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등여행기 - 도쿄에서 파리까지
하야시 후미코 지음, 안은미 옮김 / 정은문고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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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두 '모던 걸'이 쓴 여행기를 연이어 읽었다. 한 권은 나혜석의 <조선 여성 첫 세계 일주기>이고, 다른 한 권은 하야시 후미코의 <삼등여행기>이다. 읽기 전에는 나혜석의 책을 읽고 더 많이 공감할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리 나혜석의 책보다 하야시 후미코의 책이 마음에 더 와닿았다. 민족보다도 계급이 여행 경험을 좌우하기 때문일까. 


하야시 후미코는 1903년 후쿠오카에서 태어나 가난한 부모를 따라 이곳저곳 방랑하는 삶을 살았다. 자라서는 잡일꾼, 사무원, 다방 여급, 여공 등으로 일하며 근근이 생활했고, 일하는 틈틈이 글을 써 작가로 데뷔했다. 공산주의 운동가나 문학가와 주로 교류했던 탓에 치안유지법에 걸려 고초를 겪은 적도 여러 번 있다. 


<삼등여행기>는 하야시 후미코가 대표작 <방랑기>를 쓴 이후 또 한 번 쓴 여행기다. 저자는 작가로서 돈을 벌기 위해 여자 혼자 일본에서 파리까지 가는 위험천만한 여행에 도전했다. 돈을 아끼려면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삼등칸 표를 사지 않을 수 없었다. 삼등칸에는 저자처럼 가난한 조선인, 중국인, 러시아인 등이 있었고, 저자는 이들과 부대끼며 - 이들의 술 주정과 위협, 도난, 성추행을 감내하며 - 가까스로 유럽에 도착했다. 


유럽에 도착해서도 주머니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일본에서 입고 온 기모노를 비롯한 일본 물건을 팔아서 생활비를 마련했다. 카페에서 값싼 커피 한 잔 시켜놓고 하루 종일 글을 쓰거나 사람들을 구경했다. 원고를 일본에 부치고 돈이 들어오면 그 돈으로 런던, 몽모랑시를, 퐁텐블로를, 바르비종에 갔다. 조선총독부 관리인 남편을 따라 외교 사절 대우를 받으며 호화롭게 여행한 나혜석과는 보는 것도, 느끼는 것도 확연히 다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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