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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집과 꿀
폴 윤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5년 6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의든 타의든 기존에 살던 땅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여 낯선 지역에 동화해 살아가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스탈린 정부의 명령으로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로 강제로 이주한 고려인들의 이야기를 KBS 다큐멘터리로 보면서 황무지를 개간하듯 새로운 일상을 꾸려야 하는 이들의 험난한 여정을 떠올렸다. 이방인으로 한 지역의 구성원으로 뿌리를 내리고 삶을 잇는 데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이민족의 차별을 감수하면서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일이 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주자들은 집단을 형성하며 삶을 꾸려가야 했다.
폴 윤의 <<벌집과 꿀>>은 전혀 다른 시공간을 배경으로 설익은 공간으로 이주한 사람이 발을 딛고 살면서 경험하는 현장의 생생한 일면이 다양하게 펼쳐진다. 불가피하게 낯익은 공간을 떠나야 했던 이들은 전쟁과 추방의 상처를 안고 혼란과 피로를 감내하며 정착지에 적응하기 위하여 분투하였다. ‘보선’의 보는 교도소에서 출소한 뒤 보는 수감 중에 소통하던 로즈의 말을 따라 카지노에서 일하며 칼레에 가보고 싶다는 바람을 품는다. 자유를 억압하는 교도소와 별반 다를 게 없는 카지노에서 일하는 사람과 연대하며 새로운 삶을 꿈꾸었다. 아주 먼 길을 돌아 부모와의 연락조차 없는 보에게 카지노는 뜻밖의 행운을 부르는 삶의 의지처로 여기며 살고 싶었을 수도 있지만 현실은 쉽지 않았다.
‘코마로프’ 속 주연은 탈북하여 스페인에 거주하며 생업으로 호텔을 청소하며 지낸다. 북한에 남겨두고 온 아들을 만나게 해주겠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는 아들을 만나기 위하여 용기를 내었다.
‘코마로프 보러 오신 것 맞죠?’
택시 기사의 한마디는 러시아 권투 선수인 코마로프를 만나 달라고 부탁한 정보요원들의 말과 맞물려 만남이 재개된다. 주연은 계와 탁이 소개하는 아들의 인생 여정을 들으며 성장한 아들의 모습을 연상하였다. 그녀가 경기 전 만난 니콜라이는 그리 멀리 가지 않아도 좋은 한정된 공간인 링 안에서 상대 선수와의 경기에 집중함으로써 삶의 중심을 잡고 살아온 듯하였다. 그녀는 아들을 만난 뒤 남하한 남편을 떠올려 보지만 쉽사리 남편의 모습을 떠올릴 수 없었다. 옛 기억을 떠올리려 해도 생각나지 않는 이별 전의 기억은 파편처럼 흩어져 살아내느라 마음의 여유 없이 지내온 시간의 응보인 듯하다.
‘역참에서’의 역참은 더 이상 기차가 다니지 않지만, 사람들이 잠시 머무는 곳으로 기능한다. 일본의 에도 시대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무라이 두 명이 전란 후 돌보던 소년 유미를 조선의 사절단에게 인계하기 위하여 길을 나섰다. 많은 목숨을 앗아간 전쟁에서 생존한 이는 전란으로 의지가지없는 소년을 돌봐왔지만, 조선 사절단 일행이 오는 날 유미를 고국으로 보내는 게 맞다고 여긴 듯하다. 그들은 한 민족의 혼이 담긴 모국어를 잃고 살아온 유미가 조선말을 배워 그동안 잊고 지낸 민족문화를 흡수하며 살아가기를 바랐다. 고국의 문화와 의미를 채 알기도 전에 일본에서 살았던 유미가 알지 못하는 미답의 공간에서 우리말을 익히며 뿌리를 내리고 정착하기를 빌며…….
‘크로머’ 속 탈북인 둘은 외롭게 지내다 한인공동체에서 만난 남한 여성과 가정을 꾸렸다. 함께한 시간의 궤적대로 소통이 잦은 두 가정의 자녀는 자연스레 부부의 연을 맺고 런던 외곽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며 미래를 꿈꿨다. 이들은 경제적으로 풍족하지는 않지만, 무탈한 일상에 감사하며 지냈다. 하지만 피 흘리며 편의점으로 들어온 소년이 여럿에게 학대받고 지냈으며, 기억 상실로 자신의 정체를 잃고 방황하는 모습에서 과거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상처와 만난다.
표제작인 ‘벌집과 꿀’의 러시아 동부 외딴 지역에 거주하는 고려인을 감독하는 러시아 군인은 자신의 삼촌이 명하는 대로 그에 사는 이들을 감시하였다. 그는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남편을 살해한 여인의 사건을 보고 이를 중재하려 들지만 마을 사람들은 집안일이라며 군인의 말을 무시했다. 마을 사람들은 남편 살해녀를 참수형에 벌하듯 여자를 나무에 매달아 죽였다. 그 후로 마을 사람들은 죽은 여자의 방문을 받았고, 유령이 나오는 기이한 곳을 떠나야 한다고들 하지만 떠날 수도 없는 상황이다. 또 다른 이방인으로 고립되어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고려인’에서 열여섯 살 소년 막심은 같이 살던 삼촌이 세상을 뜨자 사할린에서 교도관으로 일하는 아버지를 찾아 나선다. 막심은 제대로 된 채비도 없이 혼자 힘으로 아버지를 찾았지만, 아버지는 아들에게 어떤 도움을 주지 않았다. 막심은 자신의 본질에 관한 물음을 아버지에게 던졌지만, 소년의 아버지는 어떤 답도 주지 않았다. 막심은 또 다른 공간을 찾아 길 위에 서야 하는 외로운 운명에 놓였다.
‘달의 골짜기’ 주인공 동수는 육이오 전쟁 후 피란민 정착지로 향하는 트럭에서 내려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동수는 인적이 드문 산골짜기에 있는 자신의 집을 손보았다. 전쟁으로 무너진 집에서 황폐해진 땅을 개간하여 자급자족하며 살아야 했다. 사고로 한 쪽 눈이 먼 동수는 땜장이와 소통하며 지내다 벌이 꽃을 찾아 날아든 것처럼 산골짜기 집을 찾은 남매와 함께 지냈다. 만남 뒤 이별이라고 세월이 흘러 두 아이는 떠나고 혼자 지내던 동수는 홀로 생명의 불꽃이 사위어갔다. 뒤늦게 집을 찾은 은혜는 동수의 주검을 구덩이에 안장하고 길을 나선다.
‘달은 뜨고, 기울고…….’
우식이 점점 희미해지는 시력을 붙들고 길 위에 섰듯이 하나의 결정이 삶에 존재하는 여러 겹의 무늬를 떠올리며 은혜 역시 자신의 삶을 무언가로 채우며 조각 난 삶을 이으리라 마음을 세웠으리라.
벌집은 꿀을 모은 벌이 육각형 방들에 켜켜이 쌓아 밀랍을 지어 하나의 집채를 이루어 하나의 유기체로 전체를 아우른다. <<벌집과 꿀>>에 묶인 각개의 작품 속 인물들은 저마다의 상처와 기억을 안고 고립되어 살고 있지만, 갖은 고통을 감내하며 생존해 온 삶의 서사이다. 여러 사정으로 고국을 등지고 살아야 했던 디아스포라의 삶은 생면부지의 땅에서 정착하기 위하여 분투하였지만, 이주한 곳에 뿌리를 곧게 내리지 못한 채 힘겨운 시간을 버텨 왔다. 상실의 아픔을 간직한 채 선택과 결정을 이으며 지내야 하는 유랑민의 상흔이 개인의 운명으로 치부하기에는 민족적 아픔이 전해진다. 전란으로 부모를 잃고 혼자가 된 아이가 살아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떠올리며 참혹한 시련을 견디려는 희망이 피어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