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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여성 첫 세계 일주기
나혜석 지음 / 가갸날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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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남북 관계가 크게 개선되면서 이러다 기차 타고 평양에서 냉면 먹고(맛있겠다) 유럽 여행 가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증폭되고 있다. 물론 아직 희망사항에 불과하지만, 부산에서 기차 타고 베이징, 모스크바, 파리, 런던까지 갈 수 있었던 20세기 초를 살았던 조상들의 눈에는 한반도가 남과 북으로 갈라지고 남한이 섬처럼 사방이 막혀 있는 상황이 더 비현실적으로 보이지 않을까. 


<조선 여성 첫 세계 일주기>는 조선 최초의 동경 유학생이자 서양 화가, 여성 소설가인 나혜석의 세계 일주 여행기를 엮은 책이다. 나혜석에게 세계 일주의 기회가 찾아온 건 1927년의 일이다. 조선총독부 관리인 남편이 포상 휴가를 얻자 아내인 나혜석은 남편을 따라 여행길에 올랐다. 여행 기간은 총 1년 8개월 23일. 부산에서 출발해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러시아를 지나 유럽을 돌아본 후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 들른 뒤 일본을 거쳐 다시 부산으로 돌아오는 여정이었다. 


고급 관리인 남편과 함께 하는 여행이라서 그런지 여행의 규모나 수준이 상당하다. 어느 나라에 가나 외교 사절의 대우를 받으며 고급 숙박 시설에 머무르고, 그 나라에서 가장 좋은 음식을 맛보고 좋은 경치를 즐긴다. 얼마 전에 읽은 하야시 후미코의 <삼등여행기>와는 퍽 다르다. 둘 다 비슷한 시기에 여성이 쓴 여행기인데(<삼등여행기>는 1931년), 하야시 후미코는 나혜석과 달리 '짠내투어'를 방불케하는 초저가 여행을 했다. 하야시 후미코에게는 고급 관리인 남편도, 넉넉히 쓸 돈도, 만날 지인도 없었다. 


화가답게 어느 나라에 가나 미술관에는 꼭 가보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여성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답게 런던에 가서는 제일 먼저 여성 참정권 운동 관련 인사들을 만난 것도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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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등여행기 - 도쿄에서 파리까지
하야시 후미코 지음, 안은미 옮김 / 정은문고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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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두 '모던 걸'이 쓴 여행기를 연이어 읽었다. 한 권은 나혜석의 <조선 여성 첫 세계 일주기>이고, 다른 한 권은 하야시 후미코의 <삼등여행기>이다. 읽기 전에는 나혜석의 책을 읽고 더 많이 공감할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리 나혜석의 책보다 하야시 후미코의 책이 마음에 더 와닿았다. 민족보다도 계급이 여행 경험을 좌우하기 때문일까. 


하야시 후미코는 1903년 후쿠오카에서 태어나 가난한 부모를 따라 이곳저곳 방랑하는 삶을 살았다. 자라서는 잡일꾼, 사무원, 다방 여급, 여공 등으로 일하며 근근이 생활했고, 일하는 틈틈이 글을 써 작가로 데뷔했다. 공산주의 운동가나 문학가와 주로 교류했던 탓에 치안유지법에 걸려 고초를 겪은 적도 여러 번 있다. 


<삼등여행기>는 하야시 후미코가 대표작 <방랑기>를 쓴 이후 또 한 번 쓴 여행기다. 저자는 작가로서 돈을 벌기 위해 여자 혼자 일본에서 파리까지 가는 위험천만한 여행에 도전했다. 돈을 아끼려면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삼등칸 표를 사지 않을 수 없었다. 삼등칸에는 저자처럼 가난한 조선인, 중국인, 러시아인 등이 있었고, 저자는 이들과 부대끼며 - 이들의 술 주정과 위협, 도난, 성추행을 감내하며 - 가까스로 유럽에 도착했다. 


유럽에 도착해서도 주머니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일본에서 입고 온 기모노를 비롯한 일본 물건을 팔아서 생활비를 마련했다. 카페에서 값싼 커피 한 잔 시켜놓고 하루 종일 글을 쓰거나 사람들을 구경했다. 원고를 일본에 부치고 돈이 들어오면 그 돈으로 런던, 몽모랑시를, 퐁텐블로를, 바르비종에 갔다. 조선총독부 관리인 남편을 따라 외교 사절 대우를 받으며 호화롭게 여행한 나혜석과는 보는 것도, 느끼는 것도 확연히 다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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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스릴러 - 스릴러는 풍토병과 닮았다 아무튼 시리즈 10
이다혜 지음 / 코난북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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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한 사건을 두고 "소설 같아요."라며 감탄하는 일은 현실의 강력범죄를 비현실로 소비하게 일조하는 것은 아닐까.' 


북 칼럼니스트 이다혜 기자의 책 <아무튼, 스릴러>를 읽다가 밑줄을 쭉 그었다. 저자와 마찬가지로 '겁이 많아 치밀한 범죄와 그것을 반드시 해결하는' 스릴러 장르에 매력을 느낀 나는 언제부터인가 허구 속 악의 세계와 현실의 악의 세계가 그리 멀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허구보다 현실에 더 매력을 느끼고 있다. '당신은 결국 논픽션을 읽게 되리라'는 저자의 경고(!)는 나를 위한 것인지도. 


이 책은 저자 자신이 스릴러 장르에 입문하게 된 계기로 시작해 스릴러의 정의와 특징, 반전 강박증과 스포일러 포비아, 코지 미스터리와 이야미스, 여성 스릴러 소설의 계보학, 흉악범죄와 추리소설의 관계, 픽션과 논픽션의 차이 등을 다룬다. 참고문헌 목록 포함 140쪽에 불과한 얇은 책인데도 내용이 실하고 알차다(<아무튼> 시리즈는 명성만 많이 들었지 직접 읽어본 건 처음인데 이 책 덕분에 믿음이 생겼다. 다른 책도 사봐야지). 


스릴러는 추리소설과 달리 범인 찾기에만 집중하지 않고, 범죄소설과 달리 형사나 탐정이 아닌 일반 시민도 주인공이 될 수 있다. 덕분에 <다빈치 코드>부터 <트와일라잇>,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 와카타케 나나미의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까지 전부 스릴러라는 한 장르로 묶인다. 나처럼 책이라면 손에 잡히는 대로 읽어치우고 관심사가 일관되지 않은 잡식성 독자에게는 아주 고마운 장르다. 


저자는 최근 들어 일상이 무대인 코지 미스터리와 이야미스 소설이 유행하고 있고, 여성이 쓰고 여성이 읽는 여성 소설이 점점 늘고 있다고 소개한다. 여성이 쓰고 여성이 읽는 여성 소설이 하도 인기를 끌다 보니 2017년 7월 17일 <월스트리트저널>에는 남성 작가들이 (성별이) 모모한 필명을 찾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불과 20여 년 전 조앤 롤링이 여성의 이름으로 책을 내면 안 팔린다는 출판사의 만류 때문에 남성적인 필명으로 출판을 했던 걸 떠올리면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흉악범죄가 늘어나 더 이상 스릴러 소설을 '소설'로만 읽을 수 없게 된 현실도 지적한다. '한국 여자들에게 대한민국은 언제 무슨 일을 당해도 이상할 게 없는 무법천지다. (중략) 옷이 발가벗겨지고, 피칠갑이 되어 발견되는 여성으로 시작하는 범죄물은 셀 수도 없이 많다. 여자가 죽는 게 장르적 관습이라고, 그래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는 어딘가 찜찜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105쪽) 똑같은 스릴러 소설을 읽고 특정 성별은 쾌락을, 특정 성별은 공포를 느낀다면 과연 그 사회는 정상일까. 


픽션에 대한 관심을 논픽션으로 돌려달라는 당부도 잊지 않는다. 스릴러 소설을 좋아하는 까닭은 대체로 소설 속에서 일어나는 범죄와 자신이 무관하다는 데에서 비롯된 안전함이지만, 현실에서 우리는 결코 범죄와 무관하지 않다. 언제든 범죄의 피해자가 될 수 있고 가해자 또한 될 수 있다. 소설과 달리 현실에선 범죄가 일어나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정신적인 존엄을 잃는다. 스릴러 독자가 걱정해야 하는 건 스릴러 소설에 나오는 인물의 안위보다도 지금 여기, 같은 하늘 아래, 같은 땅 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소설은 소설일 뿐. 현실을 그보다 낫게 만들어야 할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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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귀본 살인사건 스코틀랜드 책방
페이지 셸턴 지음, 이수영 옮김 / 나무옆의자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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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지 미스터리(cozy mystery)'라는 장르가 있다. 기존의 추리 소설과 달리 형사나 탐정이 아닌 평범한 시민이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상적이고 사소한 사건을 해결한다. 가끔 살인이나 절도, 방화 같은 묵직한 사건을 다루기도 하지만 본격적인 추리 소설처럼 전개가 촘촘하고 추리가 치밀하진 않다. 주인공의 연애사나 주변 사람들의 일상 등 사건 해결과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이야기가 자주 끼어드는데 그 점이 또 매력이다.


페이지 셸턴의 <희귀본 살인사건>은 전형적인 코지 미스터리 소설이다. 미국 캔자스 출신의 딜레이니 니콜스는 우연히 본 구인 광고에 이끌려 영국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 있는 한 고서점에 취직한다. 유서 깊은 도시에서 좋아하는 책에 파묻혀 생활하게 되었다는 기쁨도 잠시. 고서점 주인 에드윈의 여동생 제니가 잔인하게 살해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제니가 생전에 에드윈으로부터 셰익스피어 초판본을 받았고, 약물을 구하기 위해 셰익스피어 초판본을 팔려고 하다가 살해를 당했다는 의심이 제기되면서 딜레이니는 뜻하지 않은 범인 찾기에 휘말린다.


셰익스피어 초판본은 셰익스피어가 세상을 떠난 후, 셰익스피어의 친구 두 명이 2절판으로 간행한 최초의 셰익스피어 전집이다. 현재 200여 권밖에 남아 있지 않고 모든 판본의 소재가 밝혀져 있어 고서 수집가들 사이에선 다이아몬드보다 귀한 취급을 받는다. 소설에서 셰익스피어 초판본에 관해 나오는 설명은 이 정도다. 소설의 나머지는 셰익스피어 초판본이 아니라 딜레이니가 에든버러에서 살 집을 구하고, 새 직장에 적응하고, 킬트가 어울리는 멋진 남자를 만나 데이트하는 과정에 더 충실하다. 살인 사건을 제외하면 미국 여성의 영국 생활을 그린 일상 소설로 봐도 무방하다. 


미스터리 소설로서의 매력이 약한 건 아쉽지만 소설 자체는 흥미롭다. 동경하던 나라에서 새 직장을 구하고, 새 집을 구하고, 새로운 동료들을 사귀고, 새로운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져서 잔뜩 신나 있는데 때마침 일어난 살인 사건 때문에 모두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된다면 얼마나 오싹할까. 전형적인 코지 미스터리 소설답게 아주 안락하고 포근하게 결말을 맺으니 걱정 말고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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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목소리
시오타 타케시 지음, 임희선 옮김 / 비앤엘(BNL)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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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신 아버지의 유품 중에 31년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미제 사건의 증거가 될 만한 카세트테이프가 발견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시오타 다케시의 소설 <죄의 목소리>는 교토의 한적한 주택가에서 양복점을 운영하며 평범하게 살고 있는 소네 토시야가 31년 전 미해결된 납치 사건의 범인이 아버지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기에 충분한 증거가 담긴 카세트테이프를 발견하면서 시작된다.


31년 전 미해결된 납치 사건이란 1984년 일본 간사이 지방에서 대형 제과회사 '깅가'의 사장이 납치된 이른바 '깅만 사건'을 일컫는다. 범인은 깅가 사장을 납치한 것으로 모자라 깅가에서 제조하는 과자에 독을 넣어 살포하는 위험천만한 행각을 벌였고, 다른 제과회사와 식품회사에도 같은 일을 당하고 싶지 않으면 돈을 내놓으라는 협박장을 보냈다. 경찰과 언론이 대대적으로 투입되어 범인 찾기에 나섰지만 1년 반이 지나도 범인을 잡지 못했고, 그렇게 30년이 흘러 사건은 공소시효를 맞이하고 말았다. 


한편, 간사이 지방의 유력 일간지 문화부 기자인 아쿠쓰는 과거의 미해결 사건을 다루는 사회부 연말 기획 취재에 투입된다. 사회부 부장은 31년 전 하이네켄 회장 납치 사건 넉 달 후에 깅만 사건이 일어난 건 우연이 아닌 것 같다며, 지금 당장 영국으로 날아가 두 사건이 어떤 관계인지 알아오라는 특명을 내린다. 아쿠쓰는 너무 오래전 일이라 증인도 증거도 찾기 힘든 상황 속에서 조금씩 사건 해결의 단서를 찾아가고, 그 결과 깅만 사건이 단순 납치 협박 사건이 아니라 거대한 배후가 있는 사건이며 그 중심에 '여우 눈을 가진 남자'가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소설은 놀랍게도 1984년 일본 간사이 지방에서 실제로 일어난 '구리코, 모리나가 사건'을 재구성한 실화 소설이다. 고베신문 기자 출신인 시오타 다케시는 15년 전부터 이 작품을 구상했고, 작품 자체는 픽션이지만 사건의 발생 일시, 장소, 범인 그룹의 협박장 및 도전장 내용, 그 후의 사건 보도 등은 최대한 사실 그대로 반영했다고 밝혔다. 


실화라는 사실이 주는 임팩트가 상당하지만, 작품 자체만 놓고 보아도 더할 나위 없이 재미있다. 자신의 아버지가 미제 사건의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진실을 알고 싶은 호기심 사이에서 갈등하는 토시야. 경찰조차 해결하지 못한 미제 사건을 추적하는 부담과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끝까지 진실을 추구하는 기자 정신 사이에서 분투하는 아쿠쓰. 두 사람이 마침내 서로의 존재를 알고 마주쳤을 때 서로 대립할지 아니면 협력할지도 전개에 긴장감을 더한다. 최근에 읽은 일본 미스터리 소설 중에 가장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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