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금니 깨물기 - 사랑을 온전히 보게 하는 방식
김소연 지음 / 마음산책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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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빵 매거진 <정희진의 공부>에 김소연 시인이 출연해 정희진 작가와 대화를 나눈 편을 듣고 궁금해져서 구입한 책으로 기억한다. 구입한 지 한참이 지난 최근에야 이 책을 읽었는데 기대한 대로 좋다. 이 책 이전에 읽은 김소연 시인의 산문집들도 좋았지만 이 책이 가장 내밀하고 솔직하다고 느꼈다. 글쓰는 사람이 자신의 생애나 생활을 속속들이 보여줄 필요도 없고 그럴 의무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아무래도 그런 이야기를 읽을 때 독자가 그를 더 가깝고 친밀하게 느끼게 되는 건 사실인 것 같다.


이 책에서 저자는 자신의 어린 시절과 가족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준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저자의 아버지는 '무능하지만 무해'했고, 저자의 어머니는 '같은 무능이었어도 유해'했다. 능력은 좋지만 하는 일마다 실패했던 아버지는 비록 식구들로 하여금 가난을 경험하게 했을지언정 정서적으로 나쁜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하나뿐인 아들만 예뻐하고 두 딸은 그만큼 귀하게 대하지 않은 어머니는 저자에게 늘 애증의 대상이었다. "나는 엄마를 오래 싫어했다. 엄마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를 착취하는 사람이었고, 오빠보다 뒤에 서 있기를 지나치게 종용해온 억압의 주체였다. 나는 자랑스러운 딸이어야 하되 오빠보다 더 자랑스러우면 안 되었다." (15쪽)


그런 어머니가 점점 쇠약해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딸인 저자에게 복잡한 감정을 일으키는 일이었다. 어머니는 그토록 애지중지했던 아들을 병으로 잃고, 남편을 여의고, 치매를 앓았다. 아무리 어머니를 오랫동안 싫어했더라도 인간으로서는 연민하는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부터 저자는 어머니를 자식처럼 돌보기 시작했다. 사람 만나고 여행 다니기를 좋아하던 사람이 틈만 나면 어머니를 만나러 요양 병원에 가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병이 진행되면서 어머니는 점점 더 딸을 잊었는데, 그럴수록 저자는 어머니에 관한 추억이 되살아났다. 이 책은 그렇게 되살아난 추억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자랄 때는 증오의 대상이었던 어머니이지만, 돌이켜보면 어머니에게 좋은 것들도 많이 받았다. 그중엔 시도 있다. 웅변 대회에 나갈 정도로 글보다 말을 중심으로 살았던 저자는, 학창 시절 어머니에게 선물받은 시집을 읽으며 시의 세계를 만났고 종국에는 시인이 되었다. 정작 어머니 자신은 딸이 쓴 편지에 답장 한 번 써준 적이 없을 만큼 글과 거리가 멀었지만, 그렇게 받은 것도 유전이고 사랑 아닐까(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사랑이 이 책으로 전해진 것 역시 인연이고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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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37
알랭 로브그리예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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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적인 미스터리 스릴러 소설'이라는 문구에 혹해 이 책을 구입했다. 읽어보니 방점이 '실험적인'에 있다. 그렇다고 '미스터리 스릴러' 소설로서의 재미가 덜하다는 말은 아니다. 어떻게 보면 미스터리 스릴러 소설 속 비슷비슷한 인물, 비슷비슷한 배경, 비슷비슷한 사건에 익숙한 독자에게는 실험 자체가 트릭이 되고 사건 해결의 키(key)가 되는 이 소설이 신선하고 파격적인 재미를 선사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소설은 실종된 한 남자가 남긴 원고로부터 시작된다. 실종된 남자의 이름은 '시몽 르쾨르'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진짜 이름은 아무도 모른다. 신분증은 위조되었고, 사람마다 기억하는 그의 이름은 제각각이다. 실종되기 전 그가 타자기 옆에 남긴 원고의 내용도 사실인지 아닌지 불명확하다. 원고의 내용은 이렇다. 한 남자가 구인 광고를 보고 면접 장소로 간다. 면접 장소에는 정체가 모호한 면접관 '진'이 기다리고 있다. 진의 지시로 북부 역으로 향하던 남자는 길에 쓰러진 소년을 발견해 근처에 있는 소녀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알쏭달쏭한 말만 들을 뿐이다.


이후에도 예측을 불허하는 수수께끼 같은 일이 계속해서 등장한다. 남성인지 여성인지, 생물인지 무생물인지조차 불분명하고, 현실은 꿈이 되고 꿈은 다시 현실이 되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세계... 익숙지 않은 설정과 전개를 고통으로 받아들이는 독자에게는 인내심을 요하는 독서가 되겠으나, 어느 책에서도 경험한 적 없는 환상적인 분위기와 한 번 도전하기에 부담스럽지 않은 분량을 미덕으로 받아들인다면 인상적인 체험이 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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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과 남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29
엘리자베스 개스켈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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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영국 런던. 부유한 이모 댁에서 사촌 이디스의 시중을 들며 지내온 마거릿은 이디스의 결혼을 계기로 고향인 남부의 시골 마을 헬스톤으로 돌아간다. 런던에서의 화려한 생활을 뒤로 하고 전원에서의 소박한 생활에 적응하기로 마음 먹기가 무섭게, 마거릿의 아버지 헤일 씨가 깜짝 놀랄 만한 선언을 한다. 더는 마을의 교구 목사로 지낼 마음이 없어졌으니 가족 모두 북부의 공업 도시 밀턴으로 이사를 가자는 것이다.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결심을 번복하지 않고, 앞으로의 생계와 눈 앞에 닥친 이사, 지인 하나 없는 낯선 도시에서 자리 잡고 살아갈 생각에 마거릿은 눈앞이 캄캄하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 엘리자베스 개스켈의 소설 <북과 남>은 초반부터 흥미진진하다. 비슷한 나이 또래의 사촌이 부유하고 사회적 지위도 탄탄한 남자와 결혼하는 상황부터가 유쾌하지 않은데, 그 결혼으로 인해 자신은 가난한 고향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데다가 그 사촌이 소개해준 남자와도 잘 안 된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는 적은 수입이나마 보장해 주었던 교구 목사직을 가족과 상의도 없이 개인적인 이유로 그만두고, 불평불만 많은 어머니와 자신을 적대시하는 하녀를 데리고 사실상 혼자서 이사 준비를 해야 하는 주인공이라니. 이 소설과 자주 비교되는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의 주인공 엘리자베스 버넷의 상황이 훨씬 더 낫게 느껴질 정도다.


우여곡절 끝에 이사가 마무리된 후에도 마거릿의 사정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 자신의 고향인 헬스톤이 비록 가난한 시골 마을일지언정 자연의 아름다움과 공기의 깨끗함만큼은 최고라고 자부했던 마거릿은 삭막한 공장 일색인 데다가 매연 때문에 제대로 숨 쉬기도 힘든 공업 도시 밀턴의 환경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한다. 지인 하나 없는 이곳에서 마거릿이 겨우 알고 지내게 된 가족이 둘인데, 하나는 아버지의 제자인 공장주 손턴 씨 가족이고 다른 하나는 공장 노동자인 히긴스 씨 가족이다. 졸지에 공장주 측과 노동자 측 사이에 낀 처지가 된 마거릿은 양측의 사정을 청취하며 갈등을 조정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마거릿과 손턴 씨는 <오만과 편견>의 엘리자베스와 다아시처럼 첫 만남부터 자신에 대한 '오만'과 상대에 대한 '편견'으로 반목을 거듭하며 팽팽하게 대립한다. 그런데 이들의 대립은 그저 두 남녀의 밀고 당기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첨예한 화두였던 노동자와 공장주 간의 갈등, 나아가서는 농업을 기반으로 오랫동안 영국의 경제 중심지였던 남부와 산업 혁명 이후 공업을 기반으로 신흥 경제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는 북부 사이의 세력 다툼을 상징한다. 양심상의 이유로 목사직을 그만두는 목사, 상관의 폭력에 대항했다가 도망자 신세가 된 군인, 하녀보다 더 나은 수입을 보장하는 노동자가 되기 위해 취직하는 여성들 등 당대의 급변하는 사회상을 관찰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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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께 - 갈 곳 없는 마음의 편지
오지은 지음 / 김영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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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에서 소중한 사람에게 엽서나 편지를 쓰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런 엽서나 편지를 써본 적이 없고, 그래서인지 남에게 그런 엽서나 편지를 받아본 적도 없다. 누구라도 보내준다면 여러 번 읽고 소중히 간직할 텐데... 이런 내 마음에 응답하는 듯한 책을 읽었다. 오지은 작가가 2023년에 출간한 산문집 <당신께>이다. 이 책은 오지은 작가가 2016년부터 2023년까지 장장 7년에 걸쳐 완성했다. 이 책의 첫 번째 글이 이 책보다 먼저 출간된 오지은 작가의 또 다른 산문집 <이런 나라도 즐겁고 싶다>, <마음이 하는 일>보다 먼저 쓰였다니, 작가가 이 책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공을 들였는지 짐작이 간다.


이 책은 오지은 작가가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되어 있다. 작가는 여행을 앞두고, 여행 중의 비행기 안에서, 여행지의 숙소에서,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등등 다양한 시간과 장소, 상황에 각각의 편지를 썼다. 앞에 쓴 대로 <이런 나라도 즐겁고 싶다>, <마음이 하는 일>과 집필 기간이 겹치다 보니 기시감(기독감?)이 드는 대목들도 있지만 이건 작가 자신의 삶을 글감으로 삼으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책이나 방송에서 추억담 정도로 작가가 가볍게 언급하고 지나갔던 과거의 여행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어 좋았다. 전에는 몰랐던 여행 전후의 사정이나 심정을 추측할 수 있는 대목도 있고, 작가가 그때그때 많은 걸 이야기하고 공유하는 것 같아도 시간이 흘러서 겨우 말할 수 있게 된 것도 있다는 걸 알았다.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마음에 남아 있고 그래서 더 추천하고 싶은 책과 영화, 드라마에 대한 글도 있다. 패티 스미스의 책 <M트레인>, 앨런 릭먼의 영화 <블루밍 러브>,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 <항구 마을 식당>, 일본 드라마 <콩트가 시작된다>를 앞으로 읽을 것, 볼 것 목록에 적었다. 사노 요코와 박완서의 책은 나도 많이 읽었는데 앞으로 오지은 작가가 사노 요코와 박완서처럼 오래오래 많은 책을 써주었으면...! 아, 그리고 이 책에 언급된 피치카토 파이브의 곡을 요즘 즐겁게 듣고 있다. 뮤직비디오가 끝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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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링 인 폴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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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린 작가의 책을 열심히 따라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무려 첫 소설집을 아직 안 읽었을 줄이야... 다행히 올해 출간 10주년을 기념해 백수린 작가의 첫 소설집 <폴링 인 폴>의 개정판이 나왔다. 인터넷서점으로 이 책을 구입한 후에 북클럽문학동네 이달책으로 한 권 더 구입했는데, 인터넷서점에서 받지 못한 백수린 작가의 미공개 습작이자 진짜 첫 단편인 <셀로판 나비>를 이달책으로 받을 수 있었다. 진짜 첫 단편이라고 해서 <폴링 인 폴>을 읽기 전에 <셀로판 나비>부터 읽었는데 이 작품 아주 좋다. 아직 못 읽었거나 (나처럼) 인터넷서점에서 구입할 때 빠트렸다면 일부러라도 구해서 읽어보시길. 


<폴링 인 폴>에는 총 아홉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2010년에서 2013년 사이에 발표된 작품들이라서 세월의 흔적이 많이 느껴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작가가 많이 고쳤나 싶었는데, 개정판 작가 후기에 따르면 '대부분의 내용을 크게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두기로 했다'라고. 그런데도 요즘 독자들이 읽어도 만족하겠다 싶을 정도로 감성이 신선하고 발상이 새롭다. 표제작 <폴링 인 폴>은 삼십 대 후반의 한국어 강사인 '나'가 이십 대인 재미 교포 남성 '폴'과 만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리는데, 일견 연상인 여성이 연하인 남성을 짝사랑하면서 그의 여자친구를 질투하는 통속적인 로맨스 소설처럼 읽히지만 그 안에는 국적과 언어, 나이와 성별의 차이 등으로 인해 발생하는 소통의 오류와 새로운 가능성 등 다양한 이야깃거리가 담겨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단편은 <감자의 실종>이다. 방송국에서 공채 성우로 일하는 '나'는 어느 날 자신이 '감자'라고 알고 있었던 대상이 사실은 '개'라는 사실을 알고 혼란을 느낀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사고하고 지각하는 동물인데 그 언어를 더 이상 신뢰할 수 없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집세를 분담하기 위해 함께 사는 세 여성의 이야기를 그린 <자전거 도둑>과 어느 날 수족관에서 아이를 잃어버린 엄마의 이야기를 그린 <밤의 수족관>도 계속 곱씹게 되는 내용이다. 초반에 실린 단편들은 배경이 이국적이고 성인 여성의 일과 연애에 대한 고민을 그린다는 점에서 백수린 작가의 최근작들과 비슷한 느낌인 반면, 후반에 실린 단편들은 화자가 남성이거나 환상의 요소가 차용된 점이 신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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