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

고3 때부터 약 7년 넘게 쓴 본체가 장렬히 전사하는 바람에

컴퓨터 없이 넷북에만 의존하는 신세로 전락했던 나.

 

넷북은 쓰기가 불편해서

컴퓨터 작업을 해야 할 때면 동생 컴퓨터를 쓰거나 도서관에 가야 했다.

그 때마다 얼마나 서러웠던지...

 

아, 백수만 아니면 그깟 컴퓨터 몇개월 할부로 살 수도 있는 건데,

나는 직업도 없고 신용카드도 없구나ㅠㅠ

 

그런데 오늘 알케님 서재에서 듀얼모니터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http://blog.aladin.co.kr/alkez/5291217

 

학교에서 노트북, 컴퓨터 화면을 스크린에 띄우는 건 많~이 봤는데,

정작 그게 듀얼모니터 기능이고,

노트북과 컴퓨터, 컴퓨터와 컴퓨터 간에도 된다는 건 몰랐다.

(아 나란여자 '문과여자 = 컴맹'ㅠㅠㅠ)

 

아무튼 베란다 구석에 쳐박아 두었던 모니터를 꺼내서

동생을 불러 연결을 해봤더니

 

 

오오 된다! 된다!!!

 

 

 

 

이런 모습이다.

 

널찍한 화면으로 보게 되었다는 것 빼고는 달라진 게 없지만

그동안 작은 넷북 화면을 보느라 눈 빠질뻔 했던 걸 생각하면

이 정도로도 엄청난 진화요, 발전이다.

 

인터넷 검색하면서 보니

아이패드 화면도 듀얼모니터가 가능하다고 하는데

가지고 계신 분들은 시도해보시면 좋겠다.

(난 아이패드는 커녕, 아이폰도 없으므로 패스)

 

 

기술은 참 신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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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케 2011-12-21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축하드려요
 
분노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 / 돌베개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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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정리하다가 이 책 <분노하라>가 눈에 띄었다. 저자 인터뷰에 추천사, 역자 후기, 주석을 합쳐도 채 백 쪽이 안 되는, 소책자마냥 얇은 이 책을 지난 여름에 한창 화제가 되었을 때 바로 구입해서 읽고(그것도 콩국수 집에서 콩국수 나오는 걸 기다리는 동안에 ㅎㅎ) 감상 쓰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그러니까 이 글은 계절이 두번 바뀐 뒤에야 쓰는, 아주 뒤늦은 감상문이다.

 

저자 스테판 에셀은 1917년 독일에서 태어났다. 1917년생이면 3.1운동이 일어나기 2년 전에 태어나신 셈이니 저자가 살아온 세월의 무게가 더욱 묵직하게 느껴진다. 7세 때 프랑스로 이주하여 20세에 프랑스 국적을 취득한 저자는 선배인 사르트르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으나 2차 대전이 발발하는 통에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레지스탕스의 일원이 되었다. 연합군 상륙작전을 돕는 중에 체포 되어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 사형 선고까지 받았으나 극적으로 탈출하여 외교관이 되었다. 종전 후 1948년 유엔 세계인권선언문 초안 작성에 참여했고, 인권과 환경 문제에 굵직한 종적을 남겼다.

 

이 책의 머리말에는 제일 먼저 저자가 몸담았던 프랑스 전국 레지스탕스 평의회가 구축한 개혁안에 대한 소개가 나온다. 이 개혁안에는 사회보장제도 구축, 언론 독립, 평등한 교육 등 당시로서는 너무나도 새롭고 파격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종전 후 프랑스는 이 개혁안에 기초하여 사회제도를 만들었고, 그 결과 많은 개혁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저자는 2008년 무렵부터 프랑스 사회의 근간이기도 한 개혁안의 의지가 위협을 받고 있다고 느꼈다. 이민자에 대한 차별이 묵인되고, 사회보장제도가 제 구실을 못하고, 언론이 부자와 권력자들에게 장악되고 있는 현실을 목도하며 저자는 분노했다. 나치로부터, 전쟁의 참화로부터, 종전 후 혼란으로부터 지키고자 했던 사회의 모습은 결코 이런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 분노의 동기를 갖기 바란다. 이건 소중한 일이다. 내가 나치즘에 분노했듯이 여러분이 뭔가에 분노한다면, 그때 우리는 힘 있는 투사, 참여하는 투사가 된다. 이럴 때 우리는 역사의 흐름에 합류하게 되며, 역사의 이 도도한 흐름은 우리들 각자의 노력에 힘입어 면면히 이어질 것이다. 이 강물은 더 큰 정의, 더 큰 자유의 방향으로 흘러간다. (p.15)

 

저자는 사람들이 좀더 자신처럼 사회에 대고 분노하기를 바란다. 분노는 레지스탕스가 들고 일어섰던 기본동기로서, 미약한 개인을 사회에 참여하게 만들고, 투사로 만들며, 이 투사들이 역사를 만들고 자유를 쟁취한다는 것이 저자의 논리다.

 

분노와 상반되는 최악의 태도로 저자는 무관심을 지적했다. 분노는 부정적인 감정을 동반하는 것이니 결과 또한 부정적이지 않겠냐는 의구심이 일 수도 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분노는 지금 처한 상황을 극복해서 긍정적인 미래를 맞이하자는 의미가 담겨있는 반면, 무관심은 상황에 승복하여 아무런 희망도, 보람도 없이 살겠다는, 지극히 수동적인 감정이다. 부정에 일일이 분노하는 사회가 조금은 피곤하게 느껴질지 몰라도,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사회보다는 더 행복해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저자가 전하고자 한 바가 아닌가 싶다.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다.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 내 앞가림이나 잘 할 수밖에..." 이런 식으로 말하는 태도다. 이렇게 행동하면 당신들은 인간을 이루는 기본 요소 하나를 잃어버리게 된다. 분노할 수 있는 힘, 그리고 그 결과인 '참여'의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는 것이다. (p.22)

 

 

나이를 먹을수록 역사를 대하는 마음가짐이 더욱 경건해진다. 어릴 때부터 만화책보다 역사책을 좋아하고, 사극을 좋아했을만큼 역사에 관심이 많았지만, 그런 내 눈에도 그 때는 역사가 그저 왕들이 나오고 신하들이 나오는 옛날 이야기에 불과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생활인으로서 살며 밥과 돈이라는 아주 근원적인 욕구에 나란 사람이 얼마나 흔들리기 쉬운가 깨달을 때마다, 그런 욕구에도 불구하고 자유와 정의, 민족의 독립 등 대의를 위해 싸운 인물들에 대해 더욱 존경심을 가지게 된다.

 

저자 스테반 에셀도 그런 인물 중 한 명이다. 2차대전, 나치, 레지스탕스, 드골, 세계인권선언 ㅡ 이런 흘러간 역사가 이 분에게는 삶이었고, 아직도 꼬리를 길게 드리우고 있는 현실일 터. 그런 저자의 눈에는 21세기를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어떻게 비칠까? 수많은 이들이 피땀흘려 얻어낸 정의와 자유가 짓밟히고 있는 것을 보고 답답함을 느끼실까? 부끄러움에 고개가 숙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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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침에 인터넷에 접속하니 포털 메인 뉴스창에 북한중앙방송에서 12시에 긴급특보를 할 것이라는 글이 떴길래 '아, 뭔가 일이 터지나 보다' 싶었는데, 터졌다.

 

 

2. 그런데 신기하게도 개인의 일상은 세상사와 상관없이 잘만 흘러간다. 오늘도 시간은 잘 갔고, 해야할 일을 했고, 밥도 세끼 꼬박 잘 먹었다.

 

 

3. 오늘의 수확물은 이것.

 

 

 

붉은색 니트 워머. 동생이 털목도리가 갖고 싶다고 하길래 사줬는데, 쓸만한 것 같아서 나도 종종 빌려쓸까 싶다. 동생이 이번 겨울에 꼭 가지고 싶었던 것이라며 기뻐해서 나까지 기뻤다. 그러고보면 내 동생은 표현을 참 잘한다. 덕분에 뭔가 해주고, 사주는 즐거움이 배가 된다.

 

마트에 가서 문구도 잔뜩 구입했다. 펜 몇 자루, 지우개 몇 개씩을 묶어도 한두개 값 밖에 안 해서 신나게 바구니에 담았다. (이럴 때만 사치부리는 나란 여자) 몇 달치를 사둘 작정으로 많이 골랐는데 합계는 고작 몇 천원이었다(우왕굿!!). 이 재미 때문에 내가 아직도 화장품, 옷 쇼핑할 때보다 문구류 살 때 더 행복감을 느끼나보다 ㅎㅎ

 

 

4. 그러고보니 오늘 (내가 워머 사준 것 말고도) 동생한테 좋은 일이 하나 더 있었다. 얼마전 모 사이트에서 경품 이벤트 1등에 당첨되었는데, 상품으로 최신형 디카가 도착했다. 경품 이벤트에 참여할 때마다 좋은 상품은 남들만 가져가는 줄 알았는데 내 동생한테 이런 일이 있다니, 너무나도 신기하다. 마침 올 2월에 동생이 대학교를 졸업해서 좋은 선물이 될 것 같다. 그나저나 나는 선물 뭐해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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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재구성 - 글로벌 경제위기 제2막의 도래
김광수경제연구소 지음 / 더팩트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그동안 신간평가단을 통해서든 개인적으로든 미국발 금융위기의 원인과 전개과정에 관한 책을 여러권 읽었다. 그 모든 내용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책이 바로 <위기의 재구성>이다. 금융위기의 원인부터 제로금리정책, 달러 기축통화제, 금융자유화 등 기존 이론과 정책에 대한 반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직까지도 여파가 남아있는 유럽경제와 세계경제의 위기, 그 중에서도 공적채무와 인플레 문제에 대한 분석까지 조목조목 정리되어 있어서 미국발 금융위기에 대해 콤팩트하게 알아보기 좋다.

 

그러나 내용면으로 보면 비슷한 주제의 책을 여러권 읽어온 사람으로서 새롭게 알게 되었다거나 놀랍다고 느낀 부분은 별로 없었다. 경제 문제에 관심이 있어서 조금이라도 신문을 들여다보고 뉴스를 보고 책을 읽어왔던 사람이라면 식상하게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아무래도 연구보고서에 기초한 글이라서 그런지 문체나 글의 구성이 매우 객관적이라서 읽는 맛은 좀 떨어졌다. 과연 이 책을 읽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보고서는 그만큼 관심과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 읽는 자료이기에 수준이 높아도 무관하겠지만, 책으로 출간된 이상 폭넓은 수준의 독자들이 읽을 수 있게끔 문체나 구성면에 신경을 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아쉬운 점이 없지 않다.  

 

게다가 주제에 대한 분석 시각도 화폐 부문에 너무 치우쳐 있는 감이 있다. 이 책의 분석은 미국발 금융위기의 원인을 과도한 금융자유화와 달러기축 변동환율제의 위기, 재정 위기 등 주로 화폐 부문에 돌리고 있는데, 경제를 받치고 있는 두 기둥이 실물과 화폐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오로지 화폐 부문만의 문제라고 보기는 힘들다. 화폐 부문에 대해 강조하다보니 무역 불균형, 에너지 수급, 고령화 사회로의 진전, 신기술 부재 등 실물 부문에서 야기된,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간과하게 되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금융위기가 실물 부문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는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시각이 있었더라면 이 책이 보다 체계적이고 심층적인 분석서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몇년 전엔가 김광수 경제연구소에서 나온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위기의 재구성>이 그 책보다는 발전된 점이 많이 엿보여서 앞으로 출간될 책에도 기대를 해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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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악마가 여기에 있다 자음과모음 인문경영 총서 2
베서니 맥린 & 조 노세라 지음, 윤태경.이종호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지난 주말에 어느 책을 읽다가 집권층과 대중이 사용하는 언어의 괴리, 즉 소통의 문제에 대해 지적한 부분에 깊이 공감했다. 전문 지식을 소유하고 집행 능력을 가진 측과 그저 말없이 그들의 논리를 따라야 하는 측의 거리는 얼마나 먼가.

 

요근래 경제 전문서를 읽으면서도 같은 느낌을 받는다. 저자들은 대부분 경제학을 전공하고 정부, 금융계, 학계 등에서 다년간 종사해온 전문가이고, 독자들은 그들의 전문적인 통찰과 지식을 얻기 위해 책을 읽는다. 하지만 경제에 결코 정통하지 않아도 대학에서 다른 학문 대신 경제학을 전공으로 선택했을 만큼 관심은 있는 내가 읽기에도 요즘 나오는 경제학들은 지나치게 말이 어렵고 논리가 복잡하다. 정말 이 책들의 내용을 대중히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이렇게 되면 독자가 경제 전문서를 읽으면서 얻게 되는 것은 단 두 가지로 귀결된다. '잘 모르겠다'는 체념, 그리고 '내 일이 아니라'는 방관.

 

지난밤 <모든 악마가 여기에 있다>를 읽었다. 2008년 미국에서 벌어진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 사태의 원인에 대해 규명한 이 책은 뉴욕 타임스의 경제 경영 칼럼니스트인 조 노세라와 포춘지 기자인 베서니 맥린이라는 두 언론인이 쓴 책 답게 - 다행히도 - 독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되어 있어서 좋았다. 제법 두껍고(약 500여 페이지), 등장 인물과 회사수도 전국 시대를 배경으로 한 무협지를 연상케 할만큼 많지만 읽기에 무리가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언어의 문제는 책보다도 미국의 경제 현실 속에 있었다. 당시 미국 금융정책의 선봉장이었던 그린스펀은 시장의 순기능을 맹신했고, 그를 믿고 월가는 전문가도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복잡한 파생금융상품을 양산했다. 여기에 부동산 업체는 부실한 모기지 상품을 만들어 인간의 '집'에 대한 근원적인 욕망을 채우는 데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것처럼 가장했고, 이에 질세라 대출 업체도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이렇게 사회 전반이 열광하고 전문가들이 입을 모아 '괜찮다'고 말하는 데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들이 파생상품이니 모기지니 하는, 어렵지만 똑똑하게 들리는 말을 할수록 대중은 '나는 모르지만, 저들이 잘 알아서 하겠지'라고 생각하며 체념하고 따르거나 방관했을 것이다. 전문가들은 모르는 자를 속이고, 대중은 모르는 채로 아는 이들의 말을 듣고 따른 잘못은 결국 헤어나오기 힘든 수준의 위기로 이어졌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 알아듣지 못한 -  대중의 몫이 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책을 들춰보고 언론의 보도를 들으면 알아듣기 힘든 얘기들이 넘쳐 난다. 

 

여전히 난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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