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환담
윤채근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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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정세랑 작가의 신작 장편소설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를 읽으면서 다시 한 번 느꼈지만, 나는 정말 역사 미스터리 소설을 좋아한다. 그냥 역사 소설도 좋고 그냥 미스터리 소설도 좋지만, 스스로 창작한 허구의 세계가 아니라 모두가 알고 있는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다양한 가정을 해보고 참신한 가설을 제기하고 이를 미스터리라는 장르적인 방식으로 그럴 듯하게 풀어내는 역사 미스터리의 접근법이 나에게는 무척이나 매력적이고 흥미롭다. 


윤채근의 <고전환담>을 읽으며 실제 역사에 기반해 재구성한 이야기가 얼마나 재미있는지 다시 한 번 느꼈다. 저자는 단국대학교 한문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2017년부터 <신동아>에 한국형 팩션을 연재해왔다. 저자는 판타지나 미스터리 등 다양한 소설 기법을 동원해 우리 역사 속 인물이나 사건을 극화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왔다. 책에는 총 28편의 소설이 실려 있고, 각 소설의 끝에는 창작의 토대로 삼은 역사적 사실과 관련 문헌이 언급되어 있다. 


첫 번째 소설 <왜장 와카자키의 고백>부터 흥미진진하다. 왜장 와카자키(야스하루)는 임진왜란 때 한산도에서 이순신 장군과 맞붙었던 왜군의 우두머리이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하다. 와카자키는 자신의 적장이었던 이순신에 대한 존경과 증오가 혼재된 독특한 회고담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저자는 이에 착안해 와카자키의 목소리로 이순신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토로하고 이를 통해 임진왜란의 진상을 알리는 참신한 방식과 내용의 팩션을 창조했다.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소설은 정여립 모반 사건을 다룬 <우리들의 위험한 이웃>이다. 정여립 모반 사건은 조선 선조 때 정여립이 역성혁명을 주장했다는 빌미로 동인 세력을 몰아내고 서인 세력이 조정을 장악한 사건이다. 이는 조선 시대의 붕당 정치에 대해 배웠다면 누구나 아는 사건인데, 저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정여립 모반 사건의 숨은 주역으로 일컬어지는 길삼봉이라는 협객이 실은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이라면...? 


엉뚱한 상상 같지만, 실제로 허균은 젊은 시절 서자 출신 건달패들과 즐겨 어울렸다는 기록이 있다. 정여립 모반 사건의 빌미가 된 모반 사건의 실제 주동자는 길삼봉이고 정여립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는 설도 상당히 널리 퍼져 있다. <사랑이라면 도톤보리 운하에서>는 18세기 조선 통신사로 일본에 간 화가 최북이 오사카의 유녀와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의 소설이다. 허구이지만 조선의 풍속화와 일본의 우키요에가 서로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았을지 상상해 보는 일은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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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서블 - 일상 기록을 통해 꿈을 현실로 만드는 법
김익한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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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다이어리도 노트도 열심히 안 써서 내년에 쓸 다이어리를 장만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생각이 바뀌었다. 베스트셀러 <거인의 노트>를 쓴 대한민국 1호 기록학자 김익한의 신작 <파서블>에 따르면 "기록을 한다고 모두가 성공하는 건 아니지만, 역으로 성공한 사람 중 기록을 하지 않는 이는 없다." 열심히 기록해도 성공하지 못한 사람과 기록을 통해 꿈을 찾고 성공을 거머쥔 사람의 차이는 '생각'과 '실행'이다. 


기록 전문가로서 저자는 수년에 걸쳐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그들 대부분이 각자 나름의 방법으로 기록을 일상화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중에 성공한 사람은 일부에 그쳤다. 원인을 분석한 결과, 저자는 흔히들 쓰는 연간 기록으로는 기록의 본질 중 하나인 '실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1년 뒤의 나를 상상하는 건 막막하지만 1달 후의 나는 상상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기록은 연 단위가 아니라 월 단위로 이루어져야 한다. 


기록을 잘 못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쓰고 싶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쓰고 싶은 것이 없다는 건 평소에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일례로 똑같이 길을 걸어도 어떤 사람은 그냥 걷는 반면, 어떤 사람은 주변에 못 보던 가게가 생겼는지, 사람들 옷차림이 어떤지, 꽃이나 나무가 피었는지 또는 졌는지 등을 살피면서 걷는다. 후자처럼 자신의 관심사를 알고 일상생활에서 그것을 꾸준히 의식하며 사는 사람은 하루가 다르고 한 달이 다르고 일 년이 다르고 인생이 다르다. 


매일매일이 똑같아서 기록할 필요를 못 느낀다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일수록 기록이 필요하다. 기록이란 '과거와 오늘의 차이를 감각적으로 구분하는' 행위다. 매일 출퇴근하고 등하교 하는 평범한 일상일지라도 어제와 오늘 먹은 반찬이 다르고, 어제와 오늘 본 영화나 드라마가 다를 것이다. 이렇게 어제와 다른 오늘을 찾아내고, 그중 유난히 자신의 마음을 잡아끄는 대상이나 사건이 있다면 그것에 대해 기록하면 된다. 


책에는 이 책의 핵심인 '한 달 일상 기록'의 구체적인 방법이 자세히 나온다. 이 중에 인상적이었던 점은 일주일 동안 열심히 기록한 내용을 한 주의 마지막 날에 돌아보면서 지난 일주일을 회상하라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마치 영화를 보듯 지난 시간을 돌려보면 생각력을 키울 수 있을 뿐 아니라 일주일을 열심히 산 자기 자신이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어 자기효능감이 높아진다. 내년, 아니 당장 이번 달부터 이 책에 소개된 기록법을 실천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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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가 1
사노 유토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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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가'는 차이나타운처럼 생긴 화려하고 복잡한 거리다. 바로 이 거리에서 '극락가 해결 사무소'를 운영하는 타오와 알마는 표면적으로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 트러블 슈터(문제 해결사)로 일하지만, 이면에선 '마가(禍)'가 관련된 괴기 사건을 해결하며 살고 있다. 어느 날 평소대로 사무소 근처 중국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던 타오와 알마는 음식점 주인의 딸 야야로부터 요즘 들어 행방불명자가 늘고 있고 자주 길바닥에서 고양이나 동물 변사체가 발견된다는 소문을 듣는다. 


발견된 변사체들은 전부 커다랗게 물린 흔적이 있고, 피가 빠져서 바짝 말라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리고 어김없이 그 근처에서 사람이 사라졌다. 얼마 후 알마는 거리를 걷다가 행방불명된 친구 유키를 찾는 소년 루카를 만난다. 루카로부터 유키가 사라졌을 때 역시 길바닥에 까마귀 시체가 있었고 그 부근에 유키의 모자가 떨어져 있었다는 말을 들은 알마는 보통 사건이 아니며 어쩌면 '마가(禍)'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확신한다. 


사노 유토의 만화 <극락가>는 요괴와 액션, 스릴러와 미스터리가 결합된 작품이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해결 사무소 같지만 사실은 사람을 습격하고 먹어 치우는 이형의 존재인 마가를 다룬다는 점이 흥미를 자아낸다. 무엇보다도 쾌활하고 엉뚱하지만 그 누구보다 마가를 소탕하는 일에 진심인 알마, 그리고 겉모습은 시크하고 도도하지만 사건 앞에선 그 누구보다 열혈인 타오의 조합이 좋다. (<원피스>의 캐릭터들에 비유하면 알마=루피, 타오=조로+상디 같은 느낌이랄까.) 


1권에는 에피소드 두 편이 실려 있는데, 하나는 실종된 친구를 찾는 소년의 이야기이고, 다른 한 편은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청년의 이야기이다. 두 사람 모두 가족으로부터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학교나 사회에서도 인정을 받지 못했는데, 그런 두 사람을 유일하게 보살펴주고 인정해 준 사람을 잃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런 두 사람 주변에 마가가 나타난 걸 보면, 실은 마가가 고독과 분노, 절망과 죄책감을 먹고 사는 괴물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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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3-12-05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치님, 올해의 서재의 달인 축하드립니다.
따뜻한 연말 좋은 시간 보내세요.^^
 
결계사 완전판 11
타나베 옐로우 지음, 김동욱 옮김 / 대원씨아이(만화)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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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모리는 대대로 위대한 결계사를 배출해온 스미무라 가문의 후계자로 이웃에 사는 결계사 라이벌 집안인 유키무라 가문의 딸 토키네와 함께 최고의 결계사가 되기 위한 수련 중이다. 10권에서 무녀 사키로부터 어둠의 회합 내부와 각지의 신우지에서 참혹한 사건이 일어날 거라는 예언을 들은 후, 카라스모리의 결계사들은 예언이 이루어질 경우를 대비해 경계 태세를 강화한다. 토키네와 카게미야, 아키츠는 학교 주변을 감시한다. 


그런데 갑자기 상공에 인간도 아니고 요괴도 아닌 존재가 나타나고, 토키네와 카게미야, 아키츠는 존재의 정체가 토지신임을 간파한다. 마침 직접 만든 케이크(참고로 요시모리의 취미는 디저트 만들기이다)를 주려고 학교에 왔던 요시모리가 결계를 하려고 하는데, 그런 요시모리를 카게미야와 아키츠가 말린다. 이유인즉슨 아무리 위급한 상황이라도 (토지의 풍작을 결정하는) 토지신을 죽이는 것은 중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학교가 위험에 처하는 상황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던 토키네가 토지신과의 직접 대결에 나서고, 요시모리는 자신이 좋아하는 토키네가 위험해지는 것을 볼 수 없어 나서려고 한다. 그런 요시모리에게 카게미야와 아키츠가 토키네의 실력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냐고 말하고, 그 말에 설득된 요시모리는 마음을 바꾼다. 이때 요시모리가 내린 결정이 요시모리와 토키네의 운명을 가르는데, 과연 이후에 어떤 일이 펼쳐질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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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이야기
줌파 라히리 지음, 이승수 옮김 / 마음산책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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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이야기>는 인도계 작가 줌파 라히리가 4년 만에 선보인 신작 소설집이다. 줌파 라히리의 거의 모든 소설과 산문을 읽었기에 이번 신작 소설집을 읽기 전 기대가 매우 컸다. 게다가 줌파 라히리는 영어로 쓴 작품(<축복받은 집>)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후 이제는 이탈리아어를 공부하며 이탈리아어로 쓴 작품을 발표하는 작가이기에, 사용하는 언어의 변화가 작품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지 궁금하기도 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작가가 경험하고 관찰한 세계가 더 넓게 연결되고 확장된 만큼 작품이 담고 있는 세계도 더욱 깊어지고 풍성해졌다. 


<로마 이야기>는 총 아홉 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거의 모든 소설에 저자처럼 다른 나라에 살다가 로마에 온 사람, 이탈리아의 원주민인 백인들과 피부색이 다른 사람이 등장한다. <경계>의 소녀는 로마 외곽에 살면서 부모님을 도와 작은 펜션에서 일한다. 소녀는 원래 로마 도심에서 살았는데, 어느 날 아버지가 외국인을 혐오하는 청년들에게 폭력을 당하고 부상을 입는 바람에 쫓겨나듯 로마 외곽으로 왔다. <재회>의 교수는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러 로마에 왔다가 식당 주인의 딸로 짐작되는 어린 소녀에게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모욕을 당한다. <P의 파티>의 남자는 파티에서 만난 외국인 부인에게 호감을 느끼고 그를 창작의 원동력으로 삼는다. 


<밝은 집>의 남자는 난민 신세에서 벗어나 자수성가하기 위해 열심히 일한 끝에 임대 아파트를 얻지만, 이웃들의 배척과 혐오를 견디다 못해 아내와 아이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낸다. <계단>과 <택배 수취>, <쪽지> 등도 유구한 역사를 지닌 국제도시 로마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외국인, 유색인종에 대한 교묘하고 때로는 노골적인 배제와 차별, 혐오와 폭력을 묘사한다. <단테 알리기에리>는 그런 로마에서 살기를 스스로 택한 여성의 이야기를 통해 어떤 여성들에게는 외국인으로 사는 어려움이 (전통적인 가치관을 따르는) 여성으로 사는 어려움보다 견디기 낫다는 걸 보여준다. 


이 책을 읽다가 문득 이십여 년 전 읽었던 일본 여성 작가들의 책들이 떠올랐다. 에쿠니 가오리의 <냉정과 열정 사이>, 시오노 나나미의 <이탈리아에서 보내온 편지> 등은 모두 이탈리아에 사는 일본(아시아계) 여성의 삶을 그린다. 하지만 이탈리아에 사는 아시아계 여성 작가인 줌파 라히리가 쓴 이 책과는 다르게 외국인, 유색인종에 대한 배제나 차별의 정서는 느끼지 못했다. 그들이 무감했던 걸까, 줌파 라히리가 그들에 비해 훨씬 더 예민하고 솔직한 걸까. 아니면 그동안 세상이 더 안 좋게 변한 걸까. 생존은 더 어려워지고 혐오는 더 쉬워지는 방향으로. 이런 생각들로 연결해 주고 확장시켜주는 소설과의 만남이 고맙고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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