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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자신보다 자신의 그림자가 더 아름다운 여자는... 그림자로서 세상을 살아야 해요. 그렇게 살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나는... 이미 세상에서 사라진 여자에요.(p.211)" 남자는 '자신보다 자신의 그림자가 더 아름다운' 여자를 사랑했다. 친구는 동정으로 시작된 사랑은 무관심이나 증오보다 더 나쁜 것이며 말렸다. 남자도 자기 자신을 의심했다. 유난히 잘생겼던 그의 아버지는 유난히 못생겼던 그의 어머니를 버렸다.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어머니에 대한 동정심의 발로로 여자를 사랑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는 끝내 용기를 내 여자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오래오래 행복할 줄 알았다.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사실 몇 달 전 책을 구입하자마자 읽기를 시도했는데 문체가 생경하기도 하고 작중 상황이 이해가 안 돼서 몇 장 읽고 덮어버렸었다. 그러다가 며칠 전 <창비 라디오 책다방> 박민규 작가님 편을 듣고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날 당장 읽기 시작했는데, 오 마이 갓! 내가 이 책을 그냥 포기했다면 큰일 났겠다는 생각에 정신이 아찔했다. 한 남자의 인생 이야기 같기도 하고, 두 연인의 러브 스토리 같기도 하고, 세 남녀의 젊은 시절을 그린 청춘물 같기도 한 이 소설은 그냥 읽으면 마치 80년대 청춘 영화를 보는 듯 그저 재미있지만, 진지하게 읽으면 그 속에서 2010년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아니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여성의 미(美)'에 대한 사회의 야박한 시선과 이로 인한 사회적인 계급의 형성, 외모에 대한 비관 때문에 생긴 내면의 장애 같은 것에 대한 저자의 일갈을 읽을 수 있다.
소설을 읽으면서 가끔 케이블 채널에서 보는 <렛 미 인>이라는 프로그램을 떠올렸다. 방송에서 외모 때문에 각종 사회적 차별을 당하고, 그것 때문에 외모뿐만 아니라 자신의 내면까지 고통받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면서도, 그러한 차별과 고통이 성형수술이라는 과정을 통해 여배우나 걸그룹 같은 외모를 가짐으로써 해소될 수 있다고 보는 프로그램의 시각에는 부정적인 생각이 든다. 그 방법밖에 선택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고, 출연자 중에는 외모와 관련하여 신체적인 고통을 겪고 있어서 의학의 도움을 받는 것이 불가피한 경우도 있지만, 외모라는 것이 하나의 사회적인 자본처럼 다뤄지고, 외모가 아름다우면 자본이 있는, 소위 말하는 갑(甲)이고, 아름답지 못하면 자본이 없는 을(乙)처럼 취급되는 현실 자체의 개선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비단 외모의 문제만이 아니다. 넓게 보면 외모뿐 아니라 모든 것을 자본화하는 자본주의사회의 모순과 폐해, 또한 그러한 자본의 유무를 통해 계급이 정해지는 사회의 폐단, 그러한 것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식하더라도 무시하고 살아가는 '현대판 노예'나 다름없는 일반 시민들의 아이러니를 이야기 하는 것이 이 소설이다. "고대의 노예들에겐 노동이 전부였다. 하지만 현대의 노예들은 쇼핑까지 해야한다." (p.310) 자본주의 사회의 '노예'들은 그저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도 잘해야 하고, 외모도 아름답게 꾸며야 한다. 세상의 눈에 고깝게 보이지 않도록 때 되면 대학가고, 때 되면 취직하고, 때 되면 결혼하고 아이낳고, 때 되면 퇴직하며 살아야 한다. 내 인생은 왜 고달플까? 못생겨서? 공부를 못해서? 좋은 대학을 못나와서? 직장이 별로라서? 돈이 없어서? 결혼을 못해서? 애가 없어서?... 그런 것들을 고민하기 전에, 먼저 그런 것들을 고민하게 만드는 이 사회와 구조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궁극적인 메시지가 아닌가 싶다.
두 시간을 기다려 5분 열차를 타고 내려오는 사람들을 보며 아마도, 하고 나는 얘기했었다. 그런 걸 거야. 여기까지 왔는데 이건 꼭 타고 가야지, 그런 심리가 되는 거지. 두 시간 줄서서 5분 열차, 두 시간 줄서서 5분 회전바퀴, 두 시간 줄서서 5분 바이킹... 우와, 거의 하루인 걸. 한적한 느낌의 참으로 시시한 회전 커피 잔에 앉아 나는 생각했었다. 누구나 그럴 듯한 인생이 되려 애쓰는 것도 결국 이와 비슷한 풍경이 아닐까... 생각도 들었다. 이왕 태어났는데 저건 한번 타봐야겠지, 여기까지 살았는데... 저 정도는 해봐야겠지, 그리고 긴긴 줄을 늘어서 인생의 대부분을 보내버리는 것이다. 삶이 고된 이유는... 어쩌면 유원지의 하루가 고된 이유와 비슷한 게 아닐까. (p.200)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의 열린 결말은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해피엔딩이었다면 현실에서는 평생을 응달에서 살아야했을 여자의 운명을 비현실적으로 마무리지었다는 느낌이 들었을 것이고, 새드엔딩이었다면 못생긴 여자와 그 여자를 사랑한 남자의 운명은 결국 비극으로 끝날 수 밖에 없는 것인가 하고 한탄하는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작가는 해피엔딩과 새드엔딩을 모두 취하는 독특한 결말을 통해 독자가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게끔 결말을 열어두었다. 그렇다면 이 사회의 운명도 열린 것일까? 마냥 행복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마냥 비극적이지도 않을까?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보다는 덜 팍팍하고 다양성을 인정하는, 더 관대한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