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동거 주니어김영사 청소년문학 10
김선희 지음 / 주니어김영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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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라지지 않는 여름'을 아직 읽고 있는 중이지만, 잠깐의 쉼표동안 '이상한 동거'를 읽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읽기 편한 소설은 아니었다. 청소년소설은 비슷한 분량의 다른 소설들에 비해서 읽기에 편하긴 하지만, 반영되어야 할 흐름이 더 민감한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읽다가 문득 10대가 쓸법하지 않은 말투나 정말 저렇게 생각하고 행동할까 싶어지는 장면이 나오면 몰입이 깨져버리고 만다. 그게 나이든 나 때문인지, 우리가 매번 안다고 생각하면 또 자신들만의 세계로 달아나버리는 청소년들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가끔은 작가의 나이를 찾아본다. 그 시절에서 얼마나 많이 멀어져있는지. 그럼 조금 이해가 가기도 하고, 그럼에도 이렇게까지 가까울 수 있도록 얼마나 노력했는지 떠올려보며 읽게 된다.

 

 십대가 주인공인 소설을 읽다보면 주인공이 이해가 안되는 순간이 많다. 왜 저렇게 생각하지, 왜 저렇게 행동하지, 조금만 더 사리분별을 하거나 조금만 더 약게 굴면 좋을텐데 싶다. 주인공 광민이가 사사건건 엄마와 주인집 노인과의 관계에 대해 엇나가게 굴때면 알 수 없는 분노와 엇나감이 당황스러웠다. 나이를 먹어서 그렇게 생각하는건지, 아니면 원래 내 성격이 그래서 그런건지 모르겠다. 나라면 반찬으로 옥돔이 구워져 나오면 영감 옆 자리에 앉아 밥 먹으며 옥돔에 젓가락이라도 좀 대볼텐데, 창 밖으로 물안개가 보이는 인테리어 싹 된 내 방을 하나 마련해줬으면 핑크방이면 어때 너무 좋을거 같은데, 왜 광민이는 그리하지 않는 것일까. 내 청소년기에 나도 진짜 옥돔반찬을 포기했을까.

 

 '사라지지 않는 여름'도 그렇고 '이상한 동거'도 그렇고 십대의 동성애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내가 정말 동성을 좋아하는 걸까? 하고 흔들리는 내용은 보통 여중생이나 여고생들을 소재로 나오는 것 같다. 남학생이 고민한다면 그거는 보통 찐으로 가고, 여학생의 경우는 헷갈려하는 흔들림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보통인 것 같은데 그건 왜 그럴까. 남학생의 경우 고민하게 되면 진짜 동성애자고 아니면 이성애자의 경우는 보통 고민하는 법도 적어서 그런걸까. 더 나이든 성인물에서는 브로맨스로 엮은 컨텐츠가 더 많이 나오는데 유독 청소년물에서는 흑백처럼 분명한 구분이 있는 것 같다.

 

 '이상한 동거'는 전개도 빠르고 자극적?인 내용들도 곳곳에 심어져있어서 재밌게 읽기는 했지만 개연성은 부족하다고 생각됐다. 딸이 예의없이 굴도 반항하고 엇나가는데도 엄마가 굳이 주인 할아버지에게만 집중하고 아이를 방치하는 듯한 모습이 그렇다. 오히려 마지막에서야 밝혀지는 사연을 광민에게 먼저 설명해줬다면 아마 이해하고 착하게 적응했을 인물처럼 느껴졌다. 굳이 숨긴 탓에 애꿎은 광민만 엇나가고 서로를 이해할 아까운 시간만 낭비하는 것 아니었나. 그리고 강슬이나 건영이가 광민이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는 이유도 알 수 없었다. 그럴만한 계기같은 것에 대해 설명이 좀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아쉬웠다.

 

 하지만 학교에서 실시하는 동성애 관련 설문조사나 훈화, 색출 방법 같은 판에 박힌 듯이 똑같았다. 내가 학생일때도 그랬는데 지금도 저렇게 조사하려나, 싶을 정도로. 나는 뭐라고 썼더라, 그리고 저런 설문조사같은 것에 진짜로 응하는 학생이 있으려나. 요즘은 어떨까. 트렌스젠더가 여대와 여군에 들어가려고 하는 시대인데. 동성애를 한다고 고발?당한 학생이 있으면 선생님은 아직도 손을 잡고 기도를 해줄까. 너 때는 그렇게 착각할 수 있어, 하고 말해줄까. 요즘은 이런 식으로 대응하면 학생 인권을 침해한다고 교육청이든 인권위같은 곳이든 진정을 넣는 세상이 된 것이 아니었던가, 싶다.

 

 묘하게도 '이상한 동거'는 동성애를 인정하는 것 같으면서도, 한때 지나가는 고민거리처럼 보여주기도 한다. 동성애적 성향을 보이는 인물들에게 어딘지 모르게 전혀 평범하지 않은 설정을 부여한다. 지영이와 주예는 스스로의 이름짓기를 한다던지, 피를 섞어서 가지고 다니고, 부부가 됐다고 하거나, 동성애자가 아니지만 동성을 사랑한다고 하기도 한다. 아무리 남들과 다른 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평범한 구석이 없는 설정에서 거리감이 든다. 엄마의 학생시절에 대해 얘기하면서 그때 느꼈던 감정이 대부분 스쳐지나가는 것이라고 하는 부분도 나온다. 물론 진심을 품은 학생도 있다고 나오지만, 나중에 지영이 자신이 붙인 강슬이라는 이름을 버리는 장면과 더불어 대부분의 학생들이 자신이 붙인 이름을 버리고 만다는 뉘앙스를 받았다. 스탠스가 모호한 느낌?

 

 근데 문득 책이 '여고괴담2'랑 좀 비슷한 것 같단 느낌이 든다. 두명의 관계에 한명이 끼어들게 된 것(의미는 좀 다르지만)도 그렇고, 주예와 강슬의 관계를 다른 학생들도 알고 있고 이를 공공연히 피하는 분위기라는 점, 둘이 틀어지게 되면서 주예가 수업 중에 과잉된 행동을 하거나 자해를 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도 그렇다. 여고괴담에서 본 것 같은 비슷한 느낌이 있다. '이상한 동거'를 재밌게 읽은 십대라면 '여고괴담2'도 좋아하지 않을까. 청소년 관람불가였던가 아니었던가 기억은 나지 않는다만. 한국의 10대 성정체성에 대해 읽었으니 이제 미국의 것으로 넘어가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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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 비평 186호 - 2019.겨울
창작과비평 편집부 지음 / 창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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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간지를 곱씹어 읽으면서 혹은 파헤쳐내면서 생각지 못했던 것들과 마주할 수 있었다. 다양한 분야의 글을 읽으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내가 선택한 작가의 선택한 작품만을 읽을 수 밖에 없는데, 겨울호를 읽으면서는 한 권 안에서 다양한 글을 읽을 수 있어서 그 점이 좋았고 그래서 힘들기도 했다. 익숙치 못한 글을 마주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어떻게든 읽어냈다는 것. 흔한 표현이지만 과자가 종류별로 담긴 종합선물세트의 베스트 상품과 끼워팔기 상품까지 천천히 먹어치운 것과 비슷하다. 늘 고르던 익숙한 맛이 아닌 낯섦을 즐기는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솔직히, 읽으면서 가장 재밌었던 것은 자주 접했던 소설 부분이었다. 최근 관심이 생긴 작가의 글도 포함되어 있었고, 이승은 작가의 글은 처음 읽어보았는데 인상이 강렬했다. 단편 자체도 읽으면서 영상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는데, 날선 분위기와 히스테릭해지는 사람들의 모습을 조금 더 부각한다면 영화로 나와도 될 법하다는 생각을 했다. 읽는 동안 장류진 작가의 연수11회 젊은작가상에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승은 작가의 '공포가 우리를 지킨다'와 함께 굳이 찾아 읽어볼 만 할 것이다.

 

  가장 인상적으로 남은 것은 작가조명이었다. 작가조명을 읽었다고 해서 은희경에 대해 잘 알게된 것은 아니지만, 그를 안다고 생각했던 것이 너무나 오해였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그의 글을 몇 편 읽고 내가 느낀 것들은 나로 인해 해석된 일부에 지나지 않고, 그조차도 고집스럽게 굳어있거나 너무나 쉽게 변해버린다. 작가조명을 읽으면서 작품을 통해 들여다 본 은희경이 아닌, 은희경을 통해 작품을 돌아보는 체험을 했다. 다만 이조차도 은희경을 이해했다기 보다는 그의 순간에 닿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주로 작품에만 집중했는데 때로는 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려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단 생각을 했다.

 

  논단이나 현장의 글들은 타인의 시선이 강하게 묻어나오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읽었다. 아주 작은 것에도 나 자신의 판단과 선택이 들어갔다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선택이 틀렸다고 부정하기 쉽다. 나와 같으면 ‘*잘알이고 다르면 알못이 되는 세상 아닌가. 특히 조국사태에 대해서는 더욱 조심스럽고 예민한 시선이다. 다만 우리가 불합리하다고 여기는 것들이, 청산되지 못한 것들이 남은 임기 동안 좀 더 나아지기를. 때로 실망하더라도 냉소적 입장으로 마주보기를 피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며 읽었다. 

 

  벌써 2020년이 된지 한달쯤이 지났다. 어쩐지 2019년을 달고 있는 겨울의 계간지를 읽는 일이 좀 어색하게 느껴진다. 아직 이 겨울이 다 지나지 않았는데도, 벌써부터. 요즘 들려오는 전염병에 대한 소식들에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다보니 몇몇 이슈들은 아득히 멀게도 느껴진다. 2020년 봄호에서는 어쩌면 이 주제가 빠지지 않고 등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오늘이 지나면 1월이 끝나고 곧 입춘이다. 벌써부터 창비의 계간지 봄호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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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지 않는 여름 1
에밀리 M. 댄포스 지음, 송섬별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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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쩌면 이런 일이 일어나게 만들고 우리 부모님을 죽게 만든 게 하나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인생을 잘못 살고 있어서 벌을 주려고, 내가 변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주려고 그런 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변화해야 한다는 루스 이모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한편으로 어쩌면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하는 것은 이미 정해진 운명과 일련의 사건뿐이라는 뜻일지도 모른다는, 엄마가 지진을 피해 살아남은 뒤 30년이 지나 결국은 퀘이크 호수에서 익사하고 말았다는 사실에 무슨 교훈이 있는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하나님이 주신 교훈이 아니다. 오히려 퍼즐 조각을 맞춰 큰 그림을 만들어내는 것에 가까웠다. 나는 그런 생각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끊임없이, 무한히 이어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작아지고 투명해져서 그 생각들로부터 숨고 싶고 멀어지고 싶었다. (63) "

 

 뭐가 이렇게 복잡해?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었다. 1989년, 90년대 초라는 배경은 지금하고 얼마나 다른걸까.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주변에 이해받기까지는 사실 지금도 그때와는 그리 달라진 것이 없는 건 아닐까. 아무리 세상이 달라졌다고 해도, 말이다. 간단할 일도 아니지만 캐머런은 모든 일을 실제보다 더 복잡하게 만들고만 있는 것 같았다. 왜 조금 더 교묘하게 굴지 못하는거지, 십대는 원래 그런가. 십대가 어떤지를 이해하기에는 또 너무 멀리 온 것 같다. 90년대가 지나가버린 것만큼, 멀리.

 

 나라면 어떻게 했을지 가장 먼저 생각해봤다. 나 역시도 캐머런처럼 숨기거나 참지를 못했을까. 서로를 다 아는 작은 동네에서 산다면 그 안에서 나와 키스를 할만한 첫사랑 상대를 찾아 짝사랑했을지는 몰라도 실제로 무언가를 절대 티내지는 못했으리라. 작은 동네와 소문이 주는 타격이 얼마나 큰지 사춘기무렵에는 잘 알법했다. 그래서 금방 자신이 사랑할만한 여자애를 찾아 헤매는 캐머런의 행동이 불안하고 답답했다. 조금만 더 참으면 몬태나의 마일스시티에서 벗어나 얼마든지 익명의 레즈비언으로 살 수 있는 도시로 나갈 수 있을텐데. 그럼 어려운 길이라도 좀 더 쉬운 방법으로 갈 수 있을텐데.

 

 왜 이렇게까지 숨기려 하냐면, 십대시절 내가 만났던 과거의 캐머런들을 떠올려보았기 때문이다. 그애들이 '진짜'로 동성애자였든 한때의 호기심이었든, 조금이라도 그런 기미를 보인다면 확실히 소문은 잘 퍼져나갔다. 사실 그 당시의 아이들이 '조금만' 기미를 보였던 것도 아니었다. 내가 십대였을 적에는 그애들 특유의 스타일이 있었다. 재밌는 점은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가 캐머런의 동네보다 훨씬 더 동성애에 대해 유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랬어도 그애들은(그들 스스로가 부러 그런 차림을 하고 다님에도) 충분히 소문에 민감해하고 괴로워도 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고는 한때의 치기로 덮으려하는 쪽도 상당히 많았기 때문에 그렇게 서툴고 예민한 시기에 가질만한 고민은 가능한 숨겨두는 편이 나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도 내 생각도 어느새 굳은 편견덩어리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겠다. 염려라는 것으로 잘 숨겨둔. 하지만 굳이 가장 아프고 괴로운 길로 십대를 지나가는 모습은 그리 보고싶지 않다. 책을 읽는 내내 따라왔던 불안의 꼬리표는, 얄궂게도 1권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 터져나온다. 모든 원인이 서툴기만한 소녀 캐머런에게 붙어서, 그녀가 감당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의 캐머런이 조금이라도 더 뻔뻔했다면 상황은 이렇게 흐르지 않았을텐데, 그날 6월 말의 그때 캐머런이 부모님을 잃지 않았더라면 내용이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만약들을 떠올려본다. 이제 막 중반부에 들어선 1권의 끝에서 2권부터는 전보다 더한 괴로운 분량이 진행될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소설의 후반부로 가기까지 캐머런이 처하게 될 상황이 어떨까. 문득 영화 '바비를 위한 기도'가 떠올랐다. 책을 읽기 전에는 십대, 정체성, 여름이라는 키워드 때문에 '영원한 여름'이라는 대만 영화가 비슷한 느낌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읽으면서는 '바비를 위한 기도'가 비슷하게 느껴졌다. 두 영화 모두 괜찮은 퀴어 영화이니, '사라지지 않는 여름'을 읽으면서 함께 보면 좋을 것 같다. 캐머런이 주변 사람들에게 이해받을 수 있는 날이 바비보다는 빨리 오는 결말이 있기를 바라며 2권을 기다린다.

 

p243 마지막 줄 노쳐녀-노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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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것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 마음산책 짧은 소설
김금희 지음, 곽명주 그림 / 마음산책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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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지만 대학 때는 가능하던 그런 관계가 서른이 가까워지면서는 쉽지 않았다. 패턴이라는 것은 관계의 피로를 만들어냈고 여기다 일종의 '사는 문제'가 겹치면서 셋은 전처럼 섞여 들지 못한다는 느낌이었다. 만나면 즐거운 식사를 했고 마음을 터놓고 대화했지만 문득문득 서로의 차이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29) "

 

 김금희의 '나는 그것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를 읽기로 한 건, 인터넷에서 몇번이고 마주쳤던 '희소한 영자매'에 대한 영업글 때문이었다. 제목이 '규까스를 먹을래'라는 건 책을 읽고 나서야 알았지만, 읽는 동안 역시나 달콤쌉싸름했다. 이상하게도 언젠가부터 친구와는 여행가면 안된다는 것이 불문율처럼 도시괴담처럼 퍼져나갔다. 십여년 전만해도 친구들과 여행을 떠나는 일이 아무런 수식어도 없었는데, 최근들어 인간관계 파탄나는데는 친구와의 여행 특히 해외여행만한 것이 없다는 말들이 암암리에 퍼져나갔다.

 

 '규까스를 먹을래'에 나오는 세 친구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켜켜이 쌓여간 오래된 친구관계가 시간이 흐르면서 왜 더 단단해지기는 커녕 위태로워지는 일이 생기는지 곱씹어보았다. 조건이나 현실같은 것을 모르고 만나 놀 수 있던 어린시절이면 몰라도, 서로 사이에 다른 부분이 나도 모르게 눈에 띄고야마는 어른이 되고나니 나도 모르게 상처주고 상처받는 일들이 불가피하게 생기는걸까. 격없이 친해졌지만 친밀함을 더 오래 유지하기 위해 오히려 격을 맞춰 서로를 대하는 것이 더 요령있는 연령이 된 것 같아, 남에게 잘해야지 상처주지 말아야지 자꾸만 생각한다.

 

 가장 인상적으로 읽은 것이 '규까스를 먹을래' 였지만 다른 단편들도 꽤 괜찮았다. 아주 일상적이고 그래서 소설처럼 느껴지지 않는 무심한 어제와 오늘의 풍경들이 잠깐 종이 위에 올려간 듯한 느낌을 준다. " 나 누군지 알지? (54)" 같은 말을 하는 기업 간부급 인물이나 이른 새벽의 노점상들, 회사사람들을 피하고 싶은 점심시간, 출근전에 짬을 내서 어학원을 다니는 직장인들의 일상은 나에게도 익숙한 것들이었다. 언젠가 봤었던 듯한 풍경들을 찬찬히 읽어내면서 나도 스쳐지나보냈던 그것들에 대해 잠깐은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지나와보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을 장면들이 곳곳에 심어져있었다. 술자리에 붙은 뒷말과 시비나 집안일을 직접하게 되면서 그릇을 따로 잘 쓰지 않게 되는 습관, 대학에서 만나게 되는 알 수 없는 인연들. 얼마 전에 위내시경을 했던 탓인지 '온난한 하루'도 묘한 느낌으로 읽었다. '미국식 홈비디오'는 인기있었던 프로그램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를 글로 옮겨놓은 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단편을 기억에 남는 것으로 꼽을지 궁금해졌다. 자기 안에 쌓인 것이 무엇인지에 따라 다른 부분들에 눈길이 머물겠지.

 

 영업을 통해 굳이 읽어보게 된 책인데, 짧은 시간을 소소히 보내기에 좋은 책이었다. 언제든 부담없이 단편 하나쯤 읽을 시간을 들일 수 있을만한 분량이라 좋았다. 누구든 아무렇지 않지만 어쩐지 오랫동안 생각하게 되는 이상한 날이, 도드라진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그 묘한 느낌을 잘 담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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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엔젤의 마지막 토요일
루이스 알베르토 우레아 지음, 심연희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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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후아나의 꾸무럭한 날씨를 떠올려본다. 테라스 밖으로 멀리 보이던 바다 물결이 빛날때 돌고래가 튀어올랐다고 믿었던 날이, 건조하고 더운 바람, 길거리의 개들, 페인트 칠이 된 건물들, 아주 젊었던 시간에 그 곳이 있었다. '빅 엔젤의 마지막 토요일'에서 티후아나를 만나는 건 반가웠다. 미국으로 넘어가기 위해 호시탐탐 국경 근처를 배회하고 있는 사람들, 바닷가를 따라 길게 늘어진 철조망 같은 것, 싱코 이 디에스의 보니따 플라자 같은 것들이 잊고 있었던 기억에서 되살아났다. 마음을 때려오는 그리움이 가득 밀려왔다. 언젠가 꼭 한번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마음속에 항상 간직하고 있는 곳이라 읽으면서 반가웠다.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킨다면, 멕시코는 괜찮은 곳이었다.

 

 티후아나에서 미국으로 넘어가는 국경은 주말이면 긴 줄을 이룬다. 미국에서 돌아오는 길은 어렵지 않지만 미국으로 넘어가는 것은 일일이 검문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일찍부터 길이 막히기 시작한다. 빅 엔젤의 가족들이 멕시코와 미국을 오가며 살아온 역사에는 이 국경 사이의 예민함이 드러나 있다. 말뚝과 펜스가 쳐져있던 티후아나의 바닷가에서 '넘어가고 싶으면 수영을 해서 가면 되겠네'하던 물음에 그 생각때문에 바닷가에서 시체로 발견되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는 대답을 들었던 기억도 난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서 미국으로 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기 때문에 빅 엔젤이 자신에게 얼마나 프라이드를 가졌을지 이해가 됐다.

 

 멕시코에서 죽음이란 무엇일까. 처음 멕시코에 갔을 때 시장의 상점에서 가장 많이 본 것들이 해골 모양을 한 장식품들과 피냐타였다. 죽음, 죽은자를 연상시키는 해골 모양의 장식품들과 파티에 빠지지 않는 피냐타 인형이 함께 걸려있는 상점들의 모습은 처음에는 좀 어색하게 느껴졌다. 전혀 어둡거나 엄숙하지 않게 화려하게 장식된 해골들이 참 독특했다. 그곳에서는 삶과 죽음을 같은 자리에서 함께 전시하고 있는 것 같아 '빅 엔젤의 마지막 토요일'을 읽으며 참 멕시코스럽다고 생각됐다.(당연하게도!) 장례식과 생일 잔치를 앞 둔 이 가족의 이야기는 죽음에 대해 그리고 삶에 대해, 가족에 대해 말하고 있다. 죽음, 삶, 가족. 어울리지 않는 저 단어들은 사실 인생이란 테두리 안에서 너무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가장 아끼는 사람들과 필연적으로 이별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나이 먹을수록 절감한다. 그것은 어떤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일이라 가혹하다. 어릴 적에는 내가 뭐든지 할 수 있게 나이를 먹고 성숙해가는 것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는데, 내가 클수록 자라오며 의지했던 부모님이 점점 불안해지고, 시간이 너무나 빨리 지나간 것이 아쉬워지기 시작한다. 내가 너무 빨리 자라서 그들도 이렇게 빨리 늙어간 것이 아닐까. 책 속에 한 집안의 가장으로 살아온 빅 엔젤이 늙고 병들어 페를라와 미니에게 몸을 의지하여 목욕을 하는 장면이 있다. "미안하다. 다 미안해. 네가 아기였을 적에, 내가 널 씻겨주었는데. 나는 네 아버지였어. 그런데 지금은 네 아기가 되었구나.(309)" 핸드폰 조작법을 몇번이나 다시 알려드릴때 부모님도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신 건 아닐까. 

 

 언젠가 우리에게 모두 마지막 토요일이 올 것이다. 항상 그것이 아주 먼 후의 일이라고 자신하지만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실제로 그 날이 언제일지는 오직 신만이 알 것이다. "하느님 제기랄! 주님, 죄송합니다.(150)" '빅 엔젤의 마지막 토요일'을 읽으면서 영화 '코코'를 떠올렸다. 영화에서는 '죽은자의 날'을 배경으로 하는데, 가족을 중요시하고 삶의 한 부분으로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특유의 문화가 아름답게 그려져 책을 읽으면서 영화의 내용이나 장면들이 자연스럽게 연상되었다. 우리가 멕시코에 대해 갖는 이미지나 멕시코에서 들려오는 뉴스는 주로 갱단에 관한 무섭고 암울한 내용이 많지만, 멕시코는 아름답고 멋진 나라다. 멕시코에 가보고 싶어지고 그리워지는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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