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못 드는 밤의 궁궐 기담 궁궐 기담
현찬양 지음 / 엘릭시르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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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에서 사는 사람은 왕족만이 아니다. 적어도 조선 시대에는 왕족을 보필하는 수많은 하인들도 왕족과 함께 궁에서 살았다. 그중에는 어릴 때 궁에 들어와 궁중 여인들의 시중과 잡일을 도맡아 하는 궁녀들도 있다. 현찬양 작가의 소설 <잠 못 드는 밤의 궁궐 기담>은 바로 이런 궁녀들 사이에 오가는 기담으로부터 출발한다.


왕비가 머무는 교태전 소속의 궁녀 백희는 같은 궁녀인 노아에게 나이가 몇인데 세숫물 하나 제대로 못 받아 온다고 지청구를 듣는다. 그럴 만한 게 백희는 원래 남부럽지 않은 가문의 딸이었는데, 오빠가 알 수 없는 병에 걸리면서 부모가 가산을 탕진하고 종국에는 집안 전체가 몰락하면서 고아 신세가 되는 바람에 궁녀가 되었다. 반면 노아는 고려 시대부터 궁녀로 살아서 말투가 할머니 같다는 뒷말을 듣기는 해도 궁녀 중에 가장 왕실 법도를 잘 알고 몸가짐도 바르다.


그런 백희와 노아에게 어느 날 반갑지만은 않은 손님 한 명이 찾아온다. 그는 바로 교태전의 주인인 중전의 딸 경안궁주다. 올해로 열세 살인 경안궁주는 궁녀들 사이에서 도는, 경복궁 자리가 원래 도깨비 집터였고 그래서 밤마다 귀신이 나타난다는 소문에 대해 질문한다. 백희와 노아는 조선의 기틀인 유교 사상에 반하는 괴력난신의 이야기를 어찌 궁주님 앞에서 할 수 있겠느냐며 거부하지만, 경안궁주는 더욱더 강하게 궁녀들을 조른다.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가 점점 더 해괴한 사건들을 부르는데...


이 소설에서 좋았던 점은 단순한 무서운 이야기가 아니라, 이야기 속에 어릴 때부터 죽을 때까지 궁 안에 갇혀 살아야 했던 궁중 여인들의 희로애락이 담겨 있다는 점이다. 궁녀들만 해도 일견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누구는 고아가 되어 살 길이 막막해 궁녀가 되었는가 하면, 누구는 양갓집 규수로서 가문을 위해 궁녀가 되었다. 궁주들 또한 왕의 총애를 받는지 안 받는지에 따라 궁중 내의 입지가 전혀 다르다. 이러한 차이와 차별로 인한 애환을 기담이라는 형태로 승화한 에피소드들이 하나같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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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여자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4
이서수 지음 / 현대문학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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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생인 '나'는 어린 시절 내내 마른 몸이 콤플렉스였다. 사람들은 몸이 말랐으니 힘도 약할 거라고 생각하고 '나'를 함부로 대했으며, 자연히 '나'는 누구와 있든 주눅 들고 의기소침한 성격이 되었다. 나이가 들면서 자신의 마른 몸에 대한 콤플렉스는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더 심화되고 분화되었다. 또래보다 키가 작은 것도, 제2차 성징이 늦은 것도, 가슴이 작은 것도, 성 경험이 늦되고 적은 것도 자신의 책임, 자신의 죄처럼 느껴졌다. 문제는 그런 저자에게 어느 누구도 그런 느낌, 그런 생각이 잘못이라고 말해주지 않은 것이다. '나'의 어머니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은 저자의 불안과 열등감을 점점 더 강화할 뿐이다.


이서수 작가의 <몸과 여자들>은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에 관한 소설이다. 이서수 작가의 작품으로는 <젊은 근희의 행진>을 읽어본 것이 유일한데, 아직 읽지 않은 <헬프 미 시스터>도 그렇고 주로 여성의 '노동'에 관한 소설을 쓰는 작가라는 이미지가 있었기 때문에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에 관한 소설을 쓴 것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소설은 1983년생인 '나'와 1959년생인 '나'의 어머니의 이야기로 구성되는데, 어머니 세대의 수동적이고 폭력적인 성 경험이 딸 세대의 금욕 및 비혼, 비출산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지극히 현실적이고 사실적이라고 느꼈다. 저자가 들려줄 또 다른 여성들의 이야기가 궁금하고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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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처럼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7
임솔아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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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나가 사라진 후 예빈은 예전과 같은 일상을 보내지 못한다. 유나가 어디서 나쁜 일이라도 당했을까 봐 제대로 잠도 못 자고, 한 명이라도 목격자를 확보하기 위해 전단지를 붙이고 인터넷에 글을 올린다. 그러던 어느 날 유나가 천안에서 목격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유나가 사라진 부천에서 천안까지의 거리는 100킬로미터도 넘는다. 예빈은 유나가 그 먼 거리를 혼자서 이동했다는 게 믿기지 않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유나의 마지막 목격자를 찾아 간다. 과연 예빈은 유나를 찾을 수 있을까.


임솔아 작가의 소설 <짐승처럼>의 도입부는 미스터리 스릴러 소설의 시작 부분처럼 읽히지만, 사실 이 도입부에는 반전이 있다. 문제의 실종된 유나는 인간이 아니라 개다. 그것도 자신이 키우던 개가 아니라 남이 키우던 개. 관계가 전혀 없지는 않다. 엄마를 여의고 여동생 채빈과 단둘이 살고 있는 예빈은 별나라는 강아지를 입양해 키우고 있는데, 이 별나의 엄마가 바로 유나다. 자식들을 전부 입양 보내고 자신은 임시 보호 신세였던 유나가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예빈은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 발 벗고 유나를 찾는 일에 나섰다. 그때마다 예빈과 함께 행동하는 인물들이 소장과 간호사이다.


예빈이 유나의 실종을 나 몰라라 하지 않는 이유는 예빈의 가족사와 관련이 있다. 예빈과 채빈은 오랫동안 자신들이 친자매라는 사실을 모르고 살았는데, 친자매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다시 가족이 되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었다. 예빈이 기억하는 채빈은 어린 시절 내내 영문을 알 수 없는 행동으로 엄마와 자신을 괴롭히고 종국에는 가출로 가족을 위기에 빠뜨린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빈은 별나의 엄마인 유나를 보는 마음이 애틋하고, 유나의 딸인 별나를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크다.


예빈은 피가 섞인 자매이고 오랫동안 한 집에서 살았지만 채빈의 속을 모르겠고 굳이 알려고 하지도 않는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실종된 유나를 찾는 과정에서 예빈은 자꾸만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고, 기억 속에 묻어두고 싶었던 진실을 알고 싶어진다. 그 결과 예빈이 마주하게 되는 진실이 아주 놀라운데, 다시 생각해 보니 도입부만이 아니라 결말 부분도 미스터리 스릴러 소설과 비슷한 것 같다. 물론 원래 모든 인간의 마음이 풀기 힘든 미스터리이고, 모든 인생이 죽음을 피해 달려가는 스릴러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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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아는 사람 - 유진목의 작은 여행
유진목 지음 / 난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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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나는 여행이라는 행위보다 여행이라는 개념 자체를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팬데믹이 완화된 이후 많은 사람들이 여러 나라로 여행을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부러움을 느끼면서도 좀처럼 실행으로 옮기지 못하는 걸 보면 그렇다. 가보고 싶지만 가볼 엄두는 못 내는 여행지 중 하나가 베트남이다. 주변에 베트남 다녀온 사람도 많고, 유튜브나 팟캐스트에서 베트남 여행 이야기를 보거나 듣는 것도 좋아하는데 왜 여태 못 가고 있는 걸까. 그런 나의 등을 살짝 밀어준 책이 시인이자 작가, 영화 감독인 유진목의 베트남 여행 산문집 <슬픔을 아는 사람>이다.


2022년 여름. 6년 간 이어진 소송을 마친 저자는 수면 장애와 식욕, 성욕 감퇴라는 증세를 얻었다. 잠도 못 자고 먹지도 못하는 날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저자는 베트남 길거리에서 파는 분짜 한 그릇만 먹으면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것 같다는 영감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길로 베트남 하노이로 떠났다. 여행 초반에는 호텔에서 쉬다가 자다가 허기가 지면 밖으로 나가서 분짜 한 그릇 먹고 커피 마시고 망고를 사 먹는 나날을 보냈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니 조금씩 기운이 차올라 잘 알지도 못하는 동네로 짧은 여행을 다녀올 정도가 되었다. 어디든 너무 덥고 습했지만, 한국에서 무력하게 보냈던 나날들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렇게 저자는 그 해 여름에만 세 번 베트남을 여행했다. 한 번에 열흘 혹은 2주 씩 다녀왔으니 다 합치면 제법 긴 기간이다. 그렇게 베트남에 푹 빠졌던 이유에 대해 저자는 '무엇-없음'을 든다. 할 일-없음, 아는 사람-없음, 신경 쓸 것-없음, 불안-없음, 걱정-없음... 그런 시간을 보내고 나니 없음이 곧 자유(free)이며 자유가 곧 없음인 이유를 알 듯했다. 이 책을 읽으니 여태 내가 여행을 못하고 있는 것은 계획-없음 상태를 못 견디는 파워J 성향 때문인가 싶고, 그런 상태를 견디는 연습을 하기 위해서라도 저자처럼, 저자와 비슷한 여행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가 될까. 언제든 언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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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 좋은 말 하기 싫은 말 - 더 나은 어른이 되기 위한 기록
임진아 지음 / 뉘앙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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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좋은 인간관계의 원흉은 '말'인 경우가 아주 많다. 안 해도 되는 말을 굳이 해서 생기는 다툼이 있는가 하면, 반드시 그 말을 했어야 하는 상황에 그 말을 안 해서 생기는 갈등과 오해도 있다. 그런 말, 말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책을 읽었다. <빵 고르듯 살고 싶다>, <오늘의 단어>, <읽는 생활> 등 다수의 책을 쓰고 그린 작가이자 삽화가인 임진아의 에세이집 <듣기 좋은 말 하기 싫은 말>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그동안 살면서 자신이 들었던 듣기 좋은 말과 자신은 남에게 하고 싶지 않은 말에 대해 소개한다. 책에 좋은 말이 많이 나오는데, 웬일인지 기억에 남는 말은 대부분 안 좋은 말이다. 저자의 가정 형편이 유복하지 않다는 이유로 가입을 반대하고 인사도 받아주지 않았던 고등학교 미술반 선생님에 관한 일화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최근에 모 회사 대표가 자사의 아이돌 그룹 멤버들의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다는 의혹이 불거지면서 논란이 있었는데, 자신보다 훨씬 나이도 어리고 약자인 위치에 놓인 사람을 괴롭히는 못난 어른들이 생각보다 많구나 하는 생각에 괴로웠다.


프리랜서가 되기 전, 직장에 다닐 때 겪은 일들도 여럿 나온다. 직장이 좋은 말이 오가는 장소인 경우는 드물지만, 저자가 다닌 직장은 유독 경쟁과 비난이 심했다. 한 번은 저자가 업무상 실수를 해서 회사는 물론 클라이언트에게도 큰 손해를 입힐 뻔 했는데, 결국 저자가 밤낮 없이 일해서 손해를 막고 기대했던 것보다 좋은 성과를 이루었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잘했다, 수고했다는 말 한 마디 해주는 사람이 없었던 반면, 회사 외부 사람들은 저자의 노력과 성취를 인정해주고 칭찬해줬다. 이런 기억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결국 퇴사라는 결말로 이어진 것 아닐까.


내가 책에 나온 좋은 말보다 안 좋은 말을 더 많이 기억하는 걸 보면, 좋은 말보다 안 좋은 말이 더 많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 게 확실하다. 선의로 한 말도 상대는 악의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말의 나쁜 힘이라면, 자신이 별 뜻 없이 무심히 한 말이 누군가에게는 엄청난 감흥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은 말의 좋은 힘이다. 말에는 힘이 있다는 걸 상기하고, 나쁜 힘보다는 좋은 힘을 더 많이 활용하는 사람이 되려면 평소에 좋은 말을 많이 듣고, 안 좋은 말을 삼가는 연습을 많이 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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