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100일 정진, 3일차
<但莫憎爱/단막증애/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만 없다면
洞然明白/통연명백/통하여 명백하게 드러난다>
지도무난(至道無難), 도에 이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유혐간택(唯嫌揀擇), 오직 간택하는 마음만 꺼려라고 했다.
여기서 간택하는 마음이란 분별하여 선택하는 마음이다.
분별은 사량으로 헤아리는 마음, 즉 이해타산을 따지는 마음이다.
그 따지는 마음 , 도를 이루고자 분별심을 혐오해야 한다면 그 또한 간택하는 마음이 아니던가?
분별하지 말라고 해놓고선 또 분별을 한다. 승찬 대사는 왜 이런 모순된 말을 했을까?
그래서 오늘의 이 구절은 중요하다.
단막증애(但莫憎爱), 누군가를 미워하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 그 마음 쓰임이 바로 분별이다.
그 분별이 없다면 좋아하고 싫어 함이 없는 상태인데. 과연 그것이 도란 말인가?
‘없다’는 말에 걸리면 우리는 승찬 스님이 가둬 둔 글자의 그물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대상에 대해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즉 대상이 생기면 우리의 의식은 저절로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마음에서 일어나는 반응이 바로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분별심이 된다.
그리고서는 우리는 그 떠오르는 생각이 자기 생각임을 선택하게 된다. 즉 간택하는 것이다.
어떻게 따져도 우리는 분별심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하물며 도에 이르기 쉽다는 승찬대사 조차 분별하지 말라고 분별을 했을까?
그건 경책인가? 아니면 분별심인가?
공(空), 불교에서 공은 텅 비었다는 뜻이 아니다.
반야심경의에서 가장 핵심 구절이라 일컫는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이란 구절이 있다.
오온(五蘊)이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즉 눈,귀,코,혀, 몸을 통해 반응하는 다섯 가지 감관이 사실은 모두 공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공하다는 것은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불교의 공은 ‘고정됨이 없다’는 의미로 읽어야 한다.
오온이 공함을 본다는 것은 우리의 오온이 고정됨이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고정된 것은 진리가 아니다.
즉, 신심명에서 하지 마라, 해라 는 글자는 고정됨이 없는 공으로 읽어야 한다.
그렇다면 진정 승찬대사가 신심명을 통해서 무엇을 전달 하고 싶은 것일까?
신심명의 구절을 ‘하라, 하지 마라’로 받아 들이면 신심명은 단순한 경책의 소리로 밖에 지나질 않는다.
진리는 고정되지 않는 것이니, 굳이 하지 말라, 하라에 메이지 말고 걸림이 없이 하라는 의미가 아닐까?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없애라는 것이 아닌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에 걸리지 않으면 바로 그것이 도에 통하는 명백한 길이 드러난다는 선언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공의 도리로 보아야 비로소 승찬대사의 분별심은 그냥 단순한 분별심이 아님을 알게 된다.
분별했지만 그 분별마저 꺼리지 마라는 뜻이 된다.
즉 분별심에도 걸리지 말란 말이다.
간택하는 마음마저 걸리지 말고,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에도 걸리지 말아야
비로소 우리의 마음은 모든 것이 통하고 확연하게 드러나게 된다.
명백(明白)함이란 바로 확실히 드러난 자리이다.
통연명백이란 바로 밝아서 그대로 하얗게 드러난 마음자리를 말한다.
우리의 본성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견성(见性)이란 성품을 보는 것이 아닌 성품이 저절로 드러나 보여지는 것이 된다.
그래서 마음이 밝아지면 자연스레 보여지게 되어 있다.
통하면 자연히 밝게 하얗게 드러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참 마음 자리가 아닐까?
이제 승찬 스님이 쳐둔 언어의 그물에서 겨우 한번 빠져나왔다.
주:但莫: 다만 단, 없을 막: 단지 ~가 없다면
憎爱: 미워할 증, 사랑 애: 미워하고 사랑하는 것,
洞然: 통할 통, 그러할 연: 통연하다. 즉 통하고 ~그러하게 되다.
明白: 밝을 명, 흰 백:하얗게 밝아진다. 즉 명백하다. 현대 중국어에도 확실한 이해 여부를 의미한다.

By Dharma & Mahe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