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100일 정진,  19일차

<須庾返照/수유반조/잠깐 사이에 돌이켜 비쳐보면

勝却前空/승각전공/앞의 공함보다 뛰어남이라>

 

근본으로 돌려 놓음은 인위(人爲) 짓는 모든 것의 끊어짐이다.

인위적이라 함은 사람의 생각을 우선에 두고 희망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위는 *유위법(有爲法)에 해당된다.

유위법은 작위적이다. 일부러 지어내는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은 모두 인위적이고 유위적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유위법이 작동하는 유위의 세계이다.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무위법(無爲)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무위 함이 없는 세계로 들어가려면 일단 작위적인 말과 생각 그리고 행동까지 모두 잠시 멈춰야 한다.

멈춤은 단순히 중단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멈춘다는 것은 인위적이지만 무위로 들어가기 위한 인위의 마지막 단계이리다.

돌려 놓는 다는 것은 유위에서 무위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멈추는 행위는 다시 돌려 놓기 위한 단계에 해당한다.

 

우리는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는 경지가 너무나 경지라 여기기 쉽다.

하지만 경지에 이르기 위한 출발은 되돌려 놓음이다.

근본으로 돌려 놓는 ,

수행은 돌려 놓음의 반복이다.

 

귀근득지(歸根得旨) 근본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고

수조실종(隨照失宗) 비춤을 따르면 종취를 잃나니

수유반조(須庾返照) 잠깐 사이에 돌이켜 비쳐보면

승각전공(勝却前空) 앞의 공함보다 뛰어남이라

 

근본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우리는 놓치지 말고 있어야 한다.

봄은 바로 반조이다.

비추어 본다는 것은 근본 마음 자리를 지켜보는 것이다.

승찬스님은 깨달음에 이르는 공을 알았다 하더라도 잠깐 근본을 비춰봄만 못하다고 하신다.

그럴까?

반조(返照) ,비춰봄이 바로 수행의 근본이기 때문이 아닐까?

 

                                                        

 

須庾:모름지기 , 잠깐 유:  모름지기 잠깐 사이에

返照:돌이킬 , 비출 조 :  돌이켜 비추어 보면

勝却: 이길 , 물리칠 각 : (물리쳐 이길 정도로)  뛰어나다

前空: , 빌 공:  앞의 공 혹은 앞의 깨달음


*회광반조(回光返照): 빛을 돌이켜(스스로를) 비춘다. 회광은 빛을 돌이킨다는 역동적, 능동적 움직임으로 단순한 지켜봄을 넘어선 의식적 전환을 상징함.

*유위법(有爲法): 모든 조작이 되고 생멸(生滅) 있는 것으로, 인과(因果) 있으며, 인연(因緣) 의한 생멸변화(生滅變化) 있는 법을 뜻하는 불교용어

*무위법(無爲法): 어떤 조건 혹은 인연에 의해 조작되지 않은 것으로, 생겨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고 불생불멸(不生不滅), 항상 그대로 변함이 없는 상주불변(常住不變) 법을 뜻하는 불교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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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경계 - 나는 누구인가에 관한 동서고금의 통합적 접근
켄 윌버 지음, 김철수 옮김 / 정신세계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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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차: 나는 누구인가? 영원한 질문을 만나다.

 

2년 전, 켄 윌버의 <무경계(No Boundary)> 를 만났었다.

시간이 흘러 지금 다시 펼쳐 보니 문장 하나하나가 낯설지 않은, 동시에 분명히 달라 보였다.

2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신심명>과 <증도가>를 붙들고 보냈다.

그래서 이번에 그때 <무경계> 글을 다시 한번 <신심명>과 <증도가>로 확장하여 사유해 보기로 했다. 이번에도 몇 회에 걸쳐 사유가 이어질 것 같다.

글은 2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나누는 사유의 대화이기도 하다.


 

“너 자신을 알라(Γνῶθι σεαυτόν)”

델포이 신전에 새겨졌다는 문장은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젊은이들에게 던졌던 질문이기도 하다. 그 말을 들은 이는 자연스레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을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놀랍게도 질문은 동양의 선방에서도 거의 같은 형태로 등장한다.

“이 뭐꼬?(是甚麼: 시심마)”

지금 보고 듣고 말하고 있는 작용은 대체 무엇인가.

무엇이 나를 이끌고, 무엇이 나를 살게 하는가.

 

서양의 철학적 물음과 동양의 선적 화두는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있지만 같은 지점을 가리키고 있다.

질문에 대해 철학은 존재와 실존으로 답했고, 종교는 나와 신성의 관계로 설명했으며, 과학은 생명의 기원과 유전자로 접근해 왔다.

각자의 언어는 정교했고, 각자의 지도는 나름 완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길을 설명하는   넘쳐 났지만 지금 길을 걷는   대한 대답은 쉽게 주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지구에 80억 명의 사람이 있다면, 80억 개의 답이 공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2년 전의 나는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공부의 출발점으로 생각했다.

답을 향해 나아가야 질문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다르다.

질문은 어딘가에 있는 정답을 찾기 위한 물음이라기보다 질문을 품고 있는 마음 자체를 비추는 질문에 가깝다.

<신심명>은 “군불견(君不見) , 그대 보이지 않는가” 라고 묻고,

<증도가>는 “수무념수무생(誰無念誰無生) , 누가 무념하고 무생하는가” 라고 되묻는다.

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질문을 다시 돌려준다.

“지금 그 질문을 하고 있는 그 마음을 보라” 고 말할 뿐이다.

 

신심명이 말하는 ‘일종평회(一種平懷)’, 한 가지 평등한 마음이란 어쩌면 우리가 붙 고 있는 모든 ‘나는 ○○ 이다’라는 정의 이전의 자리일지도 모른다.

'나는 아들이다, 나는 아버지이다, 나는 부장이다, 나는 승객이다.

나는 이러하다, 저러하다' 등등. 상황과 조건에 따라  라는 정의는 달라진다.

나는 누군가의 아들이며, 나는 누군가의 아버지가 되고, 나는 어느 회사의 부장이 되며, 나는 어느 식당의 손님이 되기도 한다. 아들, 아버지, 친구, 손님 이란 모습으로 나는 시시때때로 변한다.

어느 것이 진짜  인가?

그럼 손님이기도 하고, 아들이기도 하고 , 아버지이기도 한 나는 가짜  말인가?

아니다.

나는 고정되지 않았다.  라는 것은 고정 되지 않는다. 고정 될 수가 없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이것’이라고 규정하고, ‘저것’과 구분하려 하는가?

경계는 어디에서 생겨나는가.

 

다음 사유는 윌버가 말한 “피부 경계선”이라는 개념을 통해 ‘나/나 아님’의 구조를 살펴보려 한다.

그가 말한 경계는 어떻게 정체성을 만들고, 또 어떻게 허물어지는가?

나는 누구인가  영원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여정, 이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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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100일 정진,  18일차

<歸根得旨/귀근득지/근본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고

隨照失宗/수조실종/비춤을 따르면 종취를 잃나니>

 

로고스는 태초의 말씀이요, 창조의 기원이다.

로고스는 우주의 시작이다.

(ॐ) 우주의 진동이다.

로고스는 태초의 말씀으로 창조의 시작이고, 옴은 우주의 진동으로 말이 끊어진다.

로고스는 말씀의 시작이지만 옴은 말이 끊어진 자리다.

하나는 시작이고 하나는 끝이다.

그러나 우주의 시작과 끝은 과연 둘일까?

지난번 빨대 비유를 들었듯이 우주가 하나의 관이라면 시작과 끝의 의미가 있을까?

시작이자 끝이요, 끝이자 시작이 되는 순간.

시종불이(始終不二) 시작과 끝이 둘이 아니다.

로고스와 옴의 상관 관계는 종교를 떠나서 참구해 볼만한 화두(話頭) 본다.

 

절언절려(絶言節慮)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면

무처불통(無處不通) 통하지 않는 곳이 없느니라

귀근득지(歸根得旨) 근본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고

수조실종(隨照失宗) 비춤을 따르면 종취를 잃나니

 

말과 생각이 끊어진 자리에서 듣는 것은 바로 태초의 소리일지도 모르겠다.

창조의 시작은 근본 자리가 되고 근본자리가 우리의 불성이다.

근본으로 돌아감은 청정한 우리의 본성품으로 얻는 것이다.

이것은 현재 의식에서 올라오는 말과 생각을 돌려 놓을 일어나는 사건이다.

현재 의식은 보기 바쁘고, 듣기 바쁘고, 말하기 바빠서 쉴 사이가 없다.

비춘다는 것은 올라오는 업식들을 여과없이 비추는 것이다.

따라서 업식을 따르면, 결국 내 근본 자리를 잃게 된다. 따라서 돌려 놓아야 한다.

돌려 놓는다는 것은, 올라오는 바로 그 자리를 다시 지켜보는 것이다.

 

*의상대사(義湘大師625~702) 의 *법성게(法性偈) 에서는 이렇게 표현했다.

시고행자 환본제(是故行者還本際) 그러므로 수행자는 근본으로 돌아가되

파식망상 필부득(叵息妄想必不得) 망상심을 쉬지 않고는 얻을 것이 하나 없네

 

올라오는 업식을 따르지 말고 오직 근본으로 돌아가는 행위가 바로 수행이다.

수행은 근본으로 돌아가길 바라는 끊임없는 행이 아닐까?


:歸根:돌아갈 , 뿌리 근:  근본으로 돌아가면

得旨:얻을 , 뜻 지 :  뜻을 얻게 된다.

隨照: 따를 , 비출 조: 비춤을 따르게 되면

失宗:잃을 , 근본 종: 근본을 잃게 된다.

*의상대사(義湘大師625~702): 젊은 시절 불법을 구하려 원효(元曉, 617~686) 함께 당에 가고자 했다. 원효는 해골물 사건으로 신라에 남게 되나, 의상은 중국으로 넘어가 화엄학을 깨우치고 신라에 화엄종을 개창함. 원효와 더불어 신라 불교의 양대 산맥임.

*법성게(法性偈): 신라의 승려 의상대사가 중국 당나라에서 방대한 경전 <화엄경>을 연구하여 화엄경의 핵심사상을 7언 30구, 210자로 나타난 게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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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100일 정진,  17일차

<絶言節慮/절언절려/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면

無處不通/무처불통/통하지 않는 곳이 없느니라>

 

성경에서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가 되었으니(요한복음) 라고 했다.

태초부터 있었던 소리, 그것은 소리이자 언어였다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 그것은 우주의 소리 였을 것이다.

로고스 불리는 창조의 기원이 되는 소리이다.

불교에서도 우주의 소리를 (ॐ)이라고 한다.

옴을 우주의 근원적 소리이며 진동이라 부른다.

그래서 수행의 진언으로 옴을 소리내어 부르기도 한다.

수행자가 근원으로 돌아가는 의식의 소리이다.

태초의 말씀과 옴은 어떤 상관 관계가 있을까?

 

우리는 말에 의지한다.  

태초의 말씀과는 다른 우리의 일상에서 말이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단순한 소리를 구조화 시켜 우리의 뜻을 상대방에게 전달할 있었을까?

인간이 동물과 구별 되는 말을 있는 능력은 말로 설명할 없는 능력인 같다.

그래서  이란 것은 묘하다.

말은 분명 문자보다 앞선다.

말과 문자는 모두 우리의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그러나 도를 이룬 성현들은 말을 경계 한다.

아니 사실 말을 경계하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말을 경계하는 것이라.

()에서는 *이심전심(以心傳心), *불립문자(不立文字) 내세운다.

진리는 문자나 언어로 세워질 없으며 오로지 마음과 마음으로만 전할 있다.

생각이 많고 말이 많아지면 진리에 가까워 수가 없다.

 

다언다려(多言多慮)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전불상응(轉不相應) 더욱더 상응치 못함이라

절언절려(絶言節慮)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면

무처불통(無處不通) 통하지 않는 곳이 없느니라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는 자리, 그 자리가 태초의 말씀 자리가 아닐까?

태초의 말씀은 어디든 통하지 않는 곳이 없으리라.

 

태초의 말씀과 , 오직 침묵의 체험 속에 듣게 되리라.

 

:絶言:많을 , 말씀 언:  말이 많고

節慮:많을 , 생각할 려 :  생각이 많다

無處: 더욱 , 아닐 불: 더욱 ~ 아니하다

不通:서로 ,  응할 응: 서로 응하다

*이심전심(以心傳心): (깨달음, 진리를)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한다는 선불교의 핵심 개념.

*불립문자(不立文字): 깨달음, 진리는 문자로 전달 될 수 없다는 뜻의 선불교의 핵심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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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100일 정진,  16일차

<多言多慮/다언다려/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轉不相應/전불상응/더욱더 상응치 못함이라>


금강경의 사상(四相)과 반야심경의 오온개공(五蘊皆)은 모두  라는 고정된 실체가 없음을 설했다.

불교에서는 이를 두고 *무아(無我) 라고 규정했다.

여기서 ()는 없음 이란 뜻도 있지만 () 처럼 고정되지 않은 상태  뜻하기도 한다.

마음 자리에서 없음이나 비어 있음을 뜻하지 않는다.

없음이란 뜻만 사용되면 단순히 무아는 내가 없다, 나라는 실체가 없다라고만 풀이 된다.

하지만 여기서 가장 중요한 *진아(眞我)  깨닫게 되는 참나, 불성(佛性) 부정하게 되는 모순에 직면하게 된다.

불교의 많은 논쟁중 가장 첨예한 부분이 무아 참나 간의 대립일 것이다.

전통 불교에서는 무아 실체인데 참나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고 참나를 부정했다.

하지만 선불교(禪佛敎)에서는 부처 자리가 본래 진아 이므로 참나를 찾아야 한다고 했다.

과연 참나와 무아 어느 것이 옳은가?


견유몰유(遣有沒有)있음을 버리면 있음에 빠지고

종공배공(從空背空)공함을 따르면 공함을 등진다


참나가 있다고 믿으면 무아는 부정된다.

무아라고 믿는다면 참나는 부정된다.

같은 모순속에 빠지는 참나와 무아의 대립은 불교를 공부하는 이들을 곤혹스럽게 만든다.

전통불교의 입장과 선불교의 입장이 서로 다른 것인가?


다언다려(多言多慮)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전불상응(轉不相應)더욱더 상응치 못함이라


확실하지 않으면 우리는 말이 많아지고, 생각이 많아진다.

진리는 말이 많고 생각이 많아지는 곳에서 나오지 않는다.

언어도단(言語道斷),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져야 한다.

진리는 말없는 곳에서, 생각이 끊어진 곳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무아와 참나의 논쟁은 바로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진 곳에서 결론 지어져야 한다.

깨친 지혜가 아니라면 무아든 참나든 그냥 소리에 불과하다.

소리가 언어가 되려면 지혜를 수반해야 한다.

지혜는 단순한 말이 아닌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진 자리에서만 나올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올라오는 모든 말들과 생각들을 내려 놓을 차례이다.


:多言:많을 , 말씀 언:  말이 많고

多慮:많을 , 생각할 려 :  생각이 많다

轉不: 더욱 , 아닐 불: 더욱 ~ 아니하다

相應:서로 ,  응할 응: 서로 응하다

*무아(無我): 고정된 불변의 실체로서 나는 없다는 뜻으로 초기 불교의 핵심 개념

*진아(眞我): 모든 인간이 본래 가진 참성품이며 불성을 뜻함. 대승 불교의 핵심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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