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醫는 앓는 소리를 뜻하는 예殹에다 술 단지를 뜻하는 유酉를 더하여 만들어진 글자다. 고대에는 술로 병이나 상처를 치료했기 때문에 이런 글자가 형성되었다. 오늘날의 서양 과학적 지식으로 추정한다면, 에탄올의 작용을 핵심으로 이용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술은 증류주든 발효주든 순수 에탄올 이상의 약 성분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그렇게만 말할 수는 없다. 동아시아 고대의학에서 주로 사용한 탕약은 대부분 물로 달이지만 술을 넣어 달이도록 한 처방도 있다. 이것은 에탄올 추출이 더 나은 경우를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술과 함께 복용하도록 한 처방도 있다.


자연스럽게 醫는, 우리가 아는 의사나 치료라는 기본 뜻 말고, 술이라는 뜻도 함께 지닌다. 하지만 술의 최초 위상은 신성한 것이었다. 종교지도자가 신을 만나는 방편이었으니 말이다. 술의 치료 기능은 아마도 그 신성의 확장, 세속화 과정에서 나타났을 것이다. 이렇게 종교지도자는 의사이기도 했으므로 醫에 무당의 뜻이 담기는 것 또한 자연스럽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정치지도자가 종교지도자이자 의사였다. 醫에 보살피는 사람이라는 뜻까지 담긴 것은 이 사실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 듯하다.


醫의 이런 다중 의미를 오늘날 다시 음미할 필요가 있다. 이간문명이 가르고 또 갈라놓아 모든 것이 파편화된 현대사회에서 의사는 요법포르노 기술자로 타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본디 의사는 영성의 사람이었다. 세상을 보살피고 돌보는 공공의 사람이었다. 녹색의술을 시행하는 치유의 사람이었다. 본디 위상을 복원해야 한다. 승려가 되고 국회의원이 되라는 말이 아니다. 영성과 공공성을 되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요법 포르노를 떠나서 전인치유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사람과 사람사이, 사람과 자연 사이, 자연과 자연 사이를 흐르는 파동 공동체의 매개변수가 돼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무당이자 술인 사람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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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의학이 근원과 연대하는 일은 연대 자체로 하나의 극복운동이다. 연대는 연속을 복원하는 일이다. 연속은 불연속, 그러니까 단절의 악을 관통한다. 단절의 악을 체계로 만든 것이 백색문명이다. 백색문명을 스티브 테일러는 타락the Fall-자아폭발ego explosion이라 묘사한다. 백색문명을 찰스 아이젠스타인은 분리의 이데올로기/흐름이라 표현한다. 백색문명을 거대 음모로 각색하고, 그 가짜 음모의 하수인 노릇하며 거들먹거리는 세력의 야심을 염두에 두어, 나는 이를 이간離間문명이라 이름 짓는다.


이간질은 악의적으로 둘 사이를 갈라놓는 짓이다. 이간문명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자연과 자연 사이를 갈라놓음으로써 상호연계의 네트워킹을 거세한다. 역동적 네트워킹 대신 가짜 초월, 사이비 보편을 옹립한다. 그렇게 옹립되어 마침내 완성된 초 일극집중구조의 유일신이 바로 돈이다. 돈의 지배체제인 백색문명, 그 하부단위인 백색의학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다름 아닌 녹색의학이다. 녹색의학은 돈의 노예로 살기를 거절하는 결단이다. 녹색의학은 삶을 선물(찰스 아이젠스타인)이게 하는 운동이다.


선물을 쌓아 올려 만들어내는 것이 공동체다(찰스 아이젠스타인의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102쪽). 녹색의학은 녹색출산, 녹색장례, 녹색농업과 연대하여 이런 열린 공동체를 향해 간다. 폐쇄적이고 자기충족적인 아라한집단을 꿈꾸지 않는다. 아라한집단은 자기들만 깨달았고 자기들만 깨끗하다고 기만하는 병든 게토이기 십상이다. 병든 게토는 공동체를 입자로만 생각한다. 파동으로서 공동체도 있다. 입자와 파동을 가로지르며 중재하는 존재가 의醫다. 의는 무당이자 술이다. 나는 무당이자 술로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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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오당이 쓴 『농부와 산과의사』,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의 과학화』필독을 다시 한 번 권하면서 <녹색의학의 근원연대>에 조금 더 보탠다. (자세한 내용은 마이리뷰 2016년 9월 23일부터 11월 17일까지 내용에 들어 있다.)


한의사로서 예비부부, 또는 부부와 함께 임신 문제를 상담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의외로, 아니 예상대로 대부분 백색문명이 대중매체 등을 통해 던져주는 가짜 정보 언저리에 머물러 있다. 실제로는 물론 산부인과 양의가 내린 백색의학 진단에 따라 움직인다. 유산과 그 사후 처리 과정에서도 상황은 비슷하다. 백색의학이 지니는 한계에 봉착한 후에야 누군가의 권유에 의지해 한의원을 찾는다.


녹색의학에서 ‘냉증’은 매우 중대한 개념이다. 확실한 녹색진단과 녹색치료 방법이 있음은 물론이다. 백색의학은 이에 무지하므로 인정하지 못한다. 냉증이 난임과 유산의 원인인 경우가 많다. 녹색의학은 침, 쑥뜸, 본초(약용 식물의 뿌리, 줄기, 가지, 껍질, 잎, 열매, 그리고 전초全草) 배합 탕약 등으로 냉증을 치료한다. 백색의학이 냉증을 치료할 수 없음은 물론이거니와, 있다 한들 백색화학합성물질일 테니 그 자체가 또 하나의 문제다.


난임의 원인이 남성 쪽에 있을 경우도 마찬가지다. 정자 개체수가 모자라거나, 활동력이 부족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녹색 방식이 존재한다. 여기까지 와서야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임신 문제가 의학 영역으로 넘어온 경우를 먼저 언급했지만, 사실 그보다 먼저 임신을 계획하고 구체적인 준비 과정을 거치는 동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대중매체나 책자에 실린 내용 가운데 매우 중요한 부분이 백색문명의 논리를 전제한 것이어서 그렇다. 이런 오해와 무지가 임신·출산을 산업 의료에 예속시키는 빌미로 작동한다. 현재 상태로는 기대 난망이지만, 학교교육이나 사회교육을 통해 임신·출산은 질병이 아니므로 근원적으로, 기본적으로 병원에서 독립해야 한다는 사실이 널리 공유되도록 해야 한다.


출산 문제는 위험 요인이 있으므로 무책임하게 말할 부분이 아님을 모르지 않는다. 응급상황이 터져 산업출산 시스템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내 딸아이가 태어났기 때문에 나 자신부터 현실을 무시하고 말하지 못한다. 그러나 현재의 산업출산은 산모에게도 아기에게도 재앙에 가깝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과도한 의료화를 혁파해서 의사 지휘 아닌 의사에게서 독립한 조산사 도움 중심의 자연출산을 복원해야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여생을 농투성이 의자로 살면서 임신-출산-양육-교육-죽음-장례로 이어지는 삶의 과정에서 백색문명의 독을 빼고 ‘새로운’ 자연 상태를 창조하는 공동체 네트워킹에 매진할 계획이다. 인생 제2막을 열려는 마침 이 때, 고교 시절 프랑스어를 가르치셨던 은사께서 작지만 큰 땅을 내게 주셨다. 기적의 그 469제곱미터가 교두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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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의학의 큰 수레는 질병, 질병 앓는 사람, 질병을 치료하는 사람, 질병 앓는 사람을 돌보는 사람의 평등한 소통, 함께 깨달음에서 끝나지 않는다. 근원을 향해 나아간다. 녹색의학이 주의를 기울이는 근원적 지점은 바로 출산과 장례, 그리고 농업이다.


출산과 장례는 의료 영역이 아닌데 백색문명이 산업 의료에 복속시킴으로써 그 식민지가 되었다. 이를 본디 자리로 되돌리는 과정에서 녹색의학은 불가피하게 연루된다. 미셸 오당이 『농부와 산과의사』,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의 과학화』에서 상세히 말한 자연출산 문제는 매우 화급한 현안이다. 잘못된 출산은 비가역적 재앙을 초래한다. 이미 우리 아이들은 이 재앙에 처해진 상태에서 예측 불가능한 저주를 끌어안고 살아간다. 그럼에도 이 문제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있다. 백색문명에 중독된 대중의 둔감과 근시안 탓만은 아니다. 사회적 의제 설정을 주도하는 세력의 무관심, 아니 백안시가 더 큰 원인일 것이다.


장례 시스템도 심각하기는 매일반이다. 더군다나 이 문제는 아예 이슈조차 되지 못하는 사회분위기다. 장례 시스템을 넓은 의미에서 바라보고 공공의 측면에서 논의할 필요가 있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과 죽음 이후 처리 문제에서 지금처럼 의학·의료기관이 일방적으로 과도하게 개입하면 안 된다. 본인, 가족, 사회복지 관련인, (해당되는 경우) 종교인들이 숙의 당사자로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본인의 의사와 무관할 뿐만 아니라 무의미하기까지 한 연명 기술을 의학이라 기만하는 일을 무엇보다 먼저 막아야 한다. 우리의 경우, 식민지 유제인 허례허식이 과도한 비용을 일으키는 문제도 반드시 손봐야 한다. 인간의 죽음을 둘러싸고 빚어내는 인간의 사회 행위와 제도에 대해 녹색의학사상으로 본격적인 성찰을 시작해야 할 때다.


인간 생명과 먹을거리, 치료약(의 자원)으로써 불가분적 관련을 맺는 농업은 녹색 본질에서 녹색의학과 상호작용을 할 수 있고, 해야 한다. 현재 백색문명에 심각하게 침륜된 관행농법은 녹색 본질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녹색의학과 치유 관점을 공유할 수 있고, 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근원적인 지점은 사람 생명 앞에 선 의자와 땅·식물 생명 앞에 선 농자의 마음가짐이나 손길이 같다는 각성이다. 녹색의자도 녹색농자도 생명 상태를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면 어떤 행위든 폭력이며 수탈이라고 여긴다. 연대는 여기부터다. 백색문명의 폭력과 수탈에 맞선 근원 연대의 샘 자리다.


삶과 죽음의 문제를 분리와 이종의 관점에서 해결하려 거대문명을 일으킨 백색 인류의 길을 접을 때가 왔다. 백색 인류의 길은 눈부신 개명을 이루었으나, 그 개명이 결국 착취로 귀결되었기 때문이다. 의학·출산·장례·농업, 이들은 하나다醫産葬農是一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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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빨 기어 다니며 탈 없이 크던 아기가 어느 날 갑자기 열을 펄펄 끓이며 앓는다. 젊은 엄마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른다. 할머니가 웃으며 말해준다. “아유, 우리 강아지가 걸으려나보다!” 아기는 앓고 난 뒤 영락없이 걸음마를 시작한다. 온 가족이 함께 아기의 한 걸음 한 걸음에 환호하며 행복감에 싸인다.


아기의 열병과 걷기 사이에 어떤 의학적 인과가 존재하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질병 자체를 환호의 대상으로 이해하는 일은 아무래도 이상하지만 질병을 삶의 큰 맥락에서 해석함으로써 지혜를 얻고 행복을 예감하는 일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질병을 두고 어떤 자세를 취하는가에 따라 인간은 사뭇 다른 결의 삶을 산다. 삶의 한가운데서 일어나는 모든 질병은 질병을 앓는 사람과 그를 치료하는 사람과 그를 돌보는 사람을 함께 깨달음으로 이끄는 큰 수레大乘임에 틀림없다. 우리가 그 큰 수레를 보지 못한 채, 각기 괴로움과 시큰둥함과 마지못함으로 허정허정 걸어가는 것뿐이다.


바야흐로 한 생각 크게 돌이킬 때가 왔다. 질병 인식 패러다임 전체를 뒤집어엎어야 한다. 인류가 당면한 생명의 위기는 창궐하는 질병 때문이 아니라 백색의학의 잘못된 질병 인식, 거기 터하여 치료약이랍시고 뿌려대는 화학합성물질 때문이다. 이제 질병은 백색 독극물로 때려잡을 적이 아니다. 인류 구원의 서사narrative를 실을 큰 수레다. 이 큰 수레를 끌 주체는 백색 요법 포르노와 독극물을 거절한 질병인민이다. 만국의 질병인민이여, 단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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