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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스릴러 - 스릴러는 풍토병과 닮았다 ㅣ 아무튼 시리즈 10
이다혜 지음 / 코난북스 / 2018년 2월
평점 :
'잔인한 사건을 두고 "소설 같아요."라며 감탄하는 일은 현실의 강력범죄를 비현실로 소비하게 일조하는 것은 아닐까.'
북 칼럼니스트 이다혜 기자의 책 <아무튼, 스릴러>를 읽다가 밑줄을 쭉 그었다. 저자와 마찬가지로 '겁이 많아 치밀한 범죄와 그것을 반드시 해결하는' 스릴러 장르에 매력을 느낀 나는 언제부터인가 허구 속 악의 세계와 현실의 악의 세계가 그리 멀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허구보다 현실에 더 매력을 느끼고 있다. '당신은 결국 논픽션을 읽게 되리라'는 저자의 경고(!)는 나를 위한 것인지도.
이 책은 저자 자신이 스릴러 장르에 입문하게 된 계기로 시작해 스릴러의 정의와 특징, 반전 강박증과 스포일러 포비아, 코지 미스터리와 이야미스, 여성 스릴러 소설의 계보학, 흉악범죄와 추리소설의 관계, 픽션과 논픽션의 차이 등을 다룬다. 참고문헌 목록 포함 140쪽에 불과한 얇은 책인데도 내용이 실하고 알차다(<아무튼> 시리즈는 명성만 많이 들었지 직접 읽어본 건 처음인데 이 책 덕분에 믿음이 생겼다. 다른 책도 사봐야지).
스릴러는 추리소설과 달리 범인 찾기에만 집중하지 않고, 범죄소설과 달리 형사나 탐정이 아닌 일반 시민도 주인공이 될 수 있다. 덕분에 <다빈치 코드>부터 <트와일라잇>,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 와카타케 나나미의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까지 전부 스릴러라는 한 장르로 묶인다. 나처럼 책이라면 손에 잡히는 대로 읽어치우고 관심사가 일관되지 않은 잡식성 독자에게는 아주 고마운 장르다.
저자는 최근 들어 일상이 무대인 코지 미스터리와 이야미스 소설이 유행하고 있고, 여성이 쓰고 여성이 읽는 여성 소설이 점점 늘고 있다고 소개한다. 여성이 쓰고 여성이 읽는 여성 소설이 하도 인기를 끌다 보니 2017년 7월 17일 <월스트리트저널>에는 남성 작가들이 (성별이) 모모한 필명을 찾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불과 20여 년 전 조앤 롤링이 여성의 이름으로 책을 내면 안 팔린다는 출판사의 만류 때문에 남성적인 필명으로 출판을 했던 걸 떠올리면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흉악범죄가 늘어나 더 이상 스릴러 소설을 '소설'로만 읽을 수 없게 된 현실도 지적한다. '한국 여자들에게 대한민국은 언제 무슨 일을 당해도 이상할 게 없는 무법천지다. (중략) 옷이 발가벗겨지고, 피칠갑이 되어 발견되는 여성으로 시작하는 범죄물은 셀 수도 없이 많다. 여자가 죽는 게 장르적 관습이라고, 그래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는 어딘가 찜찜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105쪽) 똑같은 스릴러 소설을 읽고 특정 성별은 쾌락을, 특정 성별은 공포를 느낀다면 과연 그 사회는 정상일까.
픽션에 대한 관심을 논픽션으로 돌려달라는 당부도 잊지 않는다. 스릴러 소설을 좋아하는 까닭은 대체로 소설 속에서 일어나는 범죄와 자신이 무관하다는 데에서 비롯된 안전함이지만, 현실에서 우리는 결코 범죄와 무관하지 않다. 언제든 범죄의 피해자가 될 수 있고 가해자 또한 될 수 있다. 소설과 달리 현실에선 범죄가 일어나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정신적인 존엄을 잃는다. 스릴러 독자가 걱정해야 하는 건 스릴러 소설에 나오는 인물의 안위보다도 지금 여기, 같은 하늘 아래, 같은 땅 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소설은 소설일 뿐. 현실을 그보다 낫게 만들어야 할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