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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 연대기 ㅣ 클래식 호러
로버트 E. 하워드 외 지음, 정진영 엮고 옮김 / 책세상 / 2017년 7월
평점 :
절판
"오, 세상에! 그 친구는 죽어 있었어요! 머리가 쪼개져 있었어요. 골수와 엉겨 붙은 피가 얼굴로 흘러내렸고, 얼굴은 시체처럼 핏기가
하나도 없었어요. 그런데도 그 친구는 계단을 내려왔어요!"
좀비물은 여타의 공포물과는 다르다. 귀신처럼 어느 곳에나 갑자기 나타나 초자연적인 현상을 일으키지도 않고, 잔인한 연쇄살인마처럼 덫을
놓거나 머리를 써서 집요하게 다음 제물을 노리는 계산도 없다.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하고 무조건 공격하고 무서운 속도로 전염되어 버린다. 요즘
좀비물이 가지고 있는 몇가지 기본 설정이 있는데, 좀비가 된다는 것은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것과 비슷하게 피나 타액이 몸안에 들어가면 전염된다.
전염되면 사망에 이르렀다 다시 깨어나게 되는데 이전의 이성이 없는 상태로 다른 인간에 대한 공격성이 강하다. 다른 신체부위를 공격하는 것은 소용
없으나 머리를 공격받으면 죽는다. 위협적인 상황에서 자신이 어떤 식으로 위기를 벗어나 생존할 수 있는지 시험해보고 싶은 호기심이 사람의 심리
안에 존재하고 있어서일까 좀비물의 이런 요소들이 큰 매력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좀비와의 대치로 긴박감이 넘치는 좀비물들을 즐겨본 탓에 클래식
호러에서 엮어낸 '좀비 연대기'도 기대하며 읽었다.
'좀비 연대기'는 접하게 되는 좀비에 대한 내용과는 달랐다. 우리가 알고 있는 좀비의 원형에 가까운 설정으로 좀비를 묘사하고 있다.
아이티, 부두교, 강제 노동, 흑인 그리고 소금. 최근에 접하는 좀비물처럼 파괴적이고 공격적인 좀비의 모습이나 실험실에서 배양된 바이러스가
원인이라는 세련된 설정이 아닌 오히려 강제 노역에 혹사 당하는 노동자를 바라보는 동정적인 시선이 더 많다. 물론 좀비가 가진 특성 상 살아있지
않은 것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도 들어있다.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기존에 접하던 현대적 좀비물의 그것을 기대하고 읽는다면 생각보다 부드러운 전개에
적응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좀비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을 접할 수 있어 색다른 재미를 준다. 특히 소금을 먹이면 안된다는 금기가
인상적이다. 과거 몇몇 작품들에서 소금을 먹여 정신을 차리게 만들어 좀비가 된 사람들을 구하는 내용을 본 적 있는데, '좀비 연대기' 안에
포함된 작품들은 소금을 먹은 좀비는 괴로움에 소리지르며 자신의 무덤으로 돌아가려 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독특했다.
짧은 여러 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어 작가마다 다른 작품 스타일, 좀비의 설정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그 중 잭 런던의 "천 번의
죽음" 편은 익히 알던 좀비라기 보다는 피실험체를 통한 죽음과 소생의 반복적 실험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래서 좀 독특한 분위기라 생각하며
인상적으로 읽었는데, 실험대상이 자신의 아들임에도 개의치 않고 실험을 진행하는 아버지의 맹목적인 태도가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이질적인
작품이었다. 현대의 좀비와 가장 비슷하게 느껴진 것은 마지막 단편인 앨피어스 하이엇 베릴의 "좀비 감염 지대"인데 여타의 작품들에 비해 가장
엽기적이고 잔혹한 묘사가 등장한다. 가장 첫번째에 있는 로버트 어빈 하워드의 "지옥에서 온 비둘기"는 좀비 코드를 빌린 추리물같은 느낌이라 초반
몰입도를 높여주는 단편이었다. 좀비물을 좋아한다면 고전적인 좀비들을 '좀비 연대기'를 통해 만나보는 것도 색다를 것이다. 혹시 모를 좀비 사태를
대비해 하나라도 더 많은 정보를 알아둔다면 더 도움이 될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