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을 잘 모셔야 후손이 잘 된다.’

   는 말을 어려서부터 들어왔다. 팔순이 가까운 어머니는 스물 둘에 시집와서 지금까지 선조들의 제사를 지냈다. 제삿날을 앞두고 어머니는 재래시장을 찾아 신선한 식재료를 구매하여 깔끔히 손질하여 제수 음식을 장만하였다. 부정 타면 안 되니 언행을 삼가고 정성을 모아 제사를 지냈다. 제사 음식을 나눠 먹으며 함께해온 동네 어른들은 어머니가 조상을 잘 섬겨 자식들이 잘 된 것이라며 입을 모을 때면 어머니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바쁜 올케를 대신하여 상차림에 필요한 음식을 준비할 때면 심통이 날 때가 있다. 얼굴도 모르는 증조할머니 제사를 챙기면서 고달프게 일할 필요가 있는지 회의가 들었다. 볼멘소리를 늘어놓는 딸에게 그런 소리 하지 말라며 타박을 주는 어머니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제사 지내는 문제를 쟁점으로 한 TV토론 참여자로 나온 시선은 오랫동안 한 집안의 풍습으로 여기며 지내온 제사를 강경하게 반대하였다. 시선은 사후에 본인의 제사는 지내지 말라는 말까지 남길 정도로 마음 없이 형식만 남은 제사를 겉치레로 여겼다. 입버릇처럼 제사를 지낼 필요가 없다던 그녀가 이승을 뜬 지 십 년이 되었지만 자식들은 지금껏 어머니 제삿날을 챙기지 않았다. 자식들은 피안의 세계로 떠난 어머니 마음을 생각하여 제사를 지내지 않은 일은 생전 그녀의 소신을 지켜주는 일이라 생각해 왔다.

 

   큰딸 명혜는 한 달에 한 번 남매들이 모여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엄마 제사를 지내야겠다고 선언했다. 이 말을 듣고는 여러 말이 오갔지만 남매들은 어머니 사후 10주기를 맞아 시선이 젊은 시절을 보낸 하와이에 모여 제사를 지내기로 했다. 자식들은 어머니가 싫어하던 방식의 제사가 아니라 하와이에서 살았을 때의 의미를 찾아 그 순간들과 연결된 물건들을 제사상에 올리기로 하였다. 특별한 제사를 준비하기 위해 한국과 미국에 흩어져 살던 가족들이 하와이로 모여들어 심시선이 살았던 시간들을 불러낸다. 그녀는 분쟁에 휘말려서도 좀처럼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은 강렬한 인물로 대중의 가벼운 사랑과 소수의 미움을 받고 살았다. 아들과 딸을 편애하지 않았고, 데려온 자식을 대할 때에도 차별 없이 대한 어머니였기에 자식들은 서로 배가 달라도 친밀하게 지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목적인 확실한 자식들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 없는 하와이에서 어머니가 지냈던 시간을 반추하며 그들만의 방식으로 심시선의 사후 십 년을 애도한다. 화가로 살아갈 길을 열어줄 것처럼 다가온 마티아스는 시선을 감정적으로 고문하며 자신의 곁에 머무르기를 바랐다. 그녀는 자아 정체성을 파괴하는 그의 압력을 피해 새로운 삶을 설계한다. 애방의 도움으로 요제프 리와 심시선은 파리로 가 자기 변신을 꾀하며 예술가로서의 삶을 살아갈 힘을 얻었다. 한국 미술계에 안착한 시선은 모국어로 표현하며 생활하는 삶을 선택함으로써 요제프 리와의 사랑을 접어야 했다. 남편이 독일로 돌아간 이후 그녀는 세 아이를 키우기 위해 글을 썼다.

 

   어머니는 생활의 조각들을 모아 글을 쓰며 자식들을 키우느라 힘들었을 텐도 내색하지 않았다. 그녀는 타인과 비교하지 않으며 아들과 딸에 대한 차별 없이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해가기를 바랐다. 손녀들은 자신에게 무게 중심을 두고 시대 너머를 보며 지낸 할머니로 기억하며 그녀와의 만남을 추억하였다. 누군가의 마음속에 오래 남아 어떤 고비가 올 때마다 그 사람을 떠올리며 힘을 낸다는 것은 숭고한 일이다. 여행지로 각광받는 하와이에서 박동 넘치는 다양한 활동을 연상하며 찾은 이들에게 이주민들의 아픔이 서려 있는 공간에서 공동체를 이뤄 제 빛깔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도 곁들여 이주민의 애환을 드러냈다.

 

   어머니 제삿날 제수 음식 대신 자식들은 마련한 물건들을 상에 올려놓으며 그들만의 방식으로 어머니와의 인연에 감사하는 의식을 치렀다. 두꺼운 종이에 붙인 레후아꽃, 등산화 밑창에 끼여 있던 작은 화산석 자갈, 블록 탑, 팬케이크 등을 상에 올렸다. 자식들은 하와이에서 보낸 어머니 삶의 의미를 규정하며 그동안 생각해 낸 것들을 시도하며 결과물을 찾았다. 병약하다고만 여기던 우윤은 수차례 도전 끝에 큰 파도를 타며 성공적으로 실리콘 물병에 포말을 담아 할머니 제사상에 올리며 새로운 길을 모색하였다.

 

   어머니를 줄기로 뻗어 나온 가지인 자식들은 서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생활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가운데 함께해야 할 일은 힘을 합치며 그들만의 방식대로 삶의 빛깔을 드러낸다. 자본의 힘에 눌려 중심까지 버리고 사는 속물들, 극단의 이기주의로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이들이 득세하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일상의 긍정적인 의미를 발견하며 자식들은 현재를 살고 있다. 위선을 떨치고 소신을 지키며 살았던 어머니의 혼이 자식들에게도 보이지 않는 에너지를 보내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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