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 (컬러 명화 수록 무삭제 완역본) - 명화와 함께 읽는 현대지성 클래식 63
알베르 카뮈 지음, 유기환 옮김 / 현대지성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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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대 초반, 전 세계를 덮친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증의 창궐은 인류가 이룩해 놓은 견고한 일상을 단숨에 뒤엎으며 아비규환의 세상을 만들어버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소한 존재 앞에서 거대한 문명은 속수무책으로 흔들렸고, 감염병 확산을 막기 위해 도입된 방역 대책들은 역설적으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거리를 멀어지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마스크 뒤로 얼굴을 숨긴 채, 외부인과의 접촉을 극도로 통제하며 안으로 잦아드는 고독의 시간을 견뎌내야 했다.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순간, 비감염자들의 안전을 도모한다는 명목하에 '격리 수용'이라는 차가운 행정적 순서를 밟아야 했던 기억은 현대인들에게 거대한 실존적 충격이었다. 보건의료 시스템의 기민한 대응과 첨단 방역 사업이 확산을 막는 방패가 되어주었으나, 그 이면에 자리한 고립과 공포는 인류의 역사 속에서 반복되어 온 오랜 재앙의 기억을 소환하기에 충분했다.

   인류는 문명과 과학의 발달을 통해 질병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어왔지만, 역사적으로 재앙은 늘 예고 없이 찾아와 인간의 오만을 꺾어 놓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알베르 카뮈(Albert Camus)의 소설 『페스트』는 단순히 과거의 전염병 창궐을 기록한 문학 작품을 넘어, 오늘날 우리가 겪은 팬데믹의 참상을 고스란히 예언한 거울과 같다. 카뮈는 1940년대의 가상 도시 오랑을 배경으로 삼았지만,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심리적 변화와 사회적 해체 과정은 우리가 마주했던 코로나19의 풍경과 소름 끼치도록 닮아 있다. 우리는 왜 수십 년 전의 소설을 읽으며 오늘의 공포를 발견하는가. 그것은 페스트라는 질병이 단순히 생물학적 바이러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힘으로 제어할 수 없는 삶의 불합리성, 즉 '부조리' 그 자체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카뮈가 묘사한 알제리의 해안 도시 오랑은 지극히 평범하고 지루한 곳이다. 그곳은 계절의 변화를 나무나 하늘의 빛깔이 아니라 오직 '상업적 활기'나 '날씨의 불쾌함'으로만 느낄 수 있는, 무색무취의 근대적 공간이다. 오랑의 주민들은 특별한 열정 없이 그저 돈을 벌고, 퇴근 후 카페에 앉아 권태를 반복하며 무탈한 일상을 소비하는 데 익숙한 인물들이다. 변화를 거부하고 어둠 속에서 안일하게 지내던 이들에게, 어느 날 상상을 초월하는 균열이 발생한다. 의사 베르나르 리유가 자신의 병원 복도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 있는 쥐 한 마리를 발견한 것을 시작으로, 오랑의 거리와 골목 곳곳에는 죽은 쥐의 사체가 수천, 수만 마리로 늘어나기 시작한다.

  돌연한 쥐 사체의 출몰은 평화롭던 도시에 불길한 전조를 드리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암약하던 인체의 약점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듯, 페스트는 도시 전체를 잔인한 열병의 늪으로 욱여넣었다. 인간들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발진과 고열에 시달리다 비참하게 죽어갔고, 평소 천식을 앓던 이들은 발작적인 기침을 연신 해대며 정신 착란과 고통에 짓눌렸다. 처음에 오랑 시민들은 이 비현실적인 재앙을 금세 사라질 한여름 밤의 악몽으로 치부하려 했다. 그러나 매일같이 늘어나는 사망자 수와 장례식장의 연기는 방관하던 이들의 뺨을 후려치며, 이것이 피할 수 없는 현실임을 각인시켰다. 카뮈는 이를 통해 일상의 견고함이 얼마나 취약한 기반 위에 서 있는지 폭로한다.

  위기 상황이 도래했을 때, 언론과 사회 지도층의 태도는 그 사회의 민낯을 보여주는 리트머스시험지가 된다. 본래 언론은 객관적인 정보를 신속하게 전달하는 것을 넘어, 사회적 이슈를 통한 올바른 여론 형성으로 당면한 현안을 해결하고 사회를 안정시키는 공적 기능을 수행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페스트 초기, 오랑의 현지 언론과 행정 기관은 주민들의 혼란과 동요를 막아야 한다는 명목하에 쥐 사건을 가볍게 보도하거나 환자들의 비극적인 죽음을 애써 외면하였다. 문제를 축소하고 은폐하려는 기득권의 태도는 재앙의 규모를 키우는 기폭제가 되었을 뿐이다.

  주검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도시가 전면 봉쇄되는 극단적인 상황에 이르자, 시민들의 불안감은 극도로 증폭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페스트균에 감염되지 않은 '현재의 상태'에 안도하는 인간 중심주의자들은 눈앞의 비극을 타자화했다. 그들은 이 불쾌한 전염병이 자신을 비껴가기를, 그저 빠르게 그리고 조용히 지나가기를 바랄 뿐이었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고 자신의 안위만을 계산하는 이기주의는 페스트가 퍼지기 가장 좋은 심리적 토양이었다. 카뮈는 이러한 방관적 태도야말로 바이러스보다 더 무서운 영혼의 페스트라고 고발한다.

  페스트의 기습으로 도시는 완벽하게 봉쇄되었고, 외부에서 온 여행자들은 순식간에 오랑에 억류되는 처지가 되었다. 신문기자 랑베르처럼 우연히 도시에 발을 들였다가 갇힌 이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강제로 떨어져야 하는 생이별의 고통을 겪었다. 그들은 상대에 대한 짙은 그리움과 외로움 속에서 매일 밤 불면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오직 질병이 종식되는 날 연인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실낱같은 희망만이 그 극단의 고통을 견디게 하는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봄에 시작된 페스트는 습하고 무더운 여름을 지나며 더욱 흉포해졌다. 뜨거운 태양 아래 도시는 거대한 감옥으로 변했고, 절망한 이들은 도시 밖으로 탈출을 시도하였지만 삼엄한 군대의 총칼 앞에 모두 허사로 돌아갔다. 페스트는 인간이 오랜 시간 쌓아온 전통적인 유대 관계를 여지없이 해체해 버렸다. 감염에 대한 공포는 이웃을 잠재적 가해자로 보게 만들었고, 개인들을 철저히 고립시켜 각자의 고독한 세계로 폐하였다. 게다가 행정 기관에서는 범죄와 사회적 혼란이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야간 등화관제를 시행했고, 이는 도시의 물리적·정서적 어둠을 가중시켰다. 상업 활동을 비롯한 경제 활동 전반이 무너지면서 실업자가 양산되었고, 가난한 이들은 질병의 위협에 굶주림의 고통까지 이중으로 겪어야 했다. 재앙은 사회의 가장 약한 고리부터 잔인하게 부수어 나갔다.

  그러나 인간은 재앙 앞에 그저 무력하게 무릎 꿇지만은 않았다. 관리 대상이 되어버린 인간의 죽음을 한 명이라도 더 줄이기 위한 숭고한 노력들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노력은 권력의 강요가 아니라, 건전한 시민 의식을 지닌 이들의 자발적인 연대를 통해 빛을 발했다. 소설 속 인물들은 페스트라는 거대한 부조리를 대면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응전한다. 파늘루 신부는 페스트를 신이 인간의 죄를 벌하기 위해 내린 '신의 채찍'이라고 설교한다. 그는 페스트의 제일선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헌신을 보이면서도, 근본적으로는 인간이 신 앞에 무릎 꿇고 회개함으로 감염병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죄 없는 어린아이가 페스트 고통 속에서 처절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목격한 후, 그의 교조적 신념은 심하게 흔들리게 된다.

  서술자이자 주인공인 리외는 종교적 구원이나 거창한 영웅주의를 거부한다. 혈청 주사조차 생명의 안전을 완벽히 지켜준다고 장담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그는 묵묵히 의사로서의 직분을 다하며 페스트 최전선에서 환자들을 치료한다. 그는 사망하는 시민이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날 수 있음을 차갑게 예견하면서도, 전염병 감염 예방과 당장의 치료를 자신의 절대적인 과제로 삼았다. 그에게 반항이란 대단한 이념이 아니라, 눈앞의 죽음을 막기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성실히 수행하는 '성실성' 그 자체였다. 그와 함께한 타루는 누구보다 먼저 자발적으로 '시민 보건대'를 조직할 것을 제안한다. 그는 대가를 바라지 않고, 페스트로 인해 건강과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상황 속에서도 이웃의 일상을 지키기 위해 행동했다. 여기에 도망치려 했던 기자 랑베르 역시 개인의 행복보다 공동체의 고통에 연대하는 것이 더 가치 있음을 깨닫고 보건대에 합류한다. 이처럼 다양한 실천을 통해 연대해 나간 이들의 행보는 인간이 부조리한 운명에 대항해 거둘 수 있는 숭고한 가치를 실현하였다.

자비 없는 총탄과 폭력에 쓰러져 간 수많은 생명체, 그리고 원자폭탄 투하로 흔들린 인류의 존엄성을 떠올릴 때, 세상에 존재하는 이 거대하고 형이상학적인 악(惡)에 맞서는 것은 과연 가능한 일일까? 소설 속 오랑 시(市)는 기나긴 겨울이 오면서 마침내 페스트가 종식될 조짐을 보인다. 언제 끝날지 몰라 숨죽였던 페스트가 물러가자, 사람들은 그동안 마음속 깊이 켜켜이 쟁여 두었던 감정과 표현의 실타래를 풀며 환희에 찬 목소리로 환호했다. 거리는 다시 활기를 찾았고, 봉쇄는 해제되었으며, 인간들은 다시 일상으로 복귀했다.

   서술자인 의사 리외는 준엄한 경고를 남긴다. 그는 페스트 제일선에서 환자들을 돌보고 쓰러져 간 동료들의 죽음을 지켜보며 기록한 이 연대기를 통해, 우리 곁에 여전히 상존하는 페스트균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언급한다. 리유의 영혼의 동반자였으나 종식 직전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타루 역시, 자신의 수첩에 페스트 환자들의 일상을 담담히 기록하며 '페스트균은 결코 죽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인류가 뼈저리게 알아야 함을 일깨웠다. 페스트균은 수십 년 동안 방이나 지하실, 트렁크나 손수건 속에 숨어 살아남아 있다가, 언젠가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주기 위해 또다시 자신들의 죽음의 숙주인 쥐들을 깨워 행복한 도시로 보낼 날이 올 것이라는 카뮈의 불길한 예측은 단순한 소설 속 경고가 아니다.

   우리는 코로나19라는 현대판 페스트를 겪으며 카뮈의 경고가 여전히 유효함을 온몸으로 체험했다. 감염병 창궐로 불안과 공포가 지배하는 시대를 사는 우리는 이제 어떤 생각과 태도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 카뮈가 『페스트』를 통해 던진 질문의 답은 명확하다. 재앙은 언제든 다시 찾아올 것이며,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부조리하다. 그러나 그 불확실하고 부정확한 것에서 오는 공포를 줄일 수 있는 유일한 열쇠는 바로 인간의 '연대'와 '소통'에 있다. 리외와 보건대 대원들이 그러했듯, 생명의 존엄함을 깊이 인식하고,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받아들이며,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모일 때 우리는 비로소 부조리한 운명의 주인으로서 당당히 설 수 있을 것이다. 오랑의 연대기가 남긴 가르침은,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실존적 나침반으로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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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세계사 : 라이벌편 벌거벗은 세계사
tvN〈벌거벗은 세계사〉제작팀 지음 / 교보문고(단행본)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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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VORA 서평단 활동의 일환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거대한 수레바퀴와 같지만, 그 바퀴를 굴리는 동력은 종종 두 개의 점이 부딪히며 발생하는 치열한 마찰음에서 비롯된다. 같은 목표를 향해 달리는 라이벌은 때로 평행선을 긋는 적대적 관계에 놓이기도 하지만, 그 충돌의 에너지는 때로 시대를 앞당기는 혁신의 불꽃이 된다. 《벌거벗은 세계사: 라이벌편》은 르네상스의 천재들부터 현대 국제 정세의 화약고까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결정적 맞대결을 통해 우리가 미래를 향해 가져야 할 태도가 무엇인지 깊이 있게 통찰한다.


   먼저 16세기 영국 왕실을 뒤흔든 메리 스튜어트와 엘리자베스 1세의 대립은 권력과 생존이 얽힌 잔혹한 드라마를 보여준다. 생후 6일 만에 왕위에 오른 메리는 빼어난 미모와 정통성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종교 분쟁과 음모라는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시기와 질투의 표적이 되었다. 그녀의 참수형으로 두 여왕의 서슬 퍼런 갈등은 비극적으로 일단락되었으나, 사후 메리의 아들 제임스 6세가 영국을 통합 통치하게 된 대목은 역사가 남긴 기묘한 아이러니다. 이는 개인의 승패를 넘어 역사의 흐름은 결국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화합의 지점을 찾아간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예술의 영역에서 라이벌은 창조적 영감의 원천이었다. 르네상스의 거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는 외모와 성격, 작업 방식까지 모든 면에서 대조적이었으나, 서로의 존재 자체가 서로의 한계를 뛰어넘게 만드는 자극제가 되었다. 스포르차 가문의 후원 속에 연출력의 정점을 찍은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과, 인간의 고통을 대리석에 새겨 넣은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그들의 보이지 않는 경쟁이 낳은 인류의 유산이다. 그러나 경쟁의 이면에는 로댕과 카미유 클로델처럼 성별과 권력 구조에 가려진 비극도 존재한다. 협업을 통해 <지옥의 문> 같은 걸작을 탄생시켰음에도, 로댕이 명성을 쌓는 동안 클로델은 예술계에서 소외되어 비참한 말년을 보냈다. 이는 경쟁이 누군가에게는 성장의 발판이 되지만, 공정함을 잃었을 때는 파멸의 굴레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건축가 가우디의 사례는 라이벌이나 후원자와의 관계가 어떻게 한 도시의 정체성을 바꿀 수 있는지 보여준다. 대장장이 아버지의 감각을 물려받은 가우디는 평생의 조력자 구엘과의 신뢰를 바탕으로 자연의 원리를 건축에 녹여냈다. 척박한 지형을 파괴하는 대신 곡선의 미학으로 극복하고, 공사장의 부산물을 재사용하여 세운 기둥들은 시대를 앞선 생태적 건축의 효시가 되었다. 반면, 현대의 라이벌인 이란과 이스라엘의 대립은 여전히 풀지 못한 인류의 숙제다. 과거의 협력자에서 현재의 숙적이 된 이들의 대결은 핵 개발과 종교적 신념이 충돌하며 전 세계 경제와 평화를 위협하는 복병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 책에서 드러나는 수많은 맞대결의 민낯은 우리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라이벌은 나를 무너뜨려야 할 적인가, 아니면 나를 완성하는 거울인가. 시기와 질투에 매몰된 경쟁은 메리나 클로델처럼 비극으로 끝나거나 이란과 이스라엘처럼 공멸의 위기를 부르지만, 가우디와 구엘처럼 서로를 지지하거나 두 르네상스 천재처럼 서로의 재능에 자극받을 때 역사는 진보한다. 우리는 이제 '누구를 이길 것인가'가 아니라, '상대와 함께 어떻게 성장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타인의 존재로 나의 한계를 시험하고 잠재력을 끌어올리는 동력으로 삼는 지혜로운 태도는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미래를 향해 나아갈 가장 강력한 에너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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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발자취를 찾아서 - 인도·네팔 불교 성지 순례
황동욱 지음 / 지식과감성#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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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43일간 인도 도보 순례를 위하여 길을 떠나는 순례자들의 걸음에 담긴 의미를 새기며 <<붓다의 발자취를 찾아서>> 책을 폈다. 순례단은 길 위에서 대중에게 전법을 설하고, 하화중생(下化衆生) 상구보리(上求菩提)를 실천하던 길 끝에서 열반에 든 부처님의 생애를 좇아 길을 나섰다. 부처님 탄생지인 룸비니에서 열반지인 쿠시나가르에 이르는 불교 8대 성지를 차례로 훑으며, 사진과 함께 게송을 읊듯 순례지를 찾았다.

미미한 인간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을 예고 없이 겪고 삶의 의미를 빼앗긴 채 하루하루 살아내는 여정에 붓다의 발자취를 따라 걸었다. 각기 다른 시간을 보내던 순례객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떠나는 여행의 첫 관문인 공항 개찰구는 동일한 목적을 띤 사람을 순례자라는 이름으로 묶어 준다. 축적된 시간이 쏟아내는 사연을 채 주워 담기 전에 부처님의 궤적을 따르는 인연의 깊이는 간절한 바람이 빚은 생의 무늬이다.

저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전하는 불제자로 당대 불교 지혜의 요람이었던 날란다대학이 붉은 벽돌로 남아 붓다의 가르침을 증명할 뿐이다. 쌓인 붉은 벽돌 더미 속에 사려 둔 부처님의 법음을 널리 전하는 후대의 불제자로 서는 지혜를 갈구하며 순례자는 걸음을 옮겼을 것이다.

‘법화경에 이르기를, 여래는 열반하지 않되 열반한다고 말한다.’

중생들이 여래의 무량한 수명을 알면 태만해질 수 있어 열반한다 말하여 정진하는 삶의 방편으로 삼은 역설적인 표현에 담긴 의미를 되새긴다.

영취산 칠엽굴 협소한 공간에서 500여 명의 비구들이 모여 경(經)과 율(律)을 합송하는 제1차 결집(結集)이 있어 후대에까지 붓다의 가르침이 이어지고 있다. 아비를 굶어 죽음에 이르게 한 죄를 지은 아자타삿투왕은 이를 참회하며 칠엽굴 결집을 후원하였다. 아자타삿투왕이 뒤늦게라도 죄를 뉘우치고 오백 나한의 결집을 후원하여 부처의 가르침이 전승될 수 있도록 하여 순례자의 꿈을 실현하게 했다.

부처님의 최초 설법지인 사르나트의 녹야원은 수행하다 헤어진 다섯 비구를 만나 수행 공동체를 이뤄 불도에 정진한 곳이라 의미가 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성도의 땅 보드가야 마하보디 대탑을 맨발로 참배하며 이천 칠백 년 전 맨발로 전역을 유랑하여 설법을 전한 부처님을 떠올리며 신심을 두텁게 하는 상상에 젖는다.

불법이 스미어 있는 공간으로 현장 공부를 나서는 성지 순례자의 바람을 품고 지금의 시간에 집중한다. 죽음을 향하여 흐르는 생명의 시간은 붙잡을 새도 없이 유유히 흘러간다. 고해와 같은 인간세상에서 불법을 만난 인연을 소중히 여기며 탐(貪)진(瞋)치(痴) 삼독(三毒)을 버리고 자비를 행하며 선업을 쌓는 생활인으로서의 나를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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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미래에게 창비청소년문학 142
주민선 지음 / 창비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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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으로 평범한 일상은 무너지고 무탈한 일상에는 제동이 걸려 갑갑한 시간을 보냈고, 감염병 확산을 막는 규제에 따라 부자유한 시간을 감내했다. 마스크를 착용하고 사람과 거리를 둔 채 비대면의 시간에 익숙해질 무렵 팬데믹은 종식되었으나, 그 후유증은 남았다. 코로나 이후 직장 문화의 생활 반경은 바뀌었고, 서로 간의 갈등을 증폭해 불신 사회의 단면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불안전함과 불확실성이 팽배해진 사회를 살아내느라 쉽지 않은 시간을 보내왔다.

<<나의 미래에게>> 속 주인공 미아는 오지 않은 미래를 살아갈 후배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생존만을 목표로 살지 말라고 한다. 치사율 100%에 이르렀던 어른은 더 이상 변하지 못하는 성체인 까닭에 ‘피터팬 바이러스’ 감염으로 죽어갔다. 미아 부모 역시 피터팬 바이러스 감염으로 독한 냄새만을 남기고 먼지처럼 사라졌다. 성장으로 변화를 거듭하는 아이들도 죽음에 이르기도 하였지만, 어른들의 치사율이 훨씬 높았다. 미성년의 아이들을 양육하고 보호해야 할 어른이 부재한 가운데 살아남은 아이들은 변모한 세계의 생존자로 삶을 이어야 했다.

고열로 위기를 넘긴 미아는 부모의 죽음을 채 깨닫기 전, 애증과 동경이 교차하는 언니 미래와 함께하는 생존 여정을 시작한다. 영원히 함께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준비 없는 이별에 속수무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결별에 슬퍼할 새도 없이 자매는 먹을 것을 구하고 쉴 곳을 찾아 나섰다. 미래 역시 바이러스 세례를 받고 시달리다 전염병 시대의 새로운 생존자로 먹을 것을 찾아 둘은 도망을 치다 쫓기기도 하면서 본능을 드러냈다.

극한의 생활에 지친 자매는 서로에게 비수를 꽂으며 다투다 헤어졌다. 미아는 언니를 찾을 때까지 아이들만의 규율로 조직을 움직이는 벙커에 머물렀다. 벙커를 움직이는 담당 부서에서는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자기 몫만 해내면 필요한 것을 제공하였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자기 몫을 해내지 못하면 벙커에 있을 자리가 없었다.

‘살아남는 게 이기는 거지.’ 벙커 내의 조직원은 오로지 생존을 위하여 분투하였다. 의식주 해결에 필요한 물건들을 전리품처럼 확보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고 활동하는 아이들을 보며 사람이 조직을 움직이는 수단으로 전락하는 상황을 떠올렸다. 피터팬 바이러스로 사망에 이른 어른은 아이를 보호할 수 없었고, 아이들은 죽을 힘을 다해 살아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씽크홀에 지진까지 겹쳐 위기에 봉착한 아이들은 예측 불허한 일에 맞서야 했다. 지진과 전쟁, 노란 비로 약해진 지반은 그동안 쌓은 개발의 문명 사회를 전복하였다.

언니와 재회한 미아는 남쪽 할머니 집을 목적지 삼아 길을 나섰다. 망한 세상에서 생존에 필요한 도구를 챙기다 알리나와 동행하게 되었고, 우연히 길을 가다 동네 친구 영조를 만나 함께하였다. 할머니 집으로 가던 중 식물로 뒤덮인 도시를 지나갈 때는 환각을 일으키는 향에 맞서 위기를 헤쳐 나갔다. 동행자는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어 무기력하게 만드는 식물의 향에 취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식물로 뒤덮인 도시 생명체에게 습격을 당하기도 하면서 목적지로 향하였다. 나비와 꽃으로 이루어진 영조의 형상이 미아의 뒤까지 쫓아와 그녀를 움켜쥐려 했지만 멈추지 않고 끝까지 가겠다고 다짐한다. 미아는 목적지로 향하던 길에서 총상을 입은 언니를 잃고, 불안과 공포에 에워싸인 채 할머니 집에 이르렀다. 미아는 똑똑하고 예쁜 언니를 동경하면서도 미워하며 지냈지만, 이제는 혼자 남은 시간을 채우며 나의 길을 걸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영원히 과거에 잠들 거 아니잖아. 너에게는 앞으로 살날이 있잖 아.’

유령처럼 나타난 미래는 미아에게 과거에 메이지 않고 새롭게 깨어나려면 스스로 마음을 먹어야 하고 지금 있을 곳은 할머니 집이 아니라는 점을 일깨워 주었다. 그동안 자매는 피터팬 바이러스에 감염된 어른들이 사망하고 구세계가 몰락하면서 생존만을 붙잡고 매달려 왔다. 생존을 붙들고 살다 죽음으로 생을 마감한 미래는 절망적 현실에서도 살아갈 만한 가치를 품고 살아야 함을 동생에게 알려 주고 싶었을 것이다.

자연과 공존하여 조화롭게 살았던 전통을 저버리고 개발을 일삼은 기성세대들은 한 점의 먼지로 사라져갔고, 미래를 살아야 하는 생존한 아이들은 파멸의 공간에서 삶을 이어가야 했다.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죽음으로 끝이 나버리는 생존이 아니라 함께 살아갈 만한 공동의 선을 실현하는 일상을 꿈꾸며 살아야 할 당위성에서 찾아야 함을 역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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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연결되어 있습니까 교양 100그램 10
고미숙 지음 / 창비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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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관계에 지치고 하는 일에 흥미를 잃고 지쳐가면서도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려는 욕구는 크다. ‘나는 자연인이다프로에 나오는 출연자들의 생활은 자연물과 소통하고 교감하며 자신과 소통하는 시간이 우세함을 알 수 있었다. 나무에게 말을 걸고 기르는 개와 대화라도 하듯 말을 거는 행위는 혼자가 아니라고 믿으며 살고 싶은 자연인의 바람인지도 모른다

  <<당신은 연결되어 있습니까>> 책 표지 속 인물은 각기 다른 색깔의 옷을 입고 손을 맞잡은 채 광장을 돌며 어우러진다. 개인이 누군가와 연결되어 소통하며 살고 싶은 바람을 담아 상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듯 시선을 모으고 있다.

   각자 도생하는 생존 방식으로 경쟁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이득을 우선시하는 생활이 주축을 이루며 공동체적 삶은 자본에 잠식당하였다. 이로써 함께 모여 힘을 쏟으며 더불어 사는 세상을 위하여 마음을 모았던 지난 시절의 훈훈함은 전통적인 미덕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스마트 혁명이 주도하는 때에 혼자는 외롭다 여기면서 함께하는 삶에 고통을 느끼는 이들이 늘어날수록 집단 지성의 힘은 공동체 회복의 고리로 작용한다.

    정보 검색에 능한 청년이 시공간의 지평을 넓혀 삶을 통찰하며 살기 위해서는 검색이 해결하지 못하는 심층적 영역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고전을 만나 저자와 대화하고 함께 공부하는 이를 만나 책에 대한 생각을 말하는 가운데 창조적 행위를 한다. 감이당과 남산강학원에서 공부하던 이들은 읽기와 말하기, 쓰기를 통해 타자와 연결하며 소통을 시작한다. 책을 읽고 물음을 던지며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함께 공부하는 이들은 서로를 격려하고 비판하면서 생각을 창조한다.

    대화를 할수록 감정이 더 쌓이는 가족과 직면할 때면 모르쇠로 일관하려는 자신을 만나기도 한다. 큰소리 나는 것을 꺼리고, 서로 마찰하며 불편한 관계로 전락하고 싶지 않아 애써 상대를 외면한 적도 있다. 올바른 말을 때에 맞게 나누며 공감을 끌어내는 말로 언어능력을 회복할 때 세상과 연결되는 힘이 커진다. 자신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감각을 넘어선 감성과 욕망을 넘어선 지성을 계발하는 일로 뜻이 모일 때 타자와의 소통은 진실해질 것이다.

   생존을 위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안간힘을 쓰며 살다가도 이렇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지 회의한다.

  ‘나는 잘 살고 있는가? 좋은 삶을 위하여 어떻게 살고 있나?’

등에 대한 물음은 삶의 화두처럼 자리한다. 생각 없이 살던 대로 일상을 보내다 보면 좋은 삶과는 멀어진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힘들면 함께 생활하고 있어도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침묵을 지키며 살아가는 생활에 익숙해진다

   소통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누르고 조직의 구성원으로서 함께할 수밖에 없는 운명체로 피상적인 연결을 유지할 뿐이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고 활동과 활동을 연결해야 하는 시점에서 상대의 생각을 무력화하여 소유하려는 욕심을 내려놓고 새로운 연결을 시도하며 아집에서 벗어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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