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 어느 페미니스트의 질병 관통기
조한진희(반다) 지음 / 동녘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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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병원 신세를 많이 졌다. 부모님도 나도 나이가 적지 않으니 앞으로 병원 신세 질 일이 더 많아지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여러 가지로 마음이 무겁다 못해 무섭다. 일단 병 걸리면 아플 테니 무섭고, 아픈 걸 고치려면 돈이 많이 들 테니 무섭고, 입원이라도 하게 되면 입원비에 간병인에 돈들 일이 많아질 테니 무섭다. 나도 동생도 비혼이고, 한 명은 밥벌이가 위태로운 비정규직이고 다른 한 명은 프리랜서인데 앞으로 어떡하나. 부모님이 떠나고 우리 둘만 남으면 그때는 또 어떡하나. 걱정이 태산이다.


그러다 보니 이 책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를 읽는 내내 마음이 안 좋았다. 저자 조한진희(반다)는 2000년 여성민우회를 시작으로 여러 사회단체에 몸담은 바 있는 사회단체 활동가이자, 페미니스트이자 비혼주의자이자 채식주의자이자 1인 가구다. 2009년 갑상선암을 진단받은 저자는 병 자체로도 고통받았지만 병에 대한 한국 사회의 태도 때문에 더 고통받았다. 저자는 아픈 몸이 되고서야 비로소 한국 사회가 '건강 중심 사회'임을 알게 되었다. 한국 사회가,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배제하듯이, 건강한 사람이 건강하지 않은 사람의 우위에 서는 사회, 아픈 사람을 실패자, 루저 취급하는 사회임을 알게 되었다.


일단 병원에선 병에 대한 자세한 설명 없이 바로 수술하자고 재촉했다. 의사든 간호사든 누구 하나 저자의 증세와 통증의 원인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주지 않았다. 병이 있다고 주변에 털어놓자 너나 할 것 없이 간섭과 잔소리를 해댔다. 저자가 빈혈로 고생한다고 하자 어떤 사람이 날것의 소 지라(비장)와 생달걀을 매일 먹어보라고 조언했다. 저자에게는 맞지 않는 방법 같아서 거절하자, 그는 "아직 덜 아픈 거 아니냐"라고 했다. 어떤 사람은 저자가 약통을 책상 위에 꺼내놓은 것을 보고 아프다는 걸 전시해놓은 것이냐고 물었다. 병 때문에 일터에서 중요한 업무를 맡지 못하고 승진과 봉급 인상의 기회를 놓치는 건 의문의 여지가 없는 '당연한' 일이다.


저자는 한국 사회가 아픈 이들을 대하는 방식이 여성을 대하는 방식과 흡사하다고 말한다. '나는 알고 너는 모른다'는 전제 아래 시도 때도 없이 가르치려 드는 '맨스플레인'과 비슷하다. 문제 제기를 하면 성찰하거나 사과로 답하는 게 아니라 '네가 예민한 거'라고 충고하거나 근엄하게 공격하는 모습도 비슷하다. 몸이 아프다는 건 대체로 '여성성'에 가까운 속성으로 치부된다. 마르고 연약한 여성이 '보호 본능을 불러일으키는 천생 여자'로 추켜세워지고, 반대로 넉넉하고 건장한 체격의 여성이 '여성답지 않다'고 '희화화'되는 것만 봐도 그렇다. 저자가 만난 어떤 여성은 폐암이 '남성스러운 병'이라며, '여성스럽지 못한' 병에 걸린 자신을 비난했다.


누구도 아픈 것 때문에 아프지 않길 바란다. 거듭 말하지만, 질병의 개인화는 아픈 몸에게 질병의 책임을 전가시켜 죄책감으로 고통받게 만든다. 아울러 질병에 대한 관점 자체가 바뀌지 않으면 아픈 몸이 상처받는 일은 줄어들기 어렵다. 우리 사회가 지금처럼 질병을 몸에서 삭제해야 하는 배설물 같은 존재로만 본다면, 만성질환자를 포함해 질병과 함께 살아가야만 하는 아픈 몸은 불행한 패배자로 살 수밖에 없다. (10~11쪽)


저자는 아픈 사람을 더 고통받게 만드는 한국 사회를 비판하는 한편, 고통을 줄일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모색한다. 그중 하나가 건강두레다. 건강두레는 가족이나 친구, 애인 등으로부터 돌봄 받길 기대하기 힘든 1인 가구나 비혼주의자들이 몸이 아플 때 서로를 보살펴주는 건강 돌봄 모임이다. 계절에 한 번 정도 건강두레 구성원에게 돌봄을 제공하고 나중에 필요할 때 돌봄을 받는 식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집', '보험', '엄마' 노릇을 해준다면, 대기업에 피 같은 돈을 내주거나 가부장제에 굴복하지 않고도 각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아갈 가능성이 더욱 높아질 것이다.


다른 하나는 죽음에 대한 준비다. 저자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죽음에 대해 삶처럼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는 연습을 하라고 충고한다. 저자는 직접 텃밭을 가꾸면서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는 경우가 많다.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은 후 흙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봄이 되면 싹을 틔우는 작물들을 볼 때, 인간의 삶과 죽음이 저와 다르지 않다는 걸 느낀다. 이 밖에도 생각할 거리를 무궁무진하게 던져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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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변화와 환경의 미래 - 어떻게 대응하고 적응할 것인가
이승은.고문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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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여름이 점점 더워지고 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한반도의 여름이 점점 높아지는 것은 다름 아닌 지구온난화의 영향이라고 한다. 이처럼 지구온난화가 점점 더 심해지면 지구 생태계에는 어떤 변화가 생길까. 기후변화로 인해 생길 수 있는 부작용을 예방하기 위해 인류는 어떤 노력을 할 수 있을까. 국내 제일의 환경법 전문가 고문현과 EBS <다큐 프라임> PD 이승은이 공저한 <기후변화와 환경의 미래>에 그 자세한 내용이 나온다.


이 책은 크게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 '인간이 만든 위기, 기후변화'에서는 기후변화의 정의와 기후변화가 불러올 광범위한 비극, 환경의 역습과 위협을 자세히 설명한다. 기후변화는 해수면의 상승, 수자원 공급, 식량 생산, 자연재해, 이상기후 현상 등 지구 환경과 인간 생태계에 큰 영향을 준다. 전 세계에서 폭염과 폭설, 가뭄, 홍수 등 날씨가 극단적으로 변하는 현상이 점점 더 자주 일어나는 것은 기후변화 때문이다. 기후변화로 인해 인간 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된 식량 등 자원 문제는 물론, 질병이나 전염병 등의 사회 문제까지 벌어질 수 있다는 걸 잊어선 안 된다.


제2장 '국제 사회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서는 지구온난화 문제에 대한 논점들과 기후변화에 관한 국제기구와 협약들을 정리한다. 기후변화에 관한 국제사회의 노력 중에 최근 들어 가장 괄목할 만한 성과는 2015년 파리협정 타결이다. 파리협정을 계기로 선진국과 개도국이 같이 참여하여 온실가스의 배출량을 줄이고, 지구 평균 기온의 상승을 산업화 이전 대비 2ºC 이내로 유지하되 온도 상승을 1.5ºC 이하로 억제하기 위한 노력에 국제 사회가 합의했다.


제3장 '어떻게 대응하고 적응할 것인가?'에서는 지구온난화에 대응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안이 제시된다. 기후변화는 단순히 기후변화를 억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기후변화는 에너지 안보, 농업 생산기술의 안보, 생물 다양성 보존, 기후난민 증가에 따른 안보, 수자원 안보, 건강 및 보건 환경의 안보 등과 직결되는 문제다. 기후변화에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는 역시 온실가스 감축이다. 이 책은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기 위해 현재 한국 정부가 실시하고 있는 전략들을 살펴보고, 녹색 친화적 발전과 그린 에너지 개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제4장 '지속가능한 환경과 에너지복지'에서는 지속가능한 발전의 의미를 살펴보고, 환경복지와 에너지복지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현재 독일, 프랑스 등 선진국에서는 기존 에너지 자원과 신-재생 에너지 자원을 각각 어느 정도 비율로 사용할지 정하는 '에너지 믹스' 설계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한국은 화석연료 등의 자원이 없고, 원자력을 포함해도 에너지 자급도가 15퍼센트 이하이기 때문에 가급적 빨리 사회 전체가 에너지 믹스의 중요성을 깨닫고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마지막 제5장 '미래 세대를 위한 길'에서는 미래 세대를 위해 현재 할 수 있는 노력들을 다각도로 살펴본다. 책에는 과학기술의 역할, 녹색 소비를 위한 탄소성적표, 녹색 정책과 녹색 소비생활, 녹색 국토와 녹색 도시, 자원과 에너지 절약 등의 키워드가 설명되어 있다. 기후변화 억제를 위해 개인이 할 수 있는 노력으로는 자동차 대신 대중교통수단 이용하기, 전기 사용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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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이 소금 뿌린 것처럼 아플 때 - 타인의 모욕과 독설, 비난에도 상처받지 않는 관계의 심리학
도리스 볼프 지음, 장혜경 옮김 / 생각의날개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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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게 책을 냈는데, 믿었던 사람이 차가운 반응을 보인다면 어떨까. <심장이 소금 뿌린 것처럼 아플 때>의 저자 도리스 볼프가 바로 그런 경험을 했다. 오래전 첫 책을 낸 저자는 단골인 동네 큰 서점으로 달려갔다. 좋은 책을 썼다는 자부심, 다 읽고 재미있어하겠지 하는 기대에 부풀어 서점 주인에게 책을 건넸다. 그런데 책을 받은 서점 주인은 이렇게 말했다. "실망했어요. 그런 책인 줄 몰랐네." 이 말을 들은 저자는 며칠을 끙끙 앓았다. '이게 무슨 창피야. 내 책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쓰레기야.' 등등의 생각이 머릿속을 채웠다.


나중에 저자는 서점 주인에게 침착하게 어떤 점이 실망스러우냐고 차근차근 물어봤다. 알고 보니 서점 주인은 저자가 기독교 책을 썼을 것이라고 예상해서 그런 말을 했던 것이었다. 당시엔 괴로웠으나, 이 경험은 저자에게 큰 교훈을 주었다. 상대의 발언이나 행동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면, 어느 정도는 스스로 허락한 부분도 있다. 상대가 돌을 던졌을 때, 돌을 던진 건 상대의 잘못이지만 그 돌을 피하지 않은 건 자신의 잘못이다. 상대가 돌을 던졌을 때 피하는 용기를 배우고, 피하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 이 책의 목표다.


이 책은 크게 두 파트로 나뉜다. 파트 1에서는 마음의 상처란 무엇인지, 왜 남보다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있는지 그 이유를 알아본다. 질문지에 답을 써넣으면서 자신의 취약한 지점을 정확히 알아보고, 당신의 예민함이 가진 장단점은 무엇인지, 당신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의 동기가 무엇인지 캐본다. 상처를 받으려면 두 가지 조건이 맞아떨어져야 한다. 첫째는 사건, 둘째는 그 사건을 대하는 특정한 자세다. 친구에게 "살 많이 빠졌다."라고 칭찬했는데 친구가 "내가 그동안 그렇게 뚱뚱했어?"라고 반응한다면, 이는 칭찬을 곡해하는 친구의 반응에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다.


파트 2에서는 상대의 행동에 대응하는 다양한 전략을 살펴본다. 상대가 돌을 던질 때마다 매번 피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저자는 몇 가지 대응 전략을 제시하고 이 중 가장 효과적인 전략을 사용해보라고 충고한다. 상대에게 다시 한 번 했던 말을 반복해달라고 요구하면서 시간 벌기, 직접 무슨 뜻이었는지 묻거나 구체적으로 따지면서 오해 풀기, 자신이 받은 느낌이나 인상을 자세하게 설명하기, 지금은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니 나중에 하자고 말하고 피하기 등이다. 이 밖에도 가벼운 조롱이나 지적에 대응하는 방법부터 파괴적인 비난이나 인신공격에 대응하는 방법이 비교적 자세히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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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다면, 한국에서 살겠습니까 - 한강의 기적에서 헬조선까지 잃어버린 사회의 품격을 찾아서 서가명강 시리즈 4
이재열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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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과 불만, 불안이 판치는 오늘날의 한국 사회를 서울대 교수는 어떻게 진단하고 평가할까. 서울대 교수진의 명강의를 책으로 만날 수 있는 '서가명강' 시리즈 제4탄,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이재열의 책 <다시 태어난다면, 한국에서 살겠습니까>에 그 답이 나온다.


저자는 현재의 한국 사회를 '불신, 불만, 불안'의 '3불 사회', 국가는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한 선진국이 되었지만 국민 대다수는 이 모든 업적을 '남의 이야기'로 여기는 '역설의 사회'라고 진단한다. 한국이 3불 사회인 건 당연한 일이다. '불신'은 과거의 경험, 즉 제도나 시스템을 믿을 수 없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불만'은 그동안 지속된 경제성장으로 인해 사람들의 눈은 높아진 반면 성취가 그에 미치지 못하는 데에서 발생한다. '불안'은 앞으로 닥칠 미래, 특히 노후에 대한 준비가 안 되어 있어서 생긴다.


불신과 불만, 불안은 세대를 불문하고 벌어지는 현상이다. 아버지 세대인 베이비붐 세대는 '개천에서 용 나는' 계층 간 이동이 가능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경험하며 성장해 노후 대비에 고심하고 있다. 반면 아들 세대인 에코 세대는 계층 간 이동이 점점 막히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외환위기의 후폭풍을 체험하며 성장해 실업난에 시달리고 있다. 한국은 세대 간 이념 갈등도 심각하다. '태어나서 직접 경험한 사건 중 가장 충격을 받았던 사건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나이 든 사람들은 한국전쟁을 떠올린 반면, 젊은 사람들은 세월호 사고를 떠올렸다. 이는 나이 든 사람들이 안보 문제에 민감하고 젊은 사람들이 사회 안전망 문제에 민감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면 이렇게 '병든' 한국 사회에서 '나'라는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저자는 네 가지 팁을 제시한다. 첫째는 몸을 잘 다스려 신체적 건강을 유지하고 정신적으로 긴장을 놓지 않는 것이다. 둘째는 성공의 기준을 바꾸는 것이다. 주위의 눈보다는 자신만의 성공 기준을 정하고 내면이 만족스러운 삶을 유지하는 것이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셋째는 관계를 풍요롭게 하고 사회적 고립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주위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웰빙을 높이는 길이다. 넷째는 삶의 의미에 대해 반추하는 것이다. 내가 죽은 후 나는 주위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까. 이런 생각을 하면 영적 생활뿐 아니라 현실의 삶 또한 풍요로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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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의 법칙 - 누구를 어떻게 믿을 것인가
데이비드 데스테노 지음, 박세연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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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 '왜 부자는 거짓말을 잘하고, 가난한 사람은 남을 잘 믿을까?'라고 적힌 이 책의 띠지를 본 순간 머릿속에 울려 퍼진 말이다. 당시 유력한 대권 후보였던 '그'가 이 말을 했을 때, 다수의 국민들이 이 책을 읽고 '그'의 거짓말에 속아넘어가지 않았다면 어떤 미래가 펼쳐졌을까(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 안타까운 마음은 잠시 접어두고, 미국의 저명한 사회심리학자 데이비드 데스테노의 책 <신뢰의 법칙>을 읽으며 뻔뻔하게 거짓말을 늘어놓는 사람의 심리와 뻔한 거짓말에 속아넘어가는 사람의 심리에 관해 생각했다.


타인의 말을 믿을지 말지 결정하는 일은 일종의 내기와도 같다. 신뢰의 밑바닥에는 종종 상반되는 두 가지 요소, 즉 자신의 욕망과 타인의 욕망이 자리 잡고 있다. 오늘 저녁 피자를 만들어줄 것이라는 엄마의 약속을 신뢰하기 위해, 아이는 부모가 갑작스러운 야근에도 불구하고 마트에 들러 재료를 사 와서 피자를 만들어 줄 것인지를 신경 쓴다. 똑같은 논리가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문제에도 해당된다. 20년짜리 장기 저축에 가입할 때, 우리는 최신형 아이패드가 출시되거나 기막히게 저렴한 여행 상품이 나왔을 때 저축을 깨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신뢰가 자신의 욕망과 타인의 욕망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결정하는 일종의 내기라는 명제는, 부자 또는 권력자의 말을 믿을지 말지 결정하는 일에도 적용된다. 돈이나 권력이 많은 사람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상대방의 협력이나 선의에 의존할 필요성이 적다. 실제로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의 행동경제학자 프란체스카 지노(Francesca Gino)는 현금을 많이 보유한 사람일수록 단기적으로 자신의 이익에 집중한 나머지 타인의 신뢰를 배신하는 행동 패턴을 보인다는 사실을 밝힌 바 있다. 가용 자원이 풍부할수록 타인에 대한 의존도가 필연적으로 줄어들기 때문이다.


인터넷 또는 SNS 상에서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사람들이 온라인상에서 물건을 거래하거나 숙소를 예약할 때 발생하는 정보 비대칭을 극복하기 위해 온라인 평가나 리뷰 같은 서비스가 실시되고 있지만 이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다. 온라인 상거래로 이익을 보는 거대 기업이나 단체, 인플루언서 등은 가짜 이메일 주소나 아이디로 자신의 신뢰성 점수를 부풀리거나, 혹은 악의적인 목적으로 다른 이들의 평판을 깎아내리는 활동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저자는 책의 마지막 장에서 신뢰의 위기를 극복할 대안으로 '직관 메커니즘 키우기'를 제시한다. 발표된 모든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직관이 이성보다 더 나은 조언을 들려준다고 한다. 비록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사람들은 대체로 특정 상황에서 상대방이 신뢰할 만한 행동을 보일지 예측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상대방의 의도를 읽고 속임수를 간파하는 기술을 갖추고 있다. 이유 없이 싫거나 두려운 기분이 들게 하는 사람을 만나거나, 뭐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왠지 모르게 쌔한 느낌이 드는 상황에 처했을 때 일단 피하고 보는 게 현명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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