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 - 신화·거짓말·유토피아
자미라 엘 우아실.프리데만 카릭 지음, 김현정 옮김 / 원더박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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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어디에나 있다. 정치도 종교도, 문학도 과학도, 예술도 스포츠도, 본질적으로는 이야기이거나 이야기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구체적으로 인간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까. 인간들은 어떤 이야기를 선호할까. 궁금하다면 독일의 저널리스트 자미라 엘 우아실과 프리데만 카릭이 공저한 책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를 읽어보길 권한다.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 힘을 가진다. 하나는 사람들을 변화시키거나 세상을 움직이는 동인이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을 선동하거나 불안 또는 혐오를 조장하는 것이다. 사실 이 두 가지 힘은 방향만 다를 뿐 크게 다르지 않다. 성경의 문장들이 기독교인들에게는 치유와 평화의 메시지로 읽히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인간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동물과 자원의 착취를 합리화하는 파괴의 메시지로 읽히는 것처럼, 어떤 사람의 '변화'가 누군가에게는 '선동'으로 보이고, 어떤 사람의 '동인'이 누군가에게는 '조장'으로 보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이야기의 힘을 이해하고 그것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최초로 시도한 사람은 아마도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일 것이다. 조지프 캠벨은 1945년에 출간된 자신의 저서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에서 수천 개에 이르는 전 세계 신화와 전설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패턴을 정리했다. 이 책의 저자들은 이를 다시 6가지로 정리한다. 책에 따르면 사람들은 경쟁, 탐색, 변신, 복수, 약자, 러브스토리 등의 코드가 들어 있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유난히 인기 있는 영화,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을 떠올려 보면 이러한 코드가 하나도 빠짐 없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대표적인 예 :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목은 인간이 존재의 우연성을 견디느니 차라리 잘못된 설명을 믿는 편을 택한다는 것이다. 만사를 통제할 수 없는 인간은 그저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들의 노리개에 불과하다. 그러나 스스로 아무것도 통제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너무나 무력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를 운명의 플레이어라고 '믿고' 믿음을 통해 자신에게 권능을 부여한다. 대표적인 예가 종교인데, 나는 사랑도 그렇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이 만나 서로 사랑에 빠지는 건 무수히 많은 우연이 겹쳐서 일어난 사건이자 일종의 오해 또는 착각인데,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으니까 운명이니 인연이니 같은 말로 당위성을 부여하는 것 아닐까.


이야기의 다양한 형태 중 하나인 문학의 힘에 대한 설명도 흥미로웠다. 프랑스에서 문학이 발전한 시기는 공교롭게도 프랑스에서 세계 최초로 인권 선언이 발표되고 민주주의가 급속도로 발전한 때와 일치한다. 저자들은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에 대해 당시 프랑스 국민들이 수많은 문학 작품을 열심히 읽으며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이 발달하고 인권 의식이 향상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거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문학의 위기와 독서 인구의 감소는 곧 인권의 위기, 민주주의의 후퇴로 연결되는 걸까. 마음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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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이름들 - 제3회 박상륭상 수상작
안윤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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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절 가깝게 지냈으나 이제는 연락이 끊어져 소재도 알 수 없고 얼굴도 가물가물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존재는 이름으로만 남아서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만 보아도 애틋한 감정이 든다. 안윤의 소설 <남겨진 사람들>은 바로 그런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주인공 '윤'은 2006년 여름부터 2008년 여름까지 2년 간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슈케크에서 어학연수를 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 8년이 지난 현재, 윤에게 그 시절과 관련해서 남은 것이라고는 당시 신세 진 하숙집 주인 라리사의 이름 정도다. 그런 윤에게 어느 날 뜻밖의 연락이 온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라리사가 자신의 수양딸 나지라의 공책을 윤에게 유품으로 남겼다는 것이다. 공책을 전달받은 윤은 번역을 시작한다. 공책에는 아내가 식물인간인 부부의 입주 간병인으로 일한 나지라의 이야기가 적혀 있다. 라리사는 왜 이 노트를 윤에게 주었을까. 윤은 라리사와 나지라의 마음을 이해하려 애쓰며 계속해서 읽고 쓴다. 


이 소설에서 인상적인 점은 라리사가 윤에게 준 나지라의 공책에 적힌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식물인간인 아내 카탸와 그의 남편 쿠르만, 이들을 돌보는 입주 간병인 나지라의 관계가 실제로 어떠했는지, 쿠르만과 나지라가 서로 좋아했는지 혹은 카탸가 그들을 질투했는지 아니면 격려했는지 등은 오로지 읽는 사람의 관점과 판단에 달려 있다. 윤은 공책에 적힌 내용의 진위 여부를 의심하면서도 번역을 멈추지 않는다. 진실을 알기 위한 번역 행위는 결국 윤에게 진실과 무관한 '어떤 효과'를 남긴다. 


윤은 라리사가 왜 이런 이야기를 자신에게 전하고자 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라리사가 윤이 글을 쓰고 싶다고 했던 것을 잊지 않았고, 라리사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사람의 가장 찬란했던 시절을 윤에게 전하고 싶어 했다는 것만은 가슴 깊이 알게 된다. 라리사에게 윤이 어떤 존재였는지, 수양딸의 유품을 남길 만큼 애틋했는지 아니면 그저 마지막이라서 기억에 더 남은 외국인 하숙생이었는지도 영영 알 길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내 이름을 안다는 것, 잊지 않고 기억해 준다는 것은 그 자체로 보통의 인연이 아니다. 결국 이 소설은 인연의 소중함을 이야기하는 소설로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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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일본책 - 서울대 박훈 교수의 전환 시대의 일본론
박훈 지음 / 어크로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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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일본에 관한 책을 열심히 찾아 읽었는데 요즘은 잘 읽지 않는다. 일본 외의 나라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상대적으로 일본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 탓도 있지만, 일본이 여러 면에서 예전 같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과거와 달리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한국보다 앞서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달까(물론 어떤 면에서는 여전히 앞서 있다. 대표적인 예가 성소수자, 장애인 문제...).


이 책의 저자인 서울대 동양사학과 박훈 교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일본을 경시하는 맨 마지막 나라가 돼야 한다."라고 말한다. 일본에 대한 호오와는 별개로, 일본에 대해서는 아무리 공부해도 지나치지 않다고도 덧붙인다. 한국이 경제적, 문화적으로 일본을 많이 따라잡았거나 어떤 면에서는 넘어섰다고 볼 여지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은 여전히 세계 상위권의 경제 대국이며 한국보다 시장의 규모가 두 배 이상 크다. 정치적으로는 국방과 안보 면에 있어서 서로 협력할지 아니면 경계할지를 두고 항상 저울질을 하는 입장에 놓여 있기도 하다.


이 책은 친일 아니면 반일이라는 극단적인 입장에서 벗어나 최대한 객관적, 중립적인 입장에서 일본이라는 나라를 볼 수 있도록 안내한다. 오래 전부터 일본인들을 '왜인'이라고 불렀고 이어령 선생의 <축소지향의 일본인>이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만큼, 한국인들 사이에는 일본 하면 '작다'라는 인상이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일본은 인구 면에서나 영토 면에서나 한국의 2배 이상으로 결코 무시할 만한 상대가 아니다. 일본은 섬나라인 만큼 해양 국가라는 인상이 있지만, 오히려 섬나라이기 때문에 타국을 신경 쓰지 않고 자국에 한정한 사고 방식을 오랫동안 견지해 왔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그래서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를 무신경하게 방류하는 걸까...?). 


일본은 개인주의가 강하고 한국은 공동체주의가 강하다는 고정관념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한다. 많은 연구들에 따르면 일본은 공동체의 성격이 강해서 각 개인이 자기가 속한 집단이나 단체에 의존적이다. 이른바 '오타쿠'도 개인주의라기보다는 공동체로부터의 '허용된 고립'으로 보는 것이 맞다. 저자가 보기에는 일본보다 한국이 "개인주의 혹은 개인이 강한 사회이지만 그것이 만든 것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다."(37쪽)


지금 돌아보면 과거에 식민 지배를 당했던 나라 중 한국만큼 '센' 나라는 없다. 강대국들은 전쟁 책임에는 관심이 많아도 식민 지배 책임에는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들도 가해자였으므로. 따라서 식민지 문제는 한국이 앞장서서 그 세계사적 의미와 정체를 밝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경험을 냉정하게 객관화할 필요가 있다. (127쪽)


타산지석이라는 말도 있듯이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의 역사를 다시 인식할 수도 있다. 저자는 특히 조선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강조한다. 조선의 역사는 너무 대단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스스로 비하할 정도로 대단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알다시피 일본은 역사적으로 줄곧 한반도로부터 선진 문물을 전수받았는데, 어떤 지점에서 입장이 뒤바뀌고 국력의 격차가 생겼는지에 대해 반일 감정을 핑계로 공부하지 않으면 한국만 손해이고, 같은 역사를 되풀이할 위험이 있다. 그런 면에서 앞으로도 박훈 교수가 소개하는 '위험한 일본' 이야기를 계속 따라 가며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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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이야기 - 거리 이름에 담긴 부와 권력, 정체성에 대하여
디어드라 마스크 지음, 연아람 옮김 / 민음사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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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주소에 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 책을 읽고 처음으로 주소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 책을 쓴 디어드라 마스크는 하버드 대학교, 옥스퍼드 대학교. 하버드 로스쿨 등에서 공부한 작가이자 변호사이다. 저자는 미국에서 영국으로 이주하면서 처음으로 주소에 주목했다고 한다. 그가 사는 런던에는 이상해도 너무 이상한 거리 이름이나 도로명이 많았기 때문이다(구체적으로 무엇이 있는지는 책으로 확인하시길). 


주소에는 권력관계가 반영되어 있다. 불과 백여 년 전까지만 해도 선진국 대부분이 주소 체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주소는커녕 지도조차 완성되지 않은 지역이 전 세계 70퍼센트에 달한다. 주소가 없다는 것은 행정력이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고, 교통과 통신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복지 서비스도 받지 못한다. 저자는 인도 콜카타에서 시행 중인 주소 만들어주기 운동을 소개하며 주소의 의미와 효과를 상기시킨다. 


주소에는 또한 해당 국가의 역사와 문화, 언어와 사고 체계가 반영되어 있다. 저자에 따르면 예부터 한자를 사용한 일본과 한국에선 공간을 구획(면) 중심으로 인식하는 지번 주소를 사용하고, 알파벳을 비롯한 표음 문자를 주로 사용한 서양에선 공간을 도로(선) 중심으로 인식하는 도로명 주소를 사용한다. 한국은 2014년부터 지번 주소 대신 도로명 주소를 사용하고 있는데, 여전히 많은 한국인들이 도로명 주소가 아닌 지번 주소로 공간을 인식하는 것이 어쩌면 문자 때문이라니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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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박물관 순례 1 - 선사시대에서 고구려까지 국토박물관 순례 1
유홍준 지음 / 창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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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년간 수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의 뒤를 잇는 새로운 시리즈가 시작되었다. 시리즈의 이름은 <국토박물관 순례>. 저자 유홍준은 '답사기' 시리즈를 통해 수많은 한국의 문화유산과 유적을 소개했지만 아직도 소개하지 못한 것이 많다는 사실에 아쉬움을 느껴서 새로운 시리즈를 시작했다고 한다. 새 시리즈의 테마가 박물관인 것은 '답사기' 제1권의 서문이 "우리나라는 전 국토가 박물관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것과도 연결된다. 


<국토박물관 순례> 시리즈가 '답사기' 시리즈와 다른 점은 박물관을 테마로 삼았다는 점만이 아니다. '답사기' 시리즈가 지역별로 구성되어 있는 반면, <국토박물관 순례> 시리즈는 시대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국토박물관 순례> 1권은 구석기시대,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그리고 삼국시대 중 고구려까지로 구성되어 있다. 2권은 백제, 신라, 비화가야를 다룬다. <국토박물관 순례> 시리즈는 전 4권 또는 5권으로 마무리될 예정이다. 


구석기시대의 답사처로 저자는 연천 전곡리 선사유적지를 골랐다. 한반도에서 발견된 구석기 유적지는 무려 200곳이 넘는다. 그중에서도 연천 전곡리 선사유적지는 세계 고고학 지도를 바꿨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유적지가 발견된 사연이 책에 나오는데 아주 드라마틱하다. 1978년 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한 백인 청년 그레그 보엔이 동두천 미군부대에서 근무하던 중 한국인 애인과 한탄강 유원지에서 데이트를 하다가 주먹도끼를 발견했다고. 발견 당시 상황과 발견 이후의 이야기도 재미있으니 책에서 확인하시길. 


신석기시대의 답사처로 저자가 고른 곳은 부산 영도의 동삼동 패총이다. 저자가 무수히 많은 신석기 유적 가운데 동삼동 패총을 고른 것은 그동안 부산을 '답사기'에 충분히 담지 못했기 때문이다. 책에는 동삼동 패총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한 동삼동패총전시관 외에도 복천박물관, 국립해양박물관, 요산문학관 등 근처에 가볼 만한 박물관이 함께 소개되어 있다. 이 중에 복천동 고분군은 저자가 부산 사람을 만났을 때 이를 아는 분과 모르는 분, 가본 분과 안 가본 분으로 문화적 소양을 평가하는 기준이라고 한다. 영도의 역사도 자세히 나와서 부산 여행 전에 읽으면 좋겠다.


청동기시대의 답사처로 저자가 고른 곳은 울산 언양이다. 언양 대곡천변에는 신석기시대 반구대암각화, 청동기시대 천전리각석, 초기철기시대 유물이 있는 울산대곡박물관 등이 모여 있어 선사시대 답사를 하기에 매우 좋다. 고구려 파트는 2000년 9월 <중앙일보>가 기획한 '압록, 두만강 대탐사단'에 단장으로 참여해 14박 15일간 중국에 있는 고구려, 발해 유적을 다녀온 답사기로 갈음되어 있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 나온 유적지, 박물관 가운데 유일하게 가본 곳이라서 반가웠다. 동북공정 이후 한국인들은 가볼 수 없게 된 곳이라서 애틋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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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11-28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지금 1권 가제본을 읽는 중입니다. 거의 다 읽었기에 2권을 미리 온라인 주문했어요.

키치 2023-11-28 15:41   좋아요 0 | URL
저도 1권 가제본 읽고 바로 2권 주문했습니다. 저와 같으시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