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 김려령 장편소설
김려령 지음 / 창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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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연한 만남이 필연적인 만남으로 이어져 지금껏 살아온 삶의 질서를 깨뜨리는 경우가 있음을 통절하며 살아가는 게 우리 인생인 듯하다. 일상적 삶에 지쳐 피폐해진 육신에 쉼을 주는 형태의 여행은 아는 사람들이 없는 곳일수록 매력적이다. 눈에 익은 일상과 이별하고 익숙지 않은 공간에서 낯선 이들의 틈새에서 자신과 맞닥뜨리는 일들은 쉽게 잊히지 않을 자아의 본질을 일깨운다.

 

   서울 토박이인 도연은 동양과 서양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하는 이스탄불에서 사투리를 쓰는 유철에게 호감이 갔다. 유철은 이스탄불에서만큼은 일정 없이 일주일을 보내려 했고, 도연은 구상하며 글을 쓰느라 쌓인 불필요한 것들을 버리고 오려 했다. 수공예품을 파는 가게에서 우연히 만난 도연과 유철은 술탄아흐메트 광장을 거닐고 노천카페에서 술을 마시며 식당에서 케밥을 먹었다. 낯선 곳에서 청음 만난 이와 음식을 나누고 잠자리를 함께 한 둘은 일주일의 여행을 가슴에 묻고 각자의 위치에서 제 역할을 수행하며 지냈다.

 

   경남 k시 지역구 국회의원인 진유철과 k시 올해의 작가로 선정된 하도연은 시간이 흘러 다시 만났다. 도연은 유철과의 짧은 만남 이후 어딘가에서 그가 자신이 쓴 책을 볼 수도 있을 것이라는 막연히 생각할 때도 있었지만 규범적인 식상에서 그를 만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하였을 것이다. 만나야 할 사람은 어떻게 해도 만나게 되어 있고, 아무리 만나려 애써도 못 만날 인연은 만나지 못하는 게 숙명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도 깨닫기 전에 뱃속에 아이가 들어서 서둘러 결혼한 도연은 이혼하고 딸과 함께 지낸다. 밤낮이 바뀌어 생활하는 작가의 기벽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딸은 엄마가 하는 일을 응원하며 모녀 사이도 좋은 편이다. 유철은 대학원에서 만난 정희와 결혼했지만 남편의 모든 일에 함께 나서는 아내의 간섭이 힘겨웠다. 재선 국회의원으로 대중들의 통제 아래 꽉 짜인 일정을 소화하며 지내야 하는 고충에다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하려는 아내의 광적인 태도에 지쳐 가던 때, 아내의 이혼 요구를 받아들이기에 이르렀다.

 

   정치권에서 잔뼈가 굵은 보좌관은 작가와 국회의원이 한자리에 함께하는 지역구 행사를 제안하여 도연과 유철은 다시 만나 터키에서의 짧은 추억을 공유하며 사랑에 빠져들었다. 서로의 영역을 침해하지 않으면서 사랑하는 이를 속박하지 않는 자유를 허하며 둘은 궁벽한 지역과 정치 1번지인 도심에서 사랑을 나눴다. 둘의 관계를 포착한 이들은 터키에서 함께 걷는 사진을 들춰 기사로 내보냈고, 이를 본 유철의 전처는 도연을 이혼 전에 남편과 불륜을 저지른 몹쓸 작가로 낙인을 찍었다.

 

   유철이 대학의 시간 강사로 일할 때, 대학원 공부를 그만 둔 정희는 교수 자료에서부터 학생들 답안지까지 손을 대며 남편을 힘들게 했다. 남편의 일을 부부가 공유하는 일을 당연시하며 국회의원 행사에도 일일이 참석하여 남편의 자유를 잠식해왔다. 아내에게 포획되어 지내온 삶을 청산하고 이혼한 유철이지만 이혼하고 나서도 새로운 사랑을 만나 안착하는 과정이 녹록치 않았다.

 

   이스탄불에서 도연과 유철이 함께 보낸 일주일이 가정파탄을 초래한 것처럼 몰아 부친 전처 정희의 편에 선 대중들의 입김에 몰려 유철은 국회의원직을 그만 둬야 했다. 불륜을 저지른 작가로 출판 금지 처분까지 내려진 도연은 당분간 절필하며 정희의 논리에 맞서지 않았다. 극악의 상황에 몰린 둘은 사랑하는 둘이 부부의 연을 맺는다는 혼인 서약을 하고 문제를 함께 풀어나갔다. 분풀이하는 상대에 맞서 분노하며 대응하기보다는 침묵하는 가운데 일이 정리대로 돌아가기를 바랐다.

   자유로이 연애하며 사랑하고 살아갈 것이라 말하던 도연이 모든 것을 내려놓은 유철을 받아들이며 혼인을 서약했다. 남편이 하는 일 모두를 알아야 하는 것처럼 상대를 옥죄는 아내, 아내를 남편의 부속품처럼 여기며 아내 위에 군림하는 남편 등살에 못 살겠다는 이들을 보면서 진정한 부부의 사랑이 무엇인지 반문한다. 연애할 때의 호감을 사랑으로 착각하여 결혼했다 후회하며 쇼윈도부부처럼 살아가는 부모를 지켜봐야 하는 자식들에게도 못할 짓이다. 서로 안 맞아 헤어졌다면 미련 없이 그 사람을 보내주고 내 그릇을 더 넓혀 상대의 안 좋은 부분까지 담을 수 있는 도량을 기를 필요가 있다. 군중 심리를 이용하여 남편의 마음을 돌리려 하다 도리어 자기 파멸을 초래한 전처 정희의 어리석음이 아픔을 더한다. 개인의 고유성을 침해하지 않으며 서로의 성장을 위해 공유하며 오늘보다는 좀 더 나은 내일을 전망할 수 있는 우리이길 바라며 권리를 앞세운 집착을 내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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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의 맛 - 교정의 숙수가 알뜰살뜰 차려 낸 우리말 움직씨 밥상 한국어 품사 교양서 시리즈 1
김정선 지음 / 유유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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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사는 사람이나 사물의 움직임 또는 작용을 나타내는 말로 문장의 주체가 되는 말의 서술어 기능을 하는 품사로 정의 내린다. 주어와 서술어의 호응을 다룰 때 동사는 한 문장의 성격을 밝히는 데에도 비중 있게 다뤄진다. 교정을 보면서 전문성을 키워온 저자는 동사의 맛을 육수나 양념에 비유하였다. 다양한 요리에 활용도가 높은 육수, 음식을 만들 때 재료가 가지고 있는 좋은 향기와 맛은 그대로 살리고, 좋지 않은 맛은 상쇄시키기 위한 양념 같은 동사의 감칠맛에 끌렸다.

 

   ‘노랫소리는 악기와 어우러져 한껏 분위기를 돋구었다.’

   는 문장에서 동사가 잘못 쓰여 어법에 맞지 않는 표현이므로 돋구웠다를 돋우었다로 수정해야 한다. 돋우다는 감정이나 기색 따위를 생겨나게 하다는 뜻을 나타내고, 돋구다는 안경의 도수 따위를 더 높게 하다는 뜻을 나타낸다. 동사의 뜻풀이와 활용형을 밝히고 기본형이 어떻게 활용되는지 예문으로 확인할 수 있어 동사의 쓰임을 명확히 알 수 있어 유용하다. 가려 쓰면 글맛이 나는 동사와 톺아보면 감칠맛 나는 동사로 구분하여 동사를 파헤쳤다.

 

   동사의 정확한 뜻과 쓰임을 알기 위해 국어사전을 즐겨 찾아 미처 알지 못했던 단어의 의미를 인지하고 일상에서 그 단어를 활용하는 글로 내 것으로 만들어 왔다. 적확한 단어 선택을 위해 고심했던 시간을 들여다보며 문장을 통해 글을 다듬는다.

   ‘밥을 먹고 나면 그릇들을 개수통에 담가 놓지 않고 바로 부시곤 했다.’

   가시다: 물 따위로 깨끗이 씻는다.

   부시다: 그릇 따위를 씻어 깨끗하게 하다.

   동사의 기본형의 의미를 풀고, 문장으로 용례를 보이니 이해가 쉽다. 어간에 어미가 붙어 다양하게 쓰이는 동사의 활용으로 다채로운 문장을 구성할 수 있다. 글을 쓰기 위해 간 도서관에서 표준 국어사전을 들추는 남자와의 만남은 특별한 끈으로 맺어지지 않더라도 이들은 서로의 마음을 살피며 동사의 맛을 집필하는데 함께했다. 흔들리며 피지 않는 꽃이 어디 있을까마는 사연 있는 남자와의 대화가 카메오처럼 등장해 독자의 흥미를 돋운다. 목례로 알은체하며 지나가는 동료에게 미소를 건네는 것처럼 시간이 흘러 안부를 묻고 싶은 이 중에는 사전을 들추는 남자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 짐을 쌓아 두면 거치적거리니 저 구석으로 옮기라는 말을 들으며 널브러진 책들을 주섬주섬 챙겼다. 물건에 사용하는 동사로 사람에게는 쓰이지 않음을 알고 활용할 필요가 있다. 밥을 눌린 누룽지로 저녁을 해결하며 라디오 방송을 귀담아들으니 좋아하는 노래가 흘러 나왔다. 동사의 당하는 말은 기본형이 당하는 말을 만들 수 있는 낱말인지 살피고, 두 번 당하는 말이 되지 않도록 써야 한다. 잊힌 역사를 다시 기억해야 한다는 문장 표현처럼 불리다 역시 불려지다로 쓰면 안 된다. 겨울철이 되면 땅기는 피부에 수분을 보충해줘야 하는 것처럼 동사를 바르게 쓰려는 노력은 글을 쓸 때 전제되어야 한다.

 

   내키는 일은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팔을 걷어붙이는 편이지만 마음이 쏠리지 않으면 엇나간 행동으로 주변의 불안을 살 때가 있다. 자기 방식대로 삶을 살아가되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기를 바라며 동사의 참맛을 찾아 생각이 산산조각 나기 전에 표현한다. 내리치는 번개를 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결정한 일이라면 자기만의 방식으로 일을 매조지을 필요가 있다. 입을 벌리고 논쟁을 벌이며 시간을 허비하기에는 새롭게 활용할 동사들이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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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가지 소원 ink books 2
조 사이플 지음, 이순영 옮김 / 써네스트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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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술사는 눈속임과 날랜 손재주로 관객들의 눈을 속이며 기대감을 드높인다. 공연장에서 봤던 마술 같은 일이 현실에서 일어나는 경우를 우연이 필연을 낳는 일로 치부할 때가 있다. 아들 둘을 떠나보내고 사랑하는 아내 제니를 떠나보낸 뒤 사랑하는 가족과의 추억이 깃든 공간에 머리 맥브라이드는 홀로 남겨졌다. 친구들도 만날 수 없는 곳으로 떠나고 그의 주변에는 손자 챈스가 있지만 그는 욕심이 많은 손자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머리의 100번째 생일, 주치의 키튼 박사의 진료를 받으며 나이 들어 삶에 지친 이도 살아갈 이유를 찾을 가능이 있음을 전해 들었다.

 

   아내와의 사별 후 머리는 아내 제니를 다시 만나는 바람으로 죽음에 이르는 날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마지막으로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는지 이런저런 생각에 휩싸였다. 언제 죽을지는 모르지만 죽음의 문턱이 가까운 100세 노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두 아들에게는 책을 읽어주지 못하였지만 누군가에게 책을 읽어준다면 보람이 있을 듯해 머리는 아동병원으로 항하였다. 간병으로 고단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보호자에게 쉼을 주고 자신이 아동에게 책을 읽어 줄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다. 살아 움직이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여기자 사는 동안 가족에게 못해 준 것들이 떠올라 짧은 시간이더라도 행할 수 있는 일을 찾은 것이다.

 

   구겨진 포스트잇에 쓰인 메모 심장이 죽어서 내가 하늘나라에 가기 전에 하고 싶은 다섯 가지를 보며 머리는 살아갈 이유를 찾게 된다. 그 메모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1. 여자애와 키스하기(입술에)

 2. 메이저리그 야구 경기장에서 홈런치기

 3. 슈퍼히어로 되기

 4. 엄마에게 멋진 남자친구 찾아주기

 5. 진짜 마술하기

  누군가에게는 지극히 평범한 소원에 관한 메모일 수 있겠지만 산소를 마시지 않으면 1~2분을 견디지 못하는 제이슨에게는 이루기 쉽지 않은 소원이다. 심장 이식을 받지 않으면 몇 개월 살지 못하는 열 살 소년이 이루고 싶은 다섯 가지 소원이 실현되도록 도울 것이라는 꿈이 머리에게는 생겼다.

 

   가끔 찾아오는 손자는 할아버지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홀로 힘들게 살지 말고 앞으로 요양원에서 생활하기를 바란다. 시카고 컵스 야구 선수로 활약한 머리의 상징물은 청춘 시절의 팔딱거리는 심장의 일면을 담고 있다. 세상을 떠난 아들들과 아내와의 추억이 깃든 공간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할아버지에게 손자의 말은 귓등으로도 들리지 않았다. 폐질환을 앓는 머리는 약을 복용하면서 지내고 움직임에도 불편함이 있는 늙은이이지만 산소통이 없으면 호흡이 힘든 열 살 제인스의 꿈을 실현하도록 돕고 싶었다. 삶의 이유를 찾은 머리는 쉽지 않은 일들을 실천으로 옮긴다. 모든 것이 서툰 100세 노인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머리는 제인스와 이메일로 마음을 전하며 소통하여 갔다. 제이슨의 다섯 가지 소원을 이룰 많은 방법을 강구하며 하나하나 실천해가는 모습에서는 용기 있는 100세 노인의 전범으로 여겨졌다.

 

  ‘젊음을 경험하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 행동해야 한다.’

  유품처럼 남은 낡은 자동차 셰비를 몰고 제인스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치어리더에게 전략적으로 접근하여 키스하기에 성공하자 둘은 어느새 다음 계획을 위한 걸음을 떼었다. 무면허 운전을 위장하기 위해 속력을 내는 등 위험을 감수하면서 시카고에 있는 야구장에 도착하였다.

   ‘에스(Strong)-(Brave)-케이(Kind)’

   폭력을 일삼는 남편을 떠나온 델라는 딸 티어건에게 어떻게 살고 싶은지 스스로에게 물으며 용기 있게 어떻게 행동하고 싶은지 스스로 결정하라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티어건은 메이저리그 야구장에서 홈런을 칠 수 있는 길에 함께하였다. 머리는 이 일로 아동 유괴범으로 붙잡힐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며 제이슨이 홈런을 칠 수 있는 길을 열었지만 제이슨은 쓰러지고 말았다. 제이슨이 시카고 병원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동안 머리는 아동 유괴범으로 구속되었다 보석으로 풀려났지만 제이슨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힘들 때마다 머리는 제임스 신부를 찾아 심경을 드러내며 이런저런 조언을 얻는다.

   ‘머리, 자신을 찾으세요. 그러면 미래의 길을 찾게 될 겁니다.’

    아동 유괴범으로 접근 금지 명령을 받은 터라 엄두도 내지 못할 때 신부의 조언은 제이슨 아빠의 집을 찾아 대화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지금 아이에게는 아빠가 필요함을 역설하며 하루하루가 기적 같은 삶이 이어지고 있는 아들의 처지를 말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머리의 접근 금지 명령은 풀려 시카고 병원으로 갈 수 있었다. 의료진도 납득할 수 없을 정도로 살아있는 제이슨은 머리가 전해달라고 부탁한 1934 탑스 카드를 움켜쥐고 있었다. 다시 만난 둘은 병상에 나란히 누워 서로를 바라보며 죽음을 관조한다. 죽음이 가까워졌음을 절감한 머리는 자신의 심장을 제이슨에게 이식해달라고 애원하지만 불가하다는 의료진 말에 냉담한 반응을 보이지만 제이슨이 곧 심장이식을 받을 것이라는 소리에 기대가 컸다.

   심장 수술을 받은 제이슨은 살아나 건강을 회복 중이고 머리는 이생에서 해야 할 일들을 마친 듯 편안하게 죽음을 기다린다. 아들들이 어렸을 때 함께하지 못한 시간을 성찰하며 그 시절 아들 같은 제이슨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였다. 끊임없이 혈액을 받아들이고 내보내면서 혈액을 온몸으로 이동하는 심장은 우리를 살게 한다면 타인을 사랑하는 마음은 기적을 낳기도 한다. 100세 노인이지만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쉽지 않은 걸음을 떼는 일은 한 생명체에 대한 뜨거운 사랑의 실천이었다. 제이슨이 위험에 처한 소녀를 구하며 슈퍼히어로는 거창한 것이 아님을 증명하였듯이 누군가가 살아갈 힘을 얻는 것만으로도 삶을 지속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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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유니콘
오드리 로드 지음, 송섬별 옮김 / 움직씨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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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드러내는 홀로코스트, 자본의 노예로 삼은 흑인들, 지배적 세력을 가진 민족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인구수가 적고 언어와 관습 등이 다른 소수 민족에 대한 차별 등이 실재하였다. 1950년 제5차 유엔 총회에서 1210일을 '세계인권선언일'로 선포했으며 유엔 회원국들은 정부 주관으로 이 날을 기념하고 있지만 인권이 유린되는 사례는 현재에도 빈번하다. 2020126일 미국 오하이오주에서는 손에 들고 있는 샌드위치를 총기로 오인 받은 흑인청년이 경찰의 총격에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극단적 인종차별이 줄어들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색안경을 끼고 흑인들을 차별하는 예는 존재한다. 미국 할렘가에서 태어나 그곳을 떠나지 않은 오드리 로드는 여성들의 인권 신장을 위하여 한평생을 바쳤다.

 

   흑인, 레즈비언, 여성, 페미니스트, 시인, 엄마, 교수, 활동가 등으로 스스로를 소개하며 그녀는 자신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가두려하지 않았다. 여자들이 결혼하여 자신의 이름 대신 누구 엄마로 더 많이 불리며 자식을 뒷바라지하는 헌신적인 여성에 갇혀 책임과 의무를 다하여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자발적이기보다는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남편을 내조하며 자식들을 양육하는 일을 도맡아야 한다는 압력이 자리하고 있다. 다수의 생각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주류로 사회를 움직이고 있는 집단에서 소수의 생각은 배제되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동성애의 사랑도 존중받아야 한다고 표명하였다.

 

   결단의 벼랑 끝에 언제나 선 채 우리 아이들의 꿈이 우리의 죽음을 닮아 가지 않도록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침묵하지 않기로 다짐한다. 한 생명체로 홀대받지 않기 위해 짓누르는 압제의 사슬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라도 침묵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시인은 말한다.

   ‘그리고 말을 할 때 두려워한다

   우리의 말이 들리지 않을까 봐

   환대받지 않을까 봐

   하지만 우리가 침묵한 때에도

   우리는 여전히 두렵다.

 

   그러니 말하는 게 낮다

   우리는 애초 살아남을 운명이 아니었음을

   기억하면서.’ -살아남기 위한 기도-

   시인은 칙칙한 물이 고인 둥그런 웅덩이 같은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침묵을 강요하는 이들에 맞서 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침묵함으로써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억압과 차별을 묵인하여 발걸음이 무거운 이들의 행동을 조장해온 셈이다. 침묵을 언어와 행동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우리는 그 자리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시인이 생전에 인터뷰한 내용 중, 자신의 침묵은 스스로를 지켜 준 적이 없다고 말하며 우리의 침묵도 우리를 지켜주지 않을 것이라 항변했다.

 

   유니콘의 뿔에는 사악한 힘을 막고 어떠한 질병도 고칠 수 있다고 전한다. 민간에 전승되는 유니콘의 흰 색과 대비되는 검정 색을 붙인 블랙 유니콘은 시적 화자를 대변하는 동물로 자유롭지 않지만 가만있지 못하고, 부정한 일들을 겪을 때마다 수그릴 줄 모른다. 지금껏 주류에게 끌려 다니며 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하고 조롱과 멸시를 받아온 블랙 유니콘은 부자연스런 죽음의 실체를 폭로하고 부정에 맞서 정의를 바로 세우려 한다.

   ‘다들 알고 싶어한다

   색이 없는 하늘

   우리가 미친 게 아니라고 충고해 줄

   해도 달도 없었던 옛 시절이 어땠는지’ -옛 시절-

   정체성을 드러내며 역할을 수행하기보다는 권력의 그림자로 지내며 갖은 피해를 감내하며 해와 달도 없었던 옛 시절은 하늘 아래 모두가 해와 달을 보면서 희망을 노래할 수 없었다. 암흑기를 지나 여명을 향한 태동을 거치는 것처럼 짙은 어둠 속에 빛나는 등불로 시인은 언어의 노래로 불운한 시대에 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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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상을 잘 모셔야 후손이 잘 된다.’

   는 말을 어려서부터 들어왔다. 팔순이 가까운 어머니는 스물 둘에 시집와서 지금까지 선조들의 제사를 지냈다. 제삿날을 앞두고 어머니는 재래시장을 찾아 신선한 식재료를 구매하여 깔끔히 손질하여 제수 음식을 장만하였다. 부정 타면 안 되니 언행을 삼가고 정성을 모아 제사를 지냈다. 제사 음식을 나눠 먹으며 함께해온 동네 어른들은 어머니가 조상을 잘 섬겨 자식들이 잘 된 것이라며 입을 모을 때면 어머니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바쁜 올케를 대신하여 상차림에 필요한 음식을 준비할 때면 심통이 날 때가 있다. 얼굴도 모르는 증조할머니 제사를 챙기면서 고달프게 일할 필요가 있는지 회의가 들었다. 볼멘소리를 늘어놓는 딸에게 그런 소리 하지 말라며 타박을 주는 어머니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제사 지내는 문제를 쟁점으로 한 TV토론 참여자로 나온 시선은 오랫동안 한 집안의 풍습으로 여기며 지내온 제사를 강경하게 반대하였다. 시선은 사후에 본인의 제사는 지내지 말라는 말까지 남길 정도로 마음 없이 형식만 남은 제사를 겉치레로 여겼다. 입버릇처럼 제사를 지낼 필요가 없다던 그녀가 이승을 뜬 지 십 년이 되었지만 자식들은 지금껏 어머니 제삿날을 챙기지 않았다. 자식들은 피안의 세계로 떠난 어머니 마음을 생각하여 제사를 지내지 않은 일은 생전 그녀의 소신을 지켜주는 일이라 생각해 왔다.

 

   큰딸 명혜는 한 달에 한 번 남매들이 모여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엄마 제사를 지내야겠다고 선언했다. 이 말을 듣고는 여러 말이 오갔지만 남매들은 어머니 사후 10주기를 맞아 시선이 젊은 시절을 보낸 하와이에 모여 제사를 지내기로 했다. 자식들은 어머니가 싫어하던 방식의 제사가 아니라 하와이에서 살았을 때의 의미를 찾아 그 순간들과 연결된 물건들을 제사상에 올리기로 하였다. 특별한 제사를 준비하기 위해 한국과 미국에 흩어져 살던 가족들이 하와이로 모여들어 심시선이 살았던 시간들을 불러낸다. 그녀는 분쟁에 휘말려서도 좀처럼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은 강렬한 인물로 대중의 가벼운 사랑과 소수의 미움을 받고 살았다. 아들과 딸을 편애하지 않았고, 데려온 자식을 대할 때에도 차별 없이 대한 어머니였기에 자식들은 서로 배가 달라도 친밀하게 지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목적인 확실한 자식들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 없는 하와이에서 어머니가 지냈던 시간을 반추하며 그들만의 방식으로 심시선의 사후 십 년을 애도한다. 화가로 살아갈 길을 열어줄 것처럼 다가온 마티아스는 시선을 감정적으로 고문하며 자신의 곁에 머무르기를 바랐다. 그녀는 자아 정체성을 파괴하는 그의 압력을 피해 새로운 삶을 설계한다. 애방의 도움으로 요제프 리와 심시선은 파리로 가 자기 변신을 꾀하며 예술가로서의 삶을 살아갈 힘을 얻었다. 한국 미술계에 안착한 시선은 모국어로 표현하며 생활하는 삶을 선택함으로써 요제프 리와의 사랑을 접어야 했다. 남편이 독일로 돌아간 이후 그녀는 세 아이를 키우기 위해 글을 썼다.

 

   어머니는 생활의 조각들을 모아 글을 쓰며 자식들을 키우느라 힘들었을 텐도 내색하지 않았다. 그녀는 타인과 비교하지 않으며 아들과 딸에 대한 차별 없이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해가기를 바랐다. 손녀들은 자신에게 무게 중심을 두고 시대 너머를 보며 지낸 할머니로 기억하며 그녀와의 만남을 추억하였다. 누군가의 마음속에 오래 남아 어떤 고비가 올 때마다 그 사람을 떠올리며 힘을 낸다는 것은 숭고한 일이다. 여행지로 각광받는 하와이에서 박동 넘치는 다양한 활동을 연상하며 찾은 이들에게 이주민들의 아픔이 서려 있는 공간에서 공동체를 이뤄 제 빛깔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도 곁들여 이주민의 애환을 드러냈다.

 

   어머니 제삿날 제수 음식 대신 자식들은 마련한 물건들을 상에 올려놓으며 그들만의 방식으로 어머니와의 인연에 감사하는 의식을 치렀다. 두꺼운 종이에 붙인 레후아꽃, 등산화 밑창에 끼여 있던 작은 화산석 자갈, 블록 탑, 팬케이크 등을 상에 올렸다. 자식들은 하와이에서 보낸 어머니 삶의 의미를 규정하며 그동안 생각해 낸 것들을 시도하며 결과물을 찾았다. 병약하다고만 여기던 우윤은 수차례 도전 끝에 큰 파도를 타며 성공적으로 실리콘 물병에 포말을 담아 할머니 제사상에 올리며 새로운 길을 모색하였다.

 

   어머니를 줄기로 뻗어 나온 가지인 자식들은 서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생활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가운데 함께해야 할 일은 힘을 합치며 그들만의 방식대로 삶의 빛깔을 드러낸다. 자본의 힘에 눌려 중심까지 버리고 사는 속물들, 극단의 이기주의로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이들이 득세하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일상의 긍정적인 의미를 발견하며 자식들은 현재를 살고 있다. 위선을 떨치고 소신을 지키며 살았던 어머니의 혼이 자식들에게도 보이지 않는 에너지를 보내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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