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레슨 인 케미스트리 1~2 - 전2권
보니 가머스 지음, 심연희 옮김 / 다산책방 / 202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순간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우연한 만남은 또 다른 시간 속 만남으로 이어져 시공간을 초월하여 서로를 단단하게 묶기도 한다. 양이온과 음이온의 인력에 의해 형성되는 이온결합처럼 서로 다른 매력에 끌려 사랑하게 되는 만남이 있다. 많은 실험 기구를 소유한 캘빈의 연구실로 가 비커를 들고 온 엘리자베스를 그는 행정직원 취급하며 쫓아냈다. 불미스런 일을 겪은 지 오래지 않아 캘빈은 극장에서 만난 엘리자베스에게 토사물을 쏟는 바람에 둘은 엮이고 만다. 둘이 만나 일으킨 화학작용은 비극적인 가족사를 공유하며 서로 합쳐지면 더 좋은 것이 만들어지는 공유 결합으로 나아갈 물꼬를 틔운다.


   캘빈과 엘리자베스에게 생물학적 부모는 있었지만 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보호받지 못한 채 세상에 내팽개쳐져 홀로 생존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엘리자베스의 아버지는 종말론을 주창하던 부흥사로 기적을 행하다 일을 그르쳐 수감 생활 중이고, 그녀의 어머니는 브라질로 이주해 새 가정을 꾸리며 탈세에 혈안이 되어 지낸다. 엘리자베스에게 글 읽는 법을 가르쳐주고 도서관의 놀라운 힘을 알려준 그녀의 오빠는 동성애자로 자살하였다. 지금껏 타인의 행동에 따라 규정된 삶을 이어온 엘리자베스는,

  ‘살아갈 날이 많으니까 힘내자. 내일은 달라질 거야. 뭐든 좋은 일이 일어날 거야.’

  자기 최면을 걸고 홀로 살아야 했던 엘리자베스에게 캘빈은 또 다른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인물로 다가왔다.


   사생아로 태어난 캘빈은 양부모를 기차 사고로 잃고 그 후 고모마저 사고사로 죽자 캘빈은 올 세인츠 보육원에서 지내며 자기 방어가 가능할 때까지 사제들에게 학대당하였다. 성년으로 홀로 존재할 수 있는 힘을 채 기르기도 전에 캘빈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기이한 사고를 당해 죽는다는 사실이 징크스로 남을 정도로 힘든 일들을 겪었다. 자신을 보육원 문제아로 낙인찍은 사제는 파커 재단의 후원을 받는 일에만 초점을 두고는 보육원생들의 삶의 질 향상에는 관심이 없었다. 부모 없는 자식으로 만들어 겪지 않아도 될 고초를 겪어야 하는 상황이 달갑지 않은 그는 화학을 통해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며 입지전적인 화학자로 위상을 드높였다. 하지만 그의 명성과 달리 화학자인 엘리자베스는 여성 과학자가 귀하던 1960년대 남성 중심의 학계에서 여러 편견과 횡포를 감내해야 했다.


   캘빈은 길고 좁은 형태의 노를 저어 보트가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스포츠 경기인 조정 선수로 활약한 덕분에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전도유망한 화학자인 그가 연봉이 적은 헤이스팅스 연구소에서 일한 이유는 조정을 할 수 있어서였지만 총명하고 지혜로운 엘리자베스가 근무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만남이 이어질수록 서로에게 빠져든 둘은 기존의 시스템을 넘어서는 동거를 시작하였다. 화학적 변화를 다룬 물음을 던지며 담론을 공유하는 시간, 캘빈은 엘리자베스에게 반지를 건네며 청혼하지만 그녀는 결혼이라는 제도를 원치 않았다. 후각으로 대상을 탐색하고 상대의 마음을 읽는 기이한 능력을 지닌 '여섯시-삼십분'과 함께하며 캘빈은 엘리자베스에게 조정을 권하였다. 8명의 선수가 협력해 노를 젓는 조정 경기의 일원으로 지구력과 인내력을 기르며 한 치 앞을 모르는 인생에 충실하였다.

 

   노벨상을 타게 될 캘빈이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고, 경황없이 그의 장례를 치른 뒤 엘리자베스는 죽고 싶은 마음이 강했지만 그와 소통하던 '여섯시-삼십분'을 잘 키워야 한다는 의무감을 저버리지 못했다. 조정 선수들이 실내에서 주로 하는 로잉머신을 하면서 그녀는 지쳐 잠들 수 있는 방법을 택했다. 엘리자베스는 '여섯시-삼십분'에게 책을 읽어주며 개의 뇌 발달을 촉진하고 어휘 축적을 가속화하며 캘빈의 빈자리를 달래야 했다. 그녀는,

  “난 엘리자베스 조트로 살고 싶어. 그건 나한테 중요한 일이야.”

   라고 말하던 이의 진정성을 받아들이고 그녀를 진지하게 대해준 최초의 남자인 캘빈을 사랑했음을 깨닫는다. 수많은 화학자 중 자신을 동등한 학자로 여기고 능력에 대한 상호 존중이 기저에는 깔려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독학으로 공부해 대학원에 입학하여 마이어스 교수 밑에서 석사 학위를 땄으나 교수에게 강간을 당하는 바람에 박사 학위를 따지 못하고 쫓겨났다. 남성들 중심의 과학계에서 피해 여성은 성폭력 피해 사실을 묵인하고 남자들이 지시하는 대로 따르는 것을 관례처럼 여겨왔다. 제대로 항변도 못한 채 근무하게 된 헤이스팅스 연구소에서 괄시 당하며 버티던 중, 캘빈의 죽음 후 임신 사실을 알고는 해고를 당하였다. 엘리자베스는 원치 않은 임신이었지만 뱃속의 생명을 지켜야 했고, 다른 경제활동으로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그녀는 주방을 실험실로 개조한 뒤 화학적 변화를 담은 연구를 지속하였고, 연구원이 맡긴 원고의 번역을 맡아 돈벌이에 나섰다.


   반사회적인 엄마 성향과 원한을 품고 살았던 아빠를 꼭 닮은 딸 매들린은 언어 능력과 이해력이 뛰어난 조숙한 아이로 머드포드 담임에게는 탐탁지 않은 아이이다. 엄마는 집에서 살림하며 자녀를 양육하는 게 낫다고 여기는 담임의 눈에 탐탁지 않은 엘리자베스는 부모 상담에 호출되는 일이 왕왕 있었다. 월터의 딸 어맨다 역시 담임 상담이 많은 편인데다 딸이 먹을 도시락을 자신의 것과 바꿔 먹는 데 노한 엘리자베스는 월터와 통화하였다. 월터는 엘리자베스와의 대화 끝에 자신이 담당하는 프로그램 ‘6시 저녁 식사를 진행하며 식재료의 화학 작용을 거쳐 음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재미있게 설명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도 화학자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그녀는 요리하는 화학자로 음식을 조리하는 온도가 어떻게 풍미에 영향을 주는지 탐구해주길 바라며 화학은 변화임을 강조한다.

 

   8살 매들린이 담임이 내 준 숙제인 가계도를 조사하기 위해 목사를 만남으로써 베일에 가려진 사실들을 하나둘씩 알게 된다. 지난시절 캘빈이 그토록 증오했던 인물이 그의 아버지였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난 아버지가 미워. 아버지가 죽었으면 좋겠어.’

   사랑하는 여인이 속박의 공간에서 아들을 낳아 생이별하게 만든 장본인으로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과학 잡지의 표지모델 사진을 보고 아들을 찾아 나선 에이버리는 캘빈 아버지가 선물한 찌그러진 브로치를 부착하고 지낼 정도로 그를 사랑했다. 파커 재단의 상속인으로 아들을 찾는 여정을 시작하였으나 보육원 주교는 캘빈의 거짓 죽음을 알리며 모금 활동에 열을 올렸다. 누구나 받아야 할 보호와 사랑을 받지 못했지만 굳건히 버텨낸 캘빈은 과학적 업적을 인정받는 화학자로 청춘을 불사르다 생을 마감하였다.

 

   잡지사와의 인터뷰가 왜곡된 내용으로 실렸을 때에도 남성들 편을 들어주는 시스템에 반격하는 글을 올리는 일도 쉽지 않았다.

  ‘나쁜 일을 거꾸로 원동력으로 삼는 거야. 나쁜 일에 사로잡히는 걸 거부하렴. 맞서 싸우렴.’

   가공 식품 속 유해한 성분을 밝히며 건강한 식탁을 위해서는 가공되지 않는 식재료를 쓰라는 말로 광고 협찬사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발언으로 위기에 직면하였지만 엘리자베스는 굴하지 않았다. 매들린을 돌보던 해리엇이 엘리자베스에게 자기만의 시간을 가지라고 말해준 것처럼 엘리자베스는 2년간의 방송 진행을 그만두고 과학 연구를 하겠다고 선언한다. 연구소 인사과장으로 부임한 프래스크의 전화를 받은 엘리자베스는 일하던 연구소로 걸음하면서 새로운 변화를 시도한다.

 

    헤이스팅스 연구소를 인수한 파커 재단은 방만한 경영과 실험 결과 위조, 연구원 논문 표절 등으로 도나티와는 계약을 종료했다. 엘리자베스는 딸의 가계도 숙제를 계기로 캘빈의 생물학적 어머님을 만나 미처 알지 못했던 그의 역사를 서사적 흐름에 담을 수 있었다. 소통하며 새로운 시작을 함께할 이들과 6시 저녁 식사를 같이 하며 연대하는 공동체의 모습을 점진적으로 찾아갈 듯하다. 연구소 화학 과장을 의뢰받은 엘리자베스는 머리에 꽂은 HB연필을 꺼내 화학진화를 시작해보자고 공책의 첫 장에 쓰며 지난한 시간을 희망으로 변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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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09-01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자성지님 리뷰 읽으니 이 책 완독의 의지가 불끈!^^

전 영상 부터 기대 했었는데 꼭 원작을 읽어야 겠네요 ^^

자성지 2022-09-04 08:40   좋아요 0 | URL
화학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이 소설을 읽으며 여성 화학자로서 자존감을 지키며 살아가는 여성의 실천적 의지를 살필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