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각의 계절'(권여선) 수록작 '사슴벌레식 문답'(에픽 9호 발표)은 권여선식 네 친구 이야기이자 벌레 이야기. 2023 김승옥문학상 대상 수상작이다. 김승옥문학상 작가노트 '안녕 사슴벌레'를 보면 이 단편의 제목은 처음에는 '강촌 여행' 또는 '생일 여행'이었다가 '강가에는 안개가'를 거쳐, "2017년9월11일의 일기"에 기록한 사슴벌레 일화 - 토지문화관에 레지던스 작가로 체류할 당시에 동료 작가가 겪은 경험을 옆에서 듣고 적어두었다 - 를 발견하고 소설의 향방과 최종제목이 결정된다.


Georgiy Jacobson - Beetles Russia and Western Europe  By see in description -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커먼즈


김승옥문학상 작품집에 실린 리뷰 '사슴벌레는 어디로든 들어온다'를 쓴 평론가 양윤의는 이 사슴벌레식 문답을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 - 1965년 발표작으로서 권여선이 1965년 생이다 - 속 대화와 연결시킨다. “안형, 파리를 사랑하십니까?” “김형, 꿈틀거리는 것을 사랑하십니까?” 




정원은 상냥하고 조심성이 많고 무서움을 잘 타는 성격이었지만 때로는 급작스러운 광기나 충동에 몸을 맡겨 우리를 놀라게도 했다. 정원은 ‘자유’나 ‘해방’이 들어간 시나 경구, 노래 가사 등을 많이 외우고 있었는데 특히나 그 말을 전공인 불어로 발음할 때면 마치 감전이라도 된 듯 온몸에 미세한 경련을 일으키곤 했다. 그러면 우리 또한 그 유려한 발음에 감탄해 덩달아 몸서리를 쳤다. 그러나 평소의 정원은 리본이 달린 작은 꾸러미에 포장되어 어딘가로 배달되기를 기다리는 어여쁜 선물 같았고, 부영은 그런 연약한 룸메이트에게 ‘언니스러운’ 강한 책임감을 갖고 있었다. 자기는 제멋대로이면서 정원이 제멋대로 굴다 상처받는 것은 견디지 못했다. 감싸면서 단련시키려 했고 아끼면서 통제했다. 정원이 저거 너무 순진해서, 정원이 쟨 너무 고지식해, 라는 말을 자주 했지만 그러면서도 정원의 순진함과 고지식함을 교정하기보다는 보존하려 했다. 정원만의 스타일을 허물어뜨리지 않으려 했다.

누가 봐도, 있는 그대로 지켜준다, 그런 느낌이었다.

너 어디로 들어와, 물으면 어디로든 들어와, 대답하는 사슴벌레의 의젓한 말투가 들리는 듯했다. 마치 가부좌라도 튼 듯한 점잖은 자세로. 그런데 나의 상상과 달리 정원의 말에 따르면 방에 있던 사슴벌레는 몸이 뒤집힌 채 계속 버둥거리며 빠른 속도로 움직여 다녔다고 했다.

약을 쳐서 그랬나봐. 정원이 사슴벌레에 빙의된 듯 양 손가락을 바르르 떨며 말했다.

그렇다면, 하고 내가 말했다. 사슴벌레의 등에 작은 휴지를 대고 양쪽 다리에 빗자루 싸리를 몇 개씩 매달아 너 대신 청소를 시켰으면 어땠을까.

정원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원과 나는 이런 대화법을 의젓한 사슴벌레식 문답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뒤집힌 채 버둥거리며 빙빙 도는 구슬픈 사슴벌레의 모습은 살짝 괄호에 넣어두고 저 흐르는 강처럼 의연한 사슴벌레의 말투만을 물려받기로 말이다. - 사슴벌레식 문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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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뤼아르 시 선집 제4부 1940년대를 읽는 중.  아래 옮긴 글은 시집 '고통의 무기'(1944) 수록작 '용기'의 마지막 대목이다.

사진: UnsplashLouis Paulin


우리 중 아주 훌륭한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 죽었다
이제 그들의 피는 우리 가슴 속에 자리 잡고
다시 아침이 온다 파리의 아침은
임박한 해방
태어나는 봄의 공간
바보 같은 세력은 열세에 놓이리라
이 포로들 우리의 적들은
만약 그들이 깨닫는다면
만약 그들이 깨달을 수 있다면
일어나 물러가리라.

-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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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이종인 역) 중 제8권 '불경한 행위와 모범적 생활'로부터


Bacchus and Ariadne, 1971 - Frank Auerbach - WikiArt.org


미노스 - Daum 백과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08m1436a



미노스의 딸 아리아드네의 도움으로, 일찍이 사람들이 온전히 통행하지 못했던 미로에 들어가면서 실을 풀어 두었다가 나오면서 회수함으로써 테세우스는 무사히 벗어났던 것이다. 즉시 아이게우스의 아들 테세우스는 미노스의 딸을 데리고 낙소스를 향해 돛을 올렸으나 잔인하게 그 섬에 아리아드네를 내팽개치고 혼자 떠나 버렸다. 버림받아 슬피 우는 여자에게 바쿠스 신은 사랑과 도움을 주었다. 바쿠스는 아리아드네의 이마를 두른 왕관을 떼어 내 하늘 높이 던졌다. 왕관은 허공을 날아갔고 이 왕관을 장식한 보석들은 반짝거리는 별이 되었다. 이 보석들은 왕관 형상을 유지하면서 오피우쿠스 성좌와 헤르쿨레스 성좌 사이에 자리 잡았다. - 미노스와 아리아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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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도라는 죄가 없다 - 우리가 오해한 신화 속 여성들을 다시 만나는 순간'(원제 Pandora's Jar: Women in the Greek Myths)으로부터

Ariadne, 1980 - Will Barnet - WikiArt.org


The Awakening of Ariadne, 1913 - Giorgio de Chirico - WikiArt.org


Ariadne, 1988 - Maria Helena Vieira da Silva - WikiArt.org


아리아드네 - Daum 백과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14a1224a




테세우스의 삶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대체로 잘 살지 못했다. 테세우스의 연인으로 가장 유명한 아리아드네는 버려지고, 그의 아내 파이드라Phaedra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테세우스의 어머니는 그의 행동으로 노예가 되어 대가를 치른다.

파이드라는 미노스 왕과 왕비의 두 딸 중 언니(-> 동생?)로 크레타에서 나고 자랐다. 그녀의 가족들을 단순히 ‘복잡하다’고 설명하는 것은 매우 절제된 표현이다. 그녀는 미노타우로스를 처단한 테세우스와 함께 크레타를 떠난 아리아드네의 동생이다. 그리고 두 여성 모두 미노타우로스(아스테리온이라고도 함)의 이복 자매다.

테세우스는 아리아드네의 도움으로 기가 막히게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쳤다. 아리아드네는 그에게 실 한 꾸러미를 주어 미궁에서 길을 찾고 - 더 중요하게는 - 다시 실을 되짚어 미궁을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도록 해준다.

고대 로마의 서정 시인 카툴루스Catullus는 그의 64번째 시에서 아리아드네가 깨어나 테세우스가 자신을 떠났음을 알게 되었을 때 낙소스섬의 장면을 묘사한다. 그녀는 부모를 버리고 여동생의 포옹마저 뿌리쳤는데, 테세우스는 그녀가 잠든 사이에 그녀를 버렸다고 한탄한다.

테세우스가 자신을 버리고 간 사실을 알았을 때 아리아드네가 절망감을 느끼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카툴루스는 아리아드네의 입을 빌어 맹렬히 비난한다. 배신자여, 위증죄를, 그 죄를 집에 가지고 갈 건가요?

낙소스섬의 아리아드네에 이르자 갑자기 디오니소스가 나타나더니 그녀를 잠들게 한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그녀는 테세우스에 대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고, 낙소스에 어떻게 왔는지조차 생각해낼 수 없었지만 기꺼이 디오니소스의 신부가 되었다.’

한 페이지를 넘기면 크레타의 새로운 왕은 테세우스에게 ‘파이드라를 보내 아내로 삼도록 했다. 그래서 그는 아리아드네를 잃었음에도 여전히 미노스의 딸과 결혼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라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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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4-05-25 20: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리아드네와 파이드라는 자매이면서 둘 다 테세우스와 인연이 있었네요.
아리아드네는 미궁의 실이 그리고 파이드라는 테세우스의 아들과의 에피소드가 먼저 생각나긴 했어요.
그리스신화는 시간이 될 때마다 다시 읽어도 좋은 책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서곡님, 좋은 주말 보내세요.^^

서곡 2024-05-25 20:49   좋아요 1 | URL
네 그런 것 같습니다 ㅎㅎ 그리스로마신화는 볼 때마다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나오네요 댓글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 토요일 밤 즐겁게 보내시길요!!
 

전에 읽은 '나의 할머니에게'(윤성희,백수린,강화길,손보미,최은미,손원평 공저) 마지막 수록작 '아리아드네 정원'(손원평)을 오디오북으로 들었다. 

Ariadne, 1890 - George Frederick Watts - WikiArt.org


손원평 작가가 참여한 작품집 '몬스터'를 발견하고 담아둔다. 다른 참여작가들도 쟁쟁하다.



손원평의 「아리아드네 정원」은 기억 속 혹은 지금 여기의 할머니가 아닌, 근미래의 할머니를 그린다. 이때 ‘할머니’는 단어에 담기기 마련인 온기나 질감을 잃고, 그저 사회가 감당하기 어려워진 "늙은 여자"(199쪽)를 지칭할 뿐이다.

청소와 말동무를 해주러 유닛에 방문하는 20대의 복지 파트너들은 떨어진 출산율을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이민자 수용 정책을 펼치며 생겨난 이들의 자녀다. 바로 그러한 처지 때문에 차별받는 젊은 그들이 말한다.

"가장 답답한 건 젊다고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젊음은 불필요한 껍데기 같아요. 차라리 몸까지 늙었으면 좋겠어요. 남아 있는 희망도 없이 긴 시간을 견뎌야 한다는 건 절망보다 더한 고통이니까요."(219쪽) - 발문_황예인 · 아직은 아니지만, 동시에 이미 할머니가 되어


노인 인구가 전체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현대사회에서 유닛의 존재는 필연적이다. 민아가 머무는 유닛 D의 정식 명칭은 ‘아리아드네 정원’이다. 각각의 유닛엔 다채로운 이름들이 있고 그 누구도 유닛을 대놓고 A, B, C, D로 부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 예전 임대 아파트들의 이름이 그랬듯, 아리아드네 정원은 명칭을 듣는 순간 D 등급으로 각인되는 곳이다.

"할머니만은, 할머니만큼은 우리에게 정말 가족 같은 분이셨어요. 뵙지 못해도 기억 속에 언제까지나 좋은 분으로 남아 있을 거예요." 유리가 덧붙였다. 진심으로 미안하고 고맙다는 눈빛으로.

"그리고 우리에게는 아직도 조금의 시간이 남아 있어요. 그러니까 이제 마지막 얘기를 들려주세요. 멋진 사랑 얘기를요. 현실을 잊을 만큼 아름다운 얘기들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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