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여선 소설집 '각각의 계절' 수록작 '실버들 천만사'로부터 옮긴다.



사진: UnsplashMaria Ilves


2020 창작과 비평 여름호 발표작 '실버들 천만사'는 같은 해 김승옥문학상 우수상 수상작이다.

사진: UnsplashAnnie Knitter

      

cf. '실버들 천만사'는 '엄마의 이름'이라는 새 제목으로 따로 출간된 적 있다.





이 물고기는 머리 윗부분 절반이 투명해.

머리 윗부분 절반이?

응. 언뜻 보면 경비행기 앞부분 조종석에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반구형 유리를 씌워놓은 모양과 비슷해.

놀라운 건 실제 목적도 비슷하다는 거야. 원래 물고기는 눈이 옆에 달려서 위를 볼 수가 없는데 이 물고기는 큰 물고기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자기 위로 큰 물고기가 지나가는지 아닌지 기필코 알아내야 해. 그래서 자기 뇌를 젤리화해서 투명하게 만든 거야.

물고기는 유리를 못 만드니까 자기 뇌를 유리처럼 만들어서 시야가 뇌를 관통하게 한 거지. 그렇다고 머리가 완전히 유리 같지는 않고 반투명 유리쯤 돼. 그쯤만 돼도 위에 큰 그림자가 지나가는지 아닌지는 알 수 있으니까.

물고기도 그렇게 바뀌는데, 엄마. 채운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인간도 말이야, 앞만 보게 돼 있잖아. 근데 만약에 천적이 늘 뒤에서만 나타난다고 하면 그걸보려고 뇌를 젤리화시켜서 뒤를 볼 수도 있겠네.

글쎄, 뇌를 젤리화시키는 건 너무 고난도 기술이니까 차라리 고개를 재빨리 백팔십 도 회전시키는 식으로 진화하지 않을까. 경추, 그러니까 목뼈를 빙빙 도는 나사못처럼 만든다든가. - 실버들 천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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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읽은 이효석문학상 2017년 대상작 '어른의 맛'(강영숙)으로부터 옮긴다. 'Dark Wood'란 말이 마음 속 깊은 곳을 건드린다. 올해의 마지막 달이 중반으로 가는 중, 13일의 토요일이다.

Pixabay로부터 입수된 Meike님의 이미지





승신은 인형을 든 채 주변을 돌아봤고 커다란 나무들 가운데 밑동이 유독 어두운 색깔인 커다란 나무 한 그루를 발견했다. 나무 밑동이 비어있는, 썩어가는 나무였다. 승신은 인형 두 개를 파인 나무 안에 넣고 천천히 걸어 나왔다. 어두운 나무 안에서 인형들의 다리만 보이던 순간의 기억은 내내 그녀를 따라다녔다. 호연에게 프러포즈를 먼저 한 건 승신이었다. 그녀는 첼리스트 데이비드 달링의 <다크 우드Dark Wood> 레이블을 호연에게 선물했다. 호연은 그닥 뜨거운 반응을 보이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그 음악을 듣고 차분하게 쓴 편지 몇 통을 보내왔다. 승신은 호연을 만났을 때 그 나무를 떠올렸다. - 어른의 맛(강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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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자가 창조한다'(박경리)로부터 옮긴다.

By 도사 미쓰오키 - The Tale of Genji: Legends and Paintings







나는 문학에 뜻을 세운 일은 없었다. 소학교(小學校) 교과서에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의 한 부분이 실려 있어서 그것을 배웠는데 작자(作者)인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는 젊어 미망인이 되었고 딸 하나를 두었으며 궁인(宮人)이 있었다는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막연히 나도 그렇게 되었으면 했지만, 어린 나는 미망인의 처참한 삶을 알지 못하였다. - 14. 나의 문학적 자전(自傳)

(편집자 주)

이 글은 1984년 7월 1일 자 《한국일보》에 아래와 같은 편자의 주기(註記)가 붙은 채 실렸던 것임을 밝힌다.

"1984년 《한국일보》가 창간된 이래 연재소설을 집필했던 작가들은 ‘한국 전후문학 30년의 최대 문제작’으로 박경리 씨의 『토지』를 뽑은 바 있다. 《한국일보》 창간 30주년을 기념하여 본지가 마련했던 이번 문제작 선정에는 창간 이후의 집필작가 87명 중 48명이 참가했으며, 전후(戰後)문제작 3편으로 『토지』, 『불꽃』(선우휘), 『장길산(張吉山)』(황석영)을 뽑았다(《한국일보》 6월 16일 자).

강원도 원주의 전원에 묻혀 대하소설 『토지』의 마지막 부분을 쓰고 있는 "전후 최대 문제작"의 작가 박경리 씨는 《한국일보》 독자들을 위해 그의 자전적 문학론(自傳的 文學論)을 집필해주었다. 그는 이 글을 통해서 무엇이 한 작가의 오늘을 이루었는지를 들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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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설 - Daum 백과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14495



달력을 보니 오늘이 절기 상 대설이다. 어느새 한 해의 마지막 달에 이르고 7일이 되었다. '절기서당'(김동철, 송혜경) 중 '4부 겨울의 절기들'로부터 옮긴다.






이상하게 눈을 보고 있으면 포근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따뜻한 이불솜을 연상시켜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절기의 흐름 안에서 보면 이것은 착각이 아니다. 가을 막바지에는 열매가 실하게 영글고 건조한 기운이 꼭지를 말린다. 이어 열매는 땅으로 추락한다. 그리고 겨울, 씨앗은 자신의 원래 자리었던 땅과 재회한다. 이 씨앗이 봄에 싹으로 트려면 어떻게든 겨울을 넘겨야 한다. (중략) 눈은 씨앗을 살포시 덮어 씨앗이 동사(凍死)하지 않도록 잘 지켜 주다가, 양기가 동할 때는 몸을 녹여 물기를 대준다. 그야말로 ‘아낌없이 주는 눈’이다. - 대설, 아낌없이 주는 눈 ● 대설을 맞이하는 우리들의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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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서울284 https://www.seoul284.org/program/view/category/319/state/5/menu/328?thisPage=1&idx=358&searchField=all&searchText= 지난 달 구경한 전시이다. 이 달 말일에 끝난다. 올해가 옛 서울역 준공 백주년이라고 한다.


김승옥 소설전집(문학동네) 1권 '무진기행' 마지막 수록작 '우리들의 낮은 울타리'(1979)로부터 옮긴다.

옛 서울역(경성역) 공사 현장(1924)


서울역사 - Daum 백과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11s3780a





"너 새벽에 일어나 이 도시를 주파(走破)해본 적이 있니?"

없다고 나는 대답했다.

"오늘 새벽 나는 네시에 일어났어. 수유리가 내 자취방이 있는 곳이야. 거기서 걸어나와 미아리까지 오니 다섯시 반 가까이 되더라. 버스를 탔어. 나 혼자뿐이었어. 신나게 달리더라. 금방 서울역 앞이더군. 거기서 내렸어. 아직 여섯시가 되지 않은 새벽이었어. 새벽의 서울역 앞을 가본 적이 없지. 그곳은 다른 곳의 여덟시처럼 바쁘더군. 조금 전까지 혼자였는데, 서울역 앞은 모두가 혼자처럼 와 있는 혼자가 아니더군. 거기서 한강까지 걸었지. 동자동 갈월동 삼각지 용산우체국을 지나니까 다리가 아프더라. 용산역 앞은 더욱 붐비더군. 너 군에 갔다 왔니? 휴가 나온 병사, 휴가 끝나 입영하러 가는 병사의 두 얼굴이 그렇게 다를 수가 있겠니. 돌아온다는 것과 돌아간다는 것이 왜 그렇게 다른지, 무엇이 그렇게 만드는지를 지금껏 생각하고 있는데 잘 모르겠어……"- 우리들의 낮은 울타리

1979년 옴니버스 스타일의 소설 「우리들의 낮은 울타리」를 『문예중앙』에 발표. - 작가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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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07 18: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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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07 20: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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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07 20: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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