설이지만 약간은 비현실적인 요소와 함께 판타지적이고 몽환적인 모습이 때때로 그려지면서 작품은 내내 꿈을 꾸듯 전개된다. 또한 소설은 두개의 시선이 교차적으로 지나가며 철저히 두개의 시점으로 갈라져 묘사된다. 그러한 구성을 통해 작가는 갈라져 나온 각자의 시선을 쫓아가는 독자에게 치밀한 그들의 심리묘사를 통해 과연 이 연애의 끝이 어떻게 될지 끝까지 궁금하게 만들고 있는 듯하다.
주인공 '나'는 어느날 클럽선배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이미 첫눈에 반해버린 그녀를 만난다. 어차피 잘 알지도 못하는 선배였기에 나의 관심은 오로지 클럽의 후배이기도 한 그녀 뿐이었다. 윤기나는 검정색 머리를 가진 그녀에게 차마 다가설 용기가 없던 나는 피로연이 끝나고 귀가하는 그녀를 쫓아 가다가 그녀를 시야에서 놓치고 만다. 그리고는 이내 괴한의 습격으로 골목에 끌려 들어가 바지와 빤스까지 강탈당하는 기괴한 상황에 놓이고 만다.
갓 스물, 아직은 사랑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대학 1학년생 그녀의 시점은 피로연이 끝나고 귀가하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날따라 갑자기 미치도록 술이 먹고 싶어진 그녀는 매혹적으로만 보이는 어른들의 세계로 나서보기로 결심한다. 그리고는 아는 사람이 미리 일러준 '월면보행'이라는 바에서 비단잉어센터 사장이라 하는 알 수 없는 중년의 남자 도도를 만나고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다니면서 애니메이션에나 나올법한 이상한 인물들과 만나기 시작한다. 아마도 월면보행이라는 낭만적인 바의 이름이 그녀의 오늘밤 모험을 미리 예견해 주고 있는 것만 같다.
소설은 이렇게 5월의 어느 밤을 시작으로 하지만 여름과 가을 그리고 겨울까지 4개의 연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밤을 걷는 그녀와 그녀의 뒤를 하릴없이 쫓는 나는 잊을 수 없는 시끌벅적한 밤을 보낸다. 그안에서 그녀는 목욕탕이 딸린 3층전차를 타고 다니는 고리대금업자이며 애주가인 이백 노인과 술 시합을 하기도 하고 도무지 알 수 없는 히누키와 히구치를 만나기도 한다. 밤새 그녀를 따라다니다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단잉어를 맞고 쓰러진 그를 바라보는 그녀는 아직까지도 그의 이름을 모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여름이 되어서도 상황은 변한게 없다. 이미 그녀를 몇달 동안 따라 다니며 그녀의 뒷모습에 관한한 세계적 권위자라 자부하는 그는 다시금 헌책시장에서 그녀와 우연히 마주치길 기대한다. 그의 분투는 더더욱 눈부시다. 그녀가 갖고 싶어하는 어린 시절의 그림책 <라타타탐>을 찾기위해 가장 뜨거운 곳에서 엄청나게 매운 요리까지 먹어대지만 별 효과가 없다. 가을이 되면서 대학 교정은 축제의 열기가 한창이다. 그는 축제 자체에는 관심이 없지만 그녀가 축제를 보러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금 그녀와 우연히 마주치기 위해 교정으로 나선다. 여기서도 역시 '빤스 총반장' '축지법 고타츠' '괴팍왕'등 각종 기이하고 황당한 인물과 사건들이 줄을 잇는다. 오로지 그의 목표는 하나다. 사격의 상품으로 획득한 커다런 비단잉어를 등에 매고 다니는 그녀를 쫓는 그의 분투는 계속되고 이어진다. 가을편인 '편의주의자 가라사대'에 등장하는 게릴라 연극 '괴팍왕'을 통해 그는 그녀와 마침내 마주하게 되고 벅찬 감동으로 눈물까지 흘린다.
목숨걸고 그녀의 마음을 끌기위해 봄부터 달려 왔건만 겨울이 되어서도 그다지 변한 것이 없다. 봄에는 녹초가 되어 밤거리를 헤메고 다녔으며, 여름에는 그녀의 그림책을 얻어내기 위해 사투를 벌였으며, 가을에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공학부 옥상에서 뛰어내렸지만 여전히 그녀는 난공불락의 성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는 그가 사투를 벌였던 과정을 이성과 신념을 가지고 성의 주변을 흐르는 해자를 메워가는 지리한 작업이라 표현한다.
모든 길의 모퉁이에 나타나는 그에게 그녀는 언제나 환한 얼굴로 "아! 선배 또 만났네요!"라고 말한다. 그러면 그 역시 말한다. "뭐, 어쩌다 지나가던 길이었어" 하지만 그는 이미 목에서 피가 나도록 그 말을 반복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그러한 노력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소설은 읽는 내내 입가에 흐르는 미소를 느끼게 된다. 어쩌면 모두들 한번쯤은 해봄직한 상황들에서 갑자기 작가가 연출해 버리는 황당하고 우스꽝스러운 상황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작가는 천진하고 행복한 여주인공을 통해 세상의 너무나 많은 일들을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만하는 순수한 캐릭터로 만들어 냈다. 그저 매사를 긍정적으로 느낄뿐 아무런 복잡함이 없기에 그녀는 늘 행복하다. 떠나가는 그녀에게 이백 노인이 던진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역시 그녀가 그녀의 젊은 날을 그저 아름답고 행복하게 보내라는 메세지가 아니었을까, 아마도 그것이 작가가 독자에게 주는 가장 평범하고도 일상적인 주제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