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 - 슈필라움의 심리학
김정운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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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운'은 문화심리학자이자, 인문학 교수이다. 언젠가 문득 tv 채널을 돌리다 독특하고 동글동글한 외모와 차림새의, 너무 재미있고도 공감 가는 강연에 혹했더랬는데, 그 후 일본화를 배우러, 일본에 건너가 어느 시골마을에서 지내는 모습도 tv를 통해 봤었다. 그때는 그 일본의 시골 마을 정경이 너무도 그림처럼 예뻐서 얼빠져 봤었다. 이름은 너무도 평범하지만, 각인시켰고, 그 후 이 책을 발간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읽겠다 했다.

독일 베를린에서 유학할 당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자신의 전공을 '비판 심리학'에서, '문화심리학'으로 바꾸었다는 그는,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그것을 청중들에게 어필하는 힘이 남다르다. 강연이 그토록 인상적였듯이, 그의 글 또한 관심과 공감을 끌어내기에 충분한 듯..

여행지에서 이 책을 펼쳤는데.. 매우 적절한 선택이었다. 물론 여수로 갔었다면 금상첨화였겠으나(이 작업실의 공간적 배경이 여수인지라..),

경주와 울산을 둘러보며 가급적 숙소에 조용히 머물며 유유자적한 쉼을 누려보자는 컨셉이었으므로..

책의 부제가 '슈필라움의 심리학'이다.

독일어로 공간을 뜻하는 라움(raum)은 영어의 space나, room, place로는 전달되지 않는 독특한 의미가 있다고 한다.

물리적 공간 너머, 사회학적, 경제학적, 심리학적 공간과 연관되기도 하고, 주체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영역을 뜻하는 '행위의 공간'이란 개념까지 포함하므로..

놀이라는 뜻의 슈필(spiel)을 더해 슈필라움은 '놀이 공간'? 우리말로는 '여유 공간' 정도로 번역된다는데, 한계는 있지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율의 공간', '심리적 여유'까지 포함을 강조한다.

작가는 프롤로그에서 이 공간의 당위성을 충분히 역설한다.

오래전 읽었던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가 내게 남긴 가장 확실한 메시지는, 남자에게는 시시때때로 숨어들, 동굴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의 순기능이 역기능보다 훨씬 긍정적인 것을 이미 알고 있는 터라, 쉽고 그리고 충분하게 공감할 수 있었다.

- 한국 남자들의 이 몹쓸 분노와 적개심은 아파트라는 매우 한국적 주거 공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전통 가옥에는 사랑방이라는 가부장적 공간이 아주 폼 나게 있었다. 그러나 아파트가 들어오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남자의 공간은 사라지고 아주 못된 가부장적 습관만 남았다. 205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언급하며 물론 여자에게도 '슈필라움'이 필요하다 하지만,

특히나 남성들에게 더 필요함을 역설하는데, 오늘날 아파트 문화에서는 꿈꿀 수조차 없는 현실.

그 당위성을 설명하고자 드는 예시들이 억지스럽고 기가 막히기도 하지만 웃으면서 절로 끄덕일 수밖에 없다. 나는 여자인데도 말이지..

여자들에게는 화장대라는 공간이라도 있지 않냐며..

남자들이 운전대만 잡으면 양보하기 싫어지는 심리도 '슈필라움'의 부재요,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의 외로움과 궁핍함을 담보로 얻어낸 그들의 공간을 들여다보게 되는 것도 '슈필라움'의 부재요,

한 번씩 꿈꾸는, 은퇴 이후 텃밭이나 가꾸며 살겠다는 포부 역시 '슈필라움'의 부재라는 것이다.

- 한 일에 대한 후회는 오래가지 않는다. 이미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그 결과가 잘못되었더라도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얼마든지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는 쉽게 정당화되지 않는다. 한 일에 대한 후회는 내가 한 행동, 그 단 한 가지 변인만 생각하면 되지만, 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는 그 일을 했다면 일어날 수 있는 변인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심리적 에너지가 너무 많이 소비된다. 죽을 때까지 후회한다는 이야기다. 이루지 못한 첫사랑의 기억이 그토록 오래가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60-61

그래서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2016년 귀국하여 여수에 정착해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삶이란 지극히 구체적인 공간 경험들의 앙상블이라고 정의 내리고, 공간이 문화이고 기억이며 그런 그에게 있어 공간이란, 자신의 아이덴티티라는 이야기를 하는 그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만의 '슈필라움'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되었으면 한다고 한다.

그리고 '4차 산업혁명'이라는 표현도 꼬집는다.

작금의 이 엄청난 의식 혁명을 어찌 '산업 혁명'이라는 낡은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냐는 말이다.

[이하 생략]

- 불안한 사회일수록 다양한 문화적 경험과 예술적 체험이 탈출구다. 스마트폰의 허접한 음모론이나 들여다보고, 근거 희박한 설명으로 흥분만 하는 각종 평론가의 시사 프로그램 채널이나 만지작거리는 방식으로 존재의 불안은 절대 해소되지 않는다. 144


- 사무직에서 일했던 사람일수록 손으로 직접 하는 일을 배우는 것이 좋다. 두 번째 인생에는 노동의 결과를 눈으로 직접 판단하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구체적인 일을 해야 심리적으로 소외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교수 기자 선생과 같이 말과 글로 먹고산 사람일수록 손으로 직접 하는 일을 해야 한다. 그래야 말년의 성품이 무난해지며 꼰대를 면할 수 있다. 아니면 컴컴한 방에서 혼자 인터넷에 악플이나 달며 삼십여 년을 더 살아야 한다. 달리할 일이 있는가? 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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