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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평점 :
머릿속으로 그리는 세상과 대비되는 현실을 보며 지금보다는 나은 삶이 이어지길 바라며 살고 있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함께 사는 가족으로 묶인 인연의 사슬이 일상을 지배하고, 개인의 의사 결정권까지 앗아버리는 족쇄를 풀려 해도 속수무책이다. 집으로 오는 길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세상을 뜬 아버지는 사회주의적 유물론과 사회주의 혁명을 신봉하며 외길 인생을 살았다.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여 적색분자를 색출하여 새로운 꿈을 꾸며 살아갈 의욕조차 앗아간 이념의 굴레는 목에 걸린 가시처럼 불편함을 주기도 하였다.
딸은 아버지의 느닷없는 사망 이후 장례를 치르는 사흘 동안 딸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를 되짚어 아버지를 회억한다. 통일과 혁명, 인류의 진보를 화두로 삼은 전직 빨치산인 아버지는 이십여 년의 수감 생활 후 고향에 터를 잡았다. 사회주의 사상으로 의식만 앞선 농부는 자연적 질서를 따르며 농사를 짓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할 수 있는 일도 그다지 없었다. 백아산과 지리산을 무대로 빨치산 활동하다 만나 부부의 연을 맺은 부모는 귀한 딸을 얻어 아리라는 이름을 붙였다. 인간에 대한 신뢰를 중시하며 살아온 아버지는 어려운 이웃을 향한 온정은 넘쳐흘러 채권자의 채무를 갚아주는 일도 자처하였다. 정작 자신을 위하여서는 만 원 정도의 돈을 지출하면서 타인의 빚을 갚아나갔다.
아버지는 1945년 일본의 식민 통치에서 해방되었으나 국토가 분단되어 남에는 미군이, 북에는 소련군이 진주하여 국토와 민족의 분열이 시작된 해방 전후의 한계와 맞서 싸웠다. 당하며 살지 않으려고 아버지는 사회주의에 발을 디뎠고, 사회주의적 혁명을 신념처럼 따르고 선택한 싸움에서 쓸쓸하게 패하고 말았다. 책을 좋아하고 공부를 잘한 사촌 오빠는 육사에 합격했으나 신원조회에 걸려 불합격 통보를 받아야 했다. 이후 연좌제가 풀리고 말단 공무원으로 생활하고는 있지만 빨갱이 조카가 견뎌야 했던 시간은 억울함으로 가득했을 듯하다.
‘사상이란 저렇듯 느닷없이 타인을 포용하게 만드는 대단한 것일까?’
가난한 빨갱이 딸이라는 수식어를 숙명처럼 달고 산 딸에게 아버지의 장례는 지금껏 알았던 아버지와는 다른 모습들을 그려보게 하였다. 뿔뿔이 흩어져 살다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상가를 찾은 이들은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아버지를 떠올렸다. 조문을 온 사람들은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베일에 가려진 아버지의 실상을 드러내며 애도하였다. 아버지는 누군가의 목숨을 살리기도 하였지만 누군가의 덕으로 살기도 하였다. 빨치산으로 함께 활동했던 생존자들은 조국 재건을 위해 활동한 아버지를 떠올리며 그의 명복을 빌었다.
장례식장에 모여든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사연을 들으며 돌연한 죽음으로 낯선 공간을 찾아 가는 아버지의 여정이 외롭지 않아 보인다. 한 사람이 죽음으로 자연의 일부로 돌아가는 과정이 유한한 삶을 마무리하듯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딸은 아버지와의 좋았던 장면들을 떠올리며 추억한다.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하는 것이라는 구절처럼 아버지의 죽음은 빨치산이 아닌 아버지, 빨갱이도 아닌 아버지로 가슴 한복판에 자리하게 되었다. 빨치산 형 때문에 자식의 앞길을 막혔다고 여긴 작은아버지가 아버지의 마지막 가는 길에 술을 따르고 잘 가라고 인사를 전하는 것처럼 죽음은 화해의 시간을 예비하기도 한다.
이승에서의 신산했던 삶이 빚은 물리적 시간을 분쇄한 뼛가루를 구례 오거리에서부터 골목골목에 뿌리는 딸의 손길은 아버지의 신념이 이웃 사랑으로 피어나길 바라는 듯하다. 아리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간 순백의 가루가 사랑의 홀씨로 발아하여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를 소망하며 이상주의자 아버지를 떠나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