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이야기
줌파 라히리 지음, 이승수 옮김 / 마음산책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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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이야기>는 인도계 작가 줌파 라히리가 4년 만에 선보인 신작 소설집이다. 줌파 라히리의 거의 모든 소설과 산문을 읽었기에 이번 신작 소설집을 읽기 전 기대가 매우 컸다. 게다가 줌파 라히리는 영어로 쓴 작품(<축복받은 집>)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후 이제는 이탈리아어를 공부하며 이탈리아어로 쓴 작품을 발표하는 작가이기에, 사용하는 언어의 변화가 작품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지 궁금하기도 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작가가 경험하고 관찰한 세계가 더 넓게 연결되고 확장된 만큼 작품이 담고 있는 세계도 더욱 깊어지고 풍성해졌다. 


<로마 이야기>는 총 아홉 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거의 모든 소설에 저자처럼 다른 나라에 살다가 로마에 온 사람, 이탈리아의 원주민인 백인들과 피부색이 다른 사람이 등장한다. <경계>의 소녀는 로마 외곽에 살면서 부모님을 도와 작은 펜션에서 일한다. 소녀는 원래 로마 도심에서 살았는데, 어느 날 아버지가 외국인을 혐오하는 청년들에게 폭력을 당하고 부상을 입는 바람에 쫓겨나듯 로마 외곽으로 왔다. <재회>의 교수는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러 로마에 왔다가 식당 주인의 딸로 짐작되는 어린 소녀에게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모욕을 당한다. <P의 파티>의 남자는 파티에서 만난 외국인 부인에게 호감을 느끼고 그를 창작의 원동력으로 삼는다. 


<밝은 집>의 남자는 난민 신세에서 벗어나 자수성가하기 위해 열심히 일한 끝에 임대 아파트를 얻지만, 이웃들의 배척과 혐오를 견디다 못해 아내와 아이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낸다. <계단>과 <택배 수취>, <쪽지> 등도 유구한 역사를 지닌 국제도시 로마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외국인, 유색인종에 대한 교묘하고 때로는 노골적인 배제와 차별, 혐오와 폭력을 묘사한다. <단테 알리기에리>는 그런 로마에서 살기를 스스로 택한 여성의 이야기를 통해 어떤 여성들에게는 외국인으로 사는 어려움이 (전통적인 가치관을 따르는) 여성으로 사는 어려움보다 견디기 낫다는 걸 보여준다. 


이 책을 읽다가 문득 이십여 년 전 읽었던 일본 여성 작가들의 책들이 떠올랐다. 에쿠니 가오리의 <냉정과 열정 사이>, 시오노 나나미의 <이탈리아에서 보내온 편지> 등은 모두 이탈리아에 사는 일본(아시아계) 여성의 삶을 그린다. 하지만 이탈리아에 사는 아시아계 여성 작가인 줌파 라히리가 쓴 이 책과는 다르게 외국인, 유색인종에 대한 배제나 차별의 정서는 느끼지 못했다. 그들이 무감했던 걸까, 줌파 라히리가 그들에 비해 훨씬 더 예민하고 솔직한 걸까. 아니면 그동안 세상이 더 안 좋게 변한 걸까. 생존은 더 어려워지고 혐오는 더 쉬워지는 방향으로. 이런 생각들로 연결해 주고 확장시켜주는 소설과의 만남이 고맙고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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