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100일 정진,  5일차

<欲得現前 /욕득현전/(도가) 눈 앞에 나타나 길 바라거든

莫存順逆/막존순역/따름과 거슬림에 걸리지 말라>

 

이제 부터 신심명은 앞의 지도무난(至道無難), 유혐간택(唯嫌揀擇) 단막증애(但莫憎爱), 통연명백(洞然明白)  변주에 해당된다.

앞의 구절의 핵심은 대상에 대해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날 분별하지 마라 였다.

승찬 대사는 언어로 그물을 쳐서 간택하고 증애하는 마음을 걸러내려고 했다.

하지만 신심명은 단순히 마음을 분별하지 말라 되풀이 하는 구절이 아니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분별하는 마음마저도 걸리지 말라는 깊은 뜻이 숨겨져 있었다.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은 좋고 싫음에서 자유로울 없다.

진정한 자유란 좋고 싫음을 구별하는 분별마저도 걸림 없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쉽게 말해 우리는 분별을 해야 한다.

아니 분별하는 것이 우리의 본성임을 감추지 말아야 한다.

분별하는 마음의 본성을 굳이 수행이란 이름에 걸려서 다시 분별하지 말아야지 하는 것이 바로 분별심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어리석고, 못 났고, 혹은 내가 잘 났고, 위대하고, 남보다 어떠한 상태로 의식과 무의식중에 비교하고 분별하는 그 마음이 바로 본성이란 것이다.

본성을 부끄러워하고, 감추고자 하고, 수행을 해서 그런 분별심을 없애겠다고 하는 순간, 이미 도는 멀어진다.

도가 어려운 것이 아니란 말은 우리의 본성품이 어렵지 않다는 것과도 같다.

단지 마음을 믿지 못해서, 분별하는 그 마음을 다시 분별하기 때문에 도가 어려워진 것 이 아닐까?

그냥 마음 그대로 인정하는 것에서 수행은 시작되지 않을까?

오늘의 구절 욕득현전(欲得現前),막존순역(莫存順逆), 또한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

 

<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길,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 하셨다.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으면 업신여기는 마음과 사치하는 마음이 생기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길, 근심과 곤란함으로 세상을 살아가라 하셨다.


공부하는데 마음에 장애가 없기를 바라지 말라. 마음에 장애가 없으면 배우는 것이 넘치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길, 장애 속에서 해탈을 얻으라 하셨다.


수행하는데 마가 없기를 바라지 말라. 수행하는데 마가 없으면 서원이 굳건해지지 못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길, 모든 마군으로서 수행을 도와주는 벗을 삼으라 하셨다.


일을 꾀하는데 쉽게 이루어지길 바라지 말라. 일이 쉽게 되면 뜻을 경솔한데 두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길, 여러 겁을 겪어서 일을 성취하라 하셨다.


친구를 사귀되 내가 이롭기를 바라지 말라. 내가 이롭고자 하면 의리를 상하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길, 순결로써 사귐을 길게 하라 하셨다.

 

남이 뜻대로 순종해주길 바라지 말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주면 마음이 스스로 교만해지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길, 뜻과 맞지 않는 사람들로서 *원림을 삼으라 하셨다.


공덕을 베풀면 과보를 바라지 말라. 과보를 바라면 도모하는 뜻을 가지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길 덕을 베푼 것을 헌신처럼 버려라 하셨다.


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말라. 이익이 분에 넘치면 어리석은 마음이 생기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길 적은 이익으로서 부자가 되라 하셨다.


억울함을 당해서 누명을 벗고자 하지 말라. 억울함을 밝히면 원망하는 마음을 돕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길 억울함을 당하는 것으로 수행하는 문을 삼으라 하셨다.> <보왕삼매론寶王三昧論> 중에서.


<보왕삼매론>은 수행 중에 마주하는10가지 장애를 극복하는 가르침이다.

내용을 보면 기존의 우리가 가진 좋고 나쁘고의 관념을 완전히 바꿔 놓는다.

본래 우리의 마음은 좋으면 따르게 되고, 싫으면 거스르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

그러나 수행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좋다 나쁘다는 관념 자체는 고정되지 않는다.

신심명은 이러한 보왕삼매론의 부연 설명을 확실한 종지부를 찍고 있다.

 

욕득현전(欲得現前),  바로 앞에 도가 나타나 보이길 바라는가?

막존순역(莫存順逆) 이란 좋아서 따른 것이든 싫어서 거스리는 것이든 모두 고정되지 않았다.

좋다 나쁘다는 것이 사실 없는 것인데 우리 마음이 짓는 것임을 철저히 알라는 것이다.

결국 수행이란 뭔 가를 이루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지금 순간, 내 마음이 어떠한 상태 인지를 철저히 확인하는 것이 전부가 아닐까?

원림속에서 있는 반응하는 나를 지켜 보는 것이다.


:欲得: 바랄 , 얻을 : 얻고자 바란다면, 즉 오를 혹은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면

現前: 나타날 , 앞 전: 앞에 나타나다. 즉 (눈) 앞에 나타나고자

莫存: 없을 , 있을 존: 막은 부정사로 ~하지 마라, 즉 있게 하지 마라.

順逆: 따를 , 거스릴 역: 따르고 거스리는 것.

*원림(怨林:원망할 , 수풀 림): 나를 힘들게 하는 환경을 뜻함. 원망, 불편, 억울함 같은 감정이 반복해서 일어나는 관계와 상황 전체를 뜻함.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괜히 마음 상하고 화가 날 때, 바로 그 자리가 원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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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100일 정진,  4일차

<毫厘有差 /호리유차/ 끝만큼이라도 차이가 있으면

天地懸隔/천지유격/하늘과  차이만큼 벌어지나니>

 

지도무난(至道無難), 도에 이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유혐간택(唯嫌揀擇), 간택하는 마음마저 꺼리지 않는다면

단막증애(但莫憎爱), 미워하고 좋아하는 마음에도 걸리지 않는다면

통연명백(洞然明白), 통하여 확연하게 (마음자리) 드러난다.

 

결국 도라는 것은 마음자리가 아닐까.

이는 개인이 확언하는 말이 아니다.

심즉불(心卽佛), 즉 마음이 부처란 말이 단순히 그냥 나온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육조의 법을 이은 남악 회양선사(南岳懷讓677~744)는 도일이라는 제자가 열심히 좌선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회양선사는 도일 옆에서 벽돌을 가지고와 숫돌로 갈기 시작했다.

회양의 부시럭 거리며 벽돌을 가는 소리에 도일은 궁금했다.

도일은 회양에게 물었다. 왜 벽돌을 가십니까?

거울을 만들거라네.

아니 벽돌을 간다고 거울이 된다는게 말이 됩니까?

그럼 앉아만 있는다고 부처가 되겠냐?

회양의 말에 도일은 깨닫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회양은 이어서 말했다.

달구지(수레)를 끌려면 마부는 소를 쳐야 하는가? 달구지를 쳐야 하는가?

부처가 되려고 좌선을 하는 것이라면 그대는 좌선을 배우는 것이지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다.

부처는 형상이 없으며 좌선을 배우는 것이라면 좌선은 앉고 눕고 서는데 있지 않다.

마음은 어떤 머무름이 없고 고정됨이 없는데 앉는 것으로 부처가 되려는가?

그건 부처를 죽이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이 부처다.

훗날 도일은 마조도일(馬祖導一, 709~788)이란 이름의 선사가 된다.

 

결국 도라는 것은 말로는 설명할 없다.

말이란 본래 뜻을 왜곡하기 쉽다. 또한 글로 남긴다고 해도 본래 뜻과는 멀어진다.

오늘의 구절 호리유차(毫厘有差) 바로 이러한 상황을 말하고 있다.

본래 우리가 가진 본래 자성인 마음자리를 밝힌 것이 신심명이다.

이는 도가 너무나 쉽지만 너무나 없는 마음의 작용임을 알리는 것이다.

단순한 마음이 아니기 때문에 장황한 설명이 필요한 지도 모른다.

하지만 선은 장황한 언어의 설명 조차 필요없이 바로 마음으로 들어가길 권한다.

호리유차(毫厘有差), 털 끝만큼이라도 차이가 있다면

천지유격(天地懸隔), 하늘 차이만큼 벌어진다는 것이 과연 틀린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도무난(至道無難), 유혐간택(唯嫌揀擇) 단막증애(但莫憎爱), 통연명백(洞然明白)

사실 신심명의 핵심은 여기까지가 전부라고 한다.

성철(性徹 1912~1993) 큰스님께서도 신심명은 여기까지만 봐도 된다고 하셨다.

뒤에 이어지는 나머지는 모두 부연설명이다.

잘못 이해하면 호리유차, 천지현격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핵심은 반복해서 거듭 되새겨야 한다.

신심명의‘명()’ 새길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2026년 신년이 되었다. 올 해는 어떤 일들이 기록되어질까?

벽돌을 갈아 거울을 만들고 있지나 않을까? 소대신 달구지만 주구장창 때리고 있지나 않을까?

이제는 희망과 기대 보다는 안녕과 무탈만 바라게 된다.

 

:毫厘: , 다스릴 : 호와 리는 사물를 재는 아주 작은 단위, 센티, 미리 개념임.

有差: 있을 , 다를 차: 차이가 있다

天地: 하늘 , 땅 지: 하늘과 

懸隔: 매달 , 뜰 격:현은 사람의 목을 나무에 매달아 놓은 형상을 상형화 한 것이다. 죄수의 목을 메달아 공간 사이가 떠 있다. 끔찍한 상황 묘사 이지만, 여기서는 그냥 공간이 벌어져 떨어져 있다고 봐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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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100일 정진,  3일차

<但莫憎爱/단막증애/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만 없다면

洞然明白/통연명백/통하여 명백하게 드러난다>

 

지도무난(至道無難), 도에 이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유혐간택(唯嫌揀擇), 오직 간택하는 마음만 꺼려라고 했다.

여기서 간택하는 마음이란 분별하여 선택하는 마음이다.

분별은 사량으로 헤아리는 마음, 즉 이해타산을 따지는 마음이다.

따지는 마음 , 도를 이루고자 분별심을 혐오해야 한다면  그 또한 간택하는 마음이 아니던가?

분별하지 말라고 해놓고선 분별을 한다. 승찬 대사는 왜 이런 모순된 말을 했을까?

그래서 오늘의 구절은 중요하다.

 

단막증애(但莫憎爱), 누군가를 미워하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 그 마음 쓰임이 바로 분별이다.

분별이 없다면 좋아하고 싫어 함이 없는 상태인데. 과연 그것이 도란 말인가?

없다 말에 걸리면 우리는 승찬 스님이 가둬 둔 글자의 그물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대상에 대해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대상이 생기면 우리의 의식은 저절로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마음에서 일어나는 반응이 바로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분별심이 된다.

그리고서는 우리는 떠오르는 생각이 자기 생각임을 선택하게 된다. 즉 간택하는 것이다.

어떻게 따져도 우리는 분별심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하물며 도에 이르기 쉽다는 승찬대사 조차 분별하지 말라고 분별을 했을까?

그건 경책인가? 아니면 분별심인가?

 

(空), 불교에서 공은 텅 비었다는 뜻이 아니다.

반야심경의에서 가장 핵심 구절이라 일컫는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이란 구절이 있다.

오온(五蘊)이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즉 눈,귀,코,혀, 몸을 통해 반응하는 다섯 가지 감관이 사실은 모두 공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공하다는 것은 없다 의미가 아니다.

불교의 공은 고정됨이 없다 의미로 읽어야 한다.

오온이 공함을 본다는 것은 우리의 오온이 고정됨이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고정된 것은 진리가 아니다.

, 신심명에서 하지 마라, 해라 는 글자는 고정됨이 없는 공으로 읽어야 한다.

 

그렇다면 진정 승찬대사가 신심명을 통해서 무엇을 전달 하고 싶은 것일까?

신심명의 구절을 하라, 하지 마라 받아 들이면 신심명은 단순한 경책의 소리로 밖에 지나질 않는다.

진리는 고정되지 않는 것이니, 굳이 하지 말라, 하라에 메이지 말고 걸림이 없이 하라는 의미가 아닐까?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없애라는 것이 아닌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에 걸리지 않으면 바로 그것이 도에 통하는 명백한 길이 드러난다는 선언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공의 도리로 보아야 비로소 승찬대사의 분별심은 그냥 단순한 분별심이 아님을 알게 된다.

분별했지만 분별마저 꺼리지 마라는 뜻이 된다.

분별심에도 걸리지 말란 말이다.

간택하는 마음마저 걸리지 말고,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에도 걸리지 말아야

비로소 우리의 마음은 모든 것이 통하고 확연하게 드러나게 된다.

 

명백(明白)함이란 바로 확실히 드러난 자리이다.

통연명백이란 바로 밝아서 그대로 하얗게 드러난 마음자리를 말한다.

우리의 본성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견성(见性)이란 성품을 보는 것이 아닌 성품이 저절로 드러나 보여지는 것이 된다.

그래서 마음이 밝아지면 자연스레 보여지게 되어 있다.

통하면 자연히 밝게 하얗게 드러나는 , 그것이 바로 우리의 참 마음 자리가 아닐까?

이제 승찬 스님이 쳐둔 언어의 그물에서 겨우 한번 빠져나왔다.

 

:但莫다만 , 없을 막: 단지 ~가 없다면

憎爱미워할 , 사랑 애: 미워하고 사랑하는 것,

洞然통할 , 그러할 연: 통연하다 통하고 ~그러하게 되다.

明白밝을 , 흰 백:하얗게 밝아진다. 즉 명백하다.  현대 중국어에도 확실한 이해 여부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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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12-31 19: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으로 받아들여도 될런지요....

한해 마힐님의 글로 많은 생각할 거리가 생겼습니다. 새해에도 정진하시길 바라며 복 많이 받으세요.

마힐 2026-01-01 13:41   좋아요 0 | URL
네, 저도 바람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네요.
그리고 글도 좀 자유롭게 쓰고 싶네요. ㅎㅎ
잉크냄새님 새해 복 많으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
올 해는 좋은 이벤트가 생기는 게 복이겠죠? ㅎㅎ


2025-12-31 2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01-01 1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곡 2026-01-01 00: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마힐 2026-01-01 13:41   좋아요 1 | URL
서곡님 새해 복 많으 받으시구요. 건강하세요!
 

- 다시, 100일 정진,  2일차

<至道無難/지도무난/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나니

唯嫌揀擇/유혐간택/오직 가리고 택하는 마음만 꺼릴 뿐이요>

 

다시 신심명(信心铭)이다.

신심명은 3조 승찬대사(僧瓚大師 ?~606)   어록이다.

승찬대사는 2조 혜가로 부터 법을 이었고, 2조는 1대조 즉, 초조(初祖)달마대사로 부터 법을 이었다.

그래서 선종宗) 보리 달마대사를 시조(始祖) 삼는다. 보리 달마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넘어 온 사건은 역사적으로나 선 ()사상적으로도 의미를 부여한다.

달마가 서쪽에서 이유 자체가 하나의 화두가 되기 때문이다.

달마서래의(達磨西來意), 달마가 왜 서쪽에서 왔을까?


달마가 중국으로 넘어갈 인도에서 불교는 이미 점점 힌두교 같은 종교들에 의해 밀려나고 있었다.

현대 인도에서 불교도는 거의 자취를 찾아 없을 만큼 맥이 끊겼지만 중국과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의 불교는 아직도 명맥을 이어 오고 있다.


붓다 생존 시 붓다는 불법의 미래에 대해 미리 예측을 했었다고 전해진다.

붓다 열반 500년은 상법시대로 불법은 번창하고, 깨닫는 이도 많다고 했다.

상법시대가 끝나고 500년은 중법시대로 깨닫는 이는 드물지만 불법은 외적으로 화려해 진다고 했다.

, 절을 짓고 승려들을 배출하며 경전을 연구하는 시대라는 것이다.

그리고 중법시대가 500년이 지난 후 말법시대가 도래하는데 깨닫는 이는 거의 없다고 했다.

오히려 불교는 종교화가 되어 화려해지고 깨달음과는 거리가 교조적으로 변한다고 전했다.

붓다 열반 1500년 이후는 완전한 말법시대에 해당하는 것이다.

시기가 바로 인도에서 불교가 완전히 소멸되는 시기와 겹친다.


달마의 동쪽 행은 꺼져 가는 붓다의 마음 불을 이으려는 의지였을지도 모른다.

희미해진 불법의 불씨는 중국에서 선이란 형식으로 불교를 다시 태우게 된다.

그것이 바로 선종의 시작이다.

마침 중국이란 나라의 풍토는 도교의 노장 사상(老莊思想) 민간을 중심으로 뿌리를 내렸다.

노장 사상의 시조, 노자 역시 붓다와 더불어 축의 시대를 연 인류 사상사의 대표적 인물이다.

이미 노자에 의해 도가 무엇 인지를 중국인들은 어렴풋 이라도 파악하고 있었다.

불교의 (空) 노자(道) 도는 서로 다른 같지만 의미는 서로 통하는 면이 있다.

그래서 일부 연구자들은 인도 불교가 중국 도교와 만나서 만들어 것이 선불교라고도 주장한다.

 

이제 인도의 불교는 완전히 소멸되었지만 명맥은 선을 통해 다시 불씨를 살려냈다.

이제 불교는 붓다가 전한 말은 글로 남아 () 가 되었고, 붓다의 마음은 선( 되었다.  

선을 부처님의 마음이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승찬스님은 분명 붓다의 마음 차원에서 신심명이란 어록을 남겨 놓았을 것이다.

스님이 깨닫고 보니 도라는 것이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라고 먼저 선언한다.

지도무난(至道無難), 지극한 도란 지극하고 간절한  라는 의미도 있겠지만 글자 그대로 도에 이르는(至:이를지) 것은 무난하다. 즉 어렵지 않다.

유혐, 즉 오직 꺼려야 한다. 무엇을 ?

간택, 즉 가리고 택하는 것을. 즉 분별(分别)함을 말한다.

다시 말해 도에 이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오직 간택하는 마음, 즉 분별하는 마음을 내지 않으면 된다.

 

신심명의 구절은 <신심명> 전체를 털어 가장 핵심 구절이며 명확한 선언이기도 하다.

앞으로 이어질 어록들은 모두 선언의 변주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베토벤 <운명 교향곡>의 가장 강력한 임팩트 있는 첫 소절을 우린 신심명에서 마주하고 있는 셈이다.

지도무난, 유혐간택, 도에 이르는 것은 쉽다. 오직 분별하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인가?

여기서 모순 점이 발생한다.

안의 간택하고 분별하는 마음을 쉬기가 어렵기 때문에 수행을 하는 것인데...

분별을 꺼리라고 하는 것은, 분별을 싫어 하는 마음 자체가 분별이 아닌가?

그럼 이제부터, 무엇이 간택 하는 마음이며 무엇이 분별하는 마음 인지를 살펴봐야겠다.

 


: 至道: 이를 , 길 도: 도에 이르는 것, 즉 도를 얻고자 하는 것

無難: 없을 , 어려울 난: 무난하다, 즉 어렵지 않다.

唯嫌: 오직 , 꺼릴 혐: 오직 싫어한다. 즉 오직 꺼린다.

揀擇: 가릴 , 가릴 택: 간택 하는 것. 즉 가리고 택하는 (마음을)



By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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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12-30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힌두교에서 보존의 신인 비슈누는 10개의 아바타로 현신하여 구원하는데 그 아홉번째가 부처라고 합니다. 일원론적 다신교인 힌두교에서 신은 하나지만 다른 이름으로 불릴 뿐이라는 믿음이 강하니 가능한 이야기겠죠. 구태여 부처를 따로 믿지 않아도 된다는 논리로 자연스레 불교를 흡수했다고 합니다.

마힐 2025-12-31 02:18   좋아요 1 | URL
아마도 그런 이유로 달마가 동쪽으로 가지 않았을 까요?
불법을 살리려면 부처가 신이 되길 원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힌두교가 흡수한 것은 부처의 껍데기 형상일 뿐이죠.
결국 부처를 형상과 소리와 이름에서 찾지 말라는 경책이 아닐까요?
달마가 서쪽에서 온 이유가 뭘까요? ^^
죽은 부처를 태워 산 부처를 먹여 살리고 있답니다. ㅎㅎ
 

- 다시, 100일 정진,  1일차


도를 아십니까?

벌써 30여년 전에 일이다. 도를 아십니까 접근하는 사람을 따라 적이 있었다.

나를 보고 기운이 좋다고 하면서  공부를 해야 하는 사람이라며 자신과 함께 도를 공부하는 곳을 가보자고 권유를 했었다. 그때 정말 호기심에 따라 갔다.

알고보니 OO진리회라는 종교 단체였다.

사실 OO진리회는 증산교에서 파생된 종교단체라는 것을 그 시절 나는 대략 알고 있었다.

왜냐면 나의 할아버지가 증산교를 믿었다는 것을 아버지에게 들었기 때문이다.


증산교라는 종교는 19세기 말, 강증산(본명: 강일순 1871~1909)이라는 사람이 자칭 천제 즉,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며 천지공사라는 행위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는 신흥종교다.

특히 불교의 미륵사상을 상징적으로 사용하여 천지 공사와 후천개벽을 주장하는 믿음을 가졌.

나도 알지는 못하지만 강증산 교주가 죽은 증산교의 세력은 사분오열되었고, 거기서 한 종파가 OO진리회가 되었다고 이해를 했다.


지금도 정확하게 이들 종교들에 대한 이해는 없지만 당시 우리나라 대표 신흥 종교하면 항상 거론되는 종교 단체중 하나라고만 기억한다

특히 세상이 어지러운 말세에 미륵 부처가 출현하여 세상을 구원한다는 미륵사상은 기독교의 종말론과 결을 같이 하는 사이비 신앙으로 대중은 오도하기에 좋았다.

도를 아느냐고 접근한 그들을 따라 나선 나는 그들의 성전에 들어갔다.

거기서 제사를 지내야 한다며 돈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 당시 내 수중에 3만원이 있어서 그걸 줬다.

없냐고 하길래, 없다고 하니, 집에 연락해 더 가져 올 수 있냐고 했지만, 난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없이 돈으로 라도 조상님께 제사를 지내도 된다고 하면서 그들이 주례를 하는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그들의 제사의 법도를 모르기 때문에 나는 그들이 하라는 대로만 했다.

물론 당시 나는 이게 정통 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마음속 반감은 없었다.

끝까지 제사를 마치고, 그들은 본격적으로 나를 가입을 시키려는 회유 공작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때 제사를 마치고, 그들이 말하는 도가 바로 이런 거냐  되물었다.

그러자 그들은 당황을 하며 도는 공부를 통해서 얻는  이라고 했다.

나는 제사가 공부냐  다시 물었다. 그들은 조상에 대해 일장 연설을 했다.

나는 그들이 행하는 제사의 진지함을 알았지만 제사 그들이 하는 말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거지는 도가 아님을 있었다.

 

우리 동양권 문화의 사람들은 부터 항상 ’ 라는 것을 추구했다.

단순히 도를 아느냐를 넘어선 일상에서 도를 혹은 깊은 산속에서 찾았다.

현대 중국어에서 안다  표현을 지도(知道:쯔다오, 모른다 부지도(不知道:뿌쯔다오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도를 안다, 도를 모른다  바로 알고 모르고의 기준이 것이다.

도는 일상에 함께 하고 있었다.

도는 또한 어떠한 정신적 경지를 의미하는 바로, 이웃 나라 일본은 어느 한 분야의 정점에는 항상 도를 붙였다.

차를 마시는 다도를 비롯하여 검도, 유도, 공수도 같은 무술의 도를 무도라고 이름 지었다.

불교에서도 깨달음이 바로 도라는 인식이 심어져 있는데 그래서 도를 깨우친다는 표현을 쓴다.

                                           

 

노자가 남긴 도덕경에는 라는 것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도덕경의 첫 구절에는, 도를 도라고 말하면 도가 아니다 라고 한다. 그리고 이 구절은 사람들 마다 해석이 조금씩 다르다.

여기서 도라는 경지 말하다  행위가 함께 들어있기 때문이다.

추상어와 동사가 함께 사용되어져 모호함과 확실함이 공존하고 있다.

그러니 도는 무엇이면서 무엇이 아닌 것이 되어져 버린다.

현대 양자 물리학의, 입자인가 파동인가의 논쟁처럼, 도는 한마디로 규정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의 생활에서 이미 도라는 말을 없이 쓰이고 있음에도 우리는 이제 도가 무엇인지 아무도 자신 있게 답하지 못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그럼에도 노자는 도를 말했다. 그가 말한 도는 무엇일까?

도대체 도는 무엇인가?

 

해마다 시기가 되면 겨울 바람 탓인지 자꾸 정진이라는 단어가 마음 속에 맴돈다.

작년 이 맘 때에는 영가현각 선사의 <증도가>를 가지고 100일 정진을 이어간 적이 있다.

해에도 뭔 가를 해야 된다는 생각에 휩싸였다. 이 생각을 쉽게 떨쳐 버리질 못할 것 같다.

 

스님들이 겨울철에 선방에서 정진하는 기간을 동안거(冬安居)라고 한다.

겨울 내내 토굴이나 선방에서 화두를 들고 깨우침을 목표로 정진하는 것이다.

물론 정진한다고 반드시 깨달음을 얻는 것은 아니다. 깨달음은 나 혼자 열심히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란 것 쯤은 안다. 그렇다고 어차피 얻지도 못할,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을지 모를 깨달음을 왜 얻으려고 하는가? 

그건 나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차가운 언 바람을 맞게 되면 나도 모르게 내 안의 아궁이가 불을 지필 준비를 하는 것 같다.

아마도 내게는 아직 동안거가 필요한 가보다.

그래서 이번에도 한번 정진 하기로 결심했다.

오늘부터 무엇인지에 대한 사유여정을 하기로 했다. 말은 거창하게 했지만 물론 이 사유여정이 어디까지 갈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래서 일단 적당한 지도 한 장을 구했다. 이 지도는 내가 예전에 한번 사용해 봤던 지도이므로 이번에 한 번 더 본다면 눈에 더 익을 것 같아서 선택했다.

바로 신심명(信心铭)이다.  


신심명은 선가의 어록이며 선종의 3조 승찬대사(僧瓚大師 ?~606) 가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

승찬대사, 문둥병에 걸려 2조 혜가를 찾아 갔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는 어떻게 도를 말 했을까?

신심명을 불쏘시게 삼아 앞으로 겨울, 내 안의 아궁이에 불을 지펴야 겠다.

 

도를 아십니까.

지금은 사이비 종교의 전도에 쓰이는 전매 특허 (?) 처럼 되어 버렸지만 정말 무엇일까?

도를 굳이 알아야 하나?

공기를 아십니까? 공기를 몰라도 사는데 아무 지장 없는 것과 다르지 않는가?

밥을 아십니까? 똥을 아십니까?

길을 아십니까?  아니, 도를 아는 것과 다른 것들을 아는 것이 차이가 있나?  

도를 몰라도 살아가는데 아무 문제 없었는데, 왜 굳이 도를 알아야 할까?

옛 사람들이 추구했던 도가 이제는  이렇게 어렵게 되어 버렸을까?

 

: 신심명(信心铭: 믿을 신, 마음 심, 새길 명)믿음을 마음에 새긴다는 뜻.



By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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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12-29 20: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도(道)를 몰라(不知道)감히 안다(知道)고 할 때는 밍바이(明白)를 사용합니다. ㅎㅎ

100일 동안의 좋은 정진 되시길 기원합니다.

마힐 2025-12-30 19:00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저도 밍바이를 많이 써요. 쯔다오(知道) 하면 말의 뉘앙스가 전부를 다 아는 것 처럼 우쭐되는 마음과, 부쯔다오(不知道) 하면 뭔가를 강하게 부정하는 것 같아요. 둘 다 말이 좀 과격해져요.
그래서 가장 무난한 단어가 밍바이(明白)즉 우리 말의 단순한 뉘앙스로 알겠다고 답하는게 편해요. 좀 부드럽죠. ^^
동러마?(懂了吗)(이건 아주 좀 알밉죠?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