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과의 대화 - 세계 정상의 조직에서 코리안 스타일로 일한다는 것에 대하여 아시아의 거인들 2
톰 플레이트 지음, 이은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을 좋아하고 존경하는데도 그에 대한 책을 이제까지 한 권도 읽어본 적이 없다. 대부분이 아동, 청소년용 도서인 탓도 있지만, 한국인의 정서상 그를 객관적이고 냉철하게 분석한 책보다는 영웅시하고 미화하는 책이 많을 것 같다는 걱정이 들어서다. 그런 점에서 <반기문과의 대화>는 읽기에 적절했다. 일단 저자가 톰 플레이트라는 미국인이기 때문에 한국인의 정서에 물들지 않고 제 3자의 시선으로 반기문의 공과 실을 객관적으로 분석했으리라는 믿음을 준다. 또한 그는 <타임>, <뉴스데이>, <뉴욕> 등에서 활동한 바 있는 전문 언론인이자 미국 언론계에서 가장 유력한 '아시아 정보통'으로 손꼽히는 인물이기도 하다. 반기문이 유엔사무총장으로 선출되기 전부터 만남을 가져온 사이라서 오랫동안 그의 경력과 업적을 지켜봐 왔다는 점도 좋았다. 또한 반기문도 지난 2년 동안 바쁜 일정을 소화하는 가운데 십여 차례 이상 저자와 만남을 가지며 책의 인터뷰이로서 성실하게 참여했다. '반기문 사무총장이 공식 인정한 유일한 책'이라는 광고 문구가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저자는 먼저 유엔사무총장이라는 직책에 대해 설명한다. 국내에서는 유엔사무총장을 '세계의 대통령'이라느니 '대통령 중의 대통령'이라느니 하는 말로 찬양하지만, 미국인인 저자의 눈에는 "정신에 이상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 일을 하고 싶어할 리도 없지만 할 수도 없"는 일에 불과하다. "이 세상에 유엔 사무총장 같은 직업은 없다. 독특하다는 말이 딱 맞는 직업이다. 사무총장이 되면 세계적인 스타로 떠오르지만, 동시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할 때가 많은 관료들에게 둘러싸여 살아야 한다. 유엔 회원국 수를 감안하면 200여 명의 보스가 있는 셈이다. 게다가 몇 분 안에 음식을 요리해내는 전자레인지처럼 바로바로 성과를 내놓길 바라는 서구 언론들까지 그를 주시하고 있다. 그뿐이랴. 유엔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고 복잡하게 얽힌 문제가 산적해 있다. 국제적인 규모로 움직이는 폭력단들 간의 싸움도 그중 하나다." (p.23) 일반인들은 신경도 안쓰고 사는 재해와 테러, 전쟁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하루 24시간 내내 전세계를 누비는 것도 모자라, 일을 잘 못하면 전세계로부터 비난을 받는 것도 감수해야 한다. 여가, 취미는커녕 하루에 몇십 분 쉬지도 못한다.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처럼 엄청난 부를 실컷 누리고 사는 것을 성공이라고 부르는 미국인들의 눈에는 반기문처럼 똑똑하고 능력있고 야심도 있는 사람이 고작 20만 달러의 연봉과 관저만 받고 이런 힘든 일을 하는 것이 이해가 안된다는 것이다. 예로부터 관료를 우대하는 문화가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국가공무원으로서나 외교공무원으로서나 최고위직에 오른 반기문을 가장 성공한 한국인 중 하나로 여기는데, 외국인들에게는 다르게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돈만 잘 벌면 장땡'이라는 식의 미국식 사고방식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직책이 높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이기만 하면 됐지 일의 본질이나 실체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우리나라의 정서도 문제인 것 같다. 그렇다면 유엔사무총장이 하는 일의 실체는 무엇일까? 궁금한 마음을 안고 계속 읽어보았다.



저자는 반기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그의 이력과 업무 스타일, 유엔이라는 조직 내에서의 문제, 여성 문제, 북한과 일본, 중국 등을 아우르는 동아시아 정치 문제에 대한 생각 등을 낱낱이 밝혔다. 그의 이력이야 국내에도 잘 알려져 있고, 지독한 워커홀릭에, 스스로를 잘 드러내지 않으면서 원하는 바를 이뤄내는 전형적인 '외교가'라는 업무 스타일 또한 유명하다. 이 책에서 새롭게 알게 된 것은 유엔이라는 조직 내에서 그가 어떤 어려움을 겪었으며, 대외적인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유엔의 수장으로서 어떤 고충이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부터가 바로 유엔사무총장이 하는 일의 실체다) 먼저 유엔이라는 조직은 전세계 백여 개의 나라에서 온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정부나 일반 사조직과는 시스템과 문화가 매우 다르다. 반기문은 사무총장이기에 앞서 유엔이라는 조직의 리더로서 업무를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일하기 좋은 문화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동안의 관행이 무너지는 것이 싫어서 저항했던 직원들도 차츰 그의 노력에 동참하기 시작했고, 결국 그는 유엔이라는 조직의 틀과 속을 모두 바꾸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전형적인 '외교가'인 그는 그것을 자신의 덕으로 돌리지 않고 한국 문화의 공으로 돌렸다. "유엔은 각양 각색의 문화를 모두 접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문화를 존중해야 합니다. 한국 문화도 중요한 문화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 문화를 지키고 싶었습니다. 적어도 한국의 성공신화만큼은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인은 훌륭한 관리방식을 발전시켜왔습니다. 저는 그런 좋은 관행을 유엔에 도입하고 싶었습니다. 실제로 그 부분에서 몇 가지 진전이 있었고, 그래서 지금은 사람들도 이해하고 있습니다." (p.127) 한국의 조직관리방식이 '훌륭한'지는 모르겠지만 효율적이라는 점은 공감한다. 그것이 자신의 덕이 아닌 한국 문화의 공으로 돌린 점도 인상적이다.



대외적인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그가 느낀 고충은 더욱 컸다. 임기 초반부터 선진국의 수장과 언론들은 그의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 출신이라는 것과 카리스마와 언어 실력 부족을 대놓고 조롱하며 무시했다. 재해, 전쟁, 테러 등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아시아, 아프리카의 개발도상국에서는 그의 개입을 주권 간섭이라며 거부하기도 했다. 더 큰 문제는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전세계 리더들의 관계를 조율하는 일이었다. 외교, 정치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고, 아무리 잘나고 대단한 리더라도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람들의 관계를 조율하는 일이 무척 어려웠다. 그 중에는 수천, 수만 명의 목숨을 걸고도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 거짓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유엔사무총장도 사람인지라 그런 사람을 대할 때는 화가 나고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멸사봉공의 자세로 개인적인 감정을 누르고 공적인 임무에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그런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약점으로 지적한) 카리스마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제가 분명한 입장을 표명하면 사람들은 놀랍니다. 이런 사무총장을 본 적이 없다면서요. (전 이집트 대통령) 호스니 무바라크에게 물러나라고 처음 말한 사람이 바로 접니다. '이제 그만 물러나야 한다'고 말했죠." (p.183)



이밖에도 여성 문제, 북한과 일본, 중국과 미국 등 동아시아 정치 문제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많은 내용이 다뤄져 있고, 국내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반기문의 하버드 케네디 스쿨 재학 당시의 일화도 소개한다(무려 저명한 국제정치학자 그레이엄 앨리슨과 조지프 나이의 회고록이 담겨 있다!). 여러 차례 부부 동반 모임을 가졌기 때문인지 저자는 반기문의 부인 유순택 여사에 대해서도 여러 번, 그것도 매우 자세히 언급한다. 유명 인사의 평전에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미국인인 저자의 눈에는 지극히 가부장적인 교육을 받고 자란 부인의 모습과 행동이 신선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첫만남에서 부인의 다소곳하고 조신한 몸가짐을 묘사하는 대목이라든가, 사서로서의 커리어를 포기하고 밖으로만 도는 남편을 위해 헌신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느낌을 서술한 대목에서 놀라워하는 작가의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남편이 사회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부인이나 가족이 그림자처럼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우리 정서로 보면 낯설지 않을 이야기가 외국인에게는 이런 식으로 보인다는 것이 신기했다. 만약 이 책을 한국인 작가가 썼다면 대단하다, 존경스럽다, 현모양처다 라는 식으로 일축했을텐데...... 그런 부인을 둔 반기문이 유엔 안팎에서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 저자의 눈에는 어떻게 보였을까? 직접적인 평가를 하지는 않았지만,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힐러리 클린턴 같은 여성 정치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 그런 것은 아닌지 캐물은 것을 보면 그저 곱게만 보지는 않은 것 같다.  



어느 곳 하나 반기문을 찬양하거나 영웅시하는 부분이 없다는 점에서 이 책은 '쿨'하기 그지 없다. 그러나 한국인이 아닌 미국인의 눈에는 반기문이라는 인물이 어떻게 비치는지, 아울러 미국인에게는 한국인 관료의 업무 스타일이나 정치적인 행보가 어떻게 보이는지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상당히 '핫'하다. 또한 (대부분의 책이 그렇듯) '위대한 한국인' 반기문으로서가 아니라, 전략적으로 커리어를 설계하고 자신의 일을 완수하기 위해 노력하는 외교 전문가, 일과 개인적인 생활 사이의 균형을 잡기 위해서 나름대로 노력하고 주변과 타협하는 사회인, 한 인간으로서의 반기문을 만난 것 같아서 개인적으로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정치외교학 전공자로서 내가 하고 있는 일과 공부, 진로 때문에 고민을 하게 될 때마다 이 책을 들여다보면서 마음을 다잡고 미래에 대해 생각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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