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에게 말 걸기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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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미는 영국에서 유학 중인 대학원생이다. 유미의 관심은 무사히 학위를 받아서 한국에서 교수로 취직할 수 있을지 여부인데, 유미의 부모는 서른을 앞둔 유미가 하루라도 빨리 언니처럼 결혼해 가정을 꾸리기만을 바란다. 유미의 언니 연미는 어릴 때부터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예쁘기로 유명했다. 일류대 대학원을 졸업한 언니는 전공을 살려 직업을 가지는 대신 병원을 소유한 남자와 결혼해 아들 하나를 키우며 살고 있다. 유미는 언니처럼 사는 것을 생각만 해도 답답하지만, 취직도 못하고 애인조차 없는 자신의 현실이 언니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면 막막하다. 그런 언니 앞으로 부쳐진 편지 한 통이 유미에게 도착한다.


<타인에게 말 걸기>는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올해로 등단 29주년을 맞은 은희경 작가의 첫 소설집이다. 이 책에는 등단작 <이중주>를 비롯해 총 아홉 편의 중단편이 실려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에 발표된 작품들이지만, 소설의 내용이나 문장이 낡았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앞에 소개한 <연미와 유미>처럼 아직도 한국 사회에 남아 있는 (여자라면 서른 살 전에는 결혼을 해야 하고, 여자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결혼이라는 식의) 성차별적 인식을 고발하고 그러한 인식에 맞서는 삶을 살고 있는 여성 주인공의 외적, 내적 갈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지금의 젊은 독자들이 읽어도 공감할 만한 점이 많다고 느꼈다.


등단작 <이중주>는 말기 암 선고를 받은 아버지를 간병하는 엄마 정순과 그런 엄마를 지켜보는 딸 인혜의 이야기를 그린다. 자라는 동안 내내 '착한 딸'이었던 인혜는 부모가 바라는 직업(교사)을 가지고 부모가 원하는 때에 결혼을 했다. 그러나 인혜 자신은 행복하지 않고 결혼 생활도 불만족스럽다. 평생 남편의 말에 순종하고 자식 키우는 데에만 헌신한 정순은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했고 좋은 직업도 있는 딸이 왜 불행해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모녀든 자매든 본질적으로는 서로 타인이고, 타인의 삶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며 다만 인정해야 할 뿐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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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정세계
찬쉐 지음, 강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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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쇼핑몰에서 일하는 샤오쌍은 연애보다 독서를 더 좋아하는 독서광이다. 허구한 날 책만 읽는 샤오쌍을 눈여겨 보던 이웃의 이 아저씨는 자신이 젊은 시절 사귀었던 여자의 아들인 헤이스에게 샤오쌍을 소개해 주기로 마음 먹는다. 헤이스도 샤오쌍 못지 않은 독서광이기 때문에 두 사람이 만나면 대단한 화학 작용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두 사람은 첫 만남부터 서로에게 강렬한 호감을 느낀다. 특히 샤오쌍은 헤이스가 속해 있는 '비둘기 북클럽'에 초대 받아 북클럽 멤버들과 책에 관한 토론을 한 이후로 전에 없는 설렘과 흥분을 느낀다. 나만큼이나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니! 


소설은 샤오쌍이 헤이스의 초대를 받아 비둘기 북클럽 회원들과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해, 샤오쓰와 헤이스, 페이와 한마, 차오쯔와 리하이, 이 아저씨와 샤오마 등 여러 커플의 이야기를 두루 다루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메인 커플이라고 할 수 있는 샤오쌍과 헤이스가 가장 무난하고 안정적인 연애를 하고, 다른 커플들은 이별과 재회를 반복하거나, 이혼의 상처를 안고 있거나, 엄청난 나이차 때문에 망설이는 등 크고 작은 위기를 겪는다. 늘 혼자서 책을 읽었던 샤오쌍은 자신만큼 책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순식간에 늘어난 것과 함께 같은 책을 읽을 수 있는 반려자가 생긴 것에 감사한다.


찬쉐는 1953년생 중국의 여성 작가로, 수전 손택이 "중국에 노벨상 수상의 유일한 가능성이 있다면 그는 바로 찬쉐다."라고 한 말이 유명하다. 나 역시 그 말에 혹해서 전부터 찬쉐의 작품을 읽어보고 싶었고, 찬쉐의 작품 중에선 이 책이 (그나마) 진입 장벽이 낮다고 해서 읽어보게 되었다. 읽어보니 과연 진입장벽이 낮은 편이기는 한데, 이성애 로맨스의 분량이 너무 많아서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는 작가의 작품이라기 보다는 대중 취향의 라이트한 소설 같다고 느꼈다. 찬쉐의 다른 소설 또는 현대 중국 소설을 더 많이 읽었다면(읽으면) 감상이 다를지도 모르겠다(앞으로 더 많이 읽어보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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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결함
예소연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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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강의를 검수하는 일을 하는 석주는 크로스핏 센터에서 만난 맹지와 친구가 된다. 석주는 맹지와 같이 밥 먹고 술 먹고 PC방에나 가는 생활이 너무 좋은데, 맹지는 남친이 살을 뺐으면 좋겠다고 해서 크로스핏을 시작한 거(였는데 이렇게 됐다)라며 죄책감을 느낀다. 석주는 애인이랍시고 맹지를 괴롭게 하는 맹지의 현 남친이 싫다. 여친이 임신 중절 수술을 받게 하고도 수술비를 안 내고 대기업에 척척 붙는 자신의 전 남친도 너무 싫다. 명백한 성차별 발언을 지적하자 '페미 같다'며 해고한 직장에도 환멸을 느낀다. 이런 세상에서 누구를, 무엇을, 어떻게 사랑하란 말인가.


예소연 작가의 첫 소설집 <사랑과 결함>에는 총 열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소설집 제목에 '사랑'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어서 이성애 로맨스를 주로 다루는 소설집인가 싶었는데 그렇지 않았다. 이성애 로맨스에 국한하지 않고 훨씬 더 폭넓은 사랑을 이야기하는 책이라서 좋았다. 첫 번째 단편 <우리 철봉 하자>만 해도 맹지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고 사랑한다는 점에서, 맹지의 현 남친보다 맹지의 친구인 석주가 맹지를 더 많이, 더 크게 사랑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성애 독점 관계만을 연애 혹은 (좁은 범위의) 사랑의 형태로 인정하는 한국 사회에선 석주가 아무리 맹지를 아껴도 잘해야 우정으로 간주된다.


이어지는 세 편의 단편 <아주 사소한 시절>, <우리는 계절마다>, <그 얼굴을 마주하고>는 희조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을 그린 연작 소설이다. 희조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우연히 미정의 아빠가 죽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 희조와 미정은 함께 청설모를 관찰하고 집에도 자주 놀러 가고 비밀 이야기도 나누는 사이였다. 하지만 미정의 아빠가 죽은 후 희조가 미정의 비밀을 누군가에게 말하면서 둘 사이가 멀어지고, 중학생이 되어 두 사람은 다시 가까워지지만 뜻밖의 사건으로 인해 또 다시 거리가 멀어진다.


표제작 <사랑과 결함>은 성혜와 고모, 엄마의 기묘한 삼각관계를 그린다. 성혜의 고모인 순정은 장녀라는 이유로 부모를 대신해 남동생을 건사하는 데 자신의 청춘을 다 바쳤다. 순정은 현재 남동생 가족과 함께 사는데, 순정은 자신이 남동생을 키웠으니 이 정도 대접을 받는 게 당연하다 여기는 반면, 성혜의 엄마는 자신의 집에 얹혀사는 시누이를 곱게 보지 않는다. 성혜는 엄마의 감정에 이입해 고모를 미워하기도 하고, 엄마에게 서운한 일이 있을 때는 고모의 돌봄을 받기도 하면서 둘 사이를 오간다. 이 밖에도 다양한 사랑, 다양한 결함의 형태를 제시하는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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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에 달 가리운 방금 전까지 인간이었다 레이디가가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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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운동할 때 팟캐스트를 주로 들었는데 요즘은 TTS 기능을 이용해 전자책을 '듣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이 책도 운동하면서 들었는데, 한 편 한 편의 길이가 짧아서 도중에 끊지 않고 끝까지 들어도 한 번에 한두 편은 거뜬히 들을 수 있고, 미스터리, 호러, 판타지 등 다양한 장르가 번갈아 나와서 질리지 않았다.


출간 배경도 재미있다. 후기에 따르면 작가는 2012년부터 지인들과 함께 하이쿠를 쓰고 읽는 이른바 '치매 예방 하이쿠 모임'을 하고 있다고 한다. 모임에서 나온 하이쿠 문장들 중에 혼자만 읽고 감탄하기에는 아까운 것들이 많아서 하이쿠 문장을 제목으로 한 단편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지은이들의 동의를 얻어 책으로 엮은 것이 이 책이다. 참고로 하이쿠는 일본의 정형시 중 하나로, 각 행이 5, 7, 5음절로 되어 있고 반드시 계절을 나타내는 단어가 들어 있어야 한다는 규칙이 있다. 


이 책에는 특히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 사건이 많이 나오는데, 그 이유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시대상을 반영한 것이겠죠.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의 90퍼센트가 시대물이고 현대물을 쓴 건 정말 오랜만이거든요. 그래서인지 매일매일 뉴스를 접하면서 느꼈던 것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고 할까요. 요즘은 예전보다 더 여성이 고통받는 사건들이 신경 쓰여서 여성의 슬픔과 고통에 공감하는 내용이 많아졌네요. 사회의 어둠을 들여다보고 거기서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일만큼은 계속 하고 싶습니다." (작가 인터뷰 중)


책의 앞부분에는 사위가 바람 피는 현장을 목격한 장모라든가 남자친구의 폭력에 시달리는 여성들의 이야기 등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많은 반면, 뒷부분에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이야기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결말이 따뜻하거나 반대로 훈훈하게 시작했는데 뒷맛이 씁쓸한 이야기가 많다. 개인적으로 마지막 단편인 <산을 내려가는 여행 역마다 꽃이 피어나네>를 읽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집안에서 공공연한 차별을 당하며 자란 주인공에게 막대한 유산을 몰래 남기고 떠난 할아버지는 좋은 사람일까 나쁜 사람일까. 답이 쉽게 안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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겅클
스티븐 롤리 지음, 최정수 옮김 / 이봄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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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캘리포니아주 팜스프링스에서 사는 패트릭 오하라는 전성기를 지난 배우다. 한때는 인기 TV 드라마에 출연하며 많은 사랑을 받고 골든 글로브 상을 받을 정도로 연기력도 인정 받았지만, 어떤 사건을 겪은 이후 연기를 그만두고 자택에서 은둔하는 중이다. 그런 패트릭에게 어느 날 전화 한 통이 걸려 온다. 패트릭의 오랜 친구이자 패트릭의 남동생 그레그의 아내인 세라가 투병 끝에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레그와 세라에게는 아홉 살 난 딸 메이지와 여섯 살 난 아들 그랜트가 있는데, 그레그가 중독 치료를 위해 시설에 들어가게 되면서 두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게 된다. 그렇다면 혼자 사는 삼촌이 나설 수 밖에.


그렇게 시작된 패트릭과 두 조카의 일상은 '천방지축 어리둥절 빙글빙글 돌아가는 OO의 하루'(로 시작하는 유명한 애니메이션 오프닝 노래 가사) 그 자체다. 패트릭은 스마트폰과 유튜브, 틱톡 없이는 못 사는 아이들을 외계인처럼 본다. 메이지와 그랜트는 삼 시 세 끼 대신 브런치와 러퍼(런치와 서퍼의 합성어)를 먹는 삼촌을 이상하게 여긴다. 패트릭은 엄마를 여의고 아빠와 떨어져 있는데도 우는 소리 안 하고 씩씩하게 살아가는 아이들을 대견하게 생각한다. 메이지와 그랜트는 자신들 앞에선 수다스럽고 허술한 삼촌이 사실은 엄청 유명한 배우였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란다.


스티븐 롤리의 <겅클>은 결혼도 안 하고 아이도 없는 삼촌이 갑자기 두 조카를 맡아서 키우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가족 시트콤 느낌의 소설이다. 주인공인 삼촌 패트릭 오하라가 워낙 독설을 잘 하고 재치 있는 캐릭터라서 시종일관 유머러스한 분위기가 이어지지만, 소설의 중심에는 패트릭의 오랜 친구이자 두 조카의 엄마인 세라의 죽음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이 있다. 패트릭은 두 조카와 생활하면서 세라와의 추억을 회상하기도 하고, 두 아이에게 남아 있는 세라의 흔적을 보면서 삶의 의미를 되새기기도 한다. 동시에 패트릭 자신을 세상과 단절하게 만든 그 사건을 극복할 힘을 얻고, 새로운 삶을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소설의 제목인 '겅클'은 남성 성소수자를 뜻하는 '게이(GAY)'와 삼촌을 뜻하는 '엉클(UNCLE)'의 합성어다. 패트릭이 조카들과 있을 때는 게이로서의 정체성이 크게 드러나지 않아서 주인공을 게이로 설정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기도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소설 중반에 패트릭에게 새로운 인연이 나타나고 두 사람의 로맨스가 시작되어 주인공을 게이로 설정할 필요가 있었다는 걸 강하게 납득했다(ㅎㅎ). 이 소설은 <미나리>, <존 윅> 등의 제작사 라이언스게이트에서 판권을 사서 영화화가 확정된 상태라고 한다. 어떤 배우가 패트릭(과 그의 새로운 인연)을 연기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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